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플뢰비르(5)
‘계속 지켜보다 보니 알겠군. 저들은 저 대군을 완전히 통제하에 둔 건 아니야.’
로엘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로브인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대형 몬스터들과 소형 몬스터들이 움직이는 방식이 달랐다. 대형 몬스터들이 정확히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라면, 소형 몬스터들은 그저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형 몬스터는 테이머가 직접 조종하고 있군. 소형 몬스터는 어떻게 조종하는 거지?’
보아하니 소형 몬스터들까지 조종하는 테이머는 저들 중 없는 듯싶었다. 사실 저 정도 숫자의 마법사들이 이만한 대군을 모조리 테이밍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기도 했고.
‘몬스터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충동을 조절해 한 곳으로 몰아넣는 느낌에 가까운데. 대체 무슨 마법이지? 광폭화 마법일리는 없고.’
생명체가 가지는 정신적인 한계선을 강제로 돌파시켜 강함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약간의 최면 효과를 대상자에게 적용시키는 <광폭화-狂暴化(Complaining Violence)>.
굉장히 고위의 마법인데다 저렇게 다수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마법도 아니다. 마법이 적용된 대상이 저렇게 약할 리도 없고. 다른 마법일 터였다.
심지어 몬스터 대군을 부리는 마법사는 전체 중 일부였다. 나머지는 대형 몬스터를 부리거나 방어마법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정신 나간 집단일 줄이야.’
레인에게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괴이한 집단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제국에선 저들의 모습을 전혀 목격한 적이 없었다. 직접적으로 저들이 ‘일’을 벌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테러가 제국에서는 유독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철혈의 황제’가 절대 권력을 동원해 저들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필리언 자작가에 내전을 일으키고, 이곳에선 몬스터를 부려 영지를 침공하고. 무슨 공통점이 있지?’
저들도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을 터였다. 저만한 전력을 갖춘 조직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대륙 곳곳에서 테러 행위를 벌일 리는 없을 테니.
그런데 그 ‘목적’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 대군으로 이 영지를 멸망시킨다면, 그 뒤엔?
대체 몬스터 따위를 부려 얻어낸 승리에 무슨 파이가 뒤따른단 말인가. 심지어 완벽하게 통제가 되는 대군이 아니니만큼 영지를 제대로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그치들의 이득이 아닌,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그것도 이상하다. 특정 영지나 왕국에 원한, 복수심 같은 것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치곤 저들의 활동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
‘역시 몇 놈 잡아다 정보를 뽑아야겠어.’
정보가 너무 적었다. 일단 최소한의 정보는 확보해야 뭐든지 간에 알 수 있을 듯싶었다.
생각을 정리한 로엘이 가만히 숨을 조절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 * *
카트리나의 시선이 로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확히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대형 라이플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까 전 영주 저택에서 보여줬던 무위도 굉장했지만, 이건 또 달랐다. 저 무구가 저만한 사정거리를 지닌 괴물 같은 물건이라는 건 이제야 알았다.
아예 상대가 인지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초장거리 공격을 하는 게 가능한 데다 지휘관만을 골라 사살할 수 있는 정밀성까지 갖췄다니. 그야말로 대륙의 전쟁 판도를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마법, 혹은 기공이 아닌 물건이란 말이지. 본인이 직접 제작한.’
상대는 그런 물건을 직접 제작하는 것이 가능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 이외의 측면에서도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인데.
카트리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년은 그저 영향력이 거대한 소년이 아니었다. 세계에 무언가 거대한 영향을 끼칠, 그런 존재였다.
그가 앞으로 향할 길엔 일개 상인의 여식일 뿐인 자신으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이 가득할 것임이 분명했다. 자신으로썬 손도 닿지 않을 세계가 펼쳐질 터였다.
‘아니, 이건 기회다.’
그녀의 눈에 강한 의지가 깃들었다.
자신은 눈앞의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챘다. 그것도 아직 그가 한참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 시기에.
그렇다면, 그가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떨치게 될 미래가 아닌, 지금이라면. 충분히 그 세계에 손이 닿지 않을까. 그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항상 동경해왔다. 역사책에서, 서사시에서 봐왔던 ‘특별한’ 존재들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며 대륙을 질타하는 ‘선택받은’ 이들을. 그들이 양지의 존재들이건 음지의 존재들이건 간에.
그녀는 ‘그저 그런 삶’이 싫었다. 평범하게 ‘잘 먹고 잘사는 삶’도 싫었다. 그런 건 너무 시시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별해지고 싶었다. 남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만족할 만큼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껏 그렇게나 노력해왔다. 상당한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뒀음에도 나태해지지 않았다.
무려 와이번을 다루는 ‘희귀한’ 마법사가 되었다. 제국에서도 수준 높기로 유명한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에 당당히 입학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자기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무언가가 부족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특별함’과는 뭔가 조금 달랐다. 그런데. 이곳에서 ‘특별함’을 찾았다.
‘이번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까지 그와 최대한 친분을 쌓는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종류의 친분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야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았다. 드디어, 정처 없는 방황을 끝낼 결심이 섰다.
그녀가 살짝 힘주어 손을 그려 쥐었다.
* * *
“이런 빌어먹을!”
“또 뚫렸다!”
로브인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몇 번 당하다 보니 그들도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 정도는 알게 되었다. 공격은 정확히 성벽 측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대략적인 위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일 뿐,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는 건 무리였다. 그저 그 방향을 향해 방어마법을 중첩해서 둘러치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상대의 위치를 대략적이나마 알게 된 덕분에 방어마법이 제 역할을 했다. 피해가 많이 줄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듯했다. 공격이 날아드는 족족 방어마법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제기랄! 이젠 마력이 부족해! 모두 한데 모여! 마력 소모를 줄여야 해!”
한 로브인이 소리쳤다. 차라리 이리저리 흩어진 동료들을 한데 모아놓고 그 앞쪽에만 방어마법을 번갈아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암습만 막아내면 되는 게 아니다. 성내에서 마법사들이 날리는 마법까지 막아내야 했다. 부담이 너무 컸다.
“그러다 성에서 특작대라도 튀어나와서 근접거리까지 접근하면 몰살당한다!”
“수천의 몬스터를 뚫고 여기까지 올 특작대? 그딴 게 있겠냐! 쓸데없이 만약을 대비할 틈이 어디에 있어! 당장 머리통 깨지기 싫으면 모이라고!”
“테이머들은 대형 몬스터들을 이쪽으로 되돌려! 만약의 상황은 그걸로 대비하면 돼!”
로브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성벽을 두들기던 대형 몬스터들이 그들의 주위를 지켰다.
그렇게 진형을 갖추고 난 뒤에야 그들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공격은 중첩된 방어마법으로 훌륭히 막아냈다.
다만 안정을 찾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성벽 위의 방어 병력 또한 사기가 크게 올랐다.
“대형 몬스터들이 물러났다!”
“자리를 지켜라! 이젠 소형 몬스터들만 막아내면 된다!”
지휘관들이 계속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은 상황이 개선되자 보다 활기차게 움직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한 용병들 또한 용기백배했다.
전황이 인간군 측에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몬스터 대군은 그저 병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로브를 걸친 로브인이 전황을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괜찮다. 어차피 소형 몬스터들 따위야 얼마든지 소모해도 좋다.”
“하지만 저만한 군대를 만들기까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네 말대로 시간이 걸릴 뿐이다. 대형 몬스터만 온존한다면 우리에게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 부족한 소형 몬스터는 산맥에서 얼마든지 보충하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지요.”
주위 로브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이닥치면 된다. 대군을 결집해서 3차, 4차, 5차 침공까지 감행하면 저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어차피 영지 전력의 대부분이 용병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냐.”
“아마 몇 번 더 들이박으면 대부분의 용병들이 발을 빼 버릴 테죠.”
“그렇겠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임무는 충분히 완수할 수 있다. 대형 몬스터와 우리 자신의 안위만 지키면 어떻게든.”
그 말에 한 로브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상부에서 내려온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비루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다.
“올해 안에 아지트로 돌아가긴 글렀군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리고 정체도 알 수 없는 괴물의 위협에서 그만큼 오래 버텨내야 하겠지요.”
“……그것도 감수해야지.”
화려한 로브를 입은 중년 사내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 수는 없으니까.”
“아니, 그 구더기가 존X 데스웜이잖아요.”
화려한 로브를 입은 중년 사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브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간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 * *
전장을 내려다보던 영지군 측 지휘관은 짧은 시간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이라도 특작대를 조직해야 하나?’
한데 밀집되어있는 로브인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었다.
현재 승기는 확실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공성 병기 역할을 대신해야 할 대형 몬스터들이 대거 빠져나간 덕분.
그가 영주의 명으로 사전에 비워뒀던 첨탑을 힐끗 곁눈질했다. 그곳에 있을 정체불명의 '조력자'를 떠올리며.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관조하다 보니 알 수 있었다. 로브인들을 격살하고 있는 공격의 근원지는 저 첨탑이었다.
첨탑 하나를 비워두라던, 이해하기 힘들었던 영주의 명령. 그것은 분명 저 안에 있을 조력자를 활용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대체 언제 저런 전력을 확보해둔 것인지. 새삼 모시는 영주에게 감탄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주성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다.)
아무튼, 이대로라면 무난히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침공이 마무리된 뒤였다. 전체적인 전황을 살피는 자로서, 지휘관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차, 4차 침공을.
‘이전에 침공해온 몬스터들을 격퇴했을 때, 분명 상당한 숫자를 줄여뒀었다. 그런데 재침공해온 몬스터 군단의 규모는 이전과 그리 다르지 않아.’
그 말은, 저들이 부족한 병력을 어디선가 새로이 충원해 온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만한 병력을 충원해 올 장소라면 이 근방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팔로스 산맥.’
자신의 짐작이 옳다면, 저들의 침공이 완전히 끝나려면 팔로스 산맥에 서식하는 모든 소형 몬스터의 씨가 말라야만 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몬스터 대군을 매번 상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원흉인 로브인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정체불명의 조력자로 인해 저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문제는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것. 특작대를 조직해 내보내 봐야 저만한 대군을 뚫고 저들에게 접근하기도 힘들 터였다. 접근한다고 해도 십중팔구 대형 몬스터들에게 저지당할 테고.
‘거기다 그렇게 특작대가 전멸하게 되면 아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
특작대를 출진시키자니 전멸의 위험성이 너무 크다. 요행을 바라며 특작대를 내보냈다가 그치들이 전멸하는 광경을 고스란히 아군이 목격하게 되면? 기껏 끌어올린 사기가 단번에 바닥을 치게 된다.
반면 출전시키지 않자니 그나마 주어진 기회가 아깝다. 저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대군을 형성해 영지를 침공해올 테고. 그때 가면 후회해도 늦는다.
그나마 이번 침공은 막아냈다는 데에 만족하고 몸을 사릴 것인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모험을 걸 것인가. 지휘관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젠장. 신께선 대체 뭘 하고 계신 건지. 저런 개자식들에게 천벌 안 떨어뜨리고!’
그가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던 때였다.
슈왁!
어디선가 날아든 빛의 기둥이 밀집해 있던 로브인들의 진형 정중앙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아앙!
막대한 폭음이 울렸다. 폭음에 걸맞은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붕괴된 진형 속에서 로브인들이 절규하며 허우적거리는 장면이 지휘관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벌?’
지휘관은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 *
“알아서 똘똘 뭉쳐주니 얼마나 좋아.”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린 마력포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마력포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일렁이는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어서 또다시 대기가 일렁이더니 그 안쪽에서부터 중화기 하나가 튀어나왔다. 방금 전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지만, 정말로 ‘같은’ 물건인 것은 아니었다.
‘이젠 재충전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아공간에는 이런 활용법도 있었다. 똑같은 무구를 여러 개 처박아놓고 충전된 탄환이 바닥나면 바꿔 드는 것이다.
로엘이 괜히 그렇게나 아공간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젠 다양한 무구 활용에 대한 문제도, 공격 딜레이 문제도, 각종 마력 무구의 내구도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우우우웅!
압도적인 기파가 몰려들었다. 포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로브인들이 밀집된 장소로 조준하며, 로엘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