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서장 (76/249)
  •  76화. 서장

     천골지체(天骨之體).

    ‘신이 내린 육체’라고 일컬어지는, 오로지 무(武)를 위한 신체.

     그 육체에 깃든 재능은, 그 어떤 무인이라도 바라마지 않는 것.

     그 어떤 무공이라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연마해야 할 골격의, 근육의 움직임을 손쉽게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어떤 기운도 무리 없이 몸 안에 축적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적성’은, 그 어떤 난폭한 기운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게 한다.

     천골지체의 등장은 항상 거대한 규모의 후폭풍을 동반하곤 했다.

     심성이 선한 이가 이 신체의 주인일 때엔 무림사에 그 이름을 길이 남기는 영웅이 출현했다. 심성이 악한 이가 이 신체의 주인일 때엔 무림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혈겁이 일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골지체는 고금 이래 그 누구보다 강한 무인이었다고 일컬어지는, ‘그’의 신체이기도 했다.

    “이야기의 맥락대로라면 ‘다크엘프’라는 존재는 엘프에게 천골지체라는 재능이 깃들면 생겨나는, 그런 존재라는 건가?”

     역대 다크엘프들은 모두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했던가.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셀린과 같은 재능이 있었을 것이라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게 정령술의 재능이 없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령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만한 오라를 축적한 상대를 지금까지 알아보지도 못했다니.”

     일개 고아원 소녀가 가지고 있기엔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다. 제대로 기공이 포함된 무술을 익혔다. 적어도 수년간 고련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정도의 분량.

     그런데 그만한 오라를 초감각을 지닌 레인이 지금까지 감지하지 못했다. 직접 체내에 내력을 밀어 넣어 살펴보고서야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육신이 그 성취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알아서 감춘 것이다. 역시 천골지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천골지체인 주제에 감기에 걸리다니, 이것도 나름 우스운 이야기군.”

     이만한 신체를 가진 주제에 잔병치레나 하고 앉아있다니, 재능이 아깝다. 하긴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키워주는 사람도 없었던 모양이지만.

    “거기다 익힌 것은 동공이고.”

     이 세계의 무술가들은 내력을 축적하는 법은 알아도 그것을 신체 내부에서 순환시키는 법은 모른다. 그렇기에 매일같이 심법을 운용해 탁기를 체외로 배출해내는 좌공 수련자들과 달리 평범하게 잔병치레를 한다.

     그렇다고 해도 단련한 만큼 잘 아프진 않지만.

    “일단 적당히 치료해 줘야지.”

     감기인 만큼 곧바로 회복시킬 수 있는 치료법은 없다. 이전의 심근경색처럼 명확한 질병 원인이 있는 경우와는 다르니까. 이런 바이러스성 질병은 시간을 들여 원기를 회복시킬 수밖에 없다.

     대신 그만큼 치료가 간단하다. 그냥 원기만 북돋아 주면 된다. 감기 정도는 한두 차례 기운을 북돋아 주는 정도만으로도 하루 이틀 내에 회복될 터였다.

     레인은 셀린의 손을 붙잡고 생사공의 구결에 따라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체내에서 순환시켰다.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거기까지 하고 내력을 거둬들였다.

     효과가 즉시 나타나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다시 상세를 살펴보는 것은 무의미하리라. 레인은 이젠 적당히 자리만 지키기로 했다.

     원장이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긴 뭣해서 운공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레인은 예비용으로 품속에 넣어두었던 환단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의자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레인의 운공은 셀린이 걱정된 원장이 일찍 장사를 접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셀린은 그때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원장과 교대한 후 귀가하던 와중. 레인은 잘 닦인 도로를 한복판을 걸어가며 생각했다.

    ‘천골지체라. 제대로 키우면 굉장한 전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역시 그 정도 자질이 있는 녀석을 봐 버리면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고 만다.

    ‘아무래도 이 대륙에는 저 녀석의 재능을 알아봐 줄 인간이 나 말고는 없을 듯싶단 말이지?’

     그건 상당히 아까웠다. 그만한 재능을 썩히다니.

    ‘이참에 두 번째 제자나 들일까?’

     * * *

     일주일 뒤. 옆 영지 주최의 파티에 참여했던 레이나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레인과의 수련을 위해 연무장을 찾았다. 지난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천생 무인이었다. 일리나가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틀어박혀 휴식을 취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레인과 늘 함께 수련하던 연무장에, 자신 말고 다른 소녀가 레인에게서 무언가 지도를 받고 있는 광경을.

     그녀가 당황해서 레인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그가 간결하게 답변했다.

    “네 사제다.”

     레인은 행동력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생각이 난 김에 바로 제안해서 얼마 전에 셀린을 정식으로 제자로 거뒀다.

     백작에게는 제대로 양해를 구했다. 백작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레인에게 레이나만의 전속 스승이 되라고 제약을 걸었던 것도 아니었다. 레이나의 수련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하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인사해. 이 녀석 이름은 셀린이다.”

    “아?”

    “셀린이라고 합니다. 레이나 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안녕.”

     레이나는 한껏 당황한 와중에도 일단 셀린의 예의 바른 인사에 어색하게 답변했다.

     * * *

     그날부터 레인이 두 제자를 가르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레이나에겐 예정대로 환단을 지급했다. 일단 첫 영약 섭취인 만큼 레인이 명문혈에 손을 대고 내력의 흐름을 조정해 주는 방식으로 흡수를 도왔다.

     레이나는 환단의 효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에 띌 정도로 불어난 내력을 느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레인은 그녀가 더욱 기뻐하도록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환단을 지급할 것임을 알렸다. 동시에 내력과 검술 실력이 부조화를 이루지 않도록 수련에 박차를 가할 것을 당부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내력만 대폭 늘려봐야 운용력 부족으로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할 테지만, 레이나라면 문제없을 거라고 레인은 생각했다. 그녀의 재능은 특별하니까.

     셀린에겐 레이나와 같은 전철을 밟도록 했다. 먼저 단전을 생성시켜 주었다. 레이나와 같이 이미 상당한 경지의 무예 수련자였기에 단전 생성에 걸린 시간은 짧았다.

     듣자 하니 그녀가 익힌 것은 대수림에 전해지는 궁술이라고 했다. 대련으로 확인해 본 바로는 그리 뛰어나진 않은 수준의 무술인 듯싶었다.

     그런데도 용케 이 정도의 내력을 쌓았다. 역시 천골지체라고 해야 할지.

     단전을 형성시키고 무공을 전수했다. 무공은 천골지체인 만큼 무엇을 가르쳐도 좋았기에, 그녀에게 익숙한 궁술을 가르치기로 했다.

     궁술은 황실의 ‘오행궁(五行弓)’을 가르쳤다. 경지에 이르면 각 원소의 힘을 화살에 담아 내쏘는 것이 가능한, 중원에서도 그 위명이 자자한 고급궁술을.

     셀린이 영입된 경위는 레이나와 같이 스스로가 원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타산적인 계산이 더 반영되어 있었다.

     레인이 처음 그녀에게 제자가 될 것을 제안했을 때, 그녀는 레인을 별 이상한 놈을 다 본다는 시선으로 보았다. 일단 나이까지 동갑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인은 몇 번 더 제의하다 이내 평범한 제의로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전략을 수정했다.

     그는 셀린에게 제의했다. ‘네 재능을 사겠다.’ 라고.

     레인은 그녀에게 재능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고아원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금액은 백작가에서 그에게 임금으로 지불되는 돈 거의 전부였다. 그것을 매달 지급하기로 약조했다.

     솔직히 돈이라면 이전에 유적을 털었기에 넘쳐났다. 딱히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과연 여기에는 셀린도 혹할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무술을 가르쳐준다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 정도 대가라면 무시할 만했다. 그녀는 고아원 원장에게 은혜가 있었으니까.

     대가 없는 친절은 의심해도 기브 앤 테이크는 신용하는 타입의 인간이 있다. 셀린이 딱 그런 유형의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과거가 과거였다 보니.

     셀린은 얼마간 고민하다가 레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취는 레인이 백작에게 부탁해 레인의 옆방을 배정받았다.

     물론 그녀가 원할 때는 언제든 고아원을 찾아갈 수 있었다. 레인은 정말로 단순히 그녀의 재능을 키워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쓸데없이 제약 따위는 걸지 않았다.

     그렇게 타산적인 목적으로 무공을 전수받기 시작한 그녀였다. 하지만 막상 무공을 전수받고 거기에 시간을 들이게 되자 무서운 속도로 그 내용을 흡수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재능도 재능이요, 열정도 열정이었다. 그녀의 무공에 대한 욕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나의 그것에 비견될 정도로 높아졌다. 천골지체답다고 할까.

     셀린에겐 무공을 가르치고 2개월이 지난 후부터 환단을 지급했다. 재능이 재능이다 보니 레이나보다도 전해준 무공에 익숙해지는 데 걸린 시간이 짧았다.

     그렇다고 셀린의 재능이 레이나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레이나의 재능도 셀린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다만 그 종류가 다를 뿐.

     그렇게 레인은 거의 반년 가까운 시간을 제자들이 무공에 익숙해지게 하는 데에, 그리고 내력량이 늘어나게 하는 데에 투자했다. 제자들의 실력은 그 기간 동안 무섭게 늘어났다.

     그렇다고 거기에만 신경을 쏟은 것은 또 아니었다.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자신의 수련에 힘쓰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엔 고아원을 찾아갔다. 고아원으로 향할 때는 셀린 또한 항상 따라붙었다.

     일단 후원자였기에 이젠 얼마든지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처음 후원금을 가져왔을 땐 너무 큰 금액이라며 사양하던 원장도, 그것이 몇 차례나 거듭되자 쓴웃음을 지으며 고맙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낭비를 납득하지 못하는 원장은 후원금을 조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생활 수준은 확실히 높였지만, 그렇다고 무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알뜰하게 주어진 금전을 활용했다. 그러고도 남는 돈은 고아들을 더 늘리는 데에, 그리고 그들을 돌봐 줄 어른들을 고용하는 데에 사용했다.

     셀린은 ‘조금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해도 좋을 텐데, 역시 원장님답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반년간 제자들이 중원의 무공에 완숙해지도록 지도한 레인은, 그들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자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른 무언가를 가르친다던가, 혹은 비기를 전수한다던가 하는 것은 이즈음의 제자들에겐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실전.

     레인은 매일같이 제자들과 대련을 했다. 가르치는 데에 들이는 시간 거의 전부를 대련에만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전에 레이나에게 과제를 내렸을 때처럼 무식하게, 무자비하게 단련시킨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대련’의 목적을 벗어나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녀들의 수준에 맞게.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가며.

     그렇다고 해도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지적이라는 게 거의 폭언이라 할 정도로 신랄했던 탓에 두 제자는 본의 아니게 정신 수양에 공을 들여야 했다.

     대련을 하는 도중에는 일부러 제자들에게 대화할 것을 종용했다.

     본래 실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다. 검술 실력도 내력 운용 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냉정하게 정황을 살필 수 있는 눈은 ‘승리율’보다도 ‘생존율’을 높여준다.

     그렇기에 레인은 그녀들이 전투에 너무 심취해 버리는 것을 경계했다. 항상 주변을 경계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유도했다.

     대련 중 계속해서 말을 거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였다. 그녀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그렇다고 아예 정신이 팔려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선 곤란해서, 대련은 그녀들에게는 조금 힘들 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뭐든지 균형이 중요했다.

     눈앞의 적에게 집중은 하되 항상 모든 주변 상황을 경계할 수 있도록. 그것이 포인트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영지가 조금 뒤숭숭한 것 같던데.”

    “그게, 얼마 전에 인접한 영지에서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와서요.”

    “무슨 요구?”

    “그쪽 영지와 저희 영지의 경계에 위치한 광산이 하나 있는데, 지난 수십 년 동안 저희 가문에서 채굴해오던 그 광산의 소유권을 갑자기 내놓으라고 해서…….”

    “그래서 분란이 일어나고 있다?”

    “네. 광산을 개발하는 데엔 조금도 손을 거들지 않은 주제에 무리한 요구를 해오니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요. 단순히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도 아니고.”

    “그것참, 고생이시네. 백작님도.”

     이런 식으로.

     대체로 레인은 여유로웠다. 반면 제자들은 안 그래도 힘든 대련 도중에 대화에까지 신경 써야 했기에 심력 소모가 극심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성형공을 전수했다.

     레이나와 셀린은 처음 성형공을 전수받았을 때 의아한 얼굴을 했다. 대체 무슨 공능을 지닌 심법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로엘과 같은 반응이었다.

     이후 레인에게서 그 효능에 대해 듣고 경악했다.

    “노, 농담이죠? 스승님?”

    “장난이겠지? 사부?”

     참고로, 셀린은 레이나와 달리 레인에게 굳이 경어를 쓰지 않았다. 사부라는 호칭은 꼬박꼬박 붙였지만.

     아무래도 레이나와는 달랐다. 그녀가 귀족의 예법 같은 데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고아원에서 서로 반말을 텄던 것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사실 그녀도 처음엔 어색하게나마 존대를 하려고 했었다. 레인이 못 볼 꼴을 다 봤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곧바로 그만두었지만.

    “농담? 내가 왜 농담을 해?”

     레인은 되려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익히고 있는데?”

     레이나와 셀린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 진짜?”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존재한다니.”

    “내가 창안한 심법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솔직히 그 어떤 무공도 비할 수 없는 걸작이라고 생각해.”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워지는 심법은 아니다. 로엘의 말을 빌리자면, ‘원판 불변의 법칙’을 벗어나진 못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 가치는 억만금에 비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었다.

    “마음에 들어?”

     레인은 그렇게 물으며 킬킬 웃었다. 레이나와 셀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고 말았다.

     대련을 통해 실전 감각을 키우는 훈련에 또다시 6개월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여담이지만, 성형공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한동안 그것에 죽어라 매달렸다. 수련 시간 이외의 시간은 거의 전부 투자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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