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영지전(4)
특작대가 임무를 마치고 아군 진형으로 귀환했다. 병사들이 환호성으로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전황은 완전히 백작군 측의 우세. 결국 자작군 측은 퇴각을 감행했다. 백작군 측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최대한 피해를 입히기만 하면 되었다.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특작대 일동이 다들 말에서 내려 여기저기 지친 얼굴로 늘어졌다. 무려 수천 군세의 중심에서 날뛰다 왔다. 정신력도, 체력도, 체내에 축적된 마나도 모두 바닥이었다.
다만 혼자서 쌩쌩한 인물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레인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다수와의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딱히 정신력이 크게 소모되지 않았다. 체력이야 내력을 몇 번 순환시키는 것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거기에 애초부터 내력은 넘쳐났다. 매일같이 영약을 섭취한 덕에 플레이나의 말마따나 거의 내력 저장 탱크가 된 단전이다. 종일 내력을 가져다 써도 부족할 일이 없었다.
“넌 안 지치냐?”
플레이나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뭐 일단. 젊으니까요.”
“뭐 인마? 그럼 난 나이 들어서 지쳤다는 거냐!”
“언제부터 독심술을 익힌 겁니까.”
“캬악!”
플레이나가 지친 와중에도 확 하고 성질을 냈다. 레인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 * *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는데.”
레인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번 풀었다가 다시 정리하며 말했다. 시선을 전장에 고정한 채.
그것을 주워들은 레이나가 반문했다.
“네? 특작대 임무는 이미 완수했잖아요?”
“그렇다고 고급 전력이 굳이 쉬고 앉아있을 필요는 없지.”
“전황이 기울었으니 이젠 스승님이 빠지신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전황을 기울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쪽으로 끌어와 버릴까 싶어서.”
“?”
“저쪽에서 죽어라 싸우는 두 높으신 분들 때문에 백작군 측이 제대로 추격하질 못하고 있잖아.”
“······설마?”
“어. 잠시 좀 저기에 끼어들었다 오려고.”
레인의 선언에 다들 경악했다.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스승님!”
“미쳤어, 사부? 저기에 끼어들었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해.”
셀린 또한 레이나를 지원하듯 레인을 만류했다. 이제는 그 영역이 확연히 늘어난, 살벌하기 그지없는 두 검성의 전투.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크레틸 자작이 후퇴하는 아군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정하고 깽판을 놓고 있었다. 당연히 헬튼 백작이 그것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로 극도로 견제하며 전투를 치르던 아까와는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크레틸 자작 쪽은 최대한 헬튼 백작을 뿌리치며 백작군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백작은 그런 크레틸 자작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암만 백작이라도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날뛰는 자작을 억누르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격의 상대를 억누르는 것이 쉬울 리가 없긴 하지만.
그 때문에 자작군을 추적하는 백작군의 움직임에 상당한 제동이 걸렸다. 전투 범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병사들이 몸을 사리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이쪽에 승기가 있는 것은 여전했다. 자작의 분투는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일 뿐이고.
“의도는 좋지만 저건 정말로 위험해. 사부의 실력은 잘 알지만, 저기에 끼어들었다간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셀린의 말 그대로였다. 작정하고 날뛰고 있는 크레틸 자작 때문에 두 검성의 격전지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공기로 가득했다.
검광이 난무하는 저 영역 안쪽은 약간의 방심에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사 검호라고 해도.
“거기까지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그러나 레인은 셀린의 걱정 어린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일단 갈 거야.”
“어째서인가요?”
레이나가 염려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원래는 저 두 사람의 전투에 끼어들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정말로 목숨 한두 개는 내어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아까 전까진 그랬다는 말이다.
“상황이 꽤나 괜찮게 돌아가고 있거든. 끼어들기 딱 좋게.”
“예?”
“저 정도의 철옹성에 저렇게나 균열이 가 있는데 지금 안 두드리면 언제 또 두드리겠어.”
“그게 무슨.”
“아무튼, 다녀온다.”
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일행을 뒤로했다. 레이나가 입술을 깨물고 멀어지는 스승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무사하셔야 해요!”
“물론.”
* * *
현재 레인의 경지는 크레틸 자작의 그것에 한참 못 미친다. 그 사실은 레인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러나 상황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화하는 법이다. 제반 사항이나 상대의 컨디션, 심리 상태 따위는 일정하지 않으니까.
지금의 크레틸 자작이라면 레인이라도 파고들 틈이 있었다.
저렇게나 무리해서, 필사적으로 날뛰고 있는 지금이라면. 아군의 피해 경감을 위해 명백히 오버워크하고 있는 현 상태의 자작이라면.
레인은 두 검성의 전투 영역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정말로 그라도 완전히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레인이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감자기 검강이 확 하고 날아왔다. 옆으로 두 걸음. 경신법을 사용해 회피했다.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군!”
“닥쳐라!”
그 차에 갑작스레 레인의 앞쪽을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
고속으로 이동하며 몇 번이고 검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부딪치고 부딪치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퍼뜨린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멀어졌다.
쾅! 쾅! 콰쾅!
두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는 여기기 힘든 폭음이 지속적으로 울렸다.
“제대로 걸려들면 뼈도 못 추리겠군.”
레인이 핫, 하고 웃었다. 그리고 심호흡 한 번.
쾅!
그가 진각을 밟고 몸을 날렸다. 방향은 물론 두 검성이 향한 쪽.
체내 혈도를 순환시켜 발끝으로 방출한 내력으로 막대한 추진력을 이끌어 냈다. 그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며 검을 뽑아 들었다.
레인은 이내 격렬하게 맞붙고 있는 두 검성 근처로 접근할 수 있었다.
크레틸 자작이 레인의 접근을 먼저 알아채고 눈을 번뜩였다. 헬튼 백작도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알아챘는지 움찔했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곧바로 레인을 향해 쇄도하는 두 사람. 크레틸 자작이 레인을 향해 횡으로 검을 내질렀다.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 백작이 검격을 뿌렸다. 그러자 마치 그것을 노렸다는 듯 자작이 검로를 틀었다. 대놓고 레인을 미끼 삼아 백작을 끌어들인 것이다.
레인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아저씨가 진짜.’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각(却).
그가 달려 나가던 기세 그대로 진각을 밟았다. 대지가 움푹 패여 들어갔다. 자작이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중심이 흔들린 탓.
그러나 역시 검성이라고 해야 할지. 중심 정도는 순식간에 회복했다. 그렇지만 내지르던 검격이 약간 느려졌다. 레인이 노린 것이 이것이기도 했고.
레인이 자신의 검을 자작의 검에 맞댔다. 힘으로 맞붙었다간 위험하니 대신 기술을 이용. 솜씨 좋게 자작의 검을 흘려냈다. 백작을 노리던 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
자작이 급히 발을 빼냈다. 당연히 백작이 추격해서 검격을 뿌렸다. 레인도 따라서 추격했다.
약간이지만, 자세가 불안정해진 탓에 백작의 검격을 걷어내기 급급해진 자작. 그 옆으로 돌아가서 내력이 듬뿍 담긴 검격을 날렸다.
카앙!
“아, 젠장.”
레인이 고개를 뒤틀어 튕겨져 나온 자신의 검을 피했다.
검격은 분명 자작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문제는 갑옷을 뚫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이 작자들 금강불괴였지.’
정확히는 금강불괴가 아니라 갑옷에 기막을 두른 것이지만,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 레인이 혀를 찼다.
“날파리 같은 놈!”
자작이 백작의 공격을 받아내는 틈틈이 검격을 내질러 왔다. 레인은 온 신경을 집중해 그것을 모두 회피했다.
“후우.”
검이 한 치의 간격만을 두고 얼굴 앞을 지나가길 몇 차례. 긴장감에 레인이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자작이 그런 레인을 짜증스럽다는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러더니 기습적으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검강을 뿌렸다.
가운데가 뚫린 원반 형태의 검강이 순식간에 범위를 불리며 백작과 레인을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콰가가각!
백작이야 밀릴 것이 없으니 검에 검강을 두르고 그것을 막아냈다. 레인은 공중으로 도약해서 피했다.
그러자 자작의 눈이 번뜩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십여 개의 초승달 형상의 검강을 뿌렸다. 검강은 일부는 백작에게, 일부는 레인에게 날아들었다.
백작이 곧바로 맞대응해서 검강을 뿌렸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강은 완벽하게 차단, 더불어 레인에게 날아든 검강 또한 몇 개 격추시켰다.
그렇지만 완전히 다 커버해주진 못했다. 크레틸 자작은 헬튼 백작 본인과 호각인 초강자. 스스로의 안전을 장담하기도 바쁜데 경지가 낮은 동료를 완벽하게 커버해가며 싸우기가 어디 쉽겠는가.
“쯧.”
헬튼 백작이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것을 목격한 레인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흑아.”
레인이 그림자에서 솟아 나온 줄기를 밟고 공중에서 도약, 자작의 공격을 피해냈다. 예상치 못한 정령의 등장에 크레틸 자작의 눈이 약간 커졌다.
몇 차례 더 도약한 후 아까 전 병사들에게 했던 것처럼 빙글빙글 휘돌며 내려찍기. 헬튼 백작이 거기에 호응해 타이밍 맞춰 검격을 뿌렸다.
자작이 혀를 차며 우선적으로 백작의 공격을 걷어냈다. 연이어 왼팔을 들어 레인의 내려찍기를 받아냈다.
콰앙!
“큭!”
상상 이상의 위력. 자작이 발을 딛고 선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들썩였다.
회전력에 막대한 내력, 더불어 천근추로 인한 중력가속도까지 더해진 일격. 백작의 공격을 받아내는 데 일차적으로 신경이 분산되었던 자작으로선 가볍게 막아낼 수 없었다.
자작의 신형이 살짝 휘청거렸다.
“우랴아아아아!”
저릿저릿한 팔을 억지로 휘둘러 레인을 떨쳐내는 자작. 레인이 예상했다는 듯 그 반동으로 멋스럽게 공중제비를 넘으며 검강을 사출했다.
“젠장!”
자작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것을 맞받았다.
헬튼 백작이 그 틈을 노려서 공격했다. 자작이 더욱 수세에 몰렸다.
자작이 초조한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이 밀리면 아군의 피해가 커진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인이 핫, 하고 웃었다.
“역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놈들이 상대하기 제일 편하다니깐.”
* * *
레인의 가세로 자작의 움직임이 제한되자 그만큼 백작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추격하라!”
“이때다! 자작군을 쫓아라!”
함성을 내지르며 후퇴 중인 자작군을 추격하는 백작군 병사들.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도망치는 적병들을 향해 용서 없이 공격을 가했다.
“제, 제발! 아악!”
“사, 살려줘!”
“크아아악!”
자작군 병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전장의 추가 완전히 기울었다.
그 기색을 크레틸 자작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레인이 틈을 노려 대침을 날렸다. 목표는 자작의 눈. 자작이 착용한 갑주로는 가려지지 않는 부위였다.
“이익!”
한참 백작의 공격을 받아내던 자작이 급히 손을 휘둘러 그것을 튕겨냈다.
조급한 마음이 빈틈이 되어 레인의 개입을 허용하게 된다. 그로 인해 더욱 제한되는 움직임.
자작의 움직임이 제한되면 될수록 백작군의 운신이 더더욱 자유로워진다. 그로 인해 한층 더 초조해지는 자작.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자작이 답답한 마음에 포효를 내질렀다.
“비켜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포효.
막대한 오라가 실린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충격파를 퍼뜨렸다. 초인의 포효에 대기가 흔들리고 대지가 얕게 패여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레인이 똑같이 포효로 맞받았다.
“커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