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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사업 확장(1) (91/249)
  •  91화. 사업 확장(1)

     후계자 경쟁이 마무리되었다.

     그리든, 칼비오의 포기 선언으로 엘리제 파르테인이 최후의 1인이 되었다. 다른 후계자들이 남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냥 없다고 봐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마탑의 원로, 간부, 탑주와 부탑주에게 인정을 받아 차기 탑주의 자리를 거머쥔 뒤.

     그녀의 주위엔 많은 변화가 일었다. 당장 숙소부터 마탑 최고위 인사들이 거주하는 최상층으로 옮겨졌다.

     방대한 개인 실험실이 주어졌다. 각종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만큼 제약도 걸리긴 했지만.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앞으로 좋을 관계를 다지기를 희망해왔다. 엘리제는 그중 옥석을 가려냈다. 이후 자신의 힘이 되어줄 것이라 여겨지는 이들을 포섭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일단 차기 탑주의 자리에 내정된 인물은 짧은 휴식 기간 뒤에 바로 마법을 전수받아야 했다. 역대 탑주들에게만 전해져온 최상위 마법. ‘공간 마법’을.

     사실 찾아온 이들도 그 짧은 휴식 기간이 기회임을 알기에 그렇게 몰려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로엘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투기장에서 그와 헤어지던 때, 그는 ‘곧 찾아뵙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은 이쪽에 주어진 휴식 기간 내에 찾아오겠다는 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될 테고.’

     의도대로 친분을 쌓기 위한 기초공사는 이미 다져두었다.

     대련에서 패배한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못 되었지만, 그래도 목적은 이뤘다. 관계를 쌓아 올리는 일은 이후 천천히 진행해도 좋으리라.

     그렇게 가볍게 생각을 마무리 지은 엘리제 파르테인. 그녀는 목적지인 로카인의 연구실 앞에 서서 문에 노크했다.

     곧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

     연구실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그녀는 눈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다. 타인 앞에서 표정 관리에 엄격한 그녀에게선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분명 이곳은 탑주로부터 마법을 전수받기 위해 찾아온 장소다. 이곳에는 오로지 탑주인 로카인만이 자리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로엘?”

     -이 자리에 로엘이 있는가.

     * * *

     첫 수업을 마친 로엘은 작게 웃으며 공방으로 향했다.

     가르치는 것도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엘리제의 표정을 간간이 구경하면서 가르치다 보니 더더욱 재미있었다.

     수업 분위기는 괜찮은 편이었다. 로카인은 지금까지 힘들게 참아왔다는 듯 신이 나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엘리제는 내심 분위기를 어색하게 여기면서도 꼼꼼하게 수업 내용을 받아 적었고.

    ‘은근슬쩍 자리에 끼어서 곁가지로 공간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로엘의 수업 이후론 로카인이 엘리제를 가르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되자, 로카인은 주저하지 않고 로엘을 연구실에서 내쫓았다.

     로엘이라면 옆에서 엿듣는 것만으로도 공간 마법을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게 아니라도 부외자가 보는 앞에서 마법을 가르치진 않겠지만.

    ‘어쨌든, 순조롭다.’

     이것으로 차기 탑주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다질 수 있을 터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좋지 않기도 힘드니까. 이후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가 용이해졌다.

    “그녀가 ‘공간 이동’ 마법을 익히는 데까지 최소 두 달은 걸린다고 했지.”

     로엘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로카인의 견해대로라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한 듯했다.

     그것도 굉장히 짧게 잡은 기간이었다. 그녀가 그만한 천재가 아니었다면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으리라.

    “그 시간 동안 나도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그녀가 공간 이동 마법을 마스터하기 전까지 사업을 위한 밑 준비를 완전히 마쳐둘 생각이었다. 한동안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하리라.

    “신입들을 열심히 굴리면 어떻게든 시간 내에 맞출 수 있겠지.”

     가장 큰 문제였던 인력 부족 사태를 어느 정도 해소한 덕분에 마음에 여유가 생긴 로엘이었다. 준비를 마치는 데 늦지는 않으리라.

     * * *

     공방에 들어서니 모두가 한창 바쁜 와중이었다.

     최근 제국의 도시 중 하나인 플라티테리움에서 대량의 타일 제작을 요청해왔다. 정화조에 활용할 타일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미리 마력제품들의 재고를 확보해 두기 위해 상당히 힘을 쏟았다. 공방 내 마법사들이 과로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린 건 물론이었다.

     참고로 이 세계의 하수도의 원리는 간단하다. 도시의 지하에 길을 트고, 그 길을 정화조에 잇는 것이다. 그리고 정화조는 다시 강이나 바다로 연결된다.

     여기서 핵심은 정화조다. 그야말로 단순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건축되는 공간. 오히려 현대 지구의 그것보다 성능이 좋은 구조물.

     정화조는 오로지 수천, 수만 장의 타일을 깔아 제작된다. 그 타일이 ‘정화’ 마법이 새겨진, 공방 제작 물품이라는 것이 특징일 뿐. 그야말로 돈을 처발라 만드는 공간인 것이다.

     어찌 보면 항마장벽과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아무래도 항마장벽의 그것과는 다른 섬세한 마법이 적용되는 데다 쉴 틈 없이 흐르는 하수를 정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타일을 갈아줘야 하는 주기가 훨씬 짧았지만.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정화조는 이렇게나 오버 테크놀러지인데 하수도는 어린아이들을 고용해 막힌 소로들을 뚫어야 할 만큼 관리되지 않는다.

     길을 잇는 파이프에 녹이 슬든 말든 어차피 정화조에서 정화될 테니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당장 그곳에서 일하며 질병이 옮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어린아이들만 빼고.

     참고로 로엘에게도 레인과 함께 어린 시절 하수도에서 일한 기억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끔찍한 시절이었다.

     애초에 하수도와 정화조를 구분할 것 없이 전부 타일을 깔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문제는 타일 한 장 한 장의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는 것.

     광범위한 하수도 전체에 타일을 두르는 것보다 하수가 집중되는 일정 구간에 타일을 두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도시에서 굳이 아이들을 구해다 하수구를 청소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야말로 기형적인 구조. 이 세계 문명 수준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각설하고.

     어쨌든 이런 대규모 마법 물품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공방 마법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바로 이렇게.

    “야! 미스릴 합금 실 어디에 뒀어!”

    “그거 저쪽!”

    “아니, 저게 왜 저기 있어? 멋대로 옮기지 말라니깐!”

    “난들 아냐!”

    “이봐! 여기 사람이 부족해!”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부족한 대로 알아서 수량을 소화해내!”

    “아오! 젠장!”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로엘은 열기로 가득한 단체 작업장을 가로질러 개인 작업실로 향했다. 개인 작업실이 있는 사람은 이래서 편했다.

    “어이 로엘!”

     마법사 중 하나가 로엘을 발견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로엘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어떤 녀석이 널 찾아왔던데? 네가 없다고 하니까 오면 이걸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렇습니까?”

    “어. 갖고 가라.”

     사내가 건네는 쪽지를 받아든 로엘이 곧바로 그것을 펼쳐 읽어 내렸다. 쪽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장소는 마탑 바깥.

    “잠시 외출하고 와야겠네요.”

    “뭐라고 적혀 있는데?”

    “별 내용 아닙니다.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누가?”

    “메이엘, 칼비오, 그리든. 이 세 사람이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후계자 경쟁 4강 중 엘리제를 제외한 전원인 것 같다만?”

    “그렇습니다.”

    “넌 언제 또 그 녀석들과 그렇게 친해졌냐? 하여튼 난 놈은 난 놈이네.”

    “그렇게 친하진 않습니다. 이번에 사업을 좀 벌이려는데 손이 부족해서 끌어들인 것뿐입니다.”

    “그게 더 무서운데.”

     끌어들이고 싶다고 끌어들일 수 있는 이들이면 애초에 말을 안 한다.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그렇고, 사업? 뭐야, 돈 냄새가 나는데? 설마 이번엔 날 빼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쉽게도 이번엔 공방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종류의 사업입니다. 도움은 다음에 요청하겠습니다.”

    “쯧, 아쉽네.”

     사내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엘의 사업에 한 손 거들면 거금을 보수로 받을 수 있다는 건 공방 마법사라면 누구나 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다녀와라.”

     로엘은 길을 되돌아가 다시 승강기에 올랐다.

    ‘환영회라니, 메이엘도 재밌는 걸 준비했네.’

     로엘이 쪽지를 살짝 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형 사업이 진행되는 와중 새로운 얼굴이 합류했으니 필요한 절차이긴 했다. 그렇지만 두 파벌의 기분을 고려해 일단 나중으로 미뤄뒀었는데 메이엘이 독단으로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이쪽이 거리낄 건 없었다. 환영회 자체가 껄끄럽게 느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엘 본인이 주최하지만 않는다면 문제의 소지는 없으니.

     오히려 그리든, 칼비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특히 자존심 덩어리라 할 수 있는 그리든의 얼굴이.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나도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은 못 된단 말이지.’

     로엘은 쪽지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작게 웃었다.

     * * *

     쪽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니 적당한 규모의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고급스러운 식당은 아니었다. 식당을 아예 전세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터였다.

    “와하하하!”

    “그거 굉장한데!”

     안쪽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한참 파티를 만끽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상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새로운 세력이 둘이나 합류한 데다 한쪽 세력의 장은 굉장히 거만한 타입. 당연히 어색한 광경이 펼쳐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이제 와?”

     한참 그리든 파벌의 여 마법사와 잡담을 주고받고 있던 메이엘이 로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로엘이 곧바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그건 됐어. 그보다 어때? 분위기 나쁘지 않지?”

    “그렇군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적응했네요.”

    “내가 힘 좀 썼지.”

     로엘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말인즉, 그녀가 먼저 손을 벌렸다는 이야기였다. 두 파벌에 그다지 호의적인 감정이 없는 그녀가 스스로 나서 갈등의 소지를 줄여주었다니 의외였다.

    “고마운 줄 알아라, 너.”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두 파벌에 없던 호의가 생겨나서 그랬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배려해준 것이라는 말이 된다.

     로엘은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메이엘은 됐다는 듯 팔을 내저었다. ‘앞으로 나한테 잘해라’라고 뒷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메이엘이 자리를 벗어나고 로엘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와중, 새로운 인물이 다가왔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칼비오였다.

    “얼굴도 보기 힘들군.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아, 칼비오 씨.”

    “편하게 말 놔라. 어차피 이젠 네 휘하에 든 일개 마법사에 불과하니.”

    “아뇨, 전 이쪽이 더 편해서요.”

    “그런가.”

     칼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이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는데 더 권하는 것도 뭣했다.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메이엘에게 끌려다니면서 네가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을 들었다. 터무니없는 규모의 일을 준비하고 있더군. 솔직히 많이 놀랐다.”

    “앞으로 많은 일을 맡게 되실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이쪽도 잘 부탁한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네.’

     전에 투기장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땐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마음을 추스른 모양이었다. 인재는 인재였다.

    “그리고 일단 제대로 된 대우를 해 주는 것에 감사를 표하지. 여러모로 불만을 감수해야 했을 텐데.”

     두 파벌의 구성원들에겐 상당한 대우를 약속하며 사업에 투입시켰다. 곧바로 중책을 맡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존 인물들이 불편해할 수준의 대우라고 봐도 좋았다.

     로엘이 공방에 입문하고 그와 동시에 개인 작업실을 부여받았던 때. 그때 주변에서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다른 이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다.

     두 파벌의 구성원들이야 마탑에서도 촉망받는 인재들이니 그 대우가 익숙하겠지만, 기존 세력에게까지 그럴 턱이 없다. 그럼에도 로엘은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였다.

     사실 시간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저들을 일일이 실적을 쌓게 만들어 직책을 높이자니 그에 소요될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 안전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좀 더 나중에 사용해도 좋을 터였다.

    “그 정도로 감사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아니, 네가 우리를 배려해 줬다는 건 사실이지.”

     로엘이 두 파벌을 끌어들인 방식은 ‘내기에서의 승리’다. 그가 원했다면 두 파벌은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불평을 제기하지 못했으리라.

     칼비오의 감사 인사에 로엘이 손사래를 쳤다. 그가 재차 겸양의 말을 뱉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로엘은 ‘그럼’이라고 서두를 끊고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부탁 하나 하겠다며.

    “제가 처음 공방에 입문했을 때, 주위에서 여러모로 말이 많았습니다. 실적도 없이 개인 작업실을 부여받는 걸 좋지 않게 보는 분들이 많았죠.”

    “그런가.”

    “그때 칼벤 씨가 제게 한 말이 있습니다. 이번엔 제가 그걸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네요.”

    “······.”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이들임을 증명해 주세요. 실적으로.”

     어차피 양 파벌 수장의 체면은 어느 정도 살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능하니 그들에 대한 불만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도 않을 터였다.

     쓸데없는 격려보다 이런 식으로 말해두는 것이 나으리라.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도, 저쪽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도.

     로엘은 말을 마친 뒤 하하,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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