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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투기장(4) (89/249)
  •  89화. 투기장(4)

    ‘괴물 같은 자식!’

     그리든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동맹을 맺지 않았으면 상대도 되지 않을 뻔했다.’

     빗발치는 마법을 빠른 움직임으로 피해내는 로엘을 바라보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괴물이 등에 메고 있는 대형 무기는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았다.

    ‘그렇지만 승리의 가능성은 보였다.’

     상황은 비등했다. 아니, 이쪽이 약간 밀리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인간인 이상 실수 한 번은 하겠지.’

     사람인 이상 전투 중에 한 번도 실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 그 순간 판도는 뒤집어 진다.

     실책은 이쪽도 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쪽은 다수고 저쪽은 혼자다.

     이쪽은 한 사람이 실수해도 다른 이들이 그것을 커버해줄 수 있다. 반면 저쪽은 그런 것 없이 그 여파를 홀로 모두 감당해야 한다.

    ‘이길 수 있다. 놈이 실책을 범하는 타이밍. 그 타이밍만 잘 노리면 된다.’

     그 뒤론 칼비오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면 된다. 그 결전 또한 고비겠지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온다! 방어 마법을 중첩시켜!”

     어느새 충전이 끝난 중화기를 발포하려는 로엘을 응시하며 그리든이 주위 마법사들을 재촉했다.

     * * *

    “스케일이 다르네.”

     관객석의 메이엘과 루나는 연신 감탄을 토해냈다. 저만한 인원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림이 없다니. 아니, 오히려 압도하고 있다니.

    “보기에 지루하진 않을 거라더니. 진짜 눈이 즐겁네. 화려하기 짝이 없는데?”

    “그것도 그렇고, 이렇게나 오래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실수 한 번을 안 하네요.”

    “그러게. 집중력이 장난 아닌데. 저 정도로 지쳤으면 판단력이 좀 흐려졌을 법도 한데.”

     로엘은 마치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상대측을 몰아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질릴 정도였다.

    “하긴, 딱 보니 저것들이 노리는 게 그건데 로엘이 쉽게 그 기회를 내주려 할 리가 없겠지.”

     메이엘은 조소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저들은 확실히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험을 걸 생각도 없었고.

     상대가 언젠간 실수를 범할 것이란 전제로 안정적인 전투를 추구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다.

    ‘인간이기에 실수 한 번은 할 것이다? 그것이 완벽한 명제라면 세상에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메이엘이 보기에 로엘은 경지는 그에 못 미쳐도 정신적인 면은 이미 초인 이상으로 완성된 인물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러했다.

     사실 로엘이 실수하지 않는 보다 명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법사의 영역 지배와는 또 다른, ‘초감각’. 웬만해선 그가 상황이 반전될 만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대로 이기겠죠?”

    “아마도?”

     그리든이 한껏 이를 갈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노리고 있는 타이밍은 좀체 만들어지지 않았다.

     로엘이 지쳤다곤 하지만, 그건 양 파벌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쓰러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때? 새삼 로엘에게 더 반했어?”

    “네…… 네에엑?!”

     멍하니 대답을 흘리던 루나가 기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뭘 그렇게까지 놀래?”

    “아, 아니에요! 전 로엘에게 그런 감정 없어요!”

    “쯧쯧.”

     메이엘은 혀를 찼다. 본인은 아니라곤 하지만 최근 그녀의 모습을 보면 명백히 로엘에게 호의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로엘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가졌고, 그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으니 그 와중에 연애 감정에 눈떴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긴 했다.

     외모도 준수한데 항상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기까지. 그야말로 상대의 호감을 이끌어 내는 데 특화되어있는 인물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 태도가 엘리제 파르테인의 그것과 같은 일종의 ‘가면’임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그에게 호감을 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은 말 그대로 호의가 있는 수준에서 그치는 모양.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로엘을 좋아하는지도 긴가민가한 듯싶었다.

    “잘 해봐라. 일단 응원은 해 줄 테니.”

    “언니!”

     루나의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랐다.

     * * *

     콰지지지지지직!

    “크으윽.”

    “젠장할!”

     다시 한 차례 포격. 압도적인 출력의 마력포가 마법사들의 진형을 크게 뒤흔들었다. 이번엔 상당히 많은 숫자의 마법사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공격해! 보아하니 저 무기도 슬슬 한계에 달했다! 이젠 기껏해야 한두 번 사용하는 게 고작일 거다!”

     아닌 게 아니라 마력포의 내구도는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검은 연기가 안쪽에서부터 뭉글뭉글 새어 나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제는 이걸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이미 상대편 진형은 만신창이였다. 솔직히 이 이상 마력포를 발포했다간 사상자가 발생할 것만 같았다.

     로엘은 마력포를 아예 한쪽으로 내던졌다. 그래도 원형은 남겨둬야 최소한 수리를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기를 바꿔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내구도에 여유가 있는 연사용 소총.

     그가 잠시 타이밍을 재다 몸을 날렸다. 이젠 거리를 조금 더 좁혀도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저 정도로 숫자가 줄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날아드는 마법들을 피하고, 그때그때 흐름을 끊기 위해 견제를 가하고. 그렇게 또다시 한참을 교전하다 보니 좋은 기회가 생겼다. 로엘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곧바로 내던졌다.

    “?”

     그리든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로엘이 내던진 주먹 크기의 구체가 진형 위쪽 허공에 떠서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물건의 등장에 그리든의 경계심이 급격히 올라갔다. 동시에 왜 저렇게 위쪽으로 내던졌는지에 대한 의문 또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구체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으헉!”

    “으아악!”

     상당히 위쪽에서 일어난 폭발이기에 사상자가 나오진 않았다. 다만 강렬한 후폭풍에 진형이 그대로 노출되어 마법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안 돼!’

     무너진 진형으로 곧장 파고드는 로엘의 모습이 그리든의 시야에 들어왔다. 당황한 마법사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차례차례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일단 간격을 허용하고 만 마법사들은 로엘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근접전에 조예가 있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앞서 장거리 전투에서 방어를 도맡다 진작 지쳐 쓰러져 버렸다.

     칼비오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애쓰고 있지만 이미 승부의 추가 완전히 기울어져 버렸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몸을 급히 바로 세우며 그리든이 이를 갈았다.

    ‘젠장, 젠장!’

     졌다. 납득하기 싫지만, 이젠 도리가 없음을 마음 한구석에서 인정하고 말았다.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눈에 습기가 들어찼다.

    “으아아아아!”

     그리든은 익숙하지 않은 원소 마법을 발현해 로엘을 향해 발출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그와 자신 사이에 방해물이 위치하진 않았다. 마법은 곧장 조준한 위치로 날아 들어갔다.

     그것을 곧바로 감지한 로엘이 날아드는 마법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격발.

     탕!

     * * *

    “끄으.”

    “젠장. 이렇게…….”

     대련이 마무리됐다. 예정된 결말이었다. 결국 로엘이 승리를 차지했다.

     그리든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이 남은 칼비오는 한쪽 구석에 앉아 힘겹게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후우.”

     로엘 또한 성치는 못했다. 그가 이래저래 상처 입은 몸을 포션으로 치료하고, 지친 몸을 이끌어 객석으로 향했다.

    “수고했어. 정말로 이겼네.”

    “감사합니다. 메이엘 양. 생각보다 많이 지치네요.”

    “수, 수고했어. 이것 좀 마셔.”

    “고맙습니다. 루나 양.”

     로엘은 루나에게서 받아든 물통으로 목을 축였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이걸로 3년 동안 부려 먹을 수 있게 됐네. 정말로 3년으로 끝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일단 휘하로 거두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평생 로엘에게 귀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 있다 해도 로엘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

    ‘거둔다는 것은 책임도 져야 한다는 뜻이니까.’

     기간을 정해두면 편하다. 상대의 의욕을 조절하는 데에도,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데에도. 그리고 어차피 3년이 지나고 난 뒤엔 오히려 저들이 남고 싶어 안달이 날 터였다.

    ‘저것들을 어디에다 써먹을까.’

     일단 당장 핵심이 되는 일을 맡길 수는 없다. 다른 것보다도 신용의 문제다. 그 부분은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렇더라도 맡길 일은 많았다. 인력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 시기였다. 벌인 일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어라. 저 녀석들 가는데?”

    “제가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기 오래 있도록 잡아둬서 뭘 하나요. 충성 맹세라도 받아낼 것도 아니고.”

     서로를 부축해 비척비척 투기장을 벗어나는 마법사들. 경기장을 나서기 전, 칼비오가 힘없는 눈빛으로 로엘을 잠시 응시했다. 로엘은 평소와 같은 웃는 얼굴로 마주 응대해 주었다.

     이내 투기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짙은 노을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그럼 우리도 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루나가 사족 보행형 키메라의 등 위쪽에 짐을 올리며 입을 여는데, 로엘이 그것을 제지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누군가 오는군요.”

    “?”

     키메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메이엘의 고개도 돌아갔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시선으로 묻자, 로엘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엘리제 파르테인?”

     황혼을 등에 지고서 등장한 인물은 엘리제 파르테인이었다. 차기 마탑주에 가장 가까운, 아니, 방금 전 로엘이 남은 경쟁자들을 대신 모두 쓰러뜨림으로써 차기 마탑주 자리가 확정된 인물.

    “저 녀석이 이곳엔 왜.”

    “조금 늦었네.”

     메이엘이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어느새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도도한 시선이 똑바로 로엘을 향하고 있었다.

    “일단, 반가워. 그런데 참가를 신청하긴 이미 늦었으려나?”

    “반갑습니다. 한데 참가란 건?”

    “그리든, 칼비오. 두 사람에게 제안했던 내기.”

    “……!”

    “설마 늦은 것과는 관계없이 애초에 나는 참가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그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엘리제의 발언에 로엘을 포함한 모두가 놀랐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 그녀가 뭐가 아쉬워서 내기에 참여할 의사를 밝힌단 말인가.

    “일이 좀 있어서 늦은 건 미안하지만, 지금이라도 참전하고 싶은데. 괜찮겠어?”

     로엘은 빠르게 평정심을 찾고 상대를 찬찬히 살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염두를 굴리길 잠시.

    “좋습니다.”

     그가 빙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메이엘과 루나가 화들짝 놀랐다.

    “야, 야!”

    “그렇게나 격전을 치른 직후잖아. 이미 상당히 지쳤을 텐데.”

    “전 괜찮습니다.”

     로엘은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해 보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메이엘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일단 잠시 컨디션 점검 정도는 해두고 싶은데, 10분 정도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상관없어. 준비되면 내려와.”

     로엘의 요청에 엘리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먼저 발걸음을 옮겨 객석을 벗어나 경기장 쪽으로 향했다.

     * * *

     엘리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 여인이 곧바로 로엘을 만류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저 녀석은 아까 그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라고.”

    “그, 그래. 엘리제는 이미 마도사의 대열에 들어선 지 오래라고 들었어. 지금쯤이면 마도사 중에서도 상위에 랭크될 수준의 실력을 쌓았을 거야.”

     엘리제 또한 다른 후계자들과 같이 자기 개발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부족한 시간을 메꿔 높은 경지를 이룩했다.

     괜히 다른 후계자들이 그녀를 ‘괴물’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마탑 내 내로라하는 인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솔직히 네 전투 스타일 상 마법사와의 1:1 대련에서 질 일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하긴 해. 그렇지만 지금 네 몸 상태는 만전과 거리가 멀잖아.”

    “불리한 조건인 건 맞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만한 기회가 또 찾아오진 않을 테니까요. 마냥 불리한 것만도 아니고.”

    “……?”

    “그녀가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 겁니다. 즉, 그녀는 대련을 직접 목격하진 못한 거죠. 대충 분위기를 살펴 이쪽이 내기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을 뿐.”

     방금 전 시선을 교환하며 로엘은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그녀는 이쪽이 각 파벌 대표자들과의 대련에서 승리했을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녀는 즉흥적으로 이뤄진 두 번째 내기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인즉슨, 이쪽이 가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녀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방금 전 진형을 갖춰 덤벼든 두 파벌의 연합체보다 강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게 내기를 제안했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널 얕보고 있다?”

    “흔치 않은 기회죠. 그녀가 명백히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거니까. 그것도 내일이면 저들과의 대련 내용이 마탑에 퍼지게 될 테니 그때엔 없어질 기횝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루나가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뭐가 어쨌든 그건 네가 이길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할 때의 이야기야.”

    “승패를 완전히 장담할 순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일단 컨디션 조절을 위해 명상 좀 하겠습니다. 이야긴 여기까지 하죠.”

     로엘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에 몰두했다. 이미 상당히 소진된 내력을 끌어모아 혈도에 흘려보내 지친 육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무모한 건지, 냉정한 건지.”

     메이엘이 그런 로엘을 내려다보며 작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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