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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플뢰비르(6) (100/249)

 100화. 플뢰비르(6)

 마치 종잇장처럼 형편없이 찢겨져나간 방어막.

 기음을 내지르며 통째로 녹아내리는 거대한 몬스터들.

 진형의 중앙에 밀집해 있다가 단숨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절규를 내뱉는 로브인들.

 그 지옥과도 같은 광경을 내려다보며, 로엘이 내뱉은 감상의 한마디는 이러했다.

“저 녀석들을 이끌고 있는 간부는 되도록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죽으면 어쩔 수 없고.

 발언과 동시에 포격.

 슈왁!

“으헉!”

 콰아아아아앙!

 연속된 포격에 로브인들의 진형은 완전히 걸레짝이 됐다.

 무려 바엘른 마탑의 촉망받는 인재들이 수십 겹씩 방어막을 중첩시켜서야 겨우 막아낼 수 있었던 포격이다. 로브인들이 포격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엘은 5연속 포격을 마치고 나서야 또 다른 마력포를 끄집어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즈음에는 로브인들 중 몸 성히 서 있는 이가 아무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반수 이상의 로브인들이 절명했다. 아예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자들은 예사요, 온갖 내장이 흘러내리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많았다.

 살아남은 로브인들 또한 죄다 중상을 입었다. 그들은 대형 몬스터들이 몸 바쳐 공격을 막아낸 덕분에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전부 죽여서야 정보를 뽑아낼 수 없으니, 이쯤에서 멈춰야지.’

 로엘은 로브인들을 빤해 내려다보며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자들 중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 * *

“적 수뇌부가 전멸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지휘관의 독려에 병사, 용병들이 우렁찬 함성을 터뜨렸다. 인간 측 병력은 용기백배해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어렵잖게 막아냈다.

 거기에 몬스터 대군 쪽에서도 문제가 일어났다. 로브인들이 무력화되면서 통제가 적용되지 않게 된 탓이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쪽까지 올라갈 만큼의 흉성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전쟁을 외면하고 근처에 널린 시신으로 달려들어 얼굴을 처박는 놈들도 속출했다.

 저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야말로 인간군의 시선으로 볼 땐 오합지졸 중의 오합지졸. 이래서야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다.

 차라리 흉년이 일어난 겨울철에 굶주림에 못 이긴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 사태였다면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진 않았을 터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분명 겨울철이긴 하지만, 몬스터들은 절박할 정도로 굶주린 상태가 아니었다. 흉성 조절을 위해 로브인들이 짧은 기간 동안 금식시켰을 뿐이지.

 헤이슨 자작령과 같이 플뢰비르의 수많은 용병, 병사들은 사냥을 통해 몬스터의 개체수를 조절해왔다. 산맥 내 몬스터 개체 수가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정도는 아닐 터.

 그런 상황에서 조종당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제정신을 되찾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면 충분히 풍족한 환경이 기다리고 있는 몬스터들이 굳이 무리해서 성채로 달려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몬스터 입장에선 ‘정신을 차려보니 바라지도 않던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라고 느낄 법한 상황이다.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금세 지리멸렬했다.

“사다리를 밀어내라! 화살을 쏴라! 바위를 굴려라! 승리가 코앞에 다가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먹어라! 이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아!”

“크하하! 이겼다! 이겼다고!”

 전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다. 몬스터들은 더 이상 성문을 두드리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성 내에선 놈들을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 병사들이 연신 활을 당겼다.

 그 와중 로엘은 무력화된 로브인들을 덮치려 드는 몬스터들을 견제했다. 로브인들이 전부 죽어선 곤란했다.

 정체불명의 포격에 몬스터들은 식겁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치들에겐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을 터였다.

 성벽 근방에 더 이상 몬스터가 보이지 않게 되자, 성안 쪽에서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인간군은 아직 죽지 않은 몬스터들을 찾아다니며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시체를 한데 모았다.

 상대가 인간군이었다면 모은 시체를 곧바로 태우거나 매몰했겠지만, 몬스터 군대인 만큼 부산물을 습득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그 모두가 돈이기에 병사들은 흥얼거리며 사체를 손질했다.

 로엘은 카트리나의 와이번을 타고 곧바로 로브인들이 있는 장소로 날아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을 확보했다.

 살아있는 로브인들 중 유독 화려한 로브를 입은 인물이 있었다. 로엘은 그가 간부임을 짐작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런데, 로브인들의 시체를 살피던 와중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구체의 형상을 띈 보옥이었다. 총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광택이 나는 흑색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칙칙한 회색이었다.

 두 보옥 모두 굉장히 기분 나쁜 기운이 전해져 왔다. 검은색 보옥은 그래도 좀 기운이 정제되어있는 느낌이었고, 회색 보옥은 반대로 난폭한 기파를 흩뿌리고 있었다.

‘혹시 이것들을 이용해서 몬스터 군단을 조종한 건가?’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엘은 보옥을 모조리 수거해 아공간에 보관했다.

 이내 영지의 병력이 다가왔다. 로엘은 확보한 로브인들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후로는 영주를 찾아갔다. 영지병들에게 넘겨줬던 간부의 신병을 양도받기 위해서였다. 넘겨줬다 돌려받는 게 좀 귀찮긴 했으나 필요한 절차였다.

 영주 입장에선 영지를 침공한 악적을 넘겨달라는 로엘의 요구가 그리 달갑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순순히 간부를 내주었다.

 그것은 그가 로엘에게 완전히 굴복했음을 의미했다. 이젠 정말로 한배를 탔다고 봐도 좋을 터였다. 사실 로엘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사로잡지도 못했을 거라는 점도 컸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엘이 영주와 악수하며 그렇게 말했다. 영주는 일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체면치레할 수 있도록 나머지 로브인들은 남겨뒀다. 애초에 와이번에 태워서 갈만한 숫자도 아니었으니 당연했지만.

 그렇게, 플뢰비르 영지에서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 * *

 와이번을 타고 마탑으로 복귀하는 길.

 카트리나가 로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그녀가 가리킨 인물은 로브인이었다. 그는 꽁꽁 묶인 채 와이번 등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탑주님의 지인 중에 인간의 뇌를 주무르는 데 탁월한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과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놔 달라고 부탁할 생각입니다.”

 로엘은 별 고민도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카트리나는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호위 용병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상당히 악명이 높았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물어보시죠.”

 카트리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로엘 님께선 이상할 정도로 무력조직을 창설하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여러 차례 우려하는 말을 꺼내신 적이 있죠.”

“그렇군요.”

“혹시 그건, 플뢰비르 영지에서 사용했던 그 아티펙트들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로엘이 이채를 띈 눈으로 카트리나를 응시했다.

 로엘은 머지않은 미래에 직접 제작한 아티펙트들을 부여한 무력 조직을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상단의 무력 수위를 증진시키는 데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카트리나는 그저 총기류 아티펙트를 몇 점 견식 했을 뿐이건만 거기까지 꿰뚫어 본 것이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통찰력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긍정하셨다는 건, 이후 그 아티펙트를 지급한 무력 조직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아, 이건 당분간 비밀입니다. 제가 아공간을 사용했다는 것과 더불어서.”

 로엘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그렇게 말했다.

 무력 조직 창설을 차일피일 미루는 데에는 꼬여 드는 날파리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아공간 건은 정식적인 공표가 있기 전에 마탑 관계자들이 알게 되면 좋을 게 없었고.

 사실 아공간이고 아티펙트고 카트리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테페론 상단주의 여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장상 비밀엄수를 요구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제가 다른 사람에게 오늘 일을 말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쪽의 호위 용병 또한.”

“감사합니다.”

“그보다, 로엘 님이 무력 조직을 창설하시면 지원자가 많을 텐데, 그들을 어떻게 골라내실 건가요? 생각해 두신 기준이 있으신가요?”

“……?”

 로엘이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의 질문은 꼭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그 조직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엘은 어떻게 답변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를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실력, 재능의 경우엔 일정 수준 이상이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그보단 인성, 그리고 제가 내거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더 중요한 관점이 될 겁니다.”

“…….”

“관심이 있으십니까?”

“네. 매우.”

“아, 아가씨?”

 카트리나의 즉답에 당황한 사람은 그녀의 호위 용병이었다. 모시는 아가씨가 집안과의 상담은 일절 없이 갑작스레 진로를 정하려 하니 그의 입장에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추천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어째서죠?”

“제가 내걸 ‘조건’이 그다지 좋은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티펙트의 유출을 막기 위해 내거는 조건인가요?”

“예. 어쩌면 노예 계약을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계약의 현자 마르스가 복원해낸 고대 계약 마법은 오로지 ‘노예 계약’ 마법뿐이다. 어째서 하필 ‘노예 계약’ 마법뿐인지 의아할 수도 있으나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생사여탈권 전체를 누군가에게 넘기는 식의 계약이 특정 조건에만 발현되도록 하는 계약보다 수 배, 수십 배는 간단하다. 프로그래밍에 비유하자면 고려해야 할 변수 자체가 적은 것이다.

 말하자면, 마르스는 가장 기초적인 계약 마법만을 복원해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쯤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로엘은 미련을 아주 버리진 못했다.

 그리고 만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로엘은 그 계약을 서슴없이 타인에게 강요할 마음의 준비 또한 되어있었다. 어디까지나 아티펙트와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만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

 과연 ‘노예 계약’이라는 말에는 카트리나도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녀는 여성인 만큼 남성인 로엘과 그런 계약을 맺는 것이 꺼려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한참을 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예? 진심이십니까?”

“네.”

 여기에는 로엘마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호위 용병의 얼굴은 아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상단에 복귀하자마자 테페론 상단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관심을 거둘 줄 알았는데.’

 사실 로엘은 앞으로 창설할 무력 조직에 여인의 자리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들을 인간답게 대하지 않을 생각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기분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은 물론 의사결정권까지 타인에게 양도되는 일이다. 웬만큼 사정이 절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감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애초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던 게 아니야. 이미 자기 마음을 확실히 정하고 난 뒤였던 거다.’

 부유층 자제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이런 조건까지 감수할 만큼 굳은 결심이라니.

 로엘은 그녀가 그 정도로 굳은 결심을 하게 된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볼을 긁적였다. 대체 이쪽의 뭘 보고, 뭘 믿고 저렇게까지 나온단 말인가.

“…….”

 로엘이 카트리나를 빤히 응시했다. 카트리나가 로엘을 마주 응시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 *

 며칠 뒤 마탑으로 귀환한 로엘은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곧바로 휘하 인물들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온 로엘에게 모두가 칭찬 세례를 쏟아냈다. 차후 플뢰비르 영지의 사업장은 칼비오 파벌의 일원이 관리하기로 했다.

 경과보고를 마친 뒤엔 로카인을 찾아갔다. 그에게 로브인을 내보이고 정보를 뽑아내 줄 마법사에게 다리를 놔줄 것을 부탁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다. 그 녀석은 돈을 밝히니까.”

 로카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 비용이 상당하긴 할 거라는 말도 뒤따랐다. 물론 그래 봐야 로엘에게 있어선 푼돈이었다. 원래 사람마다 느끼는 돈의 가치는 다른 법이다.

“그건 그렇고, ‘조직’의 존재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었다만 간부는 처음 보는구나.”

 로카인이 살짝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쯤 되는 지위의 인물인 만큼 이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놈들이 제국에선 영 활동이 없는 탓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던 듯싶지만.

“일단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아 그리고, 네가 기뻐할 만한 소식이 있다.”

“?”

“네가 외유를 다녀온 사이에 파르엘이 마탑에 복귀했다. 지금은 아마 자신의 연구실에 있을 게다. 찾아가 보겠느냐?”

“파르엘 씨가 왔단 말입니까?”

 로엘이 씩 하고 웃었다. 평상시의 밝은 아우라가 담긴 웃음이 아니었다. 칙칙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감도는 웃음이었다. 로카인이 평소엔 보기 힘든 로엘의 표정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시각,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참 실험에 열중하던 파르엘은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끼고 살짝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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