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투기장(1)
로엘이 메이엘과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사업 확장에 돌입한 날로부터 4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로엘은 상층부에 개인 훈련실을 내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간 실적이 충분히 쌓인 덕분에 신청은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마탑의 개인 훈련실은 각 마법사들의 마법 훈련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었다. 다른 장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 훈련실과 단체 훈련실로 나뉘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단체 훈련실보단 개인 훈련실이 선호도가 높았다.
단체 훈련실이 훈련에 있어 여러 제약이 있는 공간임에 비해 개인 훈련실은 무슨 훈련이든 할 수 있는 공간. 훈련에 더 적합한 공간은 역시 개인 훈련실이었다.
실적을 인정받는 마법사가 개인 훈련실을 요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 인물이 공방 마법사만 아니라면.
“로엘 너 개인 훈련실을 대실했다며?”
“아, 네.”
한 공방 마법사의 질문. 이즈음 로엘은 거의 모든 공방 마법사와 친분을 다져놓은 상태였다. 그 특유의 친화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왜 그런 거야? 거기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것저것 실험해 볼 게 있어서요.”
인적 없는 장소까지 이동해 신무기를 사용해 보는 것도 슬슬 힘들던 차였다. 이젠 제대로 된 수련 장소가 필요했다.
사격 실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은 물론, 모든 종류의 무구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껏 다양한 무구를 제작한 의미가 없다.
슬슬 경신법도 공들여 수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마탑에 입문한 후로 경신법을 수련하는데 영 시간을 투자하질 못했다.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에 그저 심법에만 매달려왔다.
“그 정도 실적이면 다른 걸 요청했어도 충분히 수락됐을 텐데.”
“하하.”
다만 다른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대체 공방 마법사가 수련실을 빌려서 뭘 한다는 말인가.
그럴 바에야 연구비를 지원받는다던가, 보고에 잠든 아티펙트를 대여해 연구한다던가, 좀 더 생산적인 일이 많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엘은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았기에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마법사의 질문을 흘려 넘겼다. 그리곤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자신에게 배치된 수련실로 향했다.
* * *
수련실은 마탑의 지하층에 위치해 있다. 높이로 치자면 공방보다도 아래쪽.
마법사들이 수련하는 수련실이 보통의 공간일 리가 없다. 당연하게도, 특별한 장치가 되어있는 장소였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마법사들이 실적을 내세워가며 개인 수련실을 대여할 리가 없다. 단지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라면 마탑 외부에서 대충 창고를 대실했겠지.
이곳 수련실이 마법사들에게 인기 높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마법을 얼마나 사용한다고 해도 그 여파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
마법은 위험하다. 아직 제어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미숙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가 발현한 마법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항마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그 숙련도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다.
수련실은 그 필요성에 의해 제작된 공간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마법사가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는다. 로엘 또한 마력을 기반으로 하는 무구를 시험적으로 활용해보기 위해 이 공간을 빌렸다.
주어진 수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몇 개의 과녁이 벽에 새겨진 널찍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널찍한데 아무것도 없어서 휑뎅그렁한 느낌이었다.
“안쪽에 배치할 물건들은 알아서 챙겨오라 했던가.”
로엘은 가져온 짐을 내려놨다. 그리고 적당히 몸을 풀었다.
“우선 경신법 수련부터 좀 하고.”
그가 다리를 꾹꾹 누르며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방 안이 널찍하긴 해도 경신법 수련 장소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그거야 운동장 돌듯 빙빙 돌면 되는 문제니까.’
모양새가 좀 이상하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개인실을 대여한 게 아니다.
“다음으론 사격 연습 좀 하고.”
마침 과녁이 있으니 잘 됐다. 충분히 연습할 수 있으리라.
일부러 마력을 방출하는 종류의 무기만 가져왔다. 항마벽은 마력, 오라에 강하지만 물리력에도 강하진 않으니까. 철제 탄환을 발출하는 총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론 두 가지를 병행하고.”
전투 스타일의 완성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정확한 사격을 날리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것을 위한 훈련이 되어야 했다.
심법은 굳이 이곳에서 수련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기가 아니라도 수련할 수 있는 곳이 많으니까.
“후우.”
적당히 준비운동을 마친 로엘이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적당히 걷던 속도가 이내 달리는 속도가 되고, 달리던 속도가 이내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에 비견될 압도적인 속도로 화했다.
* * *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는 길. 승강기에서 내린 로엘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녕?”
“오늘은 평소보다 늦군.”
두 사람은 각각 그리든, 칼비오가 보낸 인물이었다. 최근 끈질기게 이쪽을 찾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대답을 들었으면 싶다.”
“나도 그래.”
“영입 제안은 거절하겠다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로엘이 쓴웃음을 짓고 답변했다. 이렇게 말해도 저들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저들은 그저 칼비오와 그리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을 뿐이니까.
‘이젠 정말로 막바지인가 보네.’
후계자 경쟁도 이제 초읽기에 들어섰다. 그리든과 칼비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끈질기게 자신을 영입하려 들 정도로.
마탑에 입문한 지 이제 8개월. 새해를 맞이하고도 두 달이 더 지났다. 로엘도 14살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두 후계자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체면 불고하고 들러붙어 올 정도라니.
‘엘리제 파르테인의 독주가 한층 심해졌다고 하니까.’
최근 엘리제 파르테인이 그동안 감춰뒀던 실적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다른 이들도 막판에 터뜨릴 것들을 하나둘 정도는 준비해두고 있었지만, 그녀의 한 방은 그보다 훨씬 강력했다.
안 그래도 가장 탑주 자리에 가까웠던 그녀였는데 그 탓에 완전히 추가 기울어버렸다. 4강 중 하나인 메이엘이 경쟁을 포기해버렸을 정도로.
“이전에도 말했지만, 생각을 바꿔 줬으면 좋겠군.”
메이엘과 달리 포기하지 못한 칼비오와 그리든은 결국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내부를 강화하긴 늦었으니 외부에서 그것을 보충할 생각을 한 것이다.
어찌 보면 뻔뻔한 태도 변화였다. 그렇게나 오만하고 여유롭게 굴던 자들이 이제 와서야 숙이고 들어오다니. 저들에겐 선택지가 없었겠지만 로엘 입장에선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 파르테인과 대등해지기 위해선 웬만한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엘은 아군으로 반드시 끌어들여야 할 상대였다.
실적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젠 마탑의 그 누구도 로엘의 실적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마법학적인 실적이 아닐 뿐, 공방과 마탑의 위상은 충분히 높였다.
최근엔 추종자도 상당히 늘었다. 잘생긴 외모에 능력 겸비, 심지어 탑 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부유하기까지. 그 본인 또한 굉장히 친절한 성격이었기에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전 4강 중 1인이었던 메이엘과의 협력 관계도 드러났다. 정확히는 메이엘이 후계자 경쟁을 포기함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것을 공표했다. 지금까진 별 관계가 없었던 것처럼 위장하긴 했지만.
게다가 그가 기사단장인 캐틀린과 친분이 깊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녀의 아들이 몸을 회복해 탑 내를 활보하게 된 직후부터 그 소문이 쫙 퍼졌다.
‘반드시 끌어들여야 해.’
두 후계자가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위상이 너무 높아져 버린 탓에 발아래로 둘 수는 없다. 잘해봐야 대등한 관계를 맺는 정도. 그렇지만 그 정도로도 엘리제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는 패가 될 터였다.
‘끈질기네.’
당연하지만, 아무런 메리트도 느끼지 못한 로엘은 수차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해 왔다. 그리고 그들과 협력을 맺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한데 제가 좀 훈련을 하고 와서 땀을 흘렸거든요. 얼른 숙소로 돌아가서 좀 씻고 싶네요.”
로엘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하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될까? 네게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데.”
“이쪽에 요구하고 싶을 것이 있다면 최대한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겠다.”
각자 목소리를 높이던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경쟁자가 자꾸 끼어드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래선 될 영입도 안 된다.
“…….”
로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중립 선언을 한 보람이 없다. 그래도 최근까진 재미를 봤으니 그 정도면 됐지만.
그러다 문득. 로엘은 생각을 전환시켰다.
‘아니, 중립 선언을 한 보람만 없는 게 아니지. 중립 선언을 고수할 이유도 없지.’
굳이 중립 선언을 고수해온 것은 그편이 행동에 제약이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 이유가 퇴색된다.
거기다 지금이야 회유에서 그치고 있지만, 저들이 언제 강경책으로 대응 방침을 전환할지도 알 수 없다. 저들은 그야말로 절박하니까.
‘차라리 중립 선언을 깨고 적당히 줄 타면서 이익이나 챙기는 게 나으려나.’
거기까지 생각한 로엘이 걸음을 멈췄다. 한 번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나니 머릿속에서 계획이 착착 수립되었다.
‘아예 하는 김에 일 좀 크게 키워볼까? 겸사겸사 상황의 주도권도 끌어올 겸.’
생각해 보니 절박한 건 저쪽이다. 이용해 먹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그렇다면 판을 키워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괜찮겠군. 상황에 끌려다니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으니까.’
로엘은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가 빙글 뒤돌아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남녀를 마주했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제안, 받아들이죠.”
“!”
두 남녀의 신형이 우뚝 정지했다. 예상치 못했던 로엘의 발언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인지 두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조건?”
“네. 간단합니다. 저와 내기를 해서 승리하시는 분이 계신 파벌에 힘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탑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해 드리죠.”
“……!”
전면적인 협력이라니. 기대치도 않았던 선언이다.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신, 내기를 받아들인 쪽에서도 걸맞은 조건을 내걸어야 할 겁니다.”
“내기의 종목은?”
“심플하게 가죠. 대련으로 하겠습니다. 누구든 간에 대련에서 저를 이기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 인물이 소속된 파벌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대, 대련?”
예상치 못한 종목이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모를까, 로엘은 공방 마법사가 아닌가. 그 스스로가 자진해서 대련을 청하는 상황이라니.
“단, 외부에서 대리인을 초청하는 것은 인정치 않겠습니다. 갑자기 초강자가 등장하기라도 하면 형평성이 깨지니까요.”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진 두 남녀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
* * *
칸테른 시의 명물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동쪽의 바엘른 마탑부터 시작해서 서쪽 유흥가 구석진 곳에 위치한 암시장까지.
그중 일반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을 꼽자면 역시 남쪽에 위치한 대형 투기장을 들 수 있다. 가장 화려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곳이자 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합법적인 도박장.
로엘은 처음 투기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곧바로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을 떠올렸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의 혈투가 벌어지는 곳. 피와 살점이 비산하는 광경에 열광하는 대중.
그런데 이 세계 투기장은 로마 시대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본질적으로 혈투가 벌어지고 관객이 구경한다는 점은 같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피와 살점이 비산하는 광경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광기 어린 목소리로 죽음을 부르짖는 관객들을 상상했던 로엘로선 의외였다.
‘이능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지.’
이능의 힘이 존재하는 이쪽 세상에서, 대중이 열광하는 광경은 피와 죽음이 아니다. 말하자면, ‘화려한 연출’이다.
화려하고 압도적인 마법이 발현되는 모습, 혹은 찬란한 빛에 휩싸인 검이 춤추는 광경. 이렇게 눈이 즐거운 광경에 수없이 익숙해진 대중에게 피와 살점은 그다지 매력적인 오락거리가 아니다.
이 세계 대중은 쾌락의 역치값이 한없이 높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투쟁은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그래서 ‘저런’ 광경이 연출되는 거고.’
지구 역사에 기록된 로마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개인, 혹은 집단이 인간이 아닌 다수의 몬스터를 학살하는 것이 주된 볼거리였다. 보다 화려하고 쇼맨십 넘치게.
간혹 강자와 강자의 대결 구도가 성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간 대 인간의 구도인 경우엔 짜고 치는 판일 때가 많았다.
대중이 원하는 게 화려한 대전임을 감안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로 합을 주고받는 것이다.
‘대중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만 놓고 보면 이쪽 세계가 고대 로마보다 낫다고 봐도 되려나.’
로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학살 장면을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현재 그는 투기장의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물론 VIP 석이었다. 금전적으로 그만큼이나 여유가 있는데 굳이 아낄 이유가 없었다.
한 떼의 오크들이 사냥꾼들에 의해 구석으로 몰린 채 무기를 틀어쥐고 발악하는 중이었다. 사냥꾼들은 한껏 오크들을 위협하며 관객들을 향해 승리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참고로 도박의 경우엔 지구의 경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떤 참가자가 가장 많은 몬스터를 쓰러뜨리는지 1, 2, 3등을 맞추는 것이다.
관중들은 저마다 자신이 고른 사냥꾼을 응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함성이 요란했다.
‘저런 지형인가.’
오늘, 저 장소에서 대련을 한다. 모든 관객이 떠나간 후에 비게 될 투기장 한쪽을 비용을 지불하고 빌렸다. 원래 그럴 수 있도록 투기장의 방침이 세워져 있었기에 생각보다 비용이 비싸진 않았다.
‘누가 나오려나.’
내기를 수락하겠다는 전언을 전해온 두 후계자를 떠올리며, 로엘은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