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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동행(1) (52/249)

 52화. 동행(1)

 허리까지 이르는 갈색 머리칼이 그녀의 웃음에 살짝 흔들렸다.

 모닥불에 비친 피부가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차분한 분위기의 미인이지만, 병약해 보이는 모습이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조차 어딘가 애처로운 느낌이 든다.

“예?”

 레인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은 위험해요. 그렇게 값이 나가 보이는 마차를 끌고 다닌다면 더더욱.”

 관도를 지날 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실상 몬스터가 아닌 도적이다. 괜히 상단이 용병들을 고용하고 일반인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용병이 붙은 마차를 얻어 타는 것이 아니다.

 일개 소년이 끌고 다니기엔 값비싸 보이는 마차는 언젠가 반드시 표적이 된다. 그녀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거기에…….”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흐렸다.

 주기적으로 토벌을 하는 만큼 관도에 몬스터가 출현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 근방은 상당한 규모의 몬스터가 군집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면 알 수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제대로 토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빙긋 웃는 얼굴로 운을 뗐다.

“방향이 같다면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그편이 안전하리라 생각하는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담긴 제안. 단순히 제안임에도 그 속에 기품이 느껴졌다. 그 기품이 가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레인을 살짝 동요케 했다.

‘쓸데없는 배려지만.’

“어떤가요?”

 그녀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린 소년이고 평민임에도. 그런데 그것이 그녀의 격을 떨어뜨리진 않았다. 오히려 높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아가씨!”

 기사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의 제안은 기사들에게 있어서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 못 되었다.

 암만 상대가 그리 위협적이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신원 불명이다. 호위의 입장에서 그런 인물을 덥석 일행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아가씨.”

 기사들 중 하나가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소녀는 기사의 말을 재빨리 잘랐다.

“코펠 경,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진 않아요. 하지만 무릇 기사는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있어 주저함이 있어선 안 돼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재차 빙긋, 하고 웃었다. 무언가 반론하려던 기사가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혹시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갔다.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이 된 레인이 볼을 긁적이며 답변했다.

“하슨 백작령입니다.”

“어머?”

 소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기사들의 얼굴에 날카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우연이네요. 저희도 마침 하슨 백작령까지 가던 길이었는데.”

“…….”

 레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목적지가 같다니, 이 무슨 우연인가.

 솔직히 이들과 함께 이동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기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귀찮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리라.

‘알겠으니까 눈치 좀 그만 줘라, 이것들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야 ‘우연’이라고 했지만, 그게 그렇지 않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당연히 경계심을 품을 수밖에.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잘됐네요. 저희와 백작령까지 동행하시면 되겠어요.”

 소녀의 제안에 주위 기사들이 한층 더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었다. 눈빛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자면, ‘적당히 이유를 대고 거절해라.’ 정도가 될 터였다.

“거절…….”

 곧바로 거절하겠다고 말하려던 레인이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거절의 의사만 내비치면 자칫 무례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로엘이었다면.’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제 몸을 지킬 방도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얼마 먹지도 않은 육포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그렇게 속이 느글거릴 수가 없었다.

 소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와 동행하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소녀가 새침한 얼굴로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대놓고 눈치를 주시면 어떡해요.”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죠.”

 기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저희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외인이지 않습니까.”

 기사의 상투적인 답변에 이번엔 소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소년의 어디가 위험해 보여서 그러시나요.”

“아가씨의 말씀대로 위험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행선지가 같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그거야 우연이겠지요.”

“우연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기사들의 마음을 어찌 소녀가 모를 까. 그녀는 거기서 더이상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더 권해볼 생각이에요. 그때엔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별수 없다. 기사들이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 * *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든 새벽. 레인은 부스스한 얼굴로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올 거면 낮에나 올 것이지.”

 크게 하품 한 번. 눈가를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기사들은 모두 잠들어있었다. 깨어있는 이들은 병사 셋. 불침번인 모양이었다.

 잠시 잠에 취해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느껴본 적이 있을,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기분.

‘꽤 다양한 구성이네.’

 기사와 병사 외에도 다른 구성원이 더 있었다. 마법사 한 사람과 의원 한 사람. 마법사는 중년의 여인이었고, 의원은 늙은 남성이었다.

‘마법사는 그렇다 치고.’

의원을 굳이 외유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그저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일행에 포함시킨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의원을 귀족이 탄 마차에 동승시켰단 말이지?’

 이전에 로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세계의 신분제는 상당히 유연한 측면이 있다고. 무림이란 사회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아온 레인은 뭐가 유연하다는 것인지 잘 느끼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신분제는 신분제였다. 귀족 영애와 일개 평민이 한 마차에 탑승해 이동하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결론은 하나인가.’

 레인은 몇 시간 전에 봤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병약해 보이던 얼굴을.

 꾸벅. 꾸벅.

“…….”

 몽롱한 상태 그대로 떠오르고 부유하던 생각이 이내 끊어질 듯 희미해졌다. 납덩이가 얹힌 듯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려고 했다. 한 차례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시 들어 올렸다.

“으.”

 이내 레인은 억지로 고개를 흔들어 잠을 몰아냈다. 굳이 이 새벽에 깨어나게 만든 원인이 아직 그대로였다.

 찌뿌드드한 몸을 풀기 위해서 잠깐이나마 운공을 했다. 어느 정도 컨디션을 되찾은 뒤 자신을 깨어나게 한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레인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스며들어 사라졌다. 근방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병사들은 그가 자리를 벗어났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레인은 마을에서 남쪽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크게 하품을 내뱉으며 기지개를 켰다. 운공으로도 피로를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쿠에에에에!

 키이이익!

 전방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레인은 곧장 울음소리의 정체를 구분해냈다. 폼으로 지난 몇 년간 펠라키 산맥에서 사냥해온 것이 아니었다.

‘오크, 그리고 고블린인가.’

 근방에 몬스터 무리가 있음은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혹시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당장 오늘 새벽일 줄이야.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전부 합치면 백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니, 적은 건가?’

 자그마치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붕괴시킨 놈들이다. 그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의외로군. 적어도 대형 몬스터가 몇 개체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레인이 미간을 모았다. 모순이 생겼다.

‘분명 대형 몬스터가 날뛴 흔적이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은 숫자를 빼고 보면 그다지 볼 것도 없는 녀석들이다.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한 차례 흔들며 의문을 털어냈다.

“내가 굳이 신경 써야 할 바는 아니지.”

 검병 위에 손을 얹었다.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검광이 번쩍였다.

 늦은 밤.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 * *

 약간의 시간이 흘러.

“잘 됐네. 식사거리가 생겨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레인이 말했다.

 달빛에 늘어진 그림자가 기분 좋다는 듯 일렁였다.

“이제 다시 자야지.”

 레인이 또다시 하품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아침.

 레인은 일어나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여 길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오랜만에 노숙을 했다. 거기에 새벽에 쓸데없이 몸을 축내기까지 했다. 몸 마디마디가 쑤셨다.

 레인은 어깨를 주무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을 운용했다. 이내 체내 혈도를 순환하는 내력이 피로를 몰아내고 근육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레인은 이내 기운을 갈무리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마부석에 올랐다. 바로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가 막 고삐를 흔드려던 때였다.

“잘 주무셨나요?”

 가늘고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인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보았던 그 귀족 소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붙들린 것만 같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단 인사는 받아야 했다. 레인은 마부석에서 내려서 소녀와 눈높이를 맞춘 후 고개를 숙였다.

“예. 아가씨께서도 잘 주무셨는지요.”

“네에, 저는 잘 잤답니다.”

 소녀가 빙긋 하고 웃었다.

“상당히 이른 시간인데, 지금 바로 출발하려고 하시나 보죠?”

“예. 아무래도 예상치 못했던 노숙이라 그런지 영 잠이 오질 않더군요.”

 소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은 우리가 불편해서 빨리 자리를 뜨려는 것이 아니고요?”

“······.”

 레인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했다.

“저희 기사조장님께서 상당히 눈치를 준 모양이네요.”

“…….”

 레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살짝 볼을 긁적였다. 일단 뭐가 어찌 되었든 갈 길은 가야 했다. 그가 재차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 했던 동행 제안은 역시 거절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약간 아쉽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표정은 전혀 아쉬워하는 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레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쉽군요. 그래도 일단 방향도 같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같이 다니게 되겠네요?”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레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희 쪽도 마침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려던 차였는지라.”

“…….”

 소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쪽의 의사와 상관없이 동행하겠다. 이전에 말했듯이 안전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참으로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성질대로 그녀를 내쳐버릴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안 되지.’

 성질 좀 죽이고 사회생활에 적응해 보기로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레인은 마지막 술자리에서 열을 내던 로엘을 떠올렸다. 그가 살짝 어깨를 늘어뜨리며 속을 진정시켰다.

 눈앞의 아가씨가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은 그것이 조금 억지스러운 일이라 해도 강하게 밀어붙이는 타입.

 대하긴 조금 불편한데 그렇다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뭐라 지적하기도 어렵다.

‘귀찮은 여자에게 걸렸네.’

 레인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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