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공방(5)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칼비오는 이미 알아챘다. 로엘의 발언이 그저 찔러보는 말이 아님을.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시치미를 떼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당황했다는 방증이었다.
“제가 착각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로엘은 굳이 더 몰아붙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이 정도면 목적한 바는 다 이뤘다. 굳이 심기를 더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그가 입가에 그린 호선에 칼비오의 평정심이 일순 흔들릴 뻔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얼굴에 일순 인상이 찡그려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어느새 승강기가 1층에 다다랐다. 칼비오가 밖으로 나서기 위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동시에 로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전 중립 선언을 깨지 않습니다. 판도를 뒤엎을만한 행동도 일절 하지 않습니다.”
“…….”
“누군가가 한도 이상으로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그것은 칼비오에게 있어서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니기도 했다.
실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분의 문제다. 이렇게 상대의 흐름에 끌려가는 상황을 칼비오는 굉장히 싫어했다.
로엘이 살짝 고개를 까닥여 칼비오를 배웅했다. 이내 출입문이 닫히고 승강기는 아래층으로 자취를 감췄다.
“쯧.”
한 차례 그쪽을 힐끗 돌아본 칼비오가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되돌아와 마탑을 나섰다.
* * *
‘기반이 너무 부족하다.’
한참 신무기 개발에 열중하던 로엘이 잠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것저것 상념을 이어가다 다음 사업에 대한 쪽으로 생각이 넘어갔다. 그러자 문득 기반이 부족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 몸뚱이는 하나뿐이니. 거기다 한 가지 분야에서만 힘써서 될 일도 아니고.’
역시 인맥이 필요했다.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가.
앞으로의 사업은 공방 마법사들의 도움만으론 해나갈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공방과 아예 관련이 없을 사업도 많다. 조금 더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공간 마법. 이게 필요해. 차기 탑주로 내정되는 자와는 무조건 친분을 쌓는다.’
문득 생각하니 아쉬웠다. 공간 마법은 탑주와 그 후계자만이 익히는 것이 허락된 권능이다. 후계자 경쟁을 일찌감치 포기한 자신과는 인연이 없었다.
다른 자잘한 마법엔 관심 없었다. ‘공간 이동’, 그리고 ‘아공간’. 이 두 개의 마법만큼은 정말 익히고 싶었다.
이후에 로카인에게 매달리든 떼를 쓰든 한 번쯤 가르쳐 달라 부탁해볼 생각이긴 했지만 솔직히 가망은 없다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힘이라면, 그 힘을 가진 자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지.’
공간 마법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편리성을 지닌 힘. 그 마법을 다루는 인물의 협력만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앞으로 벌일 사업의 결실을 열 배, 아니 백 배 이상 빠르게 거두는 것도 가능하다.
‘일단 후계자 경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나.’
로카인 본인이 전면적으로 협력해 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할 리가 있나. 그렇게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
역시 동업 제안은 그에게서 마법을 전수받을 차기 탑주에게 해야 했다. 능력은 있되 탑주가 되기 전까진 별다른 직위나 의무가 주어지지 않는, 그런 상대에게.
친해질 방법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로카인과 자신이 맺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선 차기 탑주와 지속적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친분을 쌓기엔 충분한 기간.
“이걸 지금 생각해서 뭘 어쩌겠다고. 지금 당장 하는 일에나 집중해야지.”
로엘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냥 괜히 집중이 안 돼서 드는 잡념일 뿐.
로엘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신무기가 점점 그 형태를 갖춰갔다.
* * *
“후우.”
완전히 마음을 다잡진 못한 것일까. 로엘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손을 놓고 말았다.
“조금만 쉬었다 계속해야겠다.”
괜히 잡생각이 많이 드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 있는 법.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보단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 여긴 로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엘은 어깨를 주무르며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참고로 작업실에 일인용 침상을 설치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몸을 씻기 위해서라도 웬만해선 숙소에서 잠을 청하지만, 가끔씩 개발에 열중하느라 시간이 늦어질 때는 작업실에서 잠들기도 했다.
의식을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피로를 풀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엔 운기행공만 한 게 없었다.
먼저 성형공을 운용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하루도 빼먹을 수 없다. 그 중요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로엘은 순식간에 몰입해 들어갔다.
한 시간 정도 성형공을 운공하고 바로 이어서 생사공을 운용했다.
레인으로부터 심법을 전수받지 않았더라면, 로엘은 지금까지의 격무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심법은 로엘의 삶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그 반대라고 해야 할까. 전생에 과로사한 경험이 있음에도 또다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길 자처한 것은 생사공의 공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는 조금 쉬엄쉬엄 살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역시 자신에겐 맞지 않는 생활양식이었다. 이 정도로 바쁜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사실 피로회복뿐 아니라 다른 의미로도 중요했다. 다름 아닌 마법사로서의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영역 지배.’
로엘은 로카인으로부터 배운 초일류 마법사(마도사) 대표적인 능력을 떠올렸다.
마법사는 체내의 마력을 대기 중의 마나와 공명시켜 이적을 행하는 존재. 흔히 사람들은 그런 마법사가 되기 위해선 두 가지의 재능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천재적인 두뇌.
둘째가 바로 마나 감응 능력.
사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재능이냐고 한다면 첫 번째를 들 수 있다. 첫 번째 재능은 말 그대로 선천적인 측면이 강한 반면, 두 번째 재능은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엘의 경우, 첫 번째 재능은 압도적이었다. 굳이 말해봐야 입 아플 정도. 그에겐 오히려 두 번째 재능이 문제였다.
로엘은 일반적인 마법사와 전혀 다른 길을 걷기를 택했다. 그러다 보니 모종의 이유로 일반적인 마법사보다 압도적인 마나 감응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그쪽 재능이 뛰어나긴 했다. 로엘은 모르고 있지만, 그것은 언젠가 레인도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간. 필요로 하는 만큼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기약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벌인 일이 많아 바쁘기 그지없던 로엘이기에 더더욱.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레인에게서 전수받은 생사공이였다.
로엘은 지금까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심법을 수련하는 것만큼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옳을 터였다.
그런데 이 절세의 심법이 로엘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감응 관련 재능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마탑에 입문한 지 겨우 몇 달. 수련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숙련도가 굉장한 수준으로 높아졌다.
마나 감응 능력 향상 수련법은 심법의 운용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모종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는 점에서 특히나.
덕분에 그 요령을 빠르게 깨우칠 수 있었다. 부족한 수련 시간은 가볍게 상쇄됐다.
흔히 사람들은 초일류 검사의 ‘초감각’을 마도사의 ‘영역 지배’에 비교하곤 한다. 초감각이 검사의 기감이 극대화된 결과물이라면, 영역 지배는 마법사의 마나 감응 능력이 극대화된 결과물.
본래 신체 내부에서 기운을 뽑아내 사용하는 검사와는 달리, 마법사는 애초부터 신체 외부에서 마나를 재배열해 힘을 행사한다. 그렇기에 모든 마법사는 주변 공간에 대한 통제력을 자연스레 기르게 된다.
그 영역이 특정한 벽을 넘으면 극대화되게 된다. 그것을 세간에선 ‘영역 지배’라고 부른다.
그 ‘영역’ 내에선 마법사의 감각이 초일류 검사의 그것만큼이나 날카로워진다. 거기다 영역 내에선 그 주체가 되는 마법사의 마나 공명, 마법의 생성, 마력 파장의 전달 등이 극히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현재의 로엘은 이미 ‘영역 지배’를 깨우쳤다. 그 분야만 놓고 본다면 ‘마도사’라고 봐도 좋았다. 사용 가능한 마법이 없어서 그렇지.
‘생사공의 경지를 올리면 영역 지배의 범위를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요령이었다. 생사공의 경지만 높이면 그 요령을 영역 지배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적어도 로엘은 그것이 가능했다.
생사공은 그게 아니더라도 꾸준히 수련해야 할 무공이지만.
‘내 전투 스타일은 결국 기동성에서 비롯되니까.’
로엘은 두어 시간을 더 운기행공에 몰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다 보니 운공에 쏟은 시간이 길어졌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배고프다.’
우선 식사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개인 작업실을 나섰다. 숙소 구역과 마찬가지로 중층에 위치한 공용 식당을 목적지로 잡았다.
마탑 내 비치된 식당은 상당히 고급스럽다. 제국에서도 이름난 요리사들이 뷔페식으로 준비해둔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으면 되는 구조다.
오늘은 무슨 메뉴가 준비되어 있을까 기대하며 로엘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다른 마법사들도 식사를 위해 승강기 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 * *
“······?”
그날도 로엘은 자료를 들고 자신의 개인 작업실을 나섰다. 얼마 후면 판매 현황 보고를 받는 날이기도 하고 새롭게 전자제품, 아니 마력제품을 두 가지 개발했기에 상단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시선이 느껴졌다. 자연스럽지 못한 시선이. 예민한 감각이 이질적인 느낌을 전해주었다.
살짝 주위를 둘러보자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대부분이 최근까지도 이쪽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던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초반의 인상을 뒤집지 못하고 급속도로 입지를 다진 로엘을 질투하는 소수의 무리. 그래도 단지 그뿐이었기에 지금까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마치 감시라도 하는 양.’
그냥 쳐다보는 것과는 그 느낌이 달랐다. 조심스레 살피는 듯한 느낌. 딱히 해를 끼칠 것 같진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다.
‘칼비오인가.’
그가 자신을 지켜볼 목적으로 저들을 매수한 듯했다. 얼마 전 승강기에서 자신이 한 발언. 그 진위를 살피기 위해서 그런 것이리라.
이쪽이 감시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건 아닌 듯싶었다. 정말로 그랬다면 저렇게 여럿이나 매수하진 않았겠지.
오히려 그 반대.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는지 지켜보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일종의 압박이리라.
로엘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갈등의 소지를 없애려는 자신의 의도가 잘 먹힌 듯싶었다. 굽히고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가 힘든 법인데 이 정도면 잘 된 것이리라.
칼비오가 아닌 다른 인물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용의자라 해봐야 그리든 정도인데, 최근에 보인 모습으로 미뤄봤을 때 이렇게 곧바로 재차 액션을 취했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냥 지켜보는 정도라면 크게 신경 쓸 것 없겠지.’
정황을 파악하고 나니 딱히 크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로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체 작업장을 가로질러 승강기에 올랐다.
잠시 후.
1층에 도착한 로엘은 지체 않고 홀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섰다. 나름 안면이 익은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도 나눴다.
“오늘도 나가네? 어디 가는 거야? 사업 관련? 아니면 재료 구입?”
“사업 쪽입니다. 오늘도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러고 보니 이젠 상당히 유명 인사가 됐더라? 돈도 장난 아니게 벌어들인 모양이고. 나중에 한턱 쏴라?”
“나도! 그런 자리엔 나도 끼워줘야지!”
“네. 조만간 그러겠습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로엘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새 기사들과 친분을 쌓아둔 상태였다.
“크으-. 좋겠다. 나도 그만한 돈 좀 만져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러게.”
두 기사가 크게 기지개 켜며 그렇게 말했다. 마탑 소속 기사는 정규 기사와는 달리 기강이 그리 높진 않은 편이었다.
로엘이 픽 하고 웃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두 기사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쯤하고 자세를 바로잡도록.”
“!”
허스키한 여인의 목소리. 두 기사가 순식간에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곤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물을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단장님.”
“오늘도 약재를 사 오신 겁니까?”
“그래.”
‘단장?’
로엘도 들어본 적 있었다. 백여 명에 이르는 마탑 소속 기사 전원을 통솔하는 인물이자 바엘른 마탑을 대표하는 네 명의 ‘초인’ 중 하나. 마법사가 아닌 순수 검사라 여러모로 관심을 끄는 여인.
우월주의에 빠져 무인을 탐탁잖게 보는 일부 마법사들조차 그녀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무려 ‘검성’의 경지에 발을 디딘 초강자인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이름이 분명…….’
그녀는 마탑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들 중 하나. 당연히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캐틀린 데이드람 님.”
로엘은 곧바로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기회가 되면 가장 친분을 쌓고 싶었던 인물들 중 하나.’
바닥을 향한 로엘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