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실력의 증명(1)
푹. 푹. 푹. 푹.
연속으로 로브인의 몸에 박혀 드는 대침. 로브인의 몸이 굳었다.
레인은 로브인을 집어 들고 적당히 구릉 너머로 자리를 옮겼다. 일행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위치까지. 간헐적으로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일행의 귓가에 조금씩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인이 되돌아왔다. 로브인은 돌아온 레인의 손에 들려있지 않았다.
그사이, 귀족 소녀 일행은 산적들과 로브인들의 시신을 적당히 처리해두었다. 전투의 흔적까지 완전히 없애진 못했지만, 대체론 정리가 되어 있었다.
레인이 자신의 마차에 오르고, 일행은 다시 길을 내달렸다.
“…….”
다시 길을 내달리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인은 일리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마차를 병사 한 사람에게 맡겨두고 일리나가 타고 있는 마차로 옮겨 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뭔가 알아내신 것이 있나요?”
소녀, 일리나가 물어왔다.
“아니.”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잔챙이를 고문한 정도로는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저 이미 얻은 정보의 신빙성을 조금 높일 수 있었을 뿐. 그것이 수확의 전부였다.
“그런가요.”
일리나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이들에 대한 정보를 가문에 최대한 알려야 할 텐데, 이렇다 할 정보가 없다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희소식이라 해야 할지, 나쁜 소식이라 해야 할지. 하나 알아낸 건 있지만.”
“그게 뭔가요?”
“아무래도 추가로 습격을 가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예?”
“그러니까, 널 납치하기 위한 습격은 더 이상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어째서죠?”
“놈이 말하길, ‘이쪽’ 일에 파견된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하더군. 저쪽도 인원이 넘쳐나진 않는 모양이야.”
“그건 확실히 좋은 소식이군요.”
“좋은 소식인가? 별다른 수확도 없이 일이 일단락되는 건 달갑지 않은데.”
“…….”
소녀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만한 마법사 집단이 계속해서 습격해 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습격이 없어지는 것을 오히려 아쉬워하다니, 레인과 같은 실력자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일리나와 그녀의 수행원들로서는 레인처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습격이 없다면 저희와 함께 이동하실 이유도 없어지겠군요. 앞으로는 따로 움직이실 건가요?”
레인이 이쪽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소녀가 말했다. 레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녀석이 뱉어낸 정보를 맹신할 순 없으니까. 허위정보일 경우도 대비해야겠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허위정보를 토해냈다고 생각하긴 힘들지만.”
일리나의 쓴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이유를 듣자 하니 이쪽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표정을 심각하게 굳혔다.
“그보다, 이쪽 일이라니. 그 말 그대로라면 저희 영지뿐만 아니라 여러 장소에서 무언가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겠지.”
“그만한 규모의 조직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저희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에요. 국왕 폐하, 아니, 적어도 재상인 케이트 공작에게 알리지 않으면…….”
“알리기는 무슨. 그치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예?”
“그만한 규모의 조직이니까 오히려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왕국 전체를 주무르는 위치에 있는 녀석들만큼은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의 행사를 막으려 하는 움직임이 없는 건가요? 그자들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면 분명…….”
“가정은 몇 가지 있지만, 가장 그럴듯한 것을 뽑자면 그거겠지.”
레인은 소녀의 말을 자르며 냉소했다.
“그치들과 결탁했거나, 그치들이 적당히 날뛰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치들과 맞서는 데 들여야 할 수고가 너무 큰 탓에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거나.”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나요?”
“비약은 무슨.”
레인은 픽 하고 웃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을 것이라 자신했다. 전생에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마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정확히는 일리나 혼자서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레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보다.”
분위기를 먼저 환기시킨 것은 레인이었다.
“하슨 가에 머문다고 했었지.”
“네.”
“얼마나 머물 생각이지? 역시 영지가 안정될 때까지인가?”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당분간 얼굴 보고 살겠군.”
“그러고 보니, 레이나와 인연이 있어서 백작가로 가신다고 했었죠. 새삼스럽지만 백작가로 향하는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별건 아니고, 그냥 가정교사 노릇 좀 하려고.”
“?”
“레이나 하슨에게 검술을 가르치기로 했으니까.”
“예?”
의외의 말을 들어서일까, 일리나는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납득했는지, ‘아’ 하고 수긍했다.
레이나 하슨은 무예에 관심이 많고 레인은 초일류 검사다. 나이 쪽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자주 얼굴을 보게 되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일리나. 역시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레인은 그것이 못내 불편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만 해도 느글거리는 느낌. 귀족의 예법과 같은 것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는 별다른 주제도, 영양가도 없는 대화 몇 마디가 더 이어졌다. 이내 레인은 자신의 마차로 되돌아갔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동, 숙박, 이동, 숙박. 간혹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가볍게 퇴치했다.
더 이상 로브인들의 습격은 없었다. 얻어낸 정보는 허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몇 주를 이동하고, 이내 목적지인 하슨 백작가에 다다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성이 시야에 들어오는 평야 지대에 다다랐다.
경계를 따라 형성된 초소들. 그 모두를 자작가 깃발을 내보이는 것만으로 가볍게 통과했다. 귀족이 포함된 일행에 섞여 움직이니 편했다.
“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광경은, 온 천지에 가득한 밭과 그 밭에서 길러지고 있는 작물들이었다.
“이전에 이곳에 방문했을 땐 수확기였죠. 주위에 온통 황금빛으로 익은 곡식들이 가득해서 장관을 이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바람을 쐬겠다며 마차에서 내려 직접 말을 몰고 있는 일리나가 주변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은 6월 중순. 수확기는 조금 멀었다.
“들은 대로로군.”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슨 백작가 인물들로부터 백작령은 기름진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 중심 영지라고 들었다. 좋게 말하면 풍족하고 평화로운 영지. 나쁘게 말하자면 도시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시골 영지.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평야뿐이었다. 주로 산을 거점으로 삼는 몬스터가 대량으로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좋네.”
어쩐지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영지는, 꽤나 레인의 마음에 들었다. 그저 각박해 보이는 느낌이 옅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땀 흘리며 일하는 장정들과 그들을 돕는 아낙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들의 모습을 느긋하게 둘러보며 마차를 몰았다.
다각. 다각.
백작이 꽤 신경을 쓴 모양인지 특히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듣자 하니 영주성을 중심으로 팔방으로 뚫어진 도로가 영지 경계선까지 이어져 있다고.
형태는 헤이슨 자작령과 같았다. 그 규모는 백작령 측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어떤 의미로는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도시도 아니고 이런 농업 중심 영지에서 이만한 대로를 뚫다니, 드문 일이었다.
도시의 경우엔 물류의 이동이 활발해야 발전도가 높아지는 만큼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농업 중심 영지인 하슨 백작령은 막대한 금액을 들여 도로를 닦아놔 봐야 그다지 큰 반대급부를 기대할 수 없다.
굳이 이렇게까지 길을 정비해 두다니, 영지민들의 편의를 위해 힘쓰는 어진 영주라는 걸까. 그게 아니면 모종의 목적이 있는 것일지도.
레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영주성에 다다랐다.
역시 백작령의 심장부인 영주성이라고 해야 할까. 성문 앞에 늘어선 사람이 많았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로부터 간단한 검문을 받고 성 내부로 들어설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레인이 헤이슨 자작령에 거주했을 당시엔 사람의 유입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산맥 쪽으로 난 성문만을 이용했었다. 저렇게까지 줄을 서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통과.”
레인이 포함된 일행은 검문을 받느라 시간을 뺏기는 일 없이 옆에 난 쪽문으로 곧바로 들어섰다. 역시 귀족 일행에 섞여서 이동하니 편했다.
성 내부는 상당히 활기에 차 있었다.
왁자하게 떠들며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각자의 용무로 분주히 대로를 오가는 행인들도 눈에 띄었다.
호객을 위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상인들 또한 눈에 띄었다.
솔직히 도시처럼 발달된 영지는 아니었다. 건물들의 양식이나 사람들의 행색 등에서 그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렇지만 낙후된 영지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보통의 마을 따위완 비교가 되질 않았다. 일단은 어엿한 백작령 중심부라는 느낌이었다.
외성을 지나 내성으로.
내성 안쪽으로 진입하니, 귀족 저택스러운 느낌의 건물들이 그득했다. 아마 백작가 봉신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거처겠지.
더 안쪽으로 진입하자 근방에서 가장 거대한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백작 저택이다.
입구를 지키는 기사에게 붙잡혀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쳤다. 신분을 인정받은 귀족 소녀와 수행원들, 그리고 그 가운데 적당히 끼어 있었던 레인은 손쉽게 담장 너머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양식의 초거대 저택을 중심으로 연무장과 연회장, 갖가지 창고들과 사용인들의 거처, 그리고 잘 정돈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중간에 놓인 적당히 위압감 있는 조각상들이 주위를 둘러보는 눈을 지겹지 않게 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산책로와 곳곳에 놓인 쉼터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영지를 가진 귀족의 저택다웠다.
저택의 정문 앞에 도달하자 미리 전언을 받았는지 집사가 마중을 나왔다. 검은 머리와 흰 머리가 뒤섞인 노인이었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하슨 백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랜만이에요. 집사장님.”
말에서 내려선 일리나가 품위 있게 인사를 받았다. 그러던 중, 집사가 서 있는 뒤쪽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소녀가 뛰쳐나왔다.
“일리나! 무사히 도착했······ 어?”
“오.”
레인은 소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대충 손 흔들어 인사했다.
“스, 스승님?”
“오랜만이다.”
두 달만이었다. 제자와 재회하는 것은.
* * *
레인이 백작을 알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일리나와 그 일행은 먼저 백작을 알현, 거처를 배속받고 휴식을 취하러 갔다. 알현 우선순위는 역시 귀족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은 좋게 말하자면 풍채가 좋은, 나쁘게 말하자면 뱃살이 출렁이는 아저씨였다.
몸에 걸친 화려한 의상이 멋스러웠다. 레이나와 같은 금발 머리에 역시 금색인 콧수염과 턱수염을 적당히 기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레이나가 초빙했다는 검술 스승이란 말이냐?”
“예.”
백작의 물음. 레인은 일단 존댓말로 답변했다.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서 조금 당황스럽군.”
백작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아무래도 레인에 대한 설명을 그다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뒤쪽에 있는 레이나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쪽의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것을 밝히는 것이 껄끄러웠겠지.
그렇지만 이쪽이 숙이고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상대가 탐탁잖게 여기는 기색이라면, 이쪽 또한 삐딱하게 나가면 그만이다. 레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가장했다.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그렇진 않다. 레이나가 스스로 선택한 스승이니까. 네 신원과 실력만 확실하다면야.”
잠시 뜸을 들이던 백작이 잔잔하게 답했다. 떨떠름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에 익숙한 듯싶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실력을 증명해 보여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