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동행(3)
레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쓸데없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생각하며.
레인은 발걸음을 돌려 소녀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내 소녀가 레인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그가 일부러 인기척을 흘렸으니 당연했다.
“…….”
레인은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몰라 살짝 머뭇거렸다. 결국 두서없는 말이 이어졌다.
“마을을 구경하러 나오셨습니까?”
귀족 소녀는 갑작스런 조우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네. 마침 만월이기도 해서 이렇게 잠시 마실을 나왔답니다.”
“호위는 어쩌시고.”
“몰래 빠져나왔죠. 그냥 혼자 조용히 걷고 싶어서.”
레인이 내심 혀를 찼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조용히 정취를 즐기고 싶어 그랬겠지만, 호위기사들 입장에선 경을 칠 일이다.
‘그나저나 용케 수행원들의 이목을 속이고 빠져나왔네.’
체계적인 수련을 쌓은 기사들의 감각을 속이고 여관을 빠져나오다니. 분명 상당히 공들인 계획을 통해 탈출했을 터였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쓸데없이 행동력이 높은 소녀였다.
인사는 이쯤이면 됐다. 레인은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상당히 힘들어 보이시더군요.”
“보셨나요?”
소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목격하게 됐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선천적인 지병이거든요.”
“…….”
레인은 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적당한 화제로 대화를 유도해 자연스럽게 제안하고 싶었다. 한번 진찰해보고 싶다고. 소녀가 앓는 질환이 무엇인지, 그는 이미 대충 감을 잡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쪽엔 영 소질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제안한다니,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은가.
“못 해 먹겠네.”
결국 레인은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레인치고는 오래 견뎠다고 할 수 있었다.
갑작스레 일변한 레인의 분위기에 귀족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려니 답답해서 못 살겠군.”
“……네?”
갑작스런 박력 넘치는 언사에 소녀가 당황했다.
“손.”
“……?”
“손 내밀어 보라고.”
소녀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레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소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러나 레인은 꽉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내력을 가늘게 뽑아내 손을 통해 밀어 넣었다. 소녀의 몸속으로 침투한 내력이 그녀에 관한 정보를 낱낱이 전해주었다.
레인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옳았다.
“무슨……?
소녀가 한 층 더 당황했다. 그녀가 두르고 있던 예의 차분한 분위기가 깨졌다. 이질적인 기운이 몸속을 헤집고 다니니 묘한 거부감이 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침투시켰던 내력을 다시 회수한 레인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곧바로 귀족 소녀가 손을 회수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레인은 소녀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진찰 결과를 읊었다.
“심근경색.”
“심근경색? 그게 뭐죠?”
“네가 앓고 있는 병의 이름이 심근경색이라고.”
“!”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일까, 소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앓았다 했으니 선천적으로 타고난 모양이고. 가족이나 친지 중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
“그걸 어떻게······?”
“그 병이 선천적으로 발병하는 원인은 대체로 가족력이니까.”
귀족 소녀가 물러났던 거리만큼 다시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이 문제는 그녀에게 있어 그만큼이나 중요했다.
“제 병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어.”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소녀는 완전히 평정을 잃고 말았다.
“그, 그렇다면. 혹시 치료도 가능할까요?”
“아마도.”
소녀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레인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울 생각이었다.
심근경색은 레인도 로엘에게 지식을 전수받고서야 알게 된 명칭. 레인도 직접 치료해본 적은 없는 질환이었다.
이론상으로는 확실히 치료법을 익혔지만, 실전을 겪어보진 못했다. 이참에 경험을 쌓는 것도 좋겠다고 여겼다.
* * *
귀족 소녀와 레인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치료에 단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참.’
레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굳이 외인인 자신을 돕겠다며 나설 때부터 느꼈지만, 이 소녀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는 당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라며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려 든다면, 그 사람은 99% 수상한 인물이다. 자신이야 나머지 1% 안에 들어가니 문제없지만.
상식은 부족한데 정의감은 강하다. 거기에 행동력도 있다. 주위 사람들을 여러모로 피곤하게 만들 타입이었다.
피식.
거기까지 생각한 레인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쓸데없이 정의감은 강한 데다 지나친 행동력까지 갖췄다니. 완전히 전생의 나잖아.’
특징을 늘어놓고 보니 확실히 비슷했다. 새삼 전생의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반감을 샀을지 체감할 수 있었다.
마구간에 들러 단환을 챙겼다. 그리곤 소녀를 데리고 적당히 빈 공터를 찾아 주저앉게 했다.
소녀는 그 와중에 흙으로 옷이 더러워질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레인은 전혀 그런 것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 본색을 드러낸 레인에게선 친절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들고 있다가 지시하면 먹어.”
소녀에게 단환을 건넸다. 그런 다음 그녀의 몸 곳곳에 몇 개의 침을 박아 넣었다.
밑준비를 마치고 소녀의 뒤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녀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 채로 소녀에게 단환을 삼킬 것을 지시했다.
심근경색은 심장에 연결된 세 가닥의 혈관,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면 발병한다. 혈관의 수축, 혹은 혈전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관상동맥이 하나라도 막히면 그것이 심근경색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관상동맥이 막혀버리면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간단하다. 제대로 영양이 공급되질 않아 세포가 괴사하게 된다.
그 병은, 엘레노어 대륙에서는 불치병으로 취급받는다.
애초에 이 병에 대해 알려진 것은 심장질환이라는 것 정도다. 정보가 없으니 치료가 가능할 턱이 없다. 신관으로 인해 의원이 천시받는 세상이니만큼 더더욱.
성력(聖力)은 외상의 치료에는 뛰어나지만, 질병을 치료하는 데엔 약한 면모를 보인다. 신의 이적을 행하는 성직자일지라도 이 병은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녀라면 모를까.
한데 레인에겐 이것이 정반대로 적용된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선 외상보다도 치료하기 쉬운 것이 이런 종류의 질병이다. 로엘로부터 관련 지식을 전수받지 못했다면 그라도 치료가 불가능했겠지만.
“약을 삼킨 후엔 절대 입을 열지 마라. 기운의 소실을 조금이라도 늦춰야 하니까.”
“기운의 소실?”
“그냥 적당히 알아들어.”
치료법은 별것이 없다. 그냥 막힌 혈관을 뚫고 괴사한 세포를 떼어내면 된다. 그런 후 심장 근육 조직의 세포 활동을 활성화시키면 끝.
물론 이것은 생사의의 의술을 익힌 레인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평범한 의원은 세포 활동을 인위적으로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꿀꺽.
소녀가 단환을 입에 넣고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신체 내부에서부터 막대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좌공을 익힌 무인에겐 굉장히 유용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기운이었다. 그 기운에 의지를 부여할 수 없으니까.
그것은 귀족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기운이 순식간에 몸 밖으로 빠져나가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을 터였다. 그것을 조절해 줄 존재, 레인이 없었다면.
레인은 귀족 소녀를 대신해서 터져 나온 기운에 의지를 심어 일정한 경로로 인도했다. 다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기운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기운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막힌 혈맥을 뚫고 괴사한 세포를 떼어내는 데에 필요한 기운으로는 차고 넘쳤다.
이만큼 방대하고, 동시에 이질적인 기운이다. 그것이 몸 안을 휘젓게 되면 본래 상당한 격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선 조치를 취해뒀다. 괜히 침을 곳곳에 박아둔 것이 아니다. 귀족 소녀가 고통에 입을 벌리는 일은 없었다.
1차로 영약의 기운이 한바탕 치료를 하고 지나갔다. 2차로 레인 본인의 내력이 치료된 혈맥을 안정화시켰다. 단지 그것만으로 소녀의 병은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솔직히 중원이었다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치료 방법이었다. 생사의의 의술이라면 굳이 영약 따위 없이도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다만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뿐이었다. 대충 2주 정도. 솔직히 누가 그 귀한 영약을 치료하는 시간 좀 아끼겠다고 사용하겠는가.
단환에서 터져 나온 기운은 제 역할을 다한 후 유유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레인은 그것을 확인한 후 소녀의 몸에 찔러 넣었던 침들을 회수했다.
소녀의 겉모습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병약해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 시간 병을 앓아오며 쇠약해진 육신이 단번에 좋아질 수는 없으니.
원인이 되는 병이 치료되었으니 그도 시간문제였다. 잘 먹고 적당히 요양하면 건강한 모습이 되는 것은 문제도 아닐 터였다.
“좋아. 끝.”
레인이 옷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끝났나요?”
소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따라 일어섰다.
뭔가 가슴어림에 약간의 고통이, 곧이어 시원한 느낌이 찾아오긴 했었다. 그러나 그 이상 특별히 느껴졌던 무언가는 없었다.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 병은 완전히 치료됐고.”
“저, 정말인가요?”
소녀는 눈을 끔뻑였다.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듯.
평생 이고 살아가야 할 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지병은 그 어떤 실력 있는 의원이라도 고개를 내저을 만큼 지독한 것이었으니까.
같은 병을 앓던 할머님 또한 오랜 시간 치료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는 말 또한.
의원이 곁에서 떠나갈 날이 없었다. 아무리 귀찮더라도 주기적으로 진단을 받아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간혹 찾아오는 격통은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런 병을 타고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한 것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지병은 심지어 그녀의 입지까지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병약한 육신은 가문의 요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로서의 자격을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하다못해 다른 영지에 정략결혼으로 팔려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만큼 ‘상품성’이 없으니까.
그로 인해 어릴 적부터 받아온 가신들의 홀대는 그녀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적어도 가족들만큼은 따뜻하게 대해주었기에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병이 사라졌다고 한다. 평생 자신을 괴롭혀 온 그 지병이.
“…….”
조금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정말로 완치된 것인지도 긴가민가했고, 완치되었다고 해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레인이 한 차례 하품을 내뱉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소녀에게 말했다.
“자세한 건 네가 데리고 다니는 의원에게 물어보고. 난 간다.”
“예?”
“난 지금 바로 마을을 떠날 거다.”
“어째서 함께 가시지 않고.”
“몰라서 묻냐.”
“…….”
레인이 으르렁거리자 소녀가 입을 닫았다.
사실 소녀는 레인이 왜 이러는지 정말로 알지 못했다. 다만 분위기상 그것을 입 밖에 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아챘을 뿐.
레인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내친김이다. 귀찮은 건 다 떼고 갈 생각이었다.
* * *
레인은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여관 주인에게 셈을 치르고 마차를 마구간에서 꺼냈다.
여관 주인은 한밤중에 잠을 깨우는 진상 손님에게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 팁으로 던져준 은화 한 닢에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지만.
귀족 소녀는 레인이 마을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그녀의 외유 사실을 알아챈 기사들로부터 한 차례 원망스런 시선을 받아야 했다.
방으로 되돌아온 소녀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의원 소년에게서 치료를 받은 이후로 어쩐지 계속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치료로 인해 생명 활동이 일시적으로 촉진되면서 기력이 빠르게 소진된 탓이었다. 그녀가 그 사실까지 알진 못했지만.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른 숨소리만이 방 안을 조용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