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전쟁 발발(2)
레인은 백작의 집무실을 뒤로하며 레이나, 셀린과 대화를 나눴다.
“정말 저희 실력으로 괜찮을까요? 전쟁이라니.”
레이나가 살짝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셀린 또한 말은 않고 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는 없을 거야. 여차하면 나도 있고.”
레이나는 픽 하고 웃었다. 몇 번이고 느꼈지만, 그녀의 스승은 프라이드가 상당히 높았다. 그것이 자만에 가득 찬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또 신기하지만.
“그보다 스승님이 영지전에 스스로 참여할 의사를 밝히시다니, 조금 놀랐어요. 오히려 아버지께서 부탁해오셨어도 스승님은 ‘내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랬겠지. 지금 일어난 전쟁이 보통의 영지전이었다면.”
“보통의 영지전? 그 말은 이번 영지전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거야, 사부?”
“영지전이 일어나게 된 경위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의문투성이야. 거기에…….”
“?”
“비슷한 사례를 하나 알고 있어서 신경이 쓰이거든.”
“무슨 말이야?”
“우선 일리나를 찾아간다. 이야기는 그다음에.”
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제자들을 대동한 채 숙소로 향했다. 별채에 들어선 후, 평소처럼 바로 3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2층 안쪽의 한 방으로 향했다.
2층은 일리나와 그녀의 수행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레인이 향한 방이 바로 일리나가 숙소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어느새 그녀가 백작가에 온 지도 1년 반이 넘어가지만, 필리언 자작가의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고 있다고 했다. 내전치고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었다.
레인은 방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언질을 주고 잠시 기다린 뒤 일리나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일리나는 예의 그 차분한 분위기로 레인과 두 소녀를 맞이해 주었다.
일리나는 레이나와 동갑, 즉 올해로 17살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병약했던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조금 과하게 마른 듯했던 몸에는 살이 올랐고,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갈색 긴 생머리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건강미에 차분한 느낌이 더해져 상당한 매력을 뽐내는 외견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레인 님.”
“님은 무슨. 그보다 할 말이 있어서.”
“말씀하세요.”
“일 년 반 전에 백작가를 향하던 널 습격했던 로브인들. 기억해?”
“그들 말인가요?”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알아낸 바에 의하면 애초에 필리언 자작가에 내전이 일어난 이유도 그들 때문인데.
레이나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일리나가 신변의 위험을 겪었었다는 이야기를 오늘에서야 처음 들었다.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그놈들이 여기 하슨 영지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 것 같다.”
“예?”
“말 그대로야. 이번 영지전이 벌어지게 된 경위가 필리언 자작가와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있더군. 우연이라기엔 너무 딱 맞아떨어져.”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레인은 머릿속으로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정리했다. 일리나는 재촉하는 일 없이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여전히 기품 있는 모습.
“필리언 자작가의 내전은 작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뜬금없이 등장해서 영주 자리에 욕심을 부리는 데서 시작됐지?”
“네. 그랬었죠.”
“이번 영지전도 마찬가지야. 말도 안 되는 명분을 갖다 붙여서 어거지로 일으켰더군. 도저히 영지전을 통해 얻어낼 이득이 없어 보이는데도.”
“그런가요?”
“그리고 그 영주 자리를 탐낸다는 녀석이 상당한 전력을 대동했었지?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상당한 전력을.”
“그랬었죠.”
“이번 영지전도 마찬가지야. 어떤 경위인지 상대측에서 정말로 형편 좋게 검성을 초빙했다더군. 마치 작정하고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것처럼.”
검성 한 사람의 가세면 전장의 판도가 뒤엎어진다. 그들은 한 개인으로 취급하기보다 전략 병기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솔직히 명백한 과잉 전력이다. 시골 영지끼리의 전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린아이들 패싸움에 칼 든 조폭이 지원군으로 참전한 형국이다.
백작은 이쪽을 안심시키려고 그랬는지 괜찮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항마로 이쪽도 검성을 고용했다지만, 두 검성이 서로를 상대하는 데에만 힘을 쏟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애초에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난센스다.
검성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백작군 측이 유리한 전쟁임이 당연했다. 폼으로 지위가 더 높은 것이 아니다.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은 백작군 쪽이 윗줄이었다.
그런데 검성의 존재로 인해 전쟁의 불똥이 어떻게 튈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게 됐다. 하슨 백작이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바이튼 자작의 행동은 하슨 백작과는 아예 척을 지겠다고 선언한 것과도 같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상대의 목덜미에 들이댄 것과도 비견되는 행위니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가며 벌이는 영지전임에도, 자작가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영지전에서 승리하면 백작가를 흡수할 수 있다는 형편 좋은 일이 있을 턱이 없다. 애초에 광산을 명분으로 한 전쟁이기에 얻는 것도 광산뿐이다. 국왕이 그 이상을 허락해 줄 리 만무하다.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란 말이지. 그치의 행동은 꼭-”
“?”
“전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닌,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인 것 같단 말이야.”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 이를테면, 윗선에게서 ‘전쟁을 일으켜라’라는 명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
일리나가 저도 모르게 벌떡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면 널 납치하려고 했던 놈들도 그랬었지. 내전을 촉발시키기 위해 너를 납치하려 했다고.”
“······.”
“애초에 이상한 일이지. ‘내전에서 우위를 잡기 위해서’가 아닌, ‘내전을 촉발시키기 위해서’라니. 실리나 결과가 아닌,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 집착하고 있다고. 이 녀석들.”
“아.”
“작금의 상황과 비교해서 굉장히 비슷한 것 같지 않아?”
“그러네요. 그렇다면 바이튼 자작 또한 그들의 하수인인 걸까요?”
“그건 모르지. 자작이 놈들의 하수인인지, 놈들과 공생하는 관계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치들에게 약점을 잡혔는지.”
잠시, 침묵.
일리나는 물론이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머릿속이 과부화된 레이나와 셀린도 굳어버렸다. 레인의 말대로라면 이번 영지전은 정말로 심상치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연 것은 레인이었다.
“널 찾아온 이유는 네가 나와 함께 백작께 갔으면 해서다.”
“예?”
“별동대를 구성해 달라고 할 생각이야. 그걸 위해 네가 겪은 일을 증언해 줘야겠어. 감이지만, 분명 나타날 테니까.”
“나타나다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 로브인들.”
“!”
“분명 일전의 테이머들은 영지전으로 인해 자작가 인물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켰었지.”
“그 마을 말인가요.”
레인과 일리나가 처음으로 만났던 폐허가 된 마을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놈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거든. 이렇게까지 행동 패턴이 비슷하니까. 이것도 감이지만.”
“아뇨, 확실히 대비해 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선례가 있으니까. 만일 영지전으로 인해 주의가 쏠린 틈을 타 정말로 그들이 나타난다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겠죠.”
“그렇지. 그러니 동행을 부탁하고 싶다. 백작님을 설득하기 위해.”
“알겠습니다.”
* * *
레인과 일리나의 설명을 전해 들은 백작은 표정을 심각하게 굳혔다. 그런 내막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사실 완전히 사실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심증이다. 그렇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으니까.
실제 사례가 없다면 모르겠는데, 그 사례를 설명하는 일리나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인력과 금력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귀족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작은 곧바로 레인의 요청대로 별동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정규 병사나 기사 쪽으론 여유를 낼 수 없었기에, 별동대는 주로 용병 위주로 구성되었다. 백작이 재화를 아끼지 않은 덕에 최소 B등급 이상인 용병들을 수십 명이나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전력이 부족했다. 이쪽은 방어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상대가 어느 마을을 노릴지 모르는 만큼 전력을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상대측의 전력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분산시켜 배치한 용병들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상대도 입장이 있으니 공격할 수 있는 마을은 한정적일 터였다. 한정적이도록 백작이 손을 쓰고 있기도 했고.
그러니 습격 후보지는 아마 두세 군데. 많아도 네 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을 터. 백작가 측에서는 최대 네 개의 마을 정도만을 경계하면 되었다.
돌려 말하면, 네 개씩이나 되는 마을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레인이 제안했다. 분산된 용병들을 이끌 강력한 원군의 초빙을.
레인으로부터 제안받은 내용에 백작은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레인이 그들과 인맥이 닿아 있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
과연 레인의 이름을 빌려 초빙하자 그들이 응해주었다. 무려 왕국 최고의 용병대 중 하나인 ‘적룡대’가.
* * *
플레이나와 레인은 오랜만의 재회에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두 제자와 일리나, 거기에 가문의 기사들까지 일제히 긴장했다.
상대는 왕국에 이름 높은 용병대. 구성원 중 절반 이상이 초일류 검사라는 ‘규격 외’의 집단. 그 누가 그녀들을 한낱 용병에 불과하다고 매도할 수 있을까.
“와아. 이젠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랐는데?”
플레이나가 감탄하듯 말했다. 레인의 외견은 그 누가 봐도 탄성을 지를 만큼 바람직하게 성장했다.
“그러는 그쪽은 거의 변한 게 없는 것 같군요.”
반면 플레이나는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과 비교해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나이에 비해 동안인 것도. 뭇 남성 용병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는 아름다운 얼굴인 것도.
“흠흠, 나야 뭐. 여전히 한 미모 하지.”
플레이나는 훗, 하고 웃었다.
레인이 눈꼴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플로라에게 질문했다.
“그새 남자친구는 생겼답니까?”
플로라는 마치 친인의 죽음을 겪은 것만 같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레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했다.
“뭐야, 여전히 노처녀에 아줌마구만.”
“뭐가 어째, 인마!”
플레이나는 레인이 특정 단어를 언급함과 동시에 격하게 으르렁거렸다. 레인은 그제야 마음에 드는 표정을 봤다는 듯 킬킬 웃었다.
“뭐 일단, 도와주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엔 신세를 졌으니까.”
“이쪽은 제 제자들입니다.”
레인은 레이나와 셀린을 적룡대 일동에게 소개했다. 레이나와 셀린은 그 명망 높은 S등급 용병들과의 조우에 상당히 경직된 인사를 건넸다.
“음?”
인사를 받은 플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레인, 너 올해로 몇 살이지?”
“열다섯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열일곱, 그리고 열다섯.”
“왜 제자들 중에 너보다 나이 적은 녀석이 없는 거냐.”
플레이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답변했다.
“일단 저 두 사람도 최상위 전력입니다. 적어도 적룡대의 발목은 잡지 않을 겁니다.”
“호오.”
“일단 팀부터 짜죠.”
레인은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먼저 팀을 나눴다. 총 네 팀이었다.
레인과 레이나.
적룡대 대주와 셀린.
부대주와 남은 검호급 대원.
그리고 플로라와 특기자 대원.
레이나의 경우 백작이 걱정하는 것도 있고 하니 레인이 직접 함께 팀을 꾸려야 했다. 셀린 또한 플레이나와 함께라면 안전할 테고.
이 네 팀이 각각 용병들을 이끌고 예상 습격지에 잠복, 적이 나타나면 제압하는 역할을 맡는다.
각각의 무리에 초일류급의 전력이 적어도 한 명씩은 배치되었다. 상대의 전력이 얼마나 되든 무리 없이 쓸어버릴 수 있는 편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감이지만 상대는 아마 전원이 마법사일 겁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안정적으로 격퇴할 수 있겠죠.”
“전원이 마법사? 뭐야, 자작가에 그만한 여유가 있어?”
“자작가가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건 저도 모르고요.”
“즉, 정체불명?”
“그렇죠.”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존댓말이 많이 능숙해졌다? 이전엔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익숙해지니 어떻게든 할 수 있겠더군요.”
“그럼 앞으로 한 걸음만 남았네. 자, 누나- 라고 불러봐.”
“뭐라는 거야. 이 아줌마가.”
“캬악!”
플레이나가 확 하고 신경질을 냈다. 적룡대 대원들은 그것을 말리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