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공방(3)
바엘른 마탑에 일대 소란이 일었다.
마탑에 거주하는 마법사들은 수익을 얻을 시 전체 수익의 1할을 탑에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결산을 위해 로엘은 판매 현황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다.
그것을 받아든 감독관들로부터 시작된 소란이 탑 전체로 퍼졌다. 압도적인 ‘실적’에 수많은 이들이 관심을 표했다.
관전자들은 재미있어했다. 탑주가 직접 데려온 소년이 공방에 입문했다는 소식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던 이들이 금세 태도를 전환했다.
말하자면 날카로운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튀어나온 상황. 세력 구도의 변화가 기대되었다. 그 자신은 중립 선언을 했다지만 이젠 주위에서 그를 가만두려 하지 않으리라.
공방 내에서 로엘의 평판은 그야말로 수직 상승했다.
로엘이 지급한 성과급에 그를 돕던 마법사들이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이 로엘을 옹호하고 호의로 대하자 그 분위기가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실적’이 워낙 압도적이라 대부분의 공방지기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공방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했다.
반대로 소수지만 질투심을 불태우는 무리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질투는 칼벤도 받는다. 딱히 문제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 사안을 무엇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은 역시 차기 마탑 후보로 손꼽히는 4강의 일원들이었다.
* * *
4강 중 하나이자 가장 차기 탑주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엘리제 파르테인. 그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던 도중 로엘에 대한 보고서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손에 들린 보고서를 전부 읽은 뒤 생각했다.
‘요령 있게 자신에게 가해지는 관심을 조절한다 싶더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군. 하긴 탑주께서 직접 데려온 녀석인데.’
그녀는 지난 친목회 당시 로엘의 발언에 웃음 짓던 로카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애초부터 그녀는 로엘이 그저 그런 공방지기로 남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일단 중립 선언을 존중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지. 대신에 따로 친분을 쌓고.’
기본적인 대응 방침은 친목을 다지는 쪽으로. 성향을 파악할 수 없으니 섣불리 영입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이미 중립 선언을 내린 만큼 되려 반발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차기 탑주 자리에 내정되는 일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길게 내다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번 대응 방침도 그랬다. 자신이 탑주가 된 이후에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도록. 그런 관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로 모범적인 답안이다. 그렇긴 하지만 당장 종반에 다다른 후계자 경쟁을 놓고 생각한다면 너무 느긋하다 볼 수도 있었다. 그녀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
* * *
마찬가지로 4강 중 하나인 칼비오 펠트만. 그는 한참 자신의 개인 실험실에서 연구 일지를 작성하다 로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 또한 기본적으로 로엘에 대해 엘리제와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다만 대응 방침은 완전히 달랐다.
‘그 녀석은 위험하다. 세력 구도를 뒤흔들 가능성이 너무 높아.’
현재 그가 넘어야 할 산은 오로지 하나. 엘리제 파르테인뿐이었다. 그녀와 자신 외에도 강세라 평가받는 두 사람이 더 있긴 하지만, 그는 그 둘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신입이 쓸데없이 세력 구도를 변화시키기라도 했다간 곤란했다. 오로지 엘리제 파르테인을 넘어서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와중이라 주변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적어도 후계자 경쟁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그가 쓸데없는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중립 선언을 했다지만 사람 마음이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 주위에서 떠받들어 주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가 펜을 내려놓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딱히 악감정은 없다. 질투하는 마음도 없다. 다만 자신의 행보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최소한의 움직임은 취하기로 했다.
‘적당히 견제할 필요성이 있겠군. 일단 방침을 정하기 전에 감시라도 붙여둘까.’
* * *
4강이지만 그중에선 약세로 평가받는 두 사람 중 하나인 그리든. 그는 엘리제나 칼비오와는 반대로 애초부터 로엘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그는 한참 식사를 하던 중 로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가 식기를 내려놓고 입가를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 봐라.’
어쩐지 일말의 고민도 않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다 싶었더니 그런 것이었던가. 실적 보고가 지금 이뤄졌으니 필시 물품 개발은 자신이 파벌에 들어올 것을 제안하기 전부터 완료되어 있었으리라.
그리든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맹랑한 꼬맹이가 자신의 영입 제안을 받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 것인가.
‘이거 기분 나쁘네.’
밥맛이 뚝 떨어졌다.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이 득시글거리는 마탑 내에서도 오만하기로 정평이 난 인물. 자존심에 상처 입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일단은 쓸데없이 적을 늘릴 수 없는 입장이니 그대로 두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곧바로 다가와 식기를 정리했다.
“하지만, 다른 후계자 놈들과 붙어먹기라도 하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거다.”
일단은 감정보다 이성이 우선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 상황이 감성과 이성이 반대 측에 위치하도록 조성되었기에 내린 결정일 뿐.
감성과 이성이 일치하게 되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손을 쓰리라. 그땐 그 건방진 녀석이 크게 후회하게 되겠지.
* * *
그리고 마지막 4강인 메이엘 플루비나.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또 달랐다. 애초에 로엘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관심을 두지도 않았었다.
그녀가 로엘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취한 행동은 실로 간단했다. 직접 공방으로 실적을 구경하러 찾아간 것이다. 흥미가 생긴 일에는 곧바로 직접 움직여버리는 화끈한 성격.
그것은, 어찌 보면 일말의 신중함도 엿보이지 않는 행보였다. 수면 아래서 작업을 건 것도 아니고, 대놓고 이렇게 접촉하면 다른 후계자들의 경계를 사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그런 성격이기에 일부 마법사들은 그녀에게 ‘탑주 자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안녕!”
“?”
갑작스레 공방에 들어선 그녀가 로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로엘은 한참 단체 작업실에서 생산 현황 보고를 받던 중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날 기억하겠어? 역시 너무 오랜만이라 잊어버렸으려나?”
“잊지 않았습니다. 반갑습니다. 메이엘 양.”
로엘은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스레 인사를 받았다.
“이번에 네가 한탕 크게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구경하러 왔지! 괜찮다면 네가 안내 좀 시켜줄래?”
“…….”
그러니까 겨우 호기심 좀 채우겠다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한 채 자신을 찾아왔단 말이었다. 로엘이 일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 안내하겠습니다.”
“응~.”
그것도 잠시, 로엘은 이내 대응 방침을 정했다.
어차피 상대는 이쪽을 찾아와 버린 상황이다. 쫓아내거나 할 수도 없고, 쫓아내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이참에 친분이나 다져두는 게 좋으리라.
이 뒤에 있을 반향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쓸데없이 자신과 메이엘 사이를 오해해 견제를 가하려 드는 후계자가 등장하지 않기를 빌 수밖에.
잠시 뒤, 메이엘은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녀는 로엘을 따라 공방에서 생산되는 각종 물품을 살폈다. 연신 로엘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고, 연신 탄성을 토해냈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로엘의 친화력은 어찌 보면 독선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의 성격을 무난히 소화해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감탄했다.
메이엘은 겉보기엔 친해지기 쉬운 화통한 성격인 듯싶지만,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해 의외로 맞춰주기 까다로웠다. 괜히 ‘탑주 자리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니었다.
만족할 만큼 구경한 메이엘은 다음엔 자신의 연구실에 놀러 오라는 말을 남긴 채 공방을 떠났다. 상당히 시달린 로엘이 약간 피곤해진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좀 피곤한 인간이지?”
“…….”
어느새 다가온 칼벤이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로엘은 조용히 쓴웃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메이엘의 방문으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로엘은 마탑을 나서 테페론 상단으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사업 현황 보고를 받기로 한 날이었다. 열흘에 한 번씩은 이렇게 사업 현황을 전해 듣고 있었다.
지금까진 기대 이상으로 수익을 뽑아내주고 있었다. 역시 로카인이 추천해준 상단이라고 할까, 상당히 괜찮았다.
그래서 오늘을 찾아가는 김에 새로운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 볼까 생각 중이었다.
‘······?’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 로엘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 여느 때처럼 습관적으로 주위에 둘러쳐 둔 기감을 통해 이질적인 감각이 전해져왔다.
‘미행자가 있다.’
방금까진 그저 행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이쪽의 보폭에 맞춰 거리를 두고 따라붙는 이들이 그냥 행인일 턱이 없다.
‘누가 보낸 거지?’
역시 가장 의심 가는 이들은 후계자들이었다. 이쪽이 두각을 드러낸 현 상황을 가장 경계하고 있을 이들이니까.
최근에 메이엘이 방문한 탓에 경계심이 더욱 올라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려나. 역시 4강 중 하나겠지. 일단 메이엘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후계자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시기였다. 4강 이외의 제자들은 대체로 포기하고 있는 와중이리라. 그렇다면 역시 이렇게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는 이는 4강에 속해있을 터.
‘느낌상 엘리제도 아닐 것 같은데. 그럼 칼비오, 아니면 그리든인가.’
로엘은 친목회에서 본 엘리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승리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자신감에 찬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눈빛. 그런 타입의 인간은 보통 이렇게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메이엘의 공방 방문으로부터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보다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는 이가 취한 액션이리라. 그렇다고 그녀를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제외할 순 없지만.
‘역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그리든인데.’
얼마 전 승강기 앞에서 보인 그 오만한 태도. 그 자존심에 못 이겨 손을 쓴 것일까.
로엘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그렸다. 그가 곧바로 걸음을 돌려 근처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미행자가 급히 그 뒤를 따라붙었다.
어디까지나 방향은 상단이 있는 쪽으로 잡았다. 마치 지름길로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듯이. 뒤쪽을 신경 쓰는 기색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 * *
추적자, 로젤리아는 멀찍이 떨어진 채 로엘을 예의주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로 들어가는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행동이 뜻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혹시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고 따돌리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다. 그냥 지름길로 향하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향하는 방향도 그대로였다. 이쪽을 힐끔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저 모든 게 연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됐다.’
지시받은 일을 이행하기 위해 기회를 보는 중이었다. 알아서 인적 드문 장소로 이동해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녀가 곧바로 은신 마법을 발현했다. 그녀의 모습이 공기 중으로 녹아 들어가듯 자취를 감췄다. 그대로 골목길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녀에게 지시를 내린 인물은 4강의 일원인 그리든. 그는 로엘과 메이엘이 접촉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격분해서 그녀를 호출했다.
그가 내린 지시는 아주 간단했다.
[잡아 와!]
죽이거나 큰 부상을 입히지는 않는다. 상대는 일단 로카인이 직접 영입한 인재. 그가 해를 입으면 안 그래도 소속감이 강한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조용히 넘어갈 턱이 없다.
심지어 그는 최근 큰 실적을 낸 직후다. 조사단은 필시 탑 내부자를 우선 용의자로 둘 터. 그렇게 되면 4강 중 한 명인 그리든이 의심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그뿐이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그냥 조용히 며칠간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정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
그 대상이 개인 작업실을 지닌 공방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 며칠 동안에 온갖 트라우마가 심어지게 되겠지만.]
로젤리아는 키득키득 웃던 그리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게 혀를 찼다. 자기 사람을(만) 잘 챙기고 성과에 대한 보상이 확실한 점에 이끌려 그를 따르곤 있다. 그렇지만 역시 성격이 영 별로였다.
그렇긴 해도 상황 판단력 자체는 높이 사줄 만한 인물이었다. 일을 벌인다면 지금이 가장 적합할 때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으니.
상대는 큰 실적을 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진 못했다. 가진 것을 보호할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필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그것이 보완될 터다. 그러니 그를 노릴 거라면 지금이 적기다. 딱 지금 그를 노리면 상당한 이득을 뽑아낼 수 있다.
‘너에겐 안 됐다만, 요즘 내가 연구비가 좀 부족해서.’
그녀는 로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번 일은 실패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상대는 마탑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공방 마법사니까. 말하자면 무력한 존재.
몰래 접근해서 수면 물약으로 적신 손수건을 호흡기에 가져다 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뒤에 조용히 그리든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로엘이 굽어진 골목길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벽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급히 그 뒤를 따라붙었다.
‘없다!’
그리고 골목길을 돌아선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길은 쭉 이어져 있건만, 어째선지 상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런! 역시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고 따돌리려 골목길에 들어선 거였나!’
대체 어떻게 눈치챈 것일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모습을 감춘 것일까. 혹시나 싶어 그렇게나 주의하며 따라붙고 있었는데.
그녀가 한창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도중이었다.
푹.
그녀의 몸에 세침 하나가 박혀 들었다. 딱히 큰 자극이 느껴지진 않았기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와중.
푹푹푹푹푹푹푹푹.
‘······!’
연속해서 박혀 드는 세침들. 그녀가 급히 신형을 돌리려 했으나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녀의 눈이 한껏 크게 뜨였다.
마법이 유지되지 못하고 풀려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지 못하는 분인 듯싶은데.”
평탄한 어조. 그러나 그녀에겐 더없이 섬뜩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상대가 이렇게 지척까지 접근했는데도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그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더더욱.
“일단 편의상 ‘그리든 씨가 보내신 분’이라고 칭해도 될까요?”
“!”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그녀는 일순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로엘의 시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로엘의 입가에 길게 호선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