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영지전(2)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 전투가 벌어졌다.
서로 맞붙는 수천의 군세. 지휘관의 고함 소리가, 병사들의 기합 소리가 평원을 울린다.
각종 화려한 마법이 허공을 가르며 적 진형으로 날아가고, 색색의 검광이 전장 곳곳에서 피어올라 화려하게 타오른다.
기사단이 일제히 말을 타고 거창. 오라를 덧씌운 랜스를 전방으로 세운 채 돌진한다. 쐐기 진형을 이뤄 적 진형을 꿰뚫고, 포위되기 전에 유유히 빠져나와 본진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베테랑 용병들이 암기는 물론이요, 필요하면 단궁을, 심지어는 독까지 사용해가며 ‘살아남기 위한 전투’에 몰입한다.
그 전쟁의 한복판에서 격이 다른 전투를 펼치고 있는 두 사람.
하슨 백작군 측의 헬튼 백작. 그리고 바이튼 자작군 측의 크레틸 자작.
오라가 실린 검을 마찬가지로 오라가 실린 검으로 맞받는다. 기습적으로 사출한 오라 소드(Aura sword), 즉, 검강을 마찬가지로 검강을 덧씌운 검으로 걷어낸다.
그야말로 전투 범위만도 방대한 초인들의 싸움. 그 범위에 운 나쁘게 말려들어 죽은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범위조차 그들이 서로를 극도로 견제하며 싸우고 있기에 그 정도일 뿐.
격이 다른 검광이 수시로 번쩍이고, 일대의 땅이 폭격을 맞은 듯 뒤집어 졌다. 천둥소리에 비견될 법한 굉음이 연속으로 울리고, 기와 기의 충돌에 의한 간헐적인 폭발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아찔한 그 전투를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는 한 소년.
검은색 무복에 대침을 비녀 삼아 적당히 틀어 올린 머리칼. 그야말로 환상적이라고 표현하기 부족함이 없는 얼굴을 한 소년은 바로 레인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저걸 감당하긴 힘들겠군.’
레인은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검성’이라는 경지는 동공 수련자들의 역량이 대폭 상승하는 하나의 임계점인 모양이었다.
솔직히 검호급까지는 좌공 수련자들이 좀 더 유리한 면이 많았다. 무공에 치우침이 있다곤 하지만 오히려 그게 강점으로 작용했다. 이쪽이 내보일 수 있는 패가 더 많았다고 할까.
그런데 보다 상위의 경지인 저들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좌공 수련자가 더 유리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저들은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정확히는, 모든 면에서 ‘고르게’ 압도적이었다.
지금의 레인이 최고 출력으로 검격을 내질러도 그들의 검격에는 미치지 못할 터였다. 최고 출력으로 경신법을 발휘해도 저들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할 터였다.
너무나도 고르게, 안정되게 강해진 이들이기에 파고들 틈이 없었다. 차라리 중원의 무인들처럼 편파적으로 강해진 이들이라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무너뜨릴 시도라도 할 수 있으련만.
상성이나 약점 공략, 혹은 전법의 활용. 그것을 통해 상대적으로 낮은 경지의 인물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지의 인물을 무너뜨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던 중원과는 달랐다.
이 세계의 강자는 말 그대로 완벽한 강자인 듯했다. 무너뜨릴 틈이 없었다. 웬만큼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 한, 일 대 일로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역시 정도(正道)라 이건가.”
새삼 동공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면 저들은 걸치고 있는 갑주를 적극적으로 전투에 활용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체내 오라 제어 능력을 이용해 판금 갑옷에 오라를 덧씌운 것이다.
말하자면, 온몸에 기막(氣膜)을 두르고 있었다.
“저건 그냥 금강불괴잖아.”
정확히는 금강불괴의 하위 호환 정도로 보면 될 듯했다.
상시 온몸에 기막을 두르고 덤벼드는 상대라니. 검성이라는 것들은 전부 저런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니 새삼 끔찍했다.
중원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체내에 축적된 기운이 모조리 단전에 쌓인 그들로선 아무리 경지가 올라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온몸을 통해 기운을 발현하지 못하니까. 금강불괴지체라면 모를까.
저것은 마나를 온몸 뼈와 근육에 고루 축적한 동공 수련자들만이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 허락된, 그런 기예였다. 레인은 두 초인을 지켜보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내력을 다루는 일은 중원인들에게 있어선 의식의 영역. 그리고 저들에게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중원인들은 의식적인 내력 조작을 통해 저들에겐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저들은 중원인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그 차이가 이런 형태로 드러날 줄은 레인도 생각지 못했다.
하위 호환이래도 금강불괴는 금강불괴다.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가 괜히 중원 무림에서 최고의 재능이 담긴 신체로 평가받는 게 아니거늘. 이쪽 세계엔 저런 게 넘쳐난다는 말인가.
레인은 한 차례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빨리 경지를 높이든지 해야지, 이렇게 일일이 입이 써서 살겠나.”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저 두 초인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현재의 자신에겐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들이 한참 격이 높다.
레인은 괜스레 짜증이 올라오려는 것을 숨을 크게 내쉬는 것으로 털어냈다. 지금은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럼, 슬슬 출격하겠습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에 함께할 별동대 구성원들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해왔다.
별동대 구성원은 다음과 같았다.
레인, 레이나, 셀린.
적룡대 대원 전원.
영지 수석 기사 넷.
총인원 열두 명으로 구성된 특작대. 무려 전체 인원 중 절반이 초일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초호화 전력. 레인을 제외한 전원이 말을 타고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레인은 굳이 말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말 따위를 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경신법에 소모될 내력을 고려해서라도 말을 이용했을 터였다. 그러나 레인의 경우엔 내력량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레인의 출격 선언에 전원이 곧바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레인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는 것을 뒤따랐다.
질주. 적 진영의 허리 부분을 들이친다.
“뭐, 뭐야!”
“적습이다!”
갑작스러운 소규모 적습에 당황한 기색으로 창을 들어 막아서는 병사들. 레인은 굳이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곧바로 땅을 박차 그들을 그대로 뛰어넘어버렸다. 무려 3미터를 가볍게 넘어가는 대도약.
병사들이 멍한 얼굴로 레인이 지나간 머리 위쪽을 올려다보는데, 뒤이어 특작대가 들이쳤다.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일제 돌격, 진형을 단숨에 꿰뚫어 버렸다.
마법사 사냥의 개막이었다.
* * *
초일류 검사들이 필살 일격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총 4개의 검강이 폭사되어 전방에 위치한 모든 적을 갈라냈다.
“크악!”
“아아악!”
병사들이고 지휘관이고 범위 내에 위치한 모든 이들이 통째로 쓸려나갔다. 그렇게 뚫린 길을 따라 질주하는 특작대.
“남서쪽!”
앞서서 적진에 침투한 레인의 외침에 따라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쐐기 진형을 갖추고 사방으로 검기를 흩뿌리며 달려 나가는 일행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실력자들이니까.
레인은 아예 병사들의 머리를 발판 삼아 연속으로 도약하며 적진 위를 종횡무진 누볐다. 병사들이 위쪽으로 창을 내찔러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소득을 거두진 못했다.
레인은 오히려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넘어 내력으로 가볍게 만든 신형을 창 위에 가볍게 안착시키는 기예를 선보였다. 당하는 측에선 질려버릴 수밖에 없는 연출.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던 레인의 눈에 한 사람이 못 박히듯 들어왔다. 목표인 마법사. 역시나 예의 그 꺼림칙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찾았다.”
사나운 미소와 함께 도약. 레인이 안착해 있었던 창의 창대가 도약의 반동으로 땅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창을 붙들고 있던 병사가 그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으헉!”
갑자기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소년의 존재에 심히 당황하는 마법사. 복장을 병사들의 것과 같게 했는데 대체 어떻게 정확히 자신을 특정해서 접근해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하지만 궁금증을 풀어 줄 이유 따위 없다. 그대로 스치듯 지나치며 일섬. 마법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 없는 시체가 되었다.
뒤이어 들이친 특작대가 막 레인을 둘러싸려던 병사들의 움직임을 와해시켰다. 그러자 레인이 곧바로 왼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서 왼쪽! 숫자는 둘!”
그리고 도약. 그가 또다시 병사들의 머리를 타 넘으며 이동했다.
지휘관급이라고 판단되면 그냥 타 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재도약 전에 반드시 진각을 밟았다. 그것으로 머리, 혹은 어깨를 부숴 버림으로써 즉사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지휘관의 부재는 병사들의 혼란을 부추기는 법. 혼란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이쪽의 안전이 보장될 터였다.
두 마법사를 처리한 것은 이번엔 적룡대주 플레이나였다.
그녀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아서, 지난 일 년 반 동안 초일류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레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들에게 곧바로 검격을 뿌렸다.
“아악!”
그녀 특유의 호쾌한 검술로 초승달 모양의 검강을 사출했다. 막대한 기파가 전방에 위치한 마법사들은 물론 병사들 십여 명을 순살하고 지나갔다.
약간 비스듬하게 아래쪽으로 내쏘아진 검강은 경로에 위치한 모든 것을 베어내며 나아가 바닥과 충돌, 폭발했다. 폭발에 말려든 병사 두 사람이 추가로 피해를 입었다.
그쯤 되자 적측에서도 별동대의 침투 목적을 알아챘다.
“마법사! 마법사를 노리고 있다! 막아라!”
“마법사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병사들은 저들을 막아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지휘관들의 외침. 레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주를 계속했다.
적병에게서 빼앗은 창을 땅에 비스듬히 꽂고, 그 위에 올라탔다. 곧바로 반동을 이용해 신형을 내쏘듯 날렸다.
궁신탄영(弓身彈影). 탄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최상승의 경신법.
나아가야 할 길을 막고 있는 지휘관의 얼굴을 추진력이 그대로 실린 발차기로 걷어찼다. 지휘관이 뒤쪽에 위치한 병사들과 부딪쳐 그들을 우수수 쓰러뜨리며 날아갔다.
마치 볼링핀이 쓰러지듯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병사들. 그 방향으로 말을 탄 특작대가 내달렸다. 경로상에 위치한 병사들을 용서 없이 도륙하며 질주했다.
레인이 이끄는 방향으로 달려가 마법사들을 참살, 그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질주하기를 반복했다. 근 20여 분 사이에 그렇게 죽어 나간 마법사가 12명.
그리고 그즈음이 되자 갑작스러운 고급 전력의 기습에 혼란에 빠졌던 적 진영에서도 동요를 수습하고 제대로 대응에 나섰다.
“음?”
막 마법사 하나를 더 처치하고 일행보다 한발 앞서 질주하던 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전방에 진형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
두꺼운 철제 방패를 든 병사들이 진형을 몇 겹이나 짜서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장창병이, 후열에는 궁병과 일단의 마법사들이.
진형이 워낙 탄탄해서 말을 타고 있는 일행이 그대로 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런 앤 건(Run and Gun).’
기사들의 랜스 차지가 그렇듯이, 적진 한복판에서 멈춰 서게 되면 순식간에 둘러싸이게 된다. 절대 발목을 잡혀 정체되면 안 된다.
일단 한 번 둘러싸이고 소모전을 강요받게 되면 암만 초일류 검사들이 즐비한 특작대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인간의 체력은 유한하니까.
그렇기에 질주를 방해받아선 안 된다. 레인은 자신이 눈앞의 돌격 저지 진형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가 지체하지 않고 속도를 높여 접근했다.
마법사들이 미리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마법을 날려 왔다. 각각 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호선을 그리며 레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레인이 곧바로 도약, 마법을 회피했다. 그러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마법과 다량의 화살이 날아왔다. 공중에선 운신이 자유롭지 못할 테니 그것을 노리겠다는 심산.
그러나 레인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닥으로 착지한 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도약했다.
“뭐, 뭐야!”
“저게 무슨!”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검은 줄기가 발판이 되어주었다. 허공에서 도약, 연속적으로 뻗어 나오는 줄기를 발판삼아 계속해서 도약, 도약, 도약.
레인이 도약한 아래쪽으로 마법과 화살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병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위쪽을 올려다봤다.
레인은 한참을 도약한 후에 신형을 빙글빙글 돌리며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천근추. 집중된 내력이 중력의 영향을 늘려 떨어져 내리는 속도를 더더욱 높였다.
각(却).
대지에 발이 닿는 순간 진각. 적들이 갖춘 진형의 중심에 작렬하는 내려찍기. 회전력까지 듬뿍 실린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대지가 폭격을 맞은 듯 뒤흔들렸다. 압도적인 소음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