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공방(1)
로엘이 다른 마법사들에게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공방지기의 길로 들어설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이유. 그는 이전에 비해 ‘마법’에 대한 환상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굳이 직접 마법을 뿌리는 마법사가 되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단 말이지.’
그 지표가 된 것이 파르엘, 그리고 유적을 탐사하면서 임시로 함께 움직였던 마법사들이었다.
그가 경험한 바로, 마법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였다. 특히 전위가 없을 땐 더더욱.
솔직히 말해, 자신이 확립한 전투 스타일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길을 걸을 메리트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마법의 활용이 극에 이르러 그런 종류의 단점을 극복한 강자들도 있다. 로카인과 같은 규격 외의 강자도 존재하고.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특히 속성마법은 주위 환경, 상황에 따른 제약이 너무 많았다. 각 속성마다 장단점이 너무 뚜렷했다. 당장 파르엘만 해도 펠라키 산맥 내부에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지 않았는가.
속성마법 외의 마법도 있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것은 가르침을 줄 스승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들었다.
참고로 로카인의 공간 마법은 1인 전승이었다. 탑주 경쟁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없어진 것이다.
‘탑주라는 자리는 매력적이지만 엄연한 한계가 있는 자리인지라 굳이 가지고 싶지 않고.’
‘탑주’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직위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로엘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기엔 제약이 너무 많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로엘은 그 자신이 현재 확립한 스타일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도 이미 충분히 세워 둔 상태였다.
속성마법이고 특수 계열 마법이고. 그것들을 익힌다고 가정했을 때 대성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엘은 그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똑같이 노력을 들여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더 적은 시간을 들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쪽을 고르는 것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일반적인 마법이 제로에서 시작해야 하는 길이라면 지금의 스타일은 전생의 기억으로 인해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장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스타일을 개량, 발전시키는 쪽이 좋은 선택이었다.
심지어 현재의 스타일은 레인에게서 배운 생사공과의 시너지효과도 높았다. 마법사의 고질적인 약점도 적용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애초에 로엘이 마탑에 입문한 목적은 ‘강력한 마법을 배워서 초강자가 되어야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단순한 목적일 턱이 있나.
‘애초에 나는 힘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힘을 ‘필요로’하는 거니까.’
로엘은 근본적으로 레인과는 달랐다.
레인은 전생에 올랐던 경지를 되찾기를, 혹은 그 이상의 경지를 성취하기를 ‘갈망’하는 인물. 반면 로엘은 그 자신이 가진 것, 혹은 가질 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필요로’하는 인물이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달랐다. 레인에게 있어 무력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면, 로엘에게 있어 무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당연하게도, 로엘 쪽의 절박함이 훨씬 덜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는 레인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손에 넣는다.’
레인이 수련에 수련을 반복해 강해지는 동안, 로엘은 수많은 일을 행할 생각이었다. 무력뿐 아니라 재력, 세력, 인맥, 지위까지.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자신이 로엘에겐 있었다.
로엘이 가진 ‘전생의 지식’은 겨우 마법을 익히고 그로써 강해지는 데에만 이용하기엔 지나치게 유용했다. 이 찬란한 재능을, 왜 한 가지 분야에만 집중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는 어찌 보면, 노력의 ‘분산’. 범인이라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얻을 뿐인, 그리 좋다고 볼 수는 없는 선택.
‘그렇지만 내겐 이 선택이 옳아.’
실로 광오한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 주체가 로엘이기에 그저 건방지다고 비웃을 수만도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미래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첫걸음은 이곳 공방에서 내딛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기에, 로엘은 다른 동년배 마법사들이 천시하는 공방지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입성하게 된 공방. 필요한 모든 것들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준비된 개인 공방 내부에서, 로엘은 그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쏟아붓기 시작했다.
* * *
로엘은 자신의 개인 작업실에 틀어박힌 이후 두 달이라는 시간을 두문불출했다.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온통 개발에만 몰두했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구상한 물품들을 제작하는 데 소모했다.
갖춰진 설비는 충분했다. 유적 탐사를 성공한 덕분에 가진 자본도 상당했다. 부담 없이 폐인 생활을 만끽했다.
헤이슨 자작령에 거주하던 시절, 로엘은 틈만 나면 침대 위에서 엎드려 펜을 끄적이곤 했다. 머릿속에 든 지식을 기록하고 미래에 하고자 하는 일을 정리했다.
그때 미리 구상해뒀던 여러 설계도들이 지난 두 달간 빛을 발했다. 전선 대신 마력을 전달하기 위한 마력선을 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제품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었지만, 기본적으로 완성된 제품을 머릿속에 그리며 행하는 작업이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각종 전자제품이 재현되었다. 마력제품으로 탈바꿈되어.
활용도가 높은 주방기기부터 시작해서 수요성이 높은 에어컨과 난방기, 그 외 편의를 위한 몇몇 도구들까지.
기본적으로 그가 개발하는 제품은 마법학보다 현대 지구의 지식에 기반을 둔다. 그렇기에 마법학이 크게 쇠퇴한 현시대엔 제작 불가능한 물품을 개발해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마법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를 찬탄할 것이 분명했다.
“슬슬 가진 돈이 바닥을 보이는군. 판매처를 알아봐야겠는데…….”
마법에 관련된 연구는 기본적으로 막대한 재화를 소모한다. 유물을 판매한 돈으로 충당해온 연구비가 이젠 대부분 소모됐다. 더 이상은 연구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당분간 단체 공방 업무에 참여해 부족한 재화를 충당하고 다시 연구를 진행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개발된 물품을 판매해 그 수익금을 얻는 쪽이 효율이 높았다.
“문제는 내가 제국에 인맥이 없다는 건데.”
잠깐 고민하던 로엘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인맥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고 인맥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존의 인맥을 통해 소개받는 것이고.
“탑주님이나 한번 뵈어야겠군.”
로엘은 우선 거리로 나가 길게 자란 머리를 다듬고 새 옷을 사 입었다. 두 달간 관리하지 않아 꾀죄죄했던 몰골이 금세 깔끔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 곧바로 로카인을 찾아갔다. 미리 정리해둔 자료를 들고서.
* * *
“그러니까, 상인 인맥을 소개해 달란 말이냐?”
“네.”
로카인은 대뜸 찾아와 용건을 밝힌 로엘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두 달간 얼굴도 비치지 않는가 싶더니 말도 안 되는 것을 들고 왔다. 가져온 자료를 쭉 읽어 보니 감탄을 넘어 황당한 기분마저 느껴진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두 달 만에 이런 물건들을 개발해낼 수 있는 게냐.”
“언젠가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로카인이 가늘게 뜬 눈으로 로엘의 얼굴을 응시했다. 로엘은 그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마주 응시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로카인이 침음을 흘렸다. 이전에 공격용 아티펙트를 함께 제작했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가 가진 지식은 심상치 않다. 딱 보니 이번에 개발한 물품들도 마법이 아닌 그의 ‘지식’이 메인이다.
“그래, 좋다. 이만한 실적을 가져왔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다만, 앞으로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와 부탁을 건네는 건 자중해다오. 여러모로 불평이 들려오니까.”
“반발이 심한가요?”
“당장 네 개인 작업실 문제만 해도 여러모로 반발이 많았다. 나도 받기로 한 것이 있으니 되도록 부탁은 들어주고 싶다만…….”
“입장상 그럴 수만은 없으시겠죠. 이해합니다.”
“어차피 네가 실적을 올려 요직에 오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다. 보아하니 그렇게 될 때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 같군. 그러니 그동안만 참아다오.”
“알겠습니다.”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로카인을 필요로 할 일이 그다지 없어질 테고.
“추전장을 써주마. 테페론 상단을 찾아가 보거라. 그 이후의 일은 네가 알아서 해결하고.”
“감사합니다.”
* * *
테페론 상단은 바엘른 마탑과 마찬가지로 칸테른 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형 상단이다.
상단은 칸테른 시에 공급되는 각종 생필품을 다루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바엘른 마탑과 계약을 맺어 각종 마법 물품을 취급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상단의 최심부. 그곳에서 상단주인 테페론과 로엘이 마주했다.
처음 로엘이 로카인의 추천서를 들고 찾아 왔을 땐 일반 직원이 그를 응대했다. 그런데 사안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직원이 상급자를 찾고, 그 상급자가 간부를 찾았다.
끝내는 상단주가 사안을 다루게 되었다. 그만큼 로엘이 가져온 몇 가지 ‘시제품’들은 굉장한 물건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수십 년간 상계에 몸담아온 테페론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번 계약은 대박이라고.
심지어 이런 물건을 대량생산하는 게 가능하단다. 제작비용이 비싸다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
어차피 이런 물건을 사들일 자들은 귀족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물건만 좋으면 그것을 구매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좋다. 판매 대상이 귀족으로 한정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유리하면 유리하게 작용하지 나쁘게 작용하진 않는다.
‘계약 조건도 적당하다. 마탑의 권위를 내세워 불평등한 조건을 내건 것도 아니야.’
대신 반대로 이쪽에서 값을 협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상대가 상단과 계약을 맺는 게 처음이고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파고들어 보려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간파하고 있는 듯한 미소 띤 얼굴.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테페론은 알 수 있었다. 로엘이 껍데기만 어린 능구렁이라는 사실을.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애초에 마법사란 족속은 나이로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없는 족속.
게다가 무려 탑주인 로카인의 추천서를 들고 온 인물이다. 호락호락할 것이라 여기진 않았다. 그저 한 번 찔러봤을 뿐이지.
“어떤가요? 이 정도면 서로에게 좋은 계약이라고 생각하는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뭘 묻고 싶으신가요?”
“일단 이 물품의 판매는 대량 생산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추천서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로엘 님은 공방에 입문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상단주는 로엘의 요청에도 그대로 경어를 유지했다. 로엘이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로엘은 곧바로 상단주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챘다. 그는 물품의 공급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일단 마법 물품인 만큼 로엘의 제품들은 모두 공방에서만 생산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만한 물량을 제작하는 일을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당연히 상당한 인원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러나 로엘은 신입. 도움을 줄 동료도, 휘하 세력도 갖추지 못한 낙하산이다. 대량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해결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뭣하면 그때까지 계약을 미루셔도 좋습니다.”
테페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그 문제에 대해 이미 고려해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말의 걱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것을 빌미로 계약을 조금 더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힘들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계약서는 일주일 후에 작성하기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되도록 그전까진 지적하신 문제를 해결해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 * *
마탑으로 되돌아온 로엘이 승강기 앞에 섰다. 곧바로 다시 준비를 마치고 찾아갈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승강기를 기다리는 도중 그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니 아는 얼굴이었다.
‘친목회에서 본 얼굴이네. 4강 중 하나였던…….’
“이거 반가운 얼굴인데? 입문하자마자 공방에 입문한 우리 신입 아니야?”
“반갑습니다. 그리든 씨.”
전에도 느꼈지만, 여전히 거만하고 무례한 말투였다. 제자들 중 가장 권위적인 면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공방’과 ‘신입’이란 단어를 특히 강조하는 모습이 눈꼴셨다. 그러나 로엘은 그 특유의 미소를 전혀 무너뜨리지 않은 채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최근에 바빴나 봐? 아무리 탑 지하에 처박혀 사는 공방지기라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면 칼벤 녀석도 얼굴 보기 힘들긴 하지.”
“설비가 워낙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다지 듣기 좋지 못한 발언이었지만 로엘은 가볍게 흘려 넘겼다. 반발이든 뭐든 반응을 기대했던 그리든이 되레 맥 빠진 얼굴을 했다.
“흐음.”
“?”
그리든은 턱을 짚은 채 로엘을 빤히 응시했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
로엘이 의아해하는 와중, 그가 툭 하고 내뱉었다.
“너. 이전에 중립 선언을 했었지.”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선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나?”
“······?”
로엘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염두를 굴렸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그리든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자신의 파벌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는 물음이다.
‘왜 갑자기? 혹시 내가 개발한 물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벌써 새 나간 건가?’
만일 그렇다면 상당히 귀찮은 문제였다. 거절한대도 상대가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현재 자신이 개발한 물건들에 대해 아는 인물이라고 해봐야 로카인과 상단 관계자 일부뿐.
로카인에게서 정보가 새 나갔을 리는 없었다. 그나마 상단이 가능성이 있지만, 역시 가능성이 낮았다.
이런 큰 거래에 관한 내용을 상단이 함부로 발설했을 리 없었다. 설사 그들이 애초에 그리든과 모종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
그만한 사업이다. 상단 입장에선 인맥보다 이윤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로카인의 추천서까지 들고 찾아갔었으니 그들이 정보를 발설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로군. 단순히 ‘우연’인가.’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정보를 주워듣고 찾아왔다고 하기엔 태도가 너무 고압적이었다. 그냥 보인 김에 찔러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잘 생각해봐. 지금쯤이면 피부로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만, 넌 갖춘 기반이라곤 하나도 없잖아? 상당히 불편하지? 날 따르면 그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어.”
“…….”
분명 영입을 목적으로 한 제안인데 기분 나쁘게 들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런데 이상하군. 왜 갑자기 날 끌어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리든은 이쪽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시선은 그때와 달랐다. 이쪽을 무시할지언정 명백한 관심이 담겨 있었다.
‘역시 이쪽에 대한 인식이 변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주위 환경의 변화인가.’
“어차피 네 중립 선언은 그저 구두 약속에 불과하잖아? 딱히 거리낄 것도 없지 않아?”
‘이름뿐인 탑주의 제자라도 끌어들여 그 자신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부풀려 보이려는 마음을 먹을 만한 상황이라. 대충 감이 잡히는군.’
“후계자 경쟁도 슬슬 끝이 보여가는 건가.”
움찔.
로엘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리든이 반응을 보였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로엘은 자신의 추론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이전에도 말했듯, 전 중립을 지킬 생각입니다. 지금은 다른 것보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가 싶더니 자신이 친히 한 제안을 가볍게 거절하기까지. 그리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후회하지 않겠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데. 내가 차기 탑주 자리에 내정되기 전에 줄을 대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후회하지 않겠냐고 묻는 어조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금 따르지 않으면 이후에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리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로엘의 답변은 거절이었다. 그리든이 살짝 불쾌해하는 얼굴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 승강기에 올랐다.
“미안한데, 내가 좀 바빠서. 먼저 이용 좀 할게. 이해해줘.”
“…….”
로엘의 목적지는 지하층. 그리고 그리든의 목적지는 상층이다. 정 반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승강기를 이용하기 위해선 한쪽이 기다려야만 했다.
이 경우엔 로엘이 먼저 와 있었으니 그가 먼저 이용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그리든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예의조차 내버린 모습.
아무리 로엘이라도 이 상황은 조금 황당했다. 로엘이 그리든을 빤히 응시하는 가운데, 그가 버튼을 누르고 승강기를 작동시켰다.
이내 승강기가 멀어져 갔다. 로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저런 게 탑주가 됐다간 좀 곤란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