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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플뢰비르(3) (97/249)

 97화. 플뢰비르(3)

 제이슨 발드 플뢰비르 자작이 아주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조차도 순식간에 원상복구 되었지만.

 로엘이 자작의 표정 변화를 즐거운 심정으로 구경했다.

 굉장히 노골적인 발언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렇지만 개인 대 개인으로써 영주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정도 뻔뻔함은 갖출 필요가 있었다.

“보상 말이지요. 그……. 확실히 저희 측에서 일방적인 잘못을 했으니 제대로 보상해 드릴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영주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그가 내심 이를 갈았다.

‘젠장.’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사정을 설명하면서 적당히 좋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건만.

 애초부터 자작은 보상을 지급할 생각이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거대 세력과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

 쉽게 말해 그저 영지민들에게 형평성의 어긋남은 없음을 보여줄 생각이었을 뿐, 뒤쪽으로는 제대로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귀족의 수법.

 문제는 보상을 어느 정도로 해 주느냐,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작 본인이 아닌 상대의 입에서 먼저 보상에 대한 발언이 나와버린 이 상황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갈취한 돈에 영업정지로 인한 손해 금액을 얹어 되돌려주는 것 정도로 일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그게 힘들게 되었다. 굉장히 좋지 못한 상황.

‘보통 그 타이밍에 갑자기 보상 이야기부터 꺼내진 않지 않나?’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꼼짝없이 상대의 페이스에 끌려가야 한다. 단순히 금액적인, 실리적인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측의 자존심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협상 테이블 위로 오르게 될 테니.

 로엘은 영주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눈치챘지만, 그것을 외면했다. 괘씸죄 때문에라도 원만하게 넘어가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 자신의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먼저 이쪽에 피해를 입힌 인물이다. 그리고 상대의 사정을 봐주게 되면 어찌 됐건 이쪽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단순히 금전적인 손해만이 손해는 아니니까.

 로엘은 대가 없는 선의는 베풀 수 있어도 대가 없는 손해는 감수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이제부터 협상의 시작이다. 상대측의 사정을 깎아내리고 이쪽의 피해를 부각시키면서 받아낼 보상의 크기를 불려야 했다. 최대한 크게, 상대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영주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 때까지.’

 영주 측에서 재미없게 나왔다면, 이쪽이 그것을 뒤집어엎어 재미있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로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주는 열심히 말을 짜내고 있었다. 최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어떻게든 원만한 협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 * *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타협안이 제대로 내세워지지 않고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린 탓이었다.

 그 원인은 역시 로엘에게 있었다. 플뢰비르의 영주, 제이슨은 짜증이 치미는 것을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 썼다.

‘젠장. 이 자는 타협을 하러 온 게 아니다. 그냥 괘씸죄를 묻기 위해 온 거야.’

 대화가 안 통했다.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현재 영지의 상황상 들어줄 수 없는 요구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었다.

 쓸데없이 화술이 뛰어난 자라서 더욱 성가셨다. 말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듯싶었다.

‘되도록 충돌이 일어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되도록 눈앞의 소년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인도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뒤에 있을 ‘바엘른 마탑’의 보복이 두려웠기에.

 그렇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바엘른 마탑이 무섭다곤 하지만 당장 코앞까지 몬스터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로브인들’이 몰려든 상태. 우선순위는 그쪽에 있었다.

하다못해 요구를 수용하더라도 그치들을 물리친 뒤여야 했다. 협상의 시기를 어떻게든 미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저들을 제압해서 구류해야 한다. 그 소식이 바엘른 마탑으로 전해지지 않도록 저들의 사업장까지 이어서 습격해야 하고.’

 바엘른 마탑엔 공간의 현자가 있다. 거리의 제약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그가 이쪽의 사정을 알아채고 지원 인력을 파병한다 치면 그 인력이 이곳에 당도하는 건 순식간일 터. 그러니 애초에 정보가 그곳으로 전해지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해야만 하리라.

‘일단 구류해두고 몬스터 침공 문제가 일단락된 뒤에 다시 협상을 벌인다.’

 이렇게 되면 차악의 상황을 가정해야만 한다. ‘바엘른 마탑의 보복’이라는 유쾌하지 못한 상황을.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당장 몬스터를 막아내지 못하면 영지가 아작 나는데.

“도저히 사정을 봐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했듯, 그 사정이라는 건 이쪽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시고 계시는 듯싶습니다만, 피해자의 입장에 선 것은 이쪽입니다.”

“…….”

 영주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한 차례 내저었다. 언뜻 체념의 의미인 듯싶지만, 사실 주위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주위에 늘어선 기사 중 하나가 조용히 방을 벗어났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로엘은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자 조용히 미소 지었다. 기사는 로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움직였지만, 초감각을 지닌 로엘은 이미 기사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움찔.

 자작의 얼굴에 일순 경련이 일었다. 그가 가늘게 만든 눈매로 로엘을 응시했다.

‘눈치챘군.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과연 젊은 나이에 거대 상단의 간부로 활동할 만한 인재랄까. 통찰력이 상당했다.

 그러나 이미 내친걸음이다. 멈출 수는 없었다.

 자작은 자리를 박차고 훌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섰다. 지금이야 뱃살 나온 아저씨지만, 소싯적에는 무예깨나 익혔던 자작이다. 단숨에 거리가 벌어졌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상대에겐 이쪽을 막을 힘이 없다. 아마 이쪽이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 생각지 못하고 있었겠지. 오죽 자만했으면 수행원조차 제대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정말로 달갑지 않은 상황인데.’

 영주는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스스로가 자초한 상황이긴 했지만, 기분이 처졌다. 이게 다 그 정체 모를 로브인들 때문이었다.

 영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곧바로 기사들이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입구에서 마법사들이 뛰쳐나와 방에 장벽을 둘러쳤다. 바깥에선 병사들이 일대를 포위하고 있으리라.

 영주가 착잡한 눈으로 로엘을 응시했다. 카트리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다 기사들의 접근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갑자기 허공 한편이 일렁였다.

“어?”

 영주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눈을 껌뻑이는 사이, 일렁이는 공간 가운데에서 무언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길쭉한 철 덩어리였다.

“아공간!”

 잠시 뒤 자신이 무엇은 본 것인지 깨달은 영주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로엘이 카트리나의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그리고 씩 하고 웃었다. 그 모습에, 영주는 지금의 상황이 그가 ‘원하고 있던’ 그림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섬뜩.

 영주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 * *

 모든 기사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기절한 마법사들은 한데 모여 서로 머리를 기대고 앉은 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달아나 버렸다.

“…….”

 영주가 허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후회할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로엘은 다시 의자 위에 앉아 여유롭게 말했다. 주위 가구들이 대부분 박살 난 가운데, 그와 카트리나의 의자만큼은 멀쩡한 그대로였다. 괴리감이 느껴지는 광경.

 사실 이 정도면 상당히 많이 봐준 것이었다. 현재 영주 저택이 비교적 멀쩡한 것은 로엘이 지금까지의 자작의 태도를 봐서 어느 정도 마음을 누그러뜨린 덕분.

“…….”

 카트리나가 어딘가 겁먹은, 동시에 동경 어린 눈빛으로 로엘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그녀에겐 현재의 상황이 그리 실감 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전혀 접해본 적 없는 세상의 일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볼까요?”

“…….”

“참고로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 모두. 영상으로 기록된 상태입니다.”

“예?”

 로엘은 품속에서 주먹만 한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중앙에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진 보석이었다.

“이것은 메모리 크리스탈(Memory Crystal)이라는 유물입니다. 얼마 전에 거금을 들여서 구매한 물건이죠. 참고로 이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동시켜두고 있었습니다.”

“그, 그런!”

 영주가 기함했다. 메모리 크리스탈이라니, 억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고가를 자랑하는 유물이다.

‘아무리 거대 상단의 간부라지만!’

 현시대의 기술력으로 제조할 수 없는 건 물론이요, 대륙 전체를 통틀어 백여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귀물 중의 귀물. 그런 게 어째서 이런 자리에 있단 말인가.

 메모리 크리스탈의 기능은 자작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영상 기록, 그리고 저장. 워낙 유명한 물건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젠장.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 중엔 이쪽에 불리한 내용밖에 없다.’

 상대가 이쪽에 무리한 요구를 했다곤 하나, 그건 피해자 입장에서 할 수 있을 법한 요구였다. 이쪽의 사정상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지만 그런 것은 명분 싸움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을 터.

 이것으로 상대는 이쪽을 완전히 궤멸시켜도 상관없을 정도의 ‘정당성’을 갖췄다. 그리고 방금 전의 무력시위를 통해 그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게 가능함을 이쪽에 주지시켰다.

 조금 과장 보태 표현해서, 눈앞의 괴물 소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요구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플뢰비르 가문은 통째로 지워진다.]

 영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는 처음부터 이것을 원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쪽을 완전히 짓눌러 복종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지금부터 이쪽은 상대의 ‘요구’를 웬만해선 거절할 수 없다. 요구가 몇 가지든,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종류의 것이든.

 무력적인 측면에서도, 명분적인 측면에서도 비벼볼 구석이 없다. 쉽게 말해, 내정 간섭을 당할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된 것이다.

 * * *

“이걸로 골수까지 뽑아먹을 수 있게 됐군.”

 로엘은 사업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물질적 손해를 메꾼 것은 물론이요, 그 외적인 손해마저 넘어서는 이득을 뽑아냈다 할 수 있었다.

 골수까지 뽑아먹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지속적으로 오래 이익을 뽑아내려면 균형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동시에 협박의 대상인 영주는 계속해서 집권해줘야 했다.

 참고로 뒤에서 따라오다 로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카트리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하고 떨고 말았다.

‘자아, 그럼. 다음으론 영지에 닥친 위기를 해결해 줘야 하겠지.’

 그 일환으로 이번 몬스터 침공에 한 손을 보태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노다지가 될 곳인데 몬스터 군단 따위가 점령하게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만으로 몬스터 군단과 맞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비슷하단 말이지.’

 로엘은 레인과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받았던 편지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로브인’들에 대한 내용이.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었기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암약하는 초거대 조직이라니, 재미있지 않은가.

 이번에 영지를 침공한 몬스터 군단 사이사이에 섞여 있다는 그 로브인들. 일단 몬스터가 대규모로 영지를 침공한 원인은 그들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집단.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이고 있는, 아무런 이익도 없어 뵈는 일에 힘을 쏟고 있는 사이코패스의 무리.

‘보통의 사람, 혹은 집단은 그 자신의 이익을, 그게 아니면 하다못해 신념이나 복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움직이기 마련인데, 그 로브인들에겐 그게 없다.’

 레인에게서 받은 편지에 적힌 놈들의 행동양식도 그러했다. 놈들의 행동엔 목적성이 불투명했다. 마치 행동으로 인한 이익보단 행동 그 자체에 더 의의를 두는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같은 조직에 속한 놈들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참에 직접 한 번 확인해 볼 참이었다. 정말로 같은 놈들인지, 그리고 편지에 적힌 내용만큼이나 위험한 놈들인지.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선 놈들을 사로잡아야 하고. 로브인의 숫자가 수십 명에 이른다고 했으니 그중에 간부, 혹은 중간 간부가 한 명쯤은 있겠지.’

 그것을 위해서라도 전투에는 참여할 필요가 있었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다 보니 사업장이 들어선 건물에 다다랐다. 막 로엘이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로엘 님!”

“?”

 머리 위쪽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의 동태를 살펴보고 오라고 와이번에 태워 보내두었던 카트리나의 호위 용병이었다.

“큰일입니다! 지금 몬스터 대군이 영주성을 향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음?”

 상당히 빠른 재침공이었다. 1차 침공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2차 침공이라니. 하긴 몬스터 대군은 인간의 군대와는 그 성질이 다를 터였다.

“가 보는 게 좋겠군요. 카트리나 양. 와이번을 불러주세요.”

“아 네, 네.”

 카트리나가 곧바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와이번이 사업장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네?”

 카트리나가 옥상으로 가기 위해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덥석 하고 붙잡은 로엘이 곧바로 발을 굴렀다.

“꺅!”

 카트리나가 짧은 단말마를 내뱉었다. 그 직후, 로엘은 옥상 난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옥상에 도달한 것이다.

“어서 가죠. 상황 파악은 빠르게 해 둘수록 좋을 테니.”

 로엘은 카트리나를 내려주고 곧바로 와이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트리나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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