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사업 확장(3)
로엘은 승강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상념을 이어갔다.
‘무력 조직을 창설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수련 또한 게을리할 수는 없지.’
계약의 현자에게 도움도 구하고 이래저래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긴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타인에게 건넬 수 있는 무구는 제한되어 있었다. 정말로 위험한, 강력한 무구들은 직접 활용해야 했다.
‘그것들을 전부 활용하기 위해선 결국 나 자신이 숙달되어야 하니까.’
영역 지배 범위를 넓히는 일부터 생사공의 수련. 그리고 무기 다루는 일에 능숙해지는 것 등등.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승강기에 오른 로엘이 버튼을 눌렀다. 수련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쉴 수가 없네.”
사업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바쁜데 수련도 게을리할 수가 없다니. 이번 생에는 좀 여유롭게 살아볼까 했건만 아무래도 자신은 성향이 느긋하질 못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언제 또 과로사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생사공을 매일같이 운용하지 않았다면 쓰러져도 진작 쓰러졌겠지. 새삼 레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로엘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내뱉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대륙은 또다시 새해를 맞이했다.
어느새 15살이 된 로엘은 그야말로 눈이 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영향력이나 사업적 성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견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오죽하면 ‘엘리제 파르테인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 어찌 보면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칭호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목격한 이들은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그를 놀리려 들지 않았다.
섬세한 이목구비에 찬란한 금발이 조화를 이뤘다. 명장이 깎아 만든 조각상조차 그의 외모를 따라가진 못하리라.
“어디 가십니까? 상단?”
“아뇨. 탑주님과 잠깐 뵙기로 했습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공방을 가로질러 승강기로 향하던 로엘의 발걸음이 누군가의 부름에 멈췄다.
인사를 건넨 인물은 일전에 친목회에서 로엘을 깔봤던 인물, 카른이었다.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친근한 태도였다.
최근에 이르러 로엘을 험담하거나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다. 관련자들의 경우엔 아예 콩깍지가 씌인 판국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애초에 남에게 호감을 사는 온화한 성격인데 유능하고 부유한데다 잘 베풀기까지 한다. 접하면 접할수록 싫어하게 되기 힘든 유형의 인물.
급격한 출세를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이들은 있을지언정, 로엘이라는 사람 자체를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 최근엔 팬층마저 형성되고 있는 판국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진 카른의 태도에 다른 이들이라면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엘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행동이 노골적인 사람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인물은 오히려 다루기가 쉬우니까.’
로엘은 빙긋, 하고 웃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밝은 웃음이었다.
“오호, 탑주님과. 잘 다녀오십쇼.”
“예. 제가 없는 동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전과 다르게 카른은 로엘을 존대했다. 사실 카른뿐만 아니라 칼비오 파벌 전체가 그러했다. 최근 칼비오가 그렇게 하도록 파벌 구성원들에게 지시했다.
“물론입니다.”
참고로 카른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역시 사업에 관련한 이유였다. 마력제품인 ‘손목시계’를 담당하는 인물이 그였다.
“그럼.”
로엘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로카인과 엘리제. 두 사람을 찾아간 로엘은 곧바로 용건부터 꺼냈다.
“최근에 엘리제 양이 아공간 마법을 습득하고 공간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들었습니다.”
“음? 그렇다만.”
“그 아공간, 우선적으로 좀 배분받고 싶습니다.”
“호오. 이전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더니. 직접 그걸 요구하러 찾아온 건가.”
“아공간은 함부로 나눠줄 수 없어.”
이전에 로엘과 로카인이 나눈 대화 내용을 알지 못하는 엘리제가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로엘에게 매일같이 수업을 받는 만큼 그가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형평성이 문제였다.
로엘이 곧바로 빙긋, 하고 웃는 얼굴로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알고 있습니다. 최중요 직책에 배정되거나 마탑에 큰 공헌을 해야만 아공간을 배분받을 수 있는 ‘명분’을 손에 쥘 수 있다는 말이시죠?”
“그래.”
“그래서 제가 그 ‘공헌’이라는 걸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생각을 해 봤는데.”
“?”
“역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간단한 방식? 그게 무엇이냐.”
“돈입니다.”
로엘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가볍게 말했다. 너무나도 일반적이기에 도리어 일반적이지 않은 답변. 로카인과 엘리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돈?”
“좀 노골적이지만 가장 확실하죠.”
“그건…….”
엘리제가 말꼬리를 흐렸다.
돈으로 명분을 산다. 나쁘지 않은 말이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에 이것이 어떻게 비추느냐가 문제였다.
제삼자의 시선엔 아공간을 돈 받고 판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마탑의 재정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건 별로 좋은 결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무슨 생각이 있느냐?”
“생각이라고 할지. 제가 기부할 금액으로 생각해둔 게 대충 이 정돕니다.”
말과 함께 로엘이 추정 예산안 위로 온갖 계산식이 낙서 된 종이를 내밀었다. 한쪽 귀퉁이에 적힌 최종 금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헛헛.”
로카인이 일순 벙찐 표정을 했다가 허허롭게 웃었다.
마탑에서 기부금은 예산과 별도로 운용되는 항목이다. 원칙적으로 마탑이라는 ‘단체’가 아닌 ‘소속 마법사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정해진 돈이기도 하다.
실상은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는 항목. 부유한 마법사들에게 누가 쓸데없이 기부 따윌 한단 말인가.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때 포상의 의미로 지급되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간혹 마탑에 자식이 입문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거액을 기부하는 귀족도 있긴 하지만, 그 ‘거액’이 마탑 내 세 자릿수에 달하는 마법사들에게 분배되었을 때도 과연 거액일까. 가뜩이나 금전 감각이 남다른 마법사들이건만.
그러나, 로엘이 쾌척하겠다고 선언한 금액은 아예 그 스케일이 달랐다.
현재 로엘이 사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얼마나 굉장하냐 하면, 추가 사업들을 벌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이미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 이익을 뽑아내고 있을 정도.
조만간 대륙 최고 갑부의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 여겨지는 그였다. 그런데, 로엘이 제시한 금액은 그 압도적인 재력으로도 조금 벅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 반향이 절대 작지 않을 터였다.
각종 연구실에 지원금이 전달될 것이다. 식사나 주거공간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새로운 마법 물품들이 구비될 것이다. 탑 내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겠지.
‘원래 명분을 돈으로 살 때는 값을 비싸게 치를수록 효과적인 법이지.’
로엘은 금액을 확인하고 로카인과 같은 얼굴이 된 엘리제를 곁눈질하며 피식, 하고 웃었다.
대중에게 인지도 높은 인물이 스캔들이 터지고 1억을 자선단체에 쾌척했다 해보자. 그렇다면 대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놈이 일 터뜨려 놓고 이제 와서 이미지 챙기려 든다.]
아마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대체로 냉담한 반응을 보일 터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가 자선단체에 수백, 수천억을 기부했다고 해보자.
[저놈이 잘못을 한 건 맞는데, 그 결과로 혜택을 받을 이들이 많으니 어떤 의미에선 좋은 일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등장하게 된다. 스캔들에 비해 수백, 수천억의 기부가 훨씬 큰 화젯거리기에 의견이 분열되는 것이다.
로엘의 계획은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졌다. 특히나 이 계획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게 될 이들이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냥 게임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불만이 생길 수는 있되, 그것을 드러내는 이는 없게 만들겠단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
드물게 엘리제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드는 로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싶었다. 로엘은 그것을 슬쩍 외면했다.
“단순한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가는 계획이로군. 나야 나쁠 것 없다만.”
“아,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종류의 디저트가 개발됐다더군요. 새로운 의상도. 샘플을 좀 가져왔는데 받으시고 이후에 의견을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로엘이 엘리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말이 시제품이지 실상은 뇌물이다. 엘리제는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세련된 의상도 마찬가지로 좋아한다.
엘리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본래의 무표정함을 되찾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찻잔을 들어 살짝 입술을 적셨다. 로엘은 그 반응에서 그녀가 싫어하지 않고 있음을 읽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엘리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살짝.
로카인이 고개를 돌린 채 클클, 하고 작게 웃었다. 그러자 엘리제가 눈매가 약간 가늘게 좁혀졌다.
“왜 웃으시죠?”
“헛헛.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로카인이 가볍게 손을 내젓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엘리제에게서 불만스러워하는 기색을 읽어낸 로엘 또한 작게 웃고 말았다.
* * *
로엘은 엘리제와 함께 도시 내 한 고급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은 로엘이 고용한 상위 용병들이 머무는 장소였다. 대륙 각지에서 사업에 관련한 분쟁이 일어나면 이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모두가 용병계에선 알아주는 실력자들이었다. 이들로 인한 지출이 상당히 컸다.
엘리제가 발걸음을 옮기며 로엘에게 말했다.
“요즘 사업 관련 분쟁이 점점 많이 일어나고 있네.”
“신흥 사업체가 이만큼 빠르게 성장했으니 주위에서 견제가 들어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슬슬 이전에 지원받아둔 녀석들을 활용할 때가 되지 않았어?”
“그게, 무구를 지급해야 하는데 그 문제가 좀 걸리네요.”
몇 달 전, 로엘은 계약의 현자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유는 물론 그의 계약 마법을 필요로 했기 때문.
그렇게 찾아간 연구실에서 로엘은 정말로 오랜만에 ‘천한 공방지기 주제에’로 시작하는 욕설을 잔뜩 얻어먹었다. 소문대로 괴팍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였다.
확실한 실적으로 차별의 시선을 찍어 눌러버린 이후로는 그런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차별적인 발언을 들었다. 상당히 심한 발언에 일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아직은 고용한 용병들만으로도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조금만 더 추이를 지켜보려고요.”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마르스 님을 설득하는 일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분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고 싶다면 계약 마법 관련 유물이라도 가져가야 할걸.”
“그런 걸 어디서 구하나요…….”
로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비주류(非主流) 마법이 담긴 유물이 구하고 싶다고 구해질 턱이 있나. 존재하는지 아닌지조차 불투명하건만. 돈이 넘쳐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참고로 ‘마르스’는 계약의 현자의 이름이었다.
“아쉬움에 발목 잡혀서 일을 그르치지만 말도록 해.”
“예. 주의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여관에 다다라 용병들을 분쟁 지역으로 이송시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로젤리아를 임시 지휘관으로 삼아 용병들을 이끌도록 했다.
참고로 상위 용병들을 운용할 땐 이런 식으로 지휘관을 딸려 보냈다. 아무래도 모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무력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참고로 가는 길엔 공간 마법으로 이동하지만 오는 길엔 평범하게 마차 타고 돌아와야 했다. 일종의 출장 임무였다.
로엘과 엘리제는 그렇게 용병들을 이송시키고 곧바로 다시 마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난 김에 마르스 님이나 한번 찾아뵙고 가겠습니다.”
“그래, 잘 해봐.”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고급스러운 외견의 가게 앞에서 작별했다. 로엘이 가게 안쪽으로, 엘리제는 그대로 마탑으로 향했다.
* * *
“후우.”
로엘은 마탑 상층에 위치한 어느 연구실 앞에 서서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문을 두 차례 두들기자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이면, 또 그 녀석인가. 그 녀석은 질리지도 않는 건가?”
혼자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 일반인이라면 듣지 못했겠지만, 청각이 예민한 로엘에겐 들렸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로엘이 문을 열고 연구실 내로 들어섰다. 온갖 서류가 널브러져 어지러운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에 고개를 파묻듯 숙인 채 열심히 펜을 놀리는 노인의 모습도.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로엘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노인이 고개를 쳐들고 로엘을 마주 보았다. 이리저리 멋대로 뻗친 기름기 낀 머리를 긁적이며.
“어지간히 귀찮게 구는군. 빌어먹을 공방지기 같으니.”
“시내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마침 좋은 술이 들어온 게 눈에 띄어서 하나 사 가지고 왔습니다.”
로엘은 시큰둥한 노인의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웃는 얼굴로 손에 들린 술병을 들어 보였다.
시내에서 들렀던 가게가 바로 술집이었다. 거기서 가장 비싼 포도주 한 병을 집어왔다.
몇 번 그를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 계약의 현자, 마르스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는 로엘이 자신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로엘이 고급 주류를 선물로 들고 찾아오면 내쫓으려 들지는 않았다.
“흥.”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고개를 책상에 파묻었다. 로엘이 재차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