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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습격(1) (55/249)

 55화. 습격(1)

 다음 날 아침.

 귀족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전속 의원을 호출했다.

 어젠 경황 중에 어정쩡하게 넘어간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분명 그 의원 소년은 자신이 ‘완치’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정신이 맑아지자마자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원은 이른 아침부터 귀족 소녀가 자신을 호출하자 당황했다. 뭔가 이상이라도 생긴 줄 알고 의복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의 맥을 짚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호위 기사들도 불안해하긴 마찬가지. 그들은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가 진맥을 받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진맥을 시작한 의원은 처음에는 의아해하더니 이내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곧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기사 한 명이 그의 표정 변화에 불안한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미, 믿을 수가 없군.”

 의원은 기사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기사는 그 말에 한층 더 불안감을 느끼며 재차 의원을 채근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의원이 진맥 결과를 일행에게 알렸다.

“아가씨의 지병이 완전히 나은 듯싶습니다.”

“뭐, 뭣!”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완전히 정상인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 선언에 모두가 흥분한 얼굴로 저마다 말을 쏟아냈다. 이내 방 안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녀는 완치 판정을 전해 듣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인들로 인해 생긴 소음은 전혀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원 소년이 말한 대로 정말로 지병이 나았다. 항상 자신을 괴롭혀 왔던, 얽매왔던 사슬이 지금 이 순간 끊어졌다.

 정상인이 되었다. 그 사실이 지금에서야 확연하게 피부로 와 닿았다. 둥둥 떠서 부유하던 사고가 그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것을 실감한 순간,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어, 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연신 옷소매로 닦아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던 한 기사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냈다.

“왜, 왜 눈물이 나지?”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정리가 되질 않았다. 겨우 명확해졌던 사고가 다시 흐려졌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 * *

 전날 밤에 마을을 떠나 길을 나선 레인은 그 뒤로 한 차례 노숙까지 해가며 귀족가 일행과 거리를 벌리는 데 주력했다.

 그 와중에 몬스터 무리와 조우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낮보다는 밤에 몬스터와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그래 봐야 아주 적은 확률에서 조금 더 높아진 정도에 불과하긴 했지만.

 운이 없는 것인지 좋은 것인지. 어쨌든 레인은 한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 덕에 흑아는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수면이 부족해진 레인이 졸음운전을 하는 시간이 조금 늘어나긴 했지만.

 그는 한참을 내달려 마을에 도착했다. 귀족 소녀 일행과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찾은 마을. 레인은 숙소를 잡고 곧바로 침상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그는 그로부터 세 시간 정도를 자고 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피로가 완전히 풀려서가 아니라 허기가 졌기 때문에.

 이번에 잡은 여관은 식당을 운영하지 않았다. 시내로 나가 따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레인은 먼지 쌓인 옷을 벗고 적당히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여관을 나섰다.

 레인은 뻐근한 목을 부득부득 소리 나게 꺾으며 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이내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식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후우.”

 레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식후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다.

 귀족 소녀 일행을 겪은 반동인지 평소보다 식사가 만족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상당히 과식을 했다. 근방에서 가장 좋은 식당인 탓에 가격은 좀 나갔지만, 레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느긋하게 차를 홀짝이던 레인의 귓가에 주변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중 상인으로 짐작되는 복장의 두 사내의 대화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대체 갑자기 왜 그 작자가 영지로 돌아와서 분란을 일으키는 걸까?”

“그야, 영주님의 병환이 깊어지자 그 자리가 탐난 탓이지 않겠나.”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야. 이미 영주님의 장남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된 지 오래인데, 가진 바 세력도, 명분도 전혀 없는 그 작자가 대체 무슨 자신감이 있어 영지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것이냐 하는 거지.”

“자네, 몰랐나?”

“?”

“그 작자가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지할 세력을 지원받아 끌고 들어왔는데, 그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 하더라고.”

“허어? 그래서 요즘 영지가 이렇게 어수선한 건가?”

“그렇지. 거의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라고 하니까. 대체 어디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끌고 왔기에 내전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세가 커진 건지.”

“그것참, 모를 일이군.”

 두 상인의 대화를 듣던 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그 마을이 방치된 모양이군. 거의 전시에 가까운 상황이라 영지병을 빼낼 여유가 없었다거나 한 건가.’

 레인이 떠올린 것은 일전에 노숙을 했던, 몬스터들에 의해 반파된 마을. 분명 그 마을이 방치된 이유는 저 두 상인의 대화 내용과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이후에도 두 상인은 이것저것 화제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더 이상 레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은 없었다.

 레인은 찻잔을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갔다.

“귀찮게 들러붙던 연놈들이 없으니까 속이 다 시원하군.”

 돌아가는 길에 레인이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는 연놈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귀족 소녀 일행이었다.

“그치들이 날 쫓아오겠다고 강행군까지 할 리는 없을 테니, 백작령에 도착할 때까진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겠지.”

 레인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 * *

 다음 날. 레인은 잠에서 깨어나기엔 조금 이른 새벽에 침상에서 일어나 곧바로 운공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한차례 운공을 하고 따로 꺼내 뒀던 영약을 섭취하고 다시 운공하고. 그것만으로 새벽은 지나가고 적당히 늦은 아침이 되었다.

 여관을 나서 적당히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마차를 몰아 마을을 벗어났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시야에 비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잘 닦인 관도뿐. 마차는 아무런 소요도 없이 반나절 동안 계속해서 달리기만 했다.

 그러던 와중, 레인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한 무리가 관도 옆쪽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는 여섯 인영. 전원이 후드를 깊게 내려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레인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이들일 텐데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곧 그들을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딱히 그들이 길을 막고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에 마차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들이 늘어서 있는 구간을 통과했다.

 이내 그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될 정도로 멀어졌다.

“뭐였지?”

 레인은 그들에게서 받은 기시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는 이런 종류의 감각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아.”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레인은 이내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 녀석들과 비슷한 기운.”

 일전에 스콜피온이라는 조직을 와해시키는 과정에서 충돌한 마법사들. 아까 전 지나친 이들은 그들과 비슷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인은 곧바로 고삐를 잡아채 마차를 돌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확인해 둘 가치 정도는 있겠지.”

 이전에 제압했던 마법사로부터는 단편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었다. 알아낸 것이라곤 그가 속한 집단이 상당히 방대한 조직이라는 것 정도.

 그 마법사들과 같은 조직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었다. 접촉하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이 관도 한복판에 포진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음은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좋은 이유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쪽’ 부류의 인간은 너무나도 많이 접해봤다. 레인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레인은 말을 재촉해 빠른 속도로 관도를 내달렸다.

 어쩌면 이렇게나 멀어진 사이에 그들이 볼일을 마치고 이미 그 자리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악한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레인은 개의치 않았다.

 일단 신경이 쓰였다면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레인의 성격이었다.

 * * *

 귀족 소녀 일행은 휴식을 최소로 줄이고 빠르게 말을 몰아 레인을 쫓았다. 이는 전적으로 귀족 소녀의 의지 때문이었다.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해!’

 소녀의 생각이었다.

 사실 소년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차원에선 쫓아가지 않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는 명백히 귀족 소녀 일행을 귀찮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귀족 소녀가 그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질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 당시엔 너무 현실감이 없었던 터라 어영부영 넘어갔는데, 이후 그것이 소녀의 마음을 상당히 무겁게 만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억지로라도 그를 쫓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혹 다시 거리를 벌리게 될지라도 우선은 따라잡아 감사 인사를 전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판단했다.

 그것이 소녀가 가진 정의감에 부합되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옳은 행동이었다. 그런 이유로 귀족 소녀 일행은 예정에 없던 강행군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인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보를 얻어낸 뒤 곧바로 마을을 떠나 관도를 질주했다. 휴식이 부족했던 탓에 일행이 전체적으로 지쳐있었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휴식은 나중에라도 취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은인을 쫓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던 와중, 관도 한가운데를 막아선 일단의 무리와 조우했다. 전원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기분 나쁜 집단이었다. 숫자는 여섯.

 일행의 선두에서 말을 몰던 기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달려가던 말들과 마차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너희는 누구냐?”

 기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검은 로브 집단을 훑었다. 굳이 관도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이들이다. 좋은 의도로 저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

“너희가 그것을 알 필요는 없다.”

“그저 모시고 있는 아가씨를 순순히 우리에게 넘기기만 하면 된다.”

 로브인들이 기사의 말을 받았다. 어딘가 이죽거리는 어투.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기사는 짐짓 위압적인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나 내심 속으론 긴장했다.

 아직 모시는 아가씨가 마차 밖으로 나와 저들에게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거늘, 저들은 그녀를 특정해서 지목했다. 이쪽의 구성원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사가 병사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마차를 중심으로 진형을 짰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이들이 얼마나 잘 훈련된 이들인지를 짐작게 했다.

“훗.”

“킥.”

 로브인들로부터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불안감이 한층 증폭된 기사가 한 차례 더 호통을 내지르려 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관도 근방의 숲에서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등장한 것은 일단의 몬스터. 숫자는 로브인들의 숫자와 같은 여섯. 하나같이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다. 위험도가 높기로 유명한 대형 몬스터였다.

 오우거가 둘, 트롤이 하나, 그리고 미노타우루스가 셋.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으로 관도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이 양측 가운데에 진형을 갖추고 섰다.

 귀족 소녀를 수행하는 병사 하나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테이머? 저들 전원이?”

“네놈들은 누구냐! 대체 무슨 이유로 본 자작가의 행차를 방해하는 것이냐!”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번 호통엔 조금 전과 같은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상대 전원이 마법사다. 그것도 대형 몬스터를 수족으로 부리는 ‘테이머’.

 저만한 전력이라면 현재 수행 병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 기사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너희가 알 필요 없다고.”

 로브인들이 피식 웃으며 기사의 말을 맞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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