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영지전(3)
콰과과과과과!
일대가 통째로 뒤집어 졌다.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사방으로 돌과 모래의 파편이 비산했다. 마치 포탄이 떨어져 내린 양 레인을 중심으로 대균열이 일어났다.
“으아아아!”
“흐악!”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갔다.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내력이 실린 돌 파편에 직격당해 픽픽 쓰러졌다.
단번에 무너져버린 진형. 이내 뒤따른 특작대가 온통 휩쓸고 지나간다. 단단했던 진형이 순식간에 엉망으로 무너져 유린당했다.
당연하게도, 제1 목표인 마법사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후우.”
내력으로 보호했음에도 살짝 저린 다리를 재촉해 레인이 자리를 벗어났다. 비명과 노성으로 가득 찬 적진을 연속으로 뚫어내며 진격했다.
* * *
다시 일행의 앞쪽에서 안내.
다음으로 발견한 마법사는 말에 탑승한 채로는 접근하기 애매한 장소에 위치해 있어 일행이 처리하기 곤란했다. 레인은 자신이 잠깐 이탈해서 마법사를 처리해야 할까 고민했다.
“내가 할게.”
셀린이 손에 든 대궁(大弓)에 철제 화살을 걸었다.
드드드드득.
그녀가 활줄을 꼬아서 잡아당기다가 확 하고 손에서 놓았다.
화살은 마법사가 위치한 곳과는 전혀 무관한 곳으로 날아가나 싶더니, 허공에서 크게 방향을 틀어 반원 궤적을 그렸다.
팍.
“컥.”
그대로 마법사의 목 좌측에 박혀 드는 철시. 가히 달인의 기예.
“오오!”
“굉장한데!”
“좋아, 잘했어.”
적룡대원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레인이 고개를 돌려 셀린을 치하했다.
“그렇게 죽어라 배웠는데 이 정도도 못 해선 안 되지. 사부.”
셀린이 씩,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 * *
일행은 계속해서 질주했다.
적 병사들에게서 빼앗은 창을 다섯 개까지 모은 레인이 전방으로 그것을 순차적으로 내던졌다.
전방 일직선으로, 고도를 약간 올려 위쪽으로, 전방 좌측으로, 전방 우측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기까지 실은 창을 다시 전방 일직선으로.
내던진 창들이 결론적으론 같은 목적지를 향해 시원스러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궤적에 걸린 모든 존재를 꿰뚫어가며.
창들은 끝내 일행을 가로막기 위해 준비된 2차 저지 벽에 부딪쳤다. 가장 선두에 선 한 병사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투창을 받아냈다.
쾅! 쾅! 쾅! 쾅!
연속적으로 방패에 작렬하는 투창.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있는 방패인지 곧바로 뚫리진 않았다. 그러나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움푹움푹 패여 들어가는 방패.
“크으으.”
방패병이 버티지 못하고 뒤쪽으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뒤쪽에서 그를 지탱하는 다른 병사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바로 강기가 덧씌워진 창이 날아들어 그나마 버티던 병사를 방패와 함께 통째로 꿰뚫어 버렸다.
콰드드드득!
“크아아아악!”
혼원공으로 인해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는 강기는 병사를 찢어발긴 것으로 모자라 진형을 크게 밀어냈다.
한쪽이 움푹 안쪽으로 밀려 들어간 저지 벽. 병사들 사이에 턱 하고 내려선 레인이 마침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병사의 피로 손을 적시더니 그대로 전방으로 떨어냈다.
사파의 거두였던 혈사노괴(血死老怪)의 성명절기, ‘혈우(血雨)’.
막대한 내기를 머금어 치명적인 암기가 된 핏방울들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전방으로 사출되었다. 핏방울 하나하나에 실린 막대한 내력이 일개 액체에 압도적인 관통력을 부여했다.
경로에 위치한 병사들의 몸에 무수히 구멍이 뚫렸다. 단번에 전열이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후우.”
레인은 전열의 붕괴에 당황한 뒤쪽의 병사들에게 접근. 갑주를 입은 배 위에 주먹 쥔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그리고, 붕권(崩拳).
쩌엉!
“아악!”
단숨에 내장이 파열된 병사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막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진각을 밟은 발아래 대지가 쩍쩍 갈라졌다.
병사는 충격파에 떠밀려 다른 병사들에게 직격했다. 병사들이 한데 엉겨 성대하게 굴러갔다. 그렇게 생긴 길을 따라 곧바로 진형의 중심에 도착한 레인이-척(刺).
-어느새 병사로부터 빼앗아 든 창을 사방팔방으로 내질렀다.
창의 비거리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는 이들도 공격을 피해갈 수는 없다. 상대는 거리의 제약 따위는 초월한 초일류 검사니까. 병사들이 하나같이 머리에 구멍이 난 채로 무너져 내렸다.
또다시 무너져 내린 진형을 유린하며 특작대가 지나갔다. 앞, 뒤, 좌우에 위치한 초일류 검사들이 강맹한 검격을 뿌리며 가로막는 이들을 분쇄했다.
“쏴라!”
쉬쉬쉬쉬쉬쉬쉭!
그런데 이번엔 방어진이 무너질 것까지 예상한 것인지, 어느새 양옆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포진된 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려 왔다.
“플로라!”
“네!”
무려 백이 넘는, 그야말로 쏟아지는 빗방울에 비견될 법한 화살의 향연. 그것을 일행의 중심에 위치한 초일류 이능력자, 플로라가 걷어낸다.
플로라 또한 지난 일 년 반 동안 용병 생활을 해오며 크게 성장했다. 힘의 출력이 높아졌다기보단, 힘의 운용에 상당히 능숙해졌다.
일행을 향해 날아오던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공중에 우뚝, 하고 멈췄다. 그리곤 곧바로 쏘아져 온 장소로 되돌아 날아갔다.
무려 백이 넘는 숫자의 화살이다. 그야말로 장관. 압도적인 연출이었다.
“이, 이 미친!”
“크아악!”
“으헉! 뭐야!”
그대로 되돌아온, 아니, 오히려 염력이 실려 더욱 위력이 높아진 화살들이 궁병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오.”
레인이 그 초현실적인 광경에 감탄사를 흘렸다.
* * *
특작대가 자작군 진영 내부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다 보니 전장의 흐름은 완전히 백작가 측으로 기울었다. 자작군 측이 온전히 전장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기색을 느꼈는지 크레틸 자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쪽을 흘끔거렸다. 헬튼 백작이 놀리듯 웃으며 그것을 지적했다.
“왜, 초조한가?”
“…….”
크레틸 자작은 대답하지 않고 찌푸린 인상 그대로 강맹한 일격을 내질러 백작을 떨쳐냈다.
“안됐지만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없네. 저들이 조금 더 날뛸 수 있도록 자네를 붙잡아 두는 것이 내 역할이니까.”
헬튼 백작은 곧바로 다시 크레틸 자작에게 접근해 맞붙으며 그렇게 말했다. 크레틸 자작이 뿌득, 하고 이를 갈았다.
‘미치겠군.’
크레틸 자작이 이번 영지전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그는 검술 수련에만 묻혀 지내다가 늦은 혼인을 했기에 40대 중반이 다 되어서야 자식을 봤다. 그런데 그 자식이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그게 그냥 약한 정도가 아니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름난 의원은 물론이고 신관까지 초빙해 치료해 보려고 했지만,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딸아이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던 자작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딸의 병을 고칠 수는 없었다.
그리다 최근에 자신들이라면 병을 고칠 수 있다며 찾아온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크레틸 자작의 눈앞에서 기적을 선보였다.
지난 몇 달 동안 깨어나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딸의 의식이 잠시나마 되돌아왔다. 자작은 그들로부터 희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치료를 조건으로 내건 말도 안 되는 금액에, 자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필요한 재료를 구비 하는 데에 치료비의 8할이 소모된다고 하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모종의 루트로 바이튼 자작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바이튼 자작은 크레틸 자작에게 이번 영지전 참여를 대가로 치료비를 제공해 주기로 했다. 다만 승리했을 때 한해서.
‘좋지 않아.’
크레틸 자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황이 명백히 열세였다.
영지전에 승리하지 못하면 이미 선금으로 받은 절반의 치료비밖에 챙기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딸아이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된다.
이만한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패배하기라도 했다간 나머지 절반을 구할 방도가 요원하다. 그만한 금액을 어느 세월에 차근차근 모은단 말인가.
여기저기 손을 벌린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작의 인맥 관계는 좁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사심 없이 선뜻 빌려줄 만한 인맥은 더더욱 없었다.
그나마 접촉이나마 가능한 대귀족에게 손을 빌리려면 그만큼 휘둘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것을 저당 잡아 무엇을 요구해올지 도저히 감도 잡히질 않았다.
그 외에 떠오르는 인물이라 해봐야 국왕 정도. 그러나 기사 된 자로서 국왕에게 손을 벌리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딸아이가 당장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지독한 병이 언제 갑작스레 악화될지 알 도리가 있나. 그로선 이번 영지전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황을 되돌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아군 진영에서 날뛰는 일단의 무리를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초인의 대열에 들은 자신이라도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초강자. 손쉽게 떨쳐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은 맞붙어야 했다. 맞붙어서 틈을 엿봐야 했다.
크레틸 자작은 검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헬튼 백작에게 쇄도했다. 백작 또한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신중히 자작의 공격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공방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 * *
자작군 측의 마법사를 거의 서른 명 가까이 처리했다. 특작대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고 보아도 좋았다.
남은 마법사로는 전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불가능할 터. 그 정도면 이젠 백작가 측 병력의 우수함을 앞세워 밀어버릴 수 있었다.
마법사는 종류가 많았다.
테이머도 있었고 흑마법사도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은 원소 계열 마법사였고. 발견한 마법사 대부분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
플레이나는 이젠 적진을 빠져나가야 할 때임을 느꼈다.
제대로 날뛰어 준 덕에 자작군 측도 약이 바짝 올랐다. 점점 숫자의 우위를 앞세운 압박이 거세지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완전히 포위될지도 몰랐다.
특작대가 길을 뚫어내며 적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젠 귀환만 하면 임무 완수다. 초일류 검사들이 남은 오라를 아끼지 않고 작정해서 길을 내자 주위를 포위한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포위망이 더 두꺼워지기 전에 돌파하는 것이 관건. 그러기 위해선 남은 힘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일행은 작정하고 남은 힘을 쏟아내 전방을 일직선으로 꿰뚫고 나아갔다.
“막아라!”
“절대 곱게 보내지 마라!”
지휘관들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렸다. 레인이 그 방향으로 뒤돌아 검강을 사출했다.
“!”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지휘관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곱게 안 보내긴 뭘 안 보내.”
레인이 코웃음을 쳤다.
“셀린, 추적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지휘관들을 골라서 전부 쏴 버려.”
“맡겨 줘, 사부.”
셀린이 씩 웃으며 손가락 틈 사이사이에 화살을 끼고 활시위에 얹었다. 총 네 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팍. 팍. 팍. 팍.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막 병사들에게 추적을 지시하던 지휘관 한 명의 이마, 목, 가슴, 배에 일렬로 박혀 들었다.
시각적 효과가 상당히 강렬했다. 지휘관들이 특작대를 쫓으라고 다그치는 빈도수가 확 줄어들었다. 몸을 사리게 된 것.
“쏴라!”
뒤쪽에서 재차 모인 궁병들이 화살을 날려왔다.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날린 마법까지 함께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플로라가 나섰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정교하게, 세심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된 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쏟아지던 공격이 일제히 허공에서 붙들렸다.
그중 붙잡은 마법들이 터지며 주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화염, 얼음, 물, 그리고 바람까지. 각종 속성 마법들이 각각 수십 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그 파편들 하나하나가 일제히 화살에 깃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백 오십여 개의 마법시(Magic Arrow). 그것이 색색의 빛을 뿌리며 사방으로 퍼져 날아갔다.
“흐억!”
“이, 이건 말도 안 돼!”
쾅! 콰쾅! 콰과과과광!
이어지는 광범위한 폭발. 주위 병사들이 절규를 내지르며 튕겨 나갔다.
레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케일이 다르군.”
그야말로 초일류 이능력자이기에 가능한 압도적인 연출. 검사로썬 웬만큼 경지가 높지 않고선 저런 광경을 연출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비켜라!”
플레이나가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플로라의 활약으로 길을 뚫어내기가 더욱 쉬워졌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레인이 따라붙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주위에 떨어진 검 하나를 주워들고 내력을 밀어 넣었다.
검기를, 검강을 피워 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력만 주구장창 밀어 넣었다. 검이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이내 검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레인은 검이 완전히 깨져나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내력을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그 후, 검 위에 검강을 덧씌웠다. 그리고 그것을 일행을 가로막는 마지막 포위망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파검(破劍).”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파편 하나하나가 검강이 깃든 가공할 암기가 되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내력이 방대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 효과는 확실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아아악!”
“커억!”
포위망을 형성한 이들 중 상당수가 작정하고 몰려든 자작군 측의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무언가 저항을 해보기도 전에 한꺼번에 전멸시켰다.
피와 살점이 비산했다.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장소를 지나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특작대는 결국 적진을 벗어났다.
플레이나가 살짝 질렸다는 얼굴로 레인에게 물었다.
“마지막에 그건 뭐야? 너 몸속 어딘가에 오라 저장 탱크라도 쑤셔 박아뒀던 거야?”
“사람을 골렘 취급하는 것 아닙니다. 아주머니.”
“캬악! 호칭을 고쳐!”
“싫습니다.”
“이게 진짜!”
투덕거리며 유유히 아군의 진형을 빠져나가는 특작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기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진 자작가 병사들이 여기저기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