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전쟁 발발(3)
4개 팀은 영주성을 떠나 습격이 예상되는 각 마을로 이동했다. 레인과 레이나는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동시에 습격해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여겨지는 마을로 향했다.
이동하는 도중 레이나가 물어왔다.
“적룡대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신 건가요?”
“이전에 유적을 공략하면서 조금.”
“유적이요? 스승님, 유적을 공략한 적도 있으신가요?”
“한 번뿐이지만. 솔직히 그땐 좀 위험했어.”
“그러고 보니, 적룡대가 가장 최근에 공략했다는 유적이 ‘자이언트 플랜츠(Giant Plants)’였었죠. 혹시 그때?”
“유적 이름을 듣자 하니 맞는 것 같네.”
유적의 이름은 보통 그 유적이 완전히 공략된 후에 붙게 된다. 대부분의 유적은 발견과 동시에 발견자에 의해 은폐되고, 공략이 끝난 후에야 그 존재가 공개되니까.
공략되지 않았는데도 이름이 붙은 유적들은 대체로 수많은 탐험가를 집어삼켜 그 악명이 자자한 것들뿐이다. 그런 곳엔 웬만해선 들어가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 시기면 분명 제가 스승님보다 먼저 영지로 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은 시점이 아닌가요? 역시 대단하세요.”
“그런가. 솔직히 반쯤 흥미 위주로 참여했다가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을 겪었는데. 상당히 괴랄한 유적이었거든. 솔직히 말해서 무사히 귀환 가능했던 것도 로엘 덕이었고.”
솔직히 그때 로엘이 예의 거대 해바라기를 쓰러뜨려 주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죠. 그때 스승님이 분명 열세 살이었을 텐데.”
“그런가.”
레인은 레이나의 칭찬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 듯 한 차례 길게 하품을 했다.
“아, 보인다.”
대화하다 보니 이내 목적지인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레인과 레이나를 비롯한 15명의 별동대는 현재 소규모 상단으로 위장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레인과 레이나는 일행의 장이라는 설정이었다.
상대측이 이쪽이 요격 부대를 파견했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점조직인 만큼 정보 전달력이 느린 상대라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차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의 풍광. 푸른 초지 위에 나름 높이 있는 목책이 둘러쳐진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오늘은 제대로 여관을 잡고 쉴 수 있겠군.”
마을까지 이동하는 며칠간 일행은 계속해서 노숙을 해왔다. 아무래도 노숙은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여관에 묵게 되는 것이 반가웠다.
레이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습격을 경계해야 하니 술은 허락할 수 없지만, 식사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주문해도 좋다.”
“오오!”
용병들이 기쁜 목소리로 화답했다. 부유한 귀족가의 의뢰인만큼 용병들의 식비는 전부 고용주 측이 부담한다. 기뻐할 수밖에 없다.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일행은 곧바로 여관을 잡고 짐을 풀었다. 레인과 레이나는 용병들을 몇 명씩 나눠 방으로 들여보내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용병들의 방을 배정해주고 나니 남은 방이 하나뿐이었다. 레이나와 레인이 각각 독실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와서 다시 용병들의 방 배치를 재조정하자니 불만이 나올 터였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함께 방을 쓰자니 조금 어색했다.
‘용병들에겐 미안하지만, 방 배치를 다시 해야겠네.’
레이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럼 우리 둘이 한 방을 쓰면 되겠네.”
레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레이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하고 달아올랐다.
“그, 그건!”
“왜? 문제 있어?”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됐네.”
레인은 점원에게서 방문 열쇠를 받아들고 성큼성큼 배정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나는 당황한 얼굴로 갈팡질팡하다가 이내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방에 들어선 레인은 곧바로 방 한쪽에 놓인 탁자 의자에 털썩, 하고 앉았다. 레이나가 머뭇머뭇거리며 따라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레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다, 당연히 긴장하죠!”
“왜?”
레이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소용돌이쳤다.
스승님은 어째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과 한방을 쓰는 걸까. 그는 이 상황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혹시 그에겐 자신이 이성으로 비추어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제자일 뿐인 걸까.
어쩐지 자신만 애태우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기분에 떠밀려 저도 모르게 툭 하고 내뱉고 말았다.
“스승님은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에 대해?”
레인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레인이 잠시 말을 고르기 위해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우수한 제자지.”
“제자…….”
레이나가 미묘하게 흐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인의 말이 이어졌다.
“성실하고 노력가인데 성격까지 올곧지. 거기에 두 살 어린 스승에게까지 예의 바르고.”
“…….”
“어디 하나 부족한 점이 없지. 굉장한 미인이기도 하고.”
“…….”
레이나가 연속된 칭찬에 저도 모르게 몸을 꼬았다. 이렇게 대놓고 금칠을 하면 누구라도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리라.
“항상 생각해. 나만큼 제자 복 있는 사람도 드물 거라고.”
레이나는 어딘가 기뻐하면서도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살짝 쓴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레인의 말이 더 이어졌다.
“조금 덧붙이자면, 매력적인 이성이기도 하고.”
“?!”
레이나가 순식간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커진 눈. 흔들리는 시선을 레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레인이 하품을 내뱉으며 물었다.
“왜 그런 반응이야?”
“저, 저는 스승님이 저를 이성으로 안 보는 줄로만 알았어요.”
“내가?”
“하지만 스승님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놓고. 설마 내가 모르기라도 할 줄 알았어?”
레이나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레인이 코웃음을 쳤다.
“눈치 없는 게 누구인지.”
“…….”
“뭐야? 똑바로 말해.”
레이나가 뭐라 말은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자, 레인이 채근했다.
“으아아아!”
한참 머리를 쥐어뜯던 레이나가 한계를 맞이했는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주해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번개처럼 내달려 창문을 향해 도약했다.
호쾌하게 부서져 버린 나무창. 레이나의 모습이 금세 어둠 속으로 파묻혀 사라졌다.
레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러라고 가르친 경신법이 아닌데.”
부서진 창으로부터 찬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레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방도 더 없다는데 창을 부숴 먹어서 어쩌잔 거야.”
레인은 혀를 차며 일 층 카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관 주인에게 사과하고 적당히 공구를 빌려 수리할 요량이었다. 잡기에 능하다 보니 그 정도는 가능했다.
“제 머리가 식으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 * *
여관 주인에게 변상금을 지불하고 창을 수리했다. 아니, 수리라기보단 그냥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판자를 덧대 놓기만 했다. 적당한 재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레이나는 레인이 침대 위에 앉아 내력을 운용하고 있는 도중에 되돌아왔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 침상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레인이 기감으로 알아차렸다.
레인은 혈도를 따라 주천하던 기운을 적당히 갈무리하고 눈을 떴다. 곧바로 시야에 긴장한 기색을 띤 레이나가 들어왔다.
“왔냐.”
그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네.”
레이나는 조잡하게 판자가 덧대진 창문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대답했다.
“머리는 좀 식었고?”
“네.”
“일단 앉아.”
레이나는 레인이 손짓하는 대로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레인이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왜 이리 몸에 힘이 들어갔어. 긴장 좀 풀어.”
“…….”
“누가 잡아먹냐.”
레인은 겁먹은 강아지 같은 그녀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고.”
“뭐, 뭘 말인가요?”
“뭐긴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너 나 좋아하지?”
“……네.”
레이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레이나의 얼굴이 더 붉어지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럼 문제 없네. 그렇지?”
“그, 그렇네요.”
“그럼 서로 마음도 확인했겠다, 지금부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스승과 제자 사이인데 조금 그런가? 의외로 넌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까.”
“아, 아뇨! 전혀!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그래? 그럼 오늘부터 우리는 연인이 된 거다. 이의 없지?”
“네, 네에.”
레이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표정 좀 펴라. 뭘 아직도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레인이 피식, 하고 웃었다. 레이나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갑작스럽게는 무슨. 일 년 반 동안 끌었으면 됐지 뭘 더 질질 끌려고.”
“…….”
“그럼, 이리로 와.”
레인이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흠칫, 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레인과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돼. 잡아먹지 않을 테니.”
“자, 잡아먹……!”
“그러니까 과민반응하지 말라고.”
레인은 맞잡은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레이나의 머리가 레인의 가슴팍에 맞닿은 모양새가 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레이나 하슨.”
“자,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하나의 커플이 탄생했다.
* * *
레인과 레이나, 그리고 용병들로 이루어진 요격대는 그로부터 정확히 3일 후 정말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로브인들의 접근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방 안에서 레이나와 마주 보고 앉아 차를 즐기던 레인이었다.
“오는군.”
감각의 권역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불쾌한 존재감을 흩뿌리는 일단의 무리.
지난 일 년 반 동안 방대하게 불어난 내력으로 인해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또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다른 것보다도 기감은 내력량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레인은 곧바로 용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곧바로 마을 뒷문 쪽으로 접근해 오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였다.
‘정말로 나타났네.’
레이나는 스승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접근해 오는 무리는 전원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집단. 숫자는 대충 봐도 열일고여덟 명. 이쪽보다 많다.
“저 인원 전부가 마법사란 말이지.”
레인의 예측대로라면 저들은 모두가 마법사였다. 레이나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대치.
로브인들은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일단의 무리를 경계하며 무언가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용병들은 용병들대로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우선 가볍게 환영 인사부터 할까.”
레인은 일행이 ‘어어’하는 사이에 로브인들 쪽으로 신형을 훌쩍 날렸다.
갑자기 고속으로 접근해 오는 상대에게 당황한 로브인들. 레인이 그중 가운데 위치한 이의 안면에 비스듬히 안착했다. 그리고 곧바로-각(却).
-진각을 밟았다.
쾅!
그대로 뒤로 넘어간 로브인의 머리가 땅속 깊숙이 파묻혔다. 즉사.
곧바로 땅에 파묻힌 덕에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되진 않았지만, 사실 뒷머리가 으깨졌다. 상당히 잔인한 살해방식.
“?!”
“뭐, 뭐야!”
로브인들이 경호성을 토해내며 곧바로 마법을 발현했다.
<화염구(Fire Ball)>.
<화창(Fire Spear)>.
단숨에 쏟아져 나오는 두 종류의 마법. 타오르는 화염의 구체와 장창이 레인이 선 자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레인이 그것을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움직여 회피했다.
<화탄(Fire Bomb)>.
<화염 장벽(Fire Wall)>.
그것을 노렸다는 듯, 레인이 딛고 선 땅을 중심으로 소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레인은 뒤쪽으로 훌쩍 뛰어 회피했다.
그가 곧바로 다시 돌진하려는데, 그와 마법사들의 사이를 가로막듯 불의 장벽이 솟아올랐다. 레인은 자세를 풀고 살짝 감탄했다.
“연계가 괜찮은데.”
이번 녀석들은 지난번 녀석들에 비해 서로 손발이 잘 맞았다. 이런 식으로 척척 호흡을 맞춰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시키다니. 상당히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