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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만남(1) (74/249)

 74화. 만남(1)

 그로부터 또다시 2개월 하고도 보름 정도가 더 흘러, 새해를 맞이했다. 레인은 14살, 레이나는 16살이 되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이나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바로 백작가 저택을 떠나 잘 닦인 대로를 나아갔다.

 레이나는 옆 영지에서 벌어지는 신년맞이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영지를 떠나게 되었다.

 정중하게 초청받았기에 거절은 어려웠다. 실제로 초청받은 것은 백작이지만, 백작 본인이 쉽게 영지를 떠날 수는 없는 법. 그 대리인으로 레이나가 발탁된 것이다.

 슬슬 영약을 먹이려던 레인의 계획은 조금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최근 레이나가 전수한 무공에 상당히 익숙해진 것을 보고 기껏 결심했건만.

“…….”

 레인은 한 차례 불만스럽게 하품을 내뱉었다. 레이나가 없으면 이 저택에서 할 일이 없어진다. 벌써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제자가 귀족가의 자식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실상 금수저 of 금수저인 귀족가의 자제가 가져야 할 몇 안 되는 ‘의무’이기도 하고.

 애초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 대체로 복수의 자식을 두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다.

 귀족은 파티라던가, 축제라던가 하는 오락거리를 굉장히 좋아하는 족속. 그런 탓에 영지를 지닌 유력 귀족쯤 되면 초청장 같은 것은 수시로 찾아온다.

 그런데 영주씩이나 되는 귀족이 영지를 쉽게 떠날 수는 없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초청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는가. 초청해온 인물이 나름 왕국에서 영향력 있는, 이를테면 영주쯤 되는 인물이라면 거절하기도 굉장히 껄끄럽다.

 그러니 초청에 응하긴 응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가신들을 보내자니 그건 또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선택지는 하나다. 친족을 보내는 것.

 그것 때문에라도 대부분의 귀족들은 처첩을 들여서까지 복수의 자손을 둔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그러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개인적인 욕망이 넘쳐서 하렘 구축을 목적으로 수많은 첩을 들이는 망종들도 있긴 하지만.

 현재 하슨 백작가에서 외부로 내보낼 수 있는 인물은 레이나가 유일했다.

 모종의 이유로 결혼이 늦은 백작이 후사를 늦게 본 탓이었다. 본부인과 두 명의 첩에게서 얻은 여섯 자식 중 레이나만이 유일한 성인이었다.

 레이나가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는 다른 혈족들, 그러니까 백작의 형제자매들이 그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이젠 레이나가 성인이 됐으니(참고로 엘레노어 대륙에서는 16살 이상이면 성인으로 취급한다)그 책무를 떠맡아야 했다.

 그 덕에 레인은 외톨이가 되었다. 그나마 면식이 있는 일리나는 레이나를 따라갔다. 백작가의 다른 가솔들과는 그다지 친교를 다지지 못한 상태였고.

 지난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레인의 입지는 굉장히 단단해졌다. 그의 실력을 잘 아는 주위 인물들은 그를 제대로 존중해 주었다.

 특히 가문의 기사들의 경우, 레이나의 수업 건도 있고 해서 다들 최소 한 번쯤은 레인과 검을 맞대보았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 레인을 대함에 있어 추호의 소홀함도 없었다.

 수업 초기에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백작 부인마저도 최근에는 은연중에 레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고 있었다. 그가 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작가의 가신도 아닌 일개 가정교사일 뿐임에도 불과하고.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에게서 존중받는다는 이야기일 뿐, 그들과 친분이 깊어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태도는 레인을 어려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나마 레이나가 있는 동안에는 본인의 수련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을 그녀를 가르치면서 보냈다. 그런데 이젠 시간이 정말로 쓸데없이 남아돌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레인은 반년 만에 처음으로 백작가 저택을 나서 백작령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백작령은 시골 영지다. 헤이슨 자작령에 비해 발전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렇지만 레인의 마음에는 들었다. 백작령엔 풍작이 보장되는 비옥한 토지가 그득했다. 덕분에 전제적으로 풍요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 증거로, 거리마다 노점이 늘어서 있었다.

 레인은 오랜만에 노점에서 삶은 옥수수를 구입했다. 그것을 베어 물며 대로를 걸었다. 시골 영지임에도 어쩐지 도로만큼은 굉장히 잘 형성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최근에는 이런 식의 군것질을 거의 한 일이 없었다. 그래선지 단순한 옥수수가 굉장히 맛있게 느껴졌다.

 요 반년 동안엔 노점을 찾을 일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입이 심심하면 사용인들에게 요청해 적당히 간식을 건네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군것질을 하고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또 달랐다. 앞으로는 가끔씩 이렇게 나와서 군것질을 해야겠다고 레인은 생각했다.

“······.”

 발길 닿는 대로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외성 바깥, 빈민가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빈민가에서 살았던 만큼 딱히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었다. 레인은 그대로 빈민가 깊숙이 진입했다.

 역시 빈민가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허름해 보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민가’라는 건 명칭일 뿐이었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적의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부담스러운 감각.

 레인이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대충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한 사내아이가 침을 흘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내아이의 시선은 레인이 손에 들고 있는, 이젠 거의 알맹이가 남지 않은 옥수수를 향하고 있었다.

“……먹고 싶냐?”

 끄덕 끄덕 끄덕.

 어쩐지 신경 쓰여서 말을 걸었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상당히 빠르게.

“안 줘.”

 하지만 레인은 보란 듯이, 놀리듯이 남은 알맹이들을 전부 떼어내 입안에 털어 넣어버렸다. 사내아이의 얼굴이 단숨에 세상을 잃은 듯한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알기 쉬운 반응에 레인은 피식, 하고 웃음 지었다.

“먹던 것을 주긴 좀 그렇고. 새로 사 주마. 이 근처에 적당한 노점이 있으면 안내해.”

 어쩐지 마음이 동했다. 레인은 사내아이에게 먹을 것을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마른 체형. 어쩐지 이전에 자주 먹을 것을 나눠줬던 헤이슨 자작가의 극빈층 아이들이 연상되었다. 그답지 않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졌다.

 아이의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도도도 달려와서 레인의 손을 잡아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레인은 아이가 이끄는 대로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다다른 곳은 한 노점. 어쩐지 주위에 어린아이들이 잔뜩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낡은 원피스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수건을 둘러 묶은, 한 중년 여인이 레인 또래 소녀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즉석 볶음요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노점에 다다른 레인은 아이와 함께 간이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먹고 싶은 게 있어?”

“볶음국수! 볶음국수!”

 아이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로니?”

“어? 로니? 너 왜 여기에 있어?”

 아이의 목소리에 한참 국수를 볶던 중년 여인이 눈을 크게 뜨고 반응했다. 옆에 있던 소녀 또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여기 형이 볶음국수 사준대!”

 아이는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아는 사이?”

 레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예. 이 아이는 제가 돌보는 아이들 중 하나라서…….”

“아.”

 그러고 보니 노점 바로 뒤쪽에 무언가 있었다. 허름하지만 상당히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 간판에 쓰인 글자는 ‘고아원’이었다.

 고아원 앞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중년의 여인. 그리고 근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딱 그림이 그려졌다.

“혹시 저쪽 고아원의?”

“네. 부족하지만 제가 고아원의 원장을 맡고 있답니다. 원장이라곤 해도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저뿐이니 이름뿐인 직책이지만요.”

 중년 여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도 서슴없이 존대했다. 손님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는 건, 이 녀석.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 날 끌어들였다는 거잖아? 겉보기는 어수룩한 주제에 꽤나 영악한데?”

 레인이 큭큭 하고 웃었다.

 거기까지 말한 레인은 순간 움찔했다. 아까 전 로니라고 불린 사내아이로부터 느꼈던 시선이 주위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그들의 시선엔 강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레인은 다시 한번 키득키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제대로 걸렸군.”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폐를 끼쳤군요.”

“아뇨.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여기 볶음국수는 몇 인분이나 만들 수 있습니까?”

“네?”

“그러니까, 국수를 만들 재고는 얼마나 있냐는 겁니다.”

“아마 30인분 정도는 충분히 나올 겁니다.”

“그럼, 잘됐네요. 여기 있는 아이들 전원의 숫자가 스물둘이니 그 숫자만큼 부탁하죠.”

“그건…….”

“돈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일단 만들어 주시죠. 그냥 돈 많은 호구 하나가 괜히 기분 내고 싶어 주머니를 푸는 것뿐이니 부담 가지실 것은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레인은 주위의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고로, 오늘 너희 전원의 점심은 볶음국수다. 불만 있는 사람?”

“와아아!”

“우와아아!”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얼씨구나 하고 우르르 몰려들어 호의가 듬뿍 담긴 시선으로 레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나마 나이가 조금 있는 아이들은 그렇게 노골적인 행동을 하진 않았다. 그래도 상당히 기쁜 눈치였다.

 중년 여인은 조금 당황하다가, 이내 22인분에 달하는 볶음국수를 볶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그 냄새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 *

 국수는 상당히 맛있었다. 과연 아이들이 완성되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침을 흘릴만한 음식이었다.

 레인은 돈을 지불하는 자의 권한으로 가장 먼저 음식을 받아들고 먹어 치웠다. 상당히 맛있었기에 재차 1인분을 더 주문해 해치웠다.

“저기, 감사합니다.”

 중년 여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전해왔다. 레인은 그녀의 몫까지 볶음국수를 챙겨주었다. 그 값 또한 지불했음은 물론이다.

 국수를 판매한 이익금으로 전원의 식사를 해결해야만 하는 고아원 일동에게 레인의 돈 자랑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익금은 이익금대로 챙기고 배는 배대로 채웠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아뇨. 그냥 기분을 내고 싶은 것뿐이라.”

 레인은 적당히 감사 인사를 넘겼다.

“그보다, 장사는 매일 합니까?”

“네. 장사의 수익금으로 아이들의 생활비를 벌고 있어서…….”

“메뉴는? 매일 오늘처럼 볶음국수?”

“아뇨. 그때그때 달라진답니다. 주로 그 시기에 싸게 구매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만드는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지요.”

“그건 좋네요. 음식 솜씨는 보아하니 말할 것도 없고.”

 레인은 거기까지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올게요.”

 오랜만의 풍족한 식사였다. 레인은 나른한 얼굴로 여기저기에 늘어진 아이들 사이를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찾아왔다.

“그러니까, 레인 씨?”

“레인 씨는 무슨 레인 씨인가요. 손님이라고 대우하시는 건 좋지만, 자주 올 생각이니까 존칭은 빼시죠.”

“그렇지만 일단 손님인데.”

“예비 단골손님의 요청이라고 해두죠. 솔직히 나보다 나이 많은 분에게 존칭 듣는 것도 껄끄럽고.”

“그렇다면야.”

“오늘 메뉴는 뭔가요?”

“볶음국수란다.”

“어제와 같은 메뉴군요. 새로운 요리를 기대했는데.”

“국수가 단가가 낮아서…….”

“괜찮겠죠. 볶음국수도 상당히 마음에 들고. 1인분 주세요.”

 레인은 넉살 좋은 얼굴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해치웠다. 로엘이 보았다면 눈을 의심했을 광경.

“잘 먹었습니다.”

 레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국수 그릇을 되돌려주었다.

 그가 또다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근방에서 어슬렁거리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눈빛에 기대감이 짙게 베여있었다.

“안 됐지만, 또 사줄 생각은 없다.”

 레인은 아이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이들의 얼굴에 금세 실망감이 깃들었다.

“너희들에게 국수를 먹이면 아주머니께서 다른 메뉴를 만들어 주시지 않을 테니까.”

“……?”

“볶음국수도 좋지만, 점심은 다른 메뉴였으면 싶네요. 얻어먹어도 되겠죠? 점심. 돈은 낼 테니까.”

“배 부르지 않니?”

“방금 먹은 거야 그냥 전채요리죠 뭐.”

“점심은 고아원 안에서 먹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면야.”

“물론 상관없습니다.”

 레인은 재차 넉살 좋게 답변했다. 평소의 그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평상시 그의 분위기는 다른 이들의 접근을 물리치는, 묘하게 무거운 것이었다. 이런 부드러운 분위기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 로엘이 지금의 레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문답무용으로 총구를 겨눴을 터였다. ‘넌 누구냐?’하고 심문하려 들었겠지.

 그렇지만 레인이라고 해서 항상 무거운 분위기만 뿜으란 법은 없다. 사람이란 존재는 언제든지 감성적이게 될 수 있는 법이니까.

‘옛날 생각 나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생의 기억.

 돌림병으로 양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잃기 전까진 자신도 이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어쩐지 이들의 잔잔한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전생에 처음으로 검을 뽑아 들었던 이유도 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었다. 분명 레인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어쩐지 그에 향수를 느끼면서, 레인은 슬쩍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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