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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투기장(3) (88/249)

 88화. 투기장(3)

 그리든과 칼비오는 결국 내기를 받아들였다.

 내기를 받아들인 이유라면 이것저것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를 뽑자면,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이긴다.’

 지금껏 해 온 노력을 보상받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승자가 되어 소리 높여 웃고 싶었다. 종내에는 만인에게 존경받는 위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리스크가 큰 도박임에도 받아들였다. 너무나도 파격적이기에 오히려 의심이 갔지만, 이미 한 차례 나쁜 예감이 들어맞기도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든도, 칼비오도 조급했다. 아무리 무리를 이끄는 리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그들은 십 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잠 못 이루는.

‘여기서 후계자 경쟁을 포기하고 그저 그런 마탑의 일원으로 되돌아간다? 난 그렇게는 못 해.’

 지난 몇 년간 오로지 탑주 자리만을 보고 달려온 이들이다. 가장 이상적이고 찬란한, 스스로가 설계한 그 미래 이외엔 어떤 선택지도 눈에 차지 않았다.

‘이 녀석뿐이다. 반드시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엘리제의 독주가 심해지고, 두 사람의 꿈은 한없이 멀어졌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초조함에 떠밀린 두 사람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중립을 선언한 모든 후계자들에게, 마탑의 영향력 높은 고위 인사들에게 계속해서 접촉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의 제안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로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두가 두 사람의 최종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로엘이 내건 조건을 수락했다. 무리해서라도 내기를 받아들였다. 사실 그를 끌어들인다 해도 최종 승리까지 다다르긴 힘들 거라 여겼는데,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아티펙트를 보고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정말로 최종 승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엘리제와 비등, 아니, 더 높은 고지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로엘의 실력은 분명 굉장했다. 그가 이 이상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파벌 구성원 전원이 덤벼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전위를 맡을 이들과 후위를 맡을 이들을 적절히 조정해 체계적으로 밀어붙인다면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기도록 만들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두 사람은 로엘이 어떤 인물인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는 정말로 필요한 순간이 올 때까지 자기 자신을 숨기는 자였다. 상대의 목덜미를 완벽하게 물어뜯을 기회가 찾아오기 전까진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는 인물.

 이길 수 있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길 자신이 있기에 새로운 내기를 제안한 것일 터.

 이만한 인원을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막말로 방금 보여준 ‘감춰둔 실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드러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그것이 못내 걱정이 되었다.

‘조금 조치를 취해 두는 게 좋겠지.’

 그리든과 칼비오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로엘이 이번에 내건 조건은 절대 가볍지 않다. 이전 조건도 가볍지 않았지만, 이번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분명 상대 파벌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설사 지는 일이 있더라도 적어도 로엘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이쪽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듯이.

 그러니 로엘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일시적인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 공통된 적을 배제한 후에 최종 승자를 가리자는 제안을 건네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만 되면 최소 손해는 보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전 패배로 인해 짊어지게 된 리스크 만이라도 지울 수 있으니까.

‘저 녀석의 오만한 콧대를 찍어 누르고 최후에 웃는 자가 되겠다.’

 두 후계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투지를 불태웠다.

 * * *

 메이엘이 소형 키메라(전서구 대용)를 마탑으로 보내 로카인에게 내기 조건 변경 사실을 알렸다. 그 사이에 양 파벌의 수장이 모여 무언가를 쑥덕거렸다.

‘걸렸다.’

 로엘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작게 웃었다. 많이 양보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확신은 못 하고 내건 조건이었는데 정말로 받아들여졌다. 저들이 그만큼 심정적으로 절박했다는 뜻이리라.

 생각보다 쉽게 각 파벌의 대표자를 제압하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양 파벌의 전력을 홀로 모조리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저만한 숫자가 상대라면 이쪽도 완전히 승리를 장담할 수만은 없긴 하다. 그렇지만 원래 큰 대가를 얻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이번엔 나도 여유가 없으니 적당한 무기로는 안 되겠지.’

 이번엔 위력이 높은 무기도 거리낌 없이 사용할 생각이었다. 상대측에 부상자가 좀 나오더라도 일단 이쪽이 이기는 게 중요하니까.

 혹시라도 죽는 사람은 나오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겠지만. 그럼에도 사상자가 나온다면 그건 어쩔 수 없고.

“후우.”

 로엘이 숨을 고르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그러고 있자니 어느새 관객석에서 내려온 메이엘과 루나가 다가왔다.

“자신 있는 거야? 조건을 너무 불리하게 내건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메이엘이 묻자 로엘은 그저 빙긋 웃는 얼굴로 답변했다. 그 모습에 뒤쪽에서 우물쭈물하던 루나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로엘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었다.

“이기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저 두 파벌을 휘하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분명 이점이 많다. 재능 있고 능력 좋은 인재들을 대거 확보할 수 있으니까.

 사실 저들을 끌어들인다고 로엘의 세력이 단숨에 뻥튀기되는 것은 아니다. 저들의 파벌 구성원의 면면이라고 해봐야 마탑의 중역을 맡은 이들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들은 그저 차기 탑주 ‘후보’일 뿐이니까. 무슨 왕위 경쟁도 아니고 그들의 파벌 따위에 마탑의 간부를 비롯한 중진들이 가담할 턱이 있나.

 저들이 마탑의 영향력 높은 인사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활발하게 각 인사들과 교류를 나누긴 했다.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하고, 응원이나 지지를 등에 업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영향력의 향상일 뿐, 파벌 자체의 규모와는 무관했다.

 로엘이 승리함으로써 휘하에 둘 수 있는 자들은 저들 파벌의 ‘구성원들’뿐.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저 인력 확충이란 의미 외엔 별다른 소득이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썬 그 인력 확충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사실 로엘이 사업을 크게 확장하려고 하면서 불거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인력난이었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행하다 보니 쓸 만한 인재를 확충할 틈이 없었던 것.

 이외의 부분은 앞으로의 일이 진행되면 알아서 따라올 터였다. 돈이든, 명예든, 지위든.

 가장 시급한 것은 벌여 놓은 일을 분담할 인력이었다. 그 자리를 마탑에서도 알아주는 재능 있는 이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길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기대하고 있을게.”

“보기에 지루하진 않을 겁니다.”

 로엘은 훗 하고 웃은 후 자리에 털썩, 하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뭐 하는 거야?”

“기다리는 동안 컨디션이나 점검할 겸 명상 좀 할 생각입니다.”

“명상?”

“네.”

 메이엘이 별 특이한 놈을 다 본다는 얼굴로 로엘을 응시했다. 로엘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심법에 관한 것을 밝힐 생각은 없었으니까.

 * * *

‘대놓고 함께 움직이는군.’

 내기가 시작되자마자 양 파벌은 한데 섞여 움직였다. 자신들이 동맹을 맺었음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딱히 규칙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거리낄 게 없다는 거겠지.’

 그것을 아예 초장부터 각인시킴으로써 이후 불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이리라.

‘그래도. 저것까지도 상정 범위 내의 일이다.’

 로엘은 피식, 하고 웃었다. 어디까지나 ‘혹시 모른다’는 정도의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상정해 둔 범위 내의 일이었다.

‘저렇게까지 혼잡하게 인원을 섞을 줄은 몰랐지만.’

 동맹을 맺는다 해도 양 파벌이 나뉘어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두 파벌을 하나의 무리로 뭉뚱그려 진형을 갖췄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효율이란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한쪽이 배신하는 경우를 염두에 둔 것 같았다. 억제책을 마련한 것이다.

 한쪽의 경계가 느슨하면 모를까, 서로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와중이다. 저렇게 인원이 혼재되어 있으면 역설적으로 서로를 쉽게 배신하려 들 수 없다.

‘이쪽을 우선적으로 배제하는 것. 그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거겠지.’

 로엘은 머리를 적당히 굴리며 신형을 날렸다. 수많은 마법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에.

 쾅! 콰쾅! 콰과과과과곽!

 화염 계통 마법이. 바람 계통 마법이. 대지 계통 마법이. 수류 계통 마법이. 특수 계통 마법이.

 수많은 마법이 로엘을 노리고 직선, 혹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로엘이 빠른 움직임으로 대부분의 마법을 회피, 그러지 못한 마법은 직접 요격했다.

 콰앙! 콰아앙!

 마력과 마력의 충돌로 허공에서 일어난 폭발이 사위를 화려하게 물들였다. 그 광경에 감탄하는 이는 없었지만.

 탕!

 그가 격발한 마력 탄환이 상대측 마법사들이 미리 두르고 있던 바람 장벽에 충돌했다. 장벽은 잠시 뒤흔들렸지만, 훌륭히 충격을 받아냈다.

‘확실히 역할을 분담해서 체계적으로 몰아치는 무리는 여러모로 껄끄럽군,’

 로엘은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을 한 끗 차이로 피해낸 후, 권총을 품속에 집어넣고 등에 걸머지고 있던 두 무구 중 하나, 연사용 소총을 들었다.

 참고로 나머지 무기는 객석에 두고 왔다. 챙겨온 무기는 많았지만 세 가지 이상의 무기를 들고 싸우긴 힘들다 판단한 것이다. 첫 번째 내기에 사용했던 낮은 위력의 소총은 지금은 들고 있지 않았다.

“온다!”

“방어 마법을 넓게 펼쳐!”

 타타타타타타탕!

 앞서 치렀던 대련을 관전한 데다 이미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탓에 마법사들의 대응은 기민했다. 일제히 방어막을 형성해 진형을 촘촘히 감쌌다.

 연사용 소총의 경우엔 연사 속도는 높지만, 조준이 힘들었다. 위력도 가진 무기 중 가장 낮았고. 그래서 방어벽을 넓게 펼치면 막아내기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권총 쪽이 위력이 훨씬 높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마력탄을 발사하는 종류로 개량하고 보니 그렇게 되었다.

‘피해는 전혀 못 입혔군.’

 대신 견제는 되었다. 넓은 범위에 방어막을 형성하기 위해 일부 마법사들이 공격 마법을 포기했으므로.

 곧바로 권총으로 무기를 바꿔 들고 격발했다. 소총은 연사율이 높은 탓에 이미 탄환이 바닥난 상태였다.

 금속이 아닌 마력 압축체를 탄환으로 활용하기에 마력을 자체 충전하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탄창만 갈아 끼우면 바로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기존의 소총과는 달랐다.

 그 시간 동안엔 연사율이 느려 탄환이 바닥나는 일이 거의 없는 권총으로 상대를 견제했다. 견제의 수위는 약해도 시간을 버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지금.’

 한참을 움직이다 보니 괜찮은 기회가 잡혔다. 교란에 성공한 탓에 이쪽을 향하는 마법이 뜸해졌다. 약간의 틈을 낼 수 있었다.

 곧바로 등에 걸머지고 있던 중화기를 들었다. 무게가 100킬로그램은 넘는 물건이지만, 로엘은 그것을 거뜬하게 들어 올려 조준했다.

“젠장!”

“방어벽을 최대한 집중시켜! 일단 공격 멈추고!”

 마법사들이 일제히 한 군데로 힘을 집중시켰다. 수십 겹의 방어막이 로엘과 마법사들의 사이를 가렸다.

 우우우우웅!

 막대한 기파가 로엘의 손에 들린 중화기로 몰려들었다. 시간이 약간 걸리기에 지금처럼 틈이 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공격.

 심지어 일격을 날린 뒤의 재충전 시간도 길다. 그렇지만 위력만큼은 확실하다.

 콰아아아아!

 압도적인 출력의 마력이 마법사들을 향해 밀려 들어갔다. 마법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드-.

“크악!”

“쿨럭!”

 수십 개의 방어막 중 남은 것은 서너 개에 불과했다. 막아내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 많은 방어막이 대부분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말았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무기까지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던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전 내기에선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 마력포(가칭).

 몇몇 마법사들이 과도한 마력의 소모로 인해 주저앉아 신음을 흘렸다. 구역질을 하는 이도 있었다.

“놈도 지쳤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확실히 느려졌다! 게다가 저 무기들이 재충전되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승산은 충분히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예리하네.’

 로엘이 내심 감탄했다. 방금 전 일행을 독려하는 외침을 내뱉은 인물은 한쪽 파벌의 수장인 칼비오였다.

 눈썰미가 상당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중에 그것을 파악할 줄이야. 괜히 마탑에서 손꼽히는 인재가 아니었다.

‘분명 저 말대로 이쪽도 지쳤다. 무기도 계속해서 사용하다 보니 내구도에 한계가 오고 있고.’

 고질적인 문제였다. 체력이야 그렇다 치고, 내구도 문제는 처음으로 권총을 제작했을 때부터 따라붙은 단점. 그게 아직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했다.

 평범한 탄환을 내쏘는 무기들이라면 진작에 해결되었을 문제였다. 그런데 고위력 마력 탄환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이 요원해졌다.

 마탑에서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춰 연구하면서 그 정도를 상당히 완화시키긴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보다 많은 마력을 압축시켜 탄환을 생성시키는 무기일수록 더더욱.

‘그래도 상대측을 전멸시키기 전에 이쪽이 먼저 쓰러지진 않을 것 같다.’

 미묘하게 이쪽이 우위였다. 싸움이 중반에 이른 지금은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특별한 실수만 하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이면 분명히 이길 수 있었다.

‘변수,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이대로 끝을 낼 때까지 몰아붙인다.’

 로엘은 마음을 다잡고 곧바로 무기를 바꿔 들었다. 어느새 마력 충전이 끝난 연사용 소총이었다.

 파벌 구성원들을 독려해 반격을 지시하던 칼비오와 그리든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방어 마법을 발현할 것을 독촉했다.

 타타타타타타타탕!

 요란한 총성이 사위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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