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실력의 증명(2)
“멋대로 시험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앞으로 자식의 스승이 될 인물인데 부모로서 조금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어떤 방법으로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뭐든지 좋네. 저쪽의 기사들과 대련을 해도 좋고, 자네의 검식을 선보여도 좋고.”
레인은 한 차례 볼을 긁적였다.
백작의 말마따나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귀족인 백작이 평민일 뿐인 자신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까.
보아하니 이쪽의 나이나 실력에 대한 것은 전해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자식의 스승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오고 있었다. 상대가 어린 소년임에도.
평소부터 그런 성품이지 않다면 지금의 태도는 불가능할 터였다. 레인은 일단 백작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품었다.
“그럼, 검식을 선보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초장부터 상대측 기사를 때려눕히는 것은 이미지상 별로 좋지 않을 터였다.
레인의 답변에 백작이 손짓을 하고,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 레인이 서 있는 곳은 넓은 홀. 계단 위 상석에 백작이 있고 아래쪽 좌우로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홀 중앙에 그가 오연히 섰다. 기사 하나가 다가와서 예식용으로 보이는 화려한 검 하나를 건네 왔다. 레인이 본래 사용하던 검은 귀족을 알현하는 자리인 만큼 두고 온 참이었다.
레인이 검을 받아들고 그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가벼운 자세를 취했다.
‘무슨 검식을 선보이는 게 좋을까.’
레인은 고민했다.
‘이왕 하는 거라면, 위력도 적당히 있으면서 가장 화려한 것이 좋으려나. 아니, 화려한 것보단 신묘해 보이는 종류의 검식이 나을지도. 그럴듯해 보여야 하니까.’
어쩐지 조금 긴장되었다. 전생엔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해본 일이 없었다.
실력 증명을 위해 수련해온 검식을 선보인다니, 그런 것을 해 본 적이 있을 턱이 없다. 만나는 놈들마다 염라대왕 곁으로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바빴는데 이런 쪽의 경험을 언제 쌓아봤겠는가.
일단 너무 파괴적인 성향이 강한 사파, 마교의 것은 제외하기로 했다.
‘주위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으면서 적당히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뽑자면…….’
레인은 이내 어떤 검식을 선보일지 결정했다.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劍).
사실 남에게 선보이는 용도로 쓰이기에 가장 좋은 검식은 신비문파 신녀문(神女門)의 그것이지만, 그건 여성 특화 무공이라 레인이 사용하면 위력이 반감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레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숨을 골랐다.
몸 내부의 기운과 외부의 기운을 공조시킨다는 감각으로.
한발 내뻗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한발 회수하며 검을 반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검로는 항상 완만한 곡선을 그리도록.
결을 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끊임이 없게.
스스로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것들을 통제하에 둔다는 느낌으로.
상대가 천근 무게의 힘이 실린 공격을 날려 오더라도 가볍게 흘려내 버릴 수 있도록.
만근 무게의 힘이 실린 공격일지라도 힘의 축을 비틀어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려 보낼 수 있도록.
검이 나아갈 길(道)을 가로막는 존재를 분쇄하는 것이 아닌, 가볍게 감싸 안는 감각으로.
나를 적대하는 힘을 오히려 내 흐름에 태워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무당의 검.
태극이란, 본래 음과 양의 공존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상대의 힘도, 내 힘도 ‘흐름’에 실어 통제하에 두는 것이야말로 태극혜검의 요체.
때로는 검이 반원을 그리도록. 때로는 완전한 원을 그리도록.
검로는 막힘이 없게. 그러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앞으로, 뒤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물 흐르듯 이어 팔방으로.
걸음을 내딛고 검을 휘둘렀다. 이어 걸음을 회수하고 검을 회수했다.
자연스럽게 순환된 내력이 검을 타고 흘러 빛을 발하고, 길(道)을 나아가는 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검에 실린 빛에 스스로 취해, 검무의 절정으로.
내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검 위에 또 다른 검의 형상을 덧씌웠다.
모든 방위를 점하고 검광으로 이루어진 구체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강렬한 백광을 주위로 쏟아내며 검무의 마지막을 장식.
마지막으로, 처음과 같이 가볍게 검을 늘어뜨린 자세를 취해 여운을 즐겼다.
검식을 전부 선보인 후, 레인은 고개를 들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레인은 그렇게 묻고 평가를 기다렸다.
“추호도 부족함이 없다. 아니, 넘치는군.”
“다행입니다.”
레인은 씩 하고 웃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마음이 동하긴 한 모양이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하지. 하슨 백작가의 주인, 로버트 벤 하슨이다. 앞으로 레이나를 잘 부탁하지.”
“레인입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 텐데 실례를 끼쳤군. 그만 가 봐도 좋네. 바깥으로 나가면 집사가 숙소를 비롯해 이것저것을 안내해 줄 걸세.”
“알겠습니다.”
한 차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레인은 홀을 뒤로했다.
* * *
소년이 홀을 나간 뒤, 숨을 죽이던 일동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과도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허어.”
“대단하군.”
이내 홀 내부는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특히 하루도 빠짐없이 무예를 수련하는 기사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그들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방금 전에 목격한 검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저 소년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냐? 아니, 우문이군. 그러니 네가 제 나이보다 어린 소년을 스승으로 삼을 결심을 했을 테지.”
로버트 벤 하슨의 물음. 레이나는 벙찐 얼굴로 그 물음에 답했다.
“실력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거라곤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방금 선보이신 검무(劍舞)는 정말이지…….”
그녀는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매만졌다.
로버트 벤 하슨은 무예를 수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레인이라는 소년이 방금 펼쳐 보인 검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마지막에 선보인 강기의 향연이야 그렇다 치고, 검을 모르는 자신이 봐도 느껴지는 그 현묘함이라니. 그저 검무를 견식 했을 뿐이라기엔 묘한 여운이 남았다.
하물며 정식으로 검술을 익힌 기사들이나 레이나가 받은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받은 감동은 백작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
기사들은 자신의 안계가 넓어졌음에 환희했고, 무예를 수련하지 않은 일반 가신들은 강력한 전력이 영지에 합류했음을 기뻐했다.
“레이나.”
“예?”
“잘했다.”
“……?”
“갑자기 멋대로 스승으로 모실 사람을 정했다기에 조금 놀랐었다만, 굉장한 친구를 물어왔구나.”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진하도록 해라. 저 소년이라면 틀림없이 너를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겠지.”
“예.”
“네가 검술에 얼마나 목말라하는지 잘 안다. 저 정도로 굉장한 스승까지 모시게 되었으니, 마침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
“최선을 다해 배워, 아버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마.”
그런 대화를 하던 백작이 문득 피식, 하고 웃었다.
‘겨우 단 한 번 검무를 견식했을 뿐인데,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리다니.’
레이나가 가진 무예에 관한 욕심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은 알게 모르게 여러모로 제동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부모 마음이란 것이 어쩔 수가 없다. 레이나가 원하는 것만을 해주기엔 그녀가 귀족이라는 현실이 너무 선명하니까.
그녀가 다른 귀족들에게서 얕보이지 않도록 품격 있는, 교양 있는 모습이 되길 원했다. 거기에 좋은 혼처를 찾아 축복 속에 혼례를 치르기를 원했다.
그 마음이, 그것을 은연중에 종용하던 자신의 행동이 그녀를 상당히 압박하고 있었음을 알아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가 가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
그런데, 자신의 마음이 이 순간 180도 뒤집혔다. 겨우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었는지 내심 깨달았다.
“허허.”
백작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여러모로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지만, 이런 기분이라면 얼마든지 느껴도 좋다고 생각했다.
* * *
레인은 반백의 머리칼을 깔끔하게 올린 집사가 안내해 준 방으로 향했다.
머물게 될 숙소는 백작가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별관이었다. 듣자 하니 일리나 일행도 그곳에 짐을 풀었다고.
별관에 다다라 3층 맨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가장 주위 경관을 보기에 좋은 방이었다. 1층은 식당과 홀로 이루어져 있고, 2층은 일리나 일행이 들어서면서 방이 다 찼다는 모양이었다.
“이곳입니다.”
집사가 문을 열고 손짓으로 방 내부를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레인의 시선이 방 내부를 훑었다.
‘오.’
그저 손님방일 뿐인데 지금까지 머물러왔던 그 어떤 숙소보다도 넓은 데다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역시 귀족가다웠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별관 내에 상주하고 있는 사용인들을 찾으십시오.”
“예.”
“그럼 전 이만.”
화장실이나 옷장 같은 것을 적당히 살펴보고 있는 레인에게 집사가 묵례하더니 이내 되돌아갔다.
마저 방 탐색.
다른 것보다도 비싸 보이는 모포로 덮인 침대가 마음에 들었다. 굉장히 잠이 잘 올 것 같은 외견이었다.
“마차는 미리 별관 옆 마구간에 옮겨뒀다고 했던가.”
레인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짐을 날라야지.”
특히 영약. 영약을 옮겨야 했다. 레인은 방을 나서 1층으로 향했다.
1층 홀에서 청소 중이던 메이드와 마주쳤다. 메이드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해왔다. 가볍게 묵례로 대꾸했다.
별관 옆에 붙어있는 마구간으로 직행해 마차를 꺼냈다. 하는 김에 마구간지기와 안면도 텄다.
마차 안에 고이 보관해 두었던 궤짝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쌓았다. 옆에서 마구간지기가 자연스럽게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왔다. 이런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궤짝의 숫자는 총 10개.
어마어마한 분량의 단환이 담긴, 보물의 산이었다. 그것도 로엘에게 상당량을 나눠주고 남은 것인데 이 정도였다.
“저기, 도련님.”
“?”
도련님이라니. 어쩐지 굉장히 낯간지러운 호칭이다. 일단 백작가의 정식 손님인데 나이는 어리니 호칭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직접 손을 쓰실 것 없이, 사용인들에게 지시하시면 도련님의 방으로 옮겨 드릴 겁니다.”
“됐어. 그다지 무거운 것도 아니고.”
무려 영약의 운반을 다른 인물에게 맡겨둘 리가 있겠는가.
“예? 무겁지 않다니……”
.
레인은 마구간지기와 실랑이를 벌이느니 그냥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궤짝을 다섯 개씩 쌓아 올린 탑 두 개를 양팔에 하나씩 짊어졌다. 내력을 이용해 신체를 강화했기에 무리는 없었다.
유치한 힘자랑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했을 뿐.
“이건 내가 가져갈 테니, 그 마차 좀 제자리에 넣어둬 줬으면 좋겠는데.”
“예.”
뒷정리를 부탁하자 마구간지기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들고 다시 별관 안으로, 이어 3층의 숙소로 향했다.
중간에 마주친 사용인들이 살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레인은 무시했다. 그보다 오늘치 영약을 섭취하지 못했기에 그쪽이 먼저였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상자를 한쪽 구석에 몰아놓고 단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침대 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가 단환을 입안에 털어 넣은 후 가부좌를 틀었다. 방대한 내력이 몸 안쪽에서 터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것을 붙들어 통제하에 뒀다.
내력을 순환시켜 발생시킨 흡력이 단환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끌어들였다. 일정한 경로를 따라 혈도를 순환하는 기운이 이내 점점 본래 가지고 있던 내력에 동화되었다.
완벽하게 정제되어 통제하에 둘 수 있게 된 기운을 단전에 차곡차곡 축적시켰다. 정제하고 축적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마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운공을 마친 레인이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황혼으로 물든 노을빛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
항상 그렇지만 이렇게 영약 하나 흡수할 때마다 훌쩍 시간이 흘러갔다. 매일같이 상당한 시간을 여기에 투자하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격언이 있었다. 중원의 무인들에게 전해지는 격언.
‘경지가 높아질수록 내력의 많고 적음은 의미가 없어지니, 영약이나 내단 따위에 목을 매지 말라’는. 그런 종류의 격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개소리. 내력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뭘.’
레인은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
사실 잘못된 격언은 아니었다. 강함이 내력량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
검격의 위력, 노련한 힘의 배분, 다양한 교전 경험 등등. 이런 것들은 내력의 많고 적음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내력이 많으면 좋은 것은 오직 더 오랜 시간 내력을 유지하며 싸울 수 있다는 것뿐. 본질적으로 힘의 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오로지 본신의 경지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력이 아무리 많아 봐야 자신보다 경지가 위인 상대와 맞닥뜨리면 가진 내력을 다 써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수밖에 없다. 그 상대가 자신이 가진 것보다 현저히 적은 양의 내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경지가 높아질수록 내력의 많고 적음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내력을 축적한 이는 내력량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뜻.
반대로 말하자면 내력이 많다고 나쁜 것은 또 아니었다. 내력 증진에만 너무 시간을 쏟은 탓에 일신의 경지가 일천한 수준에 머무르지만 않는다면.
역시 레인에겐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격언이었다. 이 세계는 중원과 달리 영약이 넘쳐나는 세계니까. 영약을 먹는 주체가 되는 사람이 레인씩이나 되는 인물이기도 했고.
일반 무인보다 빠르게 내력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내력 증진에 시간을 좀 할애한다고 해서 성장이 더뎌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배고프다.”
잡생각이 조금 길어졌다. 가만히 앉아있자니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된 것일 터.
‘식사는 1층의 사용인들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했었지.’
레인은 한 차례 하품을 내뱉으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