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투기장(5)
“시작하기 전에, 내기 조건을 좀 조정할 수 있을까.”
“조건을 말인가요?”
“그래. 솔직히 난 앞서 너와 내기를 벌인 두 사람과는 달리 그리 절박하지 않으니까. 굳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고수하고 싶지 않거든.”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것이었던가.
솔직히 그녀의 등장은 로엘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는 전개였다. 애초에 그녀에겐 내기를 제안한 적조차 없었으니.
일단 나쁠 것 없는 상황이라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 상황은 그녀의 입장에선 염치 불고하고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뭐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인물이 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그런데 방금 그녀의 발언으로 인해 그 의문이 풀렸다.
말했듯, 그리든이나 칼비오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 굳이 이렇게 급하게 로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 로엘이 내건 내기 조건은 너무 과하다. 차기 탑주의 자리가 확정된 그녀에게, 3번의 부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 지나치다. 그녀로선 수지가 맞질 않는다.
그녀는 예의상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다. 그녀는 급하지 않다. 로엘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싶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그만이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애초부터 내기 조건을 바꿀 생각이었군.’
수정할 내기 조건이 무엇일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로엘 자신이 그녀였더라도 분명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대신 내 쪽에서 내걸 조건도 그리 대단하지 않아. 그저, 앞으로 가능한 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정도?”
‘역시.’
굉장히 추상적인 조건이다. 어찌 보면 절대 가볍지 않은 조건이지만, 두루뭉술하다.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강제’이 없다.
이런 조건은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로 내거는 게 아니었다.
‘상대와 친분을 쌓고 싶을 때 내걸 법한 조건이지.’
상념을 정리한 로엘은 재빨리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리곤 지체 않고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좋습니다.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잘됐네요.”
물론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한 답변이다. 실상은 ‘차기 탑주에게 3차례 부탁할 수 있는 권리’를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전혀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럼 제 조건도 간단하게, 앞으로 가능한 한 편의를 좀 봐줬으면 좋겠다고 해 두죠.”
상대가 제의한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도 나쁘진 않다. 로엘은 똑같이 추상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제의를 수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상대가 알아서 친분을 쌓고 싶다며 찾아왔는데 이쪽에서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이쪽에서 친분을 쌓고 싶었던 인물 1순위가 아닌가.
“좋아.”
“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내기의 조건이 추상적인 것뿐이라 굳이 공증인을 세울 것도 없었다. 로엘, 그리고 엘리제는 곧바로 대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가볍게 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대치했다. 그리고, 관객석의 메이엘이 앞서와 같이 시작을 외쳤다.
순식간에 두 남녀의 신형이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 * *
바람 계통 상위 마법으로 공중에 떠오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엘리제 파르테인. 그녀가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빨라.’
그녀는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원소 마법에 통달한 초강자. 초반부터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상대를 몰아치는 길을 택했다.
쉽게 쫓아올 수 없는 위치에 자리 잡은 채, 이쪽은 편하게 상대를 공격한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전투방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에게 그 전투방식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
콰드득.
주위에 둘러둔 바람 장벽에 박혀 드는 마력 탄환. 굳이 공중에 자리를 잡았건만, 그것이 전혀 이점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
‘어떻게 이런 위력이 나오는 거지?’
마법이란 것도 결국은 개인이 가진 ‘힘’이다. 그저 강한 마법을 발현시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발현시킨 마법을 상대를 향해 발출하는 데에도 힘이 소모된다. 그러니 그쪽에도 힘을 배분해야만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발현시킨 마법을 중력을 거슬러 올려보내기 위해선 보다 많은 힘을 소모해야만 하고.
필연적으로 거리, 중력 등등의 제반 여건에 마법의 위력은 반비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공격은 그 당연한 상식이 적용되질 않고 있었다.
공격이 날아드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마법이 이쪽에 다다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그 위력 자체가 낮아져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연사 속도가 높은 데다 모든 공격의 위력이 일정하기도 했고.
‘마치 마력 탄환을 생성하는 데만 마법을 적용시키고 그것을 발출하는 데엔 다른 원리를 적용한 것처럼.’
그녀는 마탑 최고의 인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게 곧바로 로엘이 든 무구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긴 했지만.
‘그것도 그렇고.’
마법의 위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본인의 움직임.
이쪽의 공격을 모두 무력화시키는 압도적인 이동속도. 웬만한 대범위 공격이 아니라면 저 이동속도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게 안 된다면 실수를 유도해 빈틈을 찌르는 수밖에 없는데…….
‘쉽게 틈을 내줄 것 같지도 않고.’
그야말로 마법사의 천적.
상대가 정통 무인이었다면 간격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춰 전투를 이어가면 된다. 마법사였다면 역량 대결로 밀어붙이면 된다. 웬만큼 경지가 높지 않다면 어정쩡하기만 한 마검사는 애초에 논외고.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높은 위력의 공격을 연속해서 날리는 주제에 장거리 전투를 즐긴다. 마법사의 마법에 비해 월등히 딜레이가 낮은 공격을 날리는 주제에 힘의 소모율이 적다.
웬만큼 경지가 높지 않고서야 저 전투방식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그만큼 까다로운 상대였다.
‘다만, 지쳐있어.’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조금 처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앞서 대련에서 무언가 있었던 것이리라. 거기에 승기가 있었다.
‘고작 두 파벌 대표자들과의 대련에서 저렇게까지 지칠 녀석은 아니야. 그렇다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건데.’
그리든, 칼비오 파벌의 최대 실력자들에 대해선 이미 모두 파악해 두고 있는 그녀였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에게 이렇게까지 지쳤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총력전이라도 벌인 건가?’
그리든의 성격이 변수가 되어 일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대련이 과열되어 패싸움으로 번졌었을 수도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많았다.
‘확실한 정보가 없어.’
가정이 옳건 어쨌건, 그녀는 단편적인 정보를 기반으로 한 추리만으로 본질에 가깝게 접근했다. 그녀의 능력이 뛰어남을 드러내는 일면이었다.
‘일단 상대가 확실히 불리한 지점에서 나와 대련을 하고 있음은 알겠어. 그럼에도 호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자기 개발에 시간을 투자하길 조금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의미가 없었다. 그야, 상대 또한 공방 마법사가 아닌가.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럴만한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는 일도, 그만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일도 지금까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이기고 싶었다. 이겨도 져도 딱히 상관없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대련임에도 이기고 싶어졌다. 잠들어있던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바람 칼날(Wind Blade)>.
<바람 탄환(Wind Bullet)>.
<공기 압축(Compression Of Air)>.
<화염구(Fire Ball)>.
연속해서 이뤄지는 마법의 발현. 장거리 전투에 유용한 바람 계통 마법을 베이스로, 간간이 파괴력 높은 화염 계통 마법을 섞어 날렸다.
탕! 탕! 탕! 탕!
로엘은 위력 높은 화염구와 범위 공격인 공기 압축을 피해낸 뒤, 나머지 마법들은 요격했다. 그리고 곧바로 반격했다.
콰드득. 콰드드득.
마력 탄환을 가로막은 바람 장벽은 건재했다. 그만한 마법을 쏟아부어 놓고도 여력이 남았다는 뜻.
로엘은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마력포도, 연사용 소총도 없다.’
앞서 대련으로 두 무구의 내구도는 한계에 달했다. 현재 수중에 있는 것이라곤 세 자루의 권총. 그 이외의 것들은 불필요하다 여겨 챙겨오지 않았다.
그중 두 개는 연사율이 기존의 것보다 낮고 재충전에 걸리는 시간도 길지만. 위력이 높은 종류였다. 나머지 하나는 앞서 사용했던 물건이고.
현재는 양손에 들린 위력 높은 권총을 사용해 교전 중이었다. 위력이 높다곤 해도 상대의 방어를 뚫을 정도는 아닌 게 문제였지만.
‘이대로 서로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먼저 지치는 건 이쪽이다.’
아까의 대련으로 인해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이쪽의 체력이 먼저 고갈될 것임은 명백했다.
‘기회를 봐서 장벽을 아예 부숴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역시 마력 폭탄밖에 없고.’
앞서의 대련에서 큰 재미를 본 투척 무기, 마력 폭탄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필히 가까운 위치로 접근해야 했고.
그렇기에 로엘은 최대한 주의했다. 자신이 접근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상대가 이쪽이 접근하려 함을 눈치채면 끝이다. 눈치 빠른 그녀는 절대 자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리라.
되려 자신이 근접전보다 장거리 전투에 능함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그렇게 상대의 경계심을 시간을 들여 낮춰갔다.
상대가 장거리 전투를 고수하든 근거리까지 다가오든 이쪽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상대가 그런 ‘인식’을 가지게 만들기 위해 최대한 집중했다.
‘결국 눈치싸움이군.’
그렇게, 로엘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겉보기엔 그저 마법을 피하기 위해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 * *
“앞서에 비하면 좀 수수하네.”
메이엘이 무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내기 조건을 조정한 그때부터, 메이엘은 대련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의 대련은 분명 박진감이 넘쳤다. 그렇지만 그뿐. 앞서의 대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전한 메이엘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로엘이 지친 탓에 박진감이 이전의 대련만 못 했다. 화려함도 덜했다. 거기에 내기에 걸린 상품마저 빈약하니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재미없다고 할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요.”
“너야 저 녀석이 하는 일이니 다 긍정적으로 보이겠지.”
“아, 아니. 그렇게 몰아가지 마시라니까요.”
루나와 메이엘이 가볍게 툭탁거렸다.
“그런데 저거 어떻게 생각해?”
“네? 뭐가요?”
“저기 두 사람 말이지. 한쪽은 차기 탑주에다, 한쪽은 천재 신인이잖아? 그런데 차기 탑주 쪽에서 친분을 다지겠다고 먼저 접근해왔단 말이지?”
메이엘은 로엘을 가리켜 천재라고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정도 칭호는 전혀 과하지 않았다.
“친분이요?”
“딱 보면 알 수 있잖아. 저 녀석 성격에 그냥 심심해서 대련하자고 찾아왔을 리는 없지. 제 알아서 조건을 낮추기까지 했고. 이유야 그것밖에 없겠지.”
“…….”
“그런데 저 둘이 친분을 쌓고 이후에 협력 체계까지 구축하면 어떻게 될까.”
“?”
“솔직히 두 사람 다 ‘괴물’이잖아? 괴물 둘이 서로 짝짜꿍이 맞게 되면 무슨 결과가 벌어질지 상상이 안 가.”
“확실히 그건 좀 무섭네요.”
짧지 않은 시간 로엘을 지켜본 두 사람은 안다. 로엘이라는 소년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춘 인물인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엘리제 파르테인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굉장한지도 잘 안다. 그들만큼 그녀를 오래 지켜본 이들도 몇 없다.
저 두 사람은 어찌 되었건 동시에 한 세력에 속한 이들이다. 심지어 한쪽은 그 세력의 장이 될 인물이고. 결국 충돌하거나 협력 체제를 구축해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 두 사람이 택한 길은 단연 후자. 공생의 길을 걷기로 무언의 협의를 나눴다. 사실 두 사람의 성격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긴 했다.
이번 대련을 통해 엘리제는 로엘의 가치를 한층 더 높게 평가하게 될 터다. 엘리제의 성격상, 적어도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질 일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
그렇다면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뭐 그것도 그렇고, 저 판박이 둘이 서로를 보고 뭔 생각을 할지도 궁금하긴 하다만.”
너무나도 비슷한 성격에 떨떠름한 기색을 보일까. 아니면 서로 똑같이 그 사실을 흘려 넘길까.
동족 혐오랍시고 서로를 껄끄러워하진 않을까. 마냥 짝짜꿍이 맞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능구렁이 커플이 탄생하진 않을까.
그것은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오.”
콰아아아아앙!
마침 로엘이 결국 제 뜻을 이뤘다. 강대한 폭발이 일어나 사위를 휩쓸었다. 대련 시작으로부터 무려 20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나마 메이엘의 눈에 차는 광경이었다. 상당히 화려한 연출이지 않은가.
일시적으로 들끓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엘리제의 모습 같은 건 웬만해선 보기 힘든 구경거리다. 저건 좀 재미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두르고 있던 마법 장벽은 모두 와장창 깨져나간 상태였다. 폭발 직전, 그녀가 기지를 발휘해 급히 몇 겹이나 강화시켰었음에도.
“진짜 이기겠네.”
역시 엘리제 파르테인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추락 와중에도 결국 들끓는 마력을 제어하고 곧바로 다시 태세를 정비했다. 이어진 로엘의 공격을 어떻게든 방어해냈다.
그러나 한 번 보인 빈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로엘. 결국 그녀는 조금씩 기세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저 녀석도 실전 경험이 영 부족하긴 하지.”
엘리제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마탑 마법사니까, 라고. 메이엘이 뒷말을 덧붙였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대련은 마무리되었다. 결국 승리한 쪽은 로엘이었다.
그렇게, 로엘의 빡빡하기 그지없었던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