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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서장 (51/249)


 51화. 서장



 쭉 뻗은 관도를 따라 마차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간다.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고 있는 인물은 어린 소년. 밤갈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미래가 기대되는 외모를 지닌 사내아이다.


 소년의 이름은 레인. 얼마 전 헤이슨 자작령을 떠나 하슨 백작령까지 향하는 여행을 시작한 13살 소년이다.


“하암.”


 레인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내뱉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마차를 모는 것이 벌써 며칠째. 보이는 것이라곤 주위 자연 풍광과 관도뿐인 나날. 지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품속에서 길쭉한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짭조름하면서 고소한 것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입의 심심함을 달래니 조금은 지루함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다음 마을에 다다르는 건, 대충 저녁 즈음이려나.”


 영지를 떠나오기 전에 용병 길드에서 구입한 지도를 펼쳐 들었다. 지도에 표기된 거리대로라면 저녁 즈음엔 여관이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듯싶었다.


 정확히는 조금 이른 저녁 시간이겠지만, 그다음 마을에 다다르기 위해선 최소 한나절은 걸릴 터였다. 그냥 하룻밤 머물기로 결심했다.


 조금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마을마다 들려가며 여유롭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노숙은 되도록 지양하고 싶었다. 전생에 질리도록 했으니.


 그렇게 한참을 더 나아가던 와중 갈림길이 나왔다. 그중 한쪽으로 지체없이 마차를 몰았다.


 레인은 고삐를 조종하며 힐끗 반대쪽 길을 곁눈질했다. 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한 대의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듯 감싼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원 말을 타고 있었다.


 이들은 갈림길 앞에서 잠시 지도를 펼쳐보는가 싶더니 레인이 향한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레인은 습관적으로 그들에게 경계심을 품었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것을 털어냈다. 그냥 단순히 길이 같은 것뿐일 터였다.


 지금은 전생과는 달랐다. 주변에 접근하는 모든 이들을 경계하고 의심해야 했던 그때와는.


 육포를 꿀꺽 삼켰다. 할 것도 없는 김에 심법이나 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최근엔 영약이 넘쳐나다 보니 심법 운용을 통한 내력 증진이 영 신통치 않게 느껴졌다. 심법 운용으로 축적되는 내력이 1이라면, 영약 섭취로 축적되는 내력은 수백, 수천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운기행공은 하루도 거를 수 없었다. 쌓은 내력을 정제하기 위해, 그리고 내력을 운용하는 일 자체에 익숙해지기 위해.


 거기다 운기행공은 몸의 탁기를 날숨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해 정신을 맑게 해준다. 무인으로써 항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니 절대 거를 수 없었다.


 흔들리는 마부석 위에 앉아 내력을 운용하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도 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레인에게조차 무리가 되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력이 체내를 순환하며 근육에 활기를 불어넣고 혈도에 쌓인 탁기를 몰아냈다. 영약을 섭취해 축적한 방대한 내력이 조금 더 온순하게 정제되어갔다.


 끊임없이 내력을 순환시키는 단순 반복 작업. 시간을 때우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레인은 완전히 운공에 몰두했다.


 운기행공은 몇 시간이 지나고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마을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짝 실망한 레인이 무료한 얼굴로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여전히 비슷비슷한 풍광만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내 그가 품에서 새로운 육포를 꺼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육포를 씹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시선을 힐끗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 측면으로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품속에서 또 다른 육포를 꺼내 그림자가 있는 위치로 휙 던져주었다. 일견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림자 속에 숨은 암흑정령, 흑아(黑兒)가 검은 줄기로 육포를 낚아챘다.


 육포는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림자가 기분이 좋다는 것을 드러내듯 일렁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특이한 녀석이란 말이지.’


 흑아는 일반적인 정령과는 궤를 달리하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정령이라니, 그 어떤 정령도 이런 특성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었다.


‘하긴, 이것저것 던져주는 것마다 다 잘 받아먹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생각해 보면 흑아가 음식을 받아먹는 것부터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다. 정령이 에너지원을 섭취한다는 것부터가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으니까.


‘잘 먹네.’


 품에서 육포 몇 개를 더 꺼내 던져주자 바로바로 받아먹는다. 어쩐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가 된 느낌이었다.


‘좀 많이 부족해 하는 것 같긴 한데……. 어디 몬스터라도 습격해 주면 좋으련만.’


 한차례 각성하면서 흑아의 식사량이 늘었다. 아무래도 육포 몇 개 정도로는 성이 차질 않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달라고 보챈다.


 아무래도 적당히 몬스터를 사냥해 그 사체를 던져주면 만족할 듯싶었다. 그렇지만 잘 정비된 관도다 보니 몬스터와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몬스터 사체와 맞먹는 분량의 식량을 사 들고 다니기도 조금 그랬다. 그만한 식량을 사려면 상당한 금액을 지출해야 하니까.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있지만 몬스터 사체가 공짜임을 감안하면 괜히 크게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원래 여행을 떠나면 간간이 습격을 받기 마련이라고 들었는데. 어디 눈먼 몬스터 없나.’


 레인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감각에 걸려드는 기척은 뒤쪽에 있는 일단의 무리밖에 없음에도.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아, 지루하다.”


 불만 가득한 중얼거림이 주위를 울리다 스러졌다.



 * * *



 노숙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 레인은 그날 본의 아닌 노숙을 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동 끝에 도착한 마을은 이제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폐허가 되어있었다. 전혀 상정치 못한 사태였다.


‘돌아버리겠군.’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기대하며 마을을 찾아온 레인으로써는 이마를 짚게 되는 상황.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마을 곳곳에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상흔이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벽이었던 것의 잔해, 그리고 무너진 건물들 이곳저곳에 손톱으로 할퀸 듯한 거대한 상흔이.


“아니, 관도와 이어져 있는 멀쩡한 마을 하나가 무너질 때까지 치안병들은 뭘 한 거야?”


 레인이 저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도에 표기된 바로는, 이 마을은 필리언 자작령에 속했다. 몬스터들이 관도 근방에서 날뛰고 있는 동안 영지의 병력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젠장.”


 레인은 혀를 차며 노숙 준비를 했다.


“노숙은 싫은데.”


 말과는 달리 준비는 척척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그쪽 경험이 풍부하다 보니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런 다음 비상식량으로 챙겨온 밀가루와 물, 육포와 간단한 향신료를 이용해 수프를 끓…… 이려다 말았다.


 귀찮았다. 노숙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가 갑작스레 맞이한 상황이라 너무나도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육포로 식사를 때우기로 했다.


 그렇게 레인이 노숙 준비를 끝마치고 육포만으로 단출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소음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레인이 마차를 세워 둔 근방으로 다가왔다. 아까 전 기감으로 감지했던 이들이었다.


 이들 또한 레인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은 장소에서 노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내 레인과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곧이어 음식 준비를 하는지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레인은 안 그래도 식사가 부실하던 차에 좋은 냄새가 풍겨오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허기짐을 잊고자 억지로 눈을 감고 모포를 두른 채 벽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러나 레인은 조용히 잠들지도 못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들 중 한 명이 레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기 때문.


 잘 갖춰진 무장. 필시 영지병일 터였다. 그가 레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꼬마야.”


“……?”


“이쪽을 봤으면 인사를 하러 와야 할 것 아니냐.”


 뜬금없는 말인 듯싶지만 원래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노숙을 하게 된 이들은 서로 통성명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서로 경계하느라 피곤해지느니 그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일종의 매너라고 할 수 있었다.


 먼저 나서서 인사하는 건 숫자가 적은 쪽, 혹은 신분이 낮은 쪽인 것이 일반적이었고.


 거기에, 상대측에 귀족이 포함되어있다면 이것은 관례라기보다 의무에 가까워진다.


 사내의 일행엔 준귀족인 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레인 측에서 통성명을 하러 왔어야 한다고, 사내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레인은 그런 관례 따위 알지 못했다.


“……?”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레인이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여행자의 관례 따윈 전혀 모르는 모양이로군.”


 사내가 약간 짜증이 어려있던 표정을 풀었다.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면 이해하지 못해줄 것도 없었다.


 사내는 레인에게 간단히 공동 노숙시의 관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레인을 일행에게 데려갔다.


 사내의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병사가 기사로 보이는 한 사내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수고했다.”


 기사는 짧게 답했다.


“아직 어린 소년이로군. 이름이 어떻게 되나?”


“레인…….”


 일순 ‘레인이다.’라고 대답하려던 레인이 멈칫했다.


 사회생활 능력을 길러보겠다 결심한 것이 얼마 전이었다. 일단 외견적으로 상대가 이쪽보다 연장자인 만큼 여기선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써야 했다.


“……이라고 합니다.”


“그래. 일행이 있나?”


“없습니다.”


“혼자라는 건가? 보니까 마차를 몰고 다니는 것 같던데.”


 기사가 마차 쪽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마차 안에 동행자가 있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보통 마차는 최소 마부와 승객 두 사람은 탑승하니까.


 한 사람만 탑승한다면 마차를 몰아야 할 이유가 없다. 속도적인 측면에서도,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좋을 것이 없으니까.


 예외가 있다면 실어 나르는 짐이 많은 경우인데, 그런 경우라고 해도 보통은 마차가 아닌 수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마차는 비싸니까.


 레인의 경우엔 영초들을 최대한 안전하고 깔끔하게 운반하기 위해 마차를 이용하고 있지만.


 레인은 내심 귀찮았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성실하게 답변했다.


“안에는 짐이 실려 있습니다. 사정이 있어 수레가 아닌 마차를 몰고 다니고 있을 뿐이죠. 의심이 가시면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런가.”


 기사는 레인의 답변에 그런가 보다 하고 적당히 관심을 거뒀다. 굳이 마차를 이용해가며 운반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는 궁금했지만, 굳이 거기까지 파고들 이유는 없었다.


“알겠다. 이만 가 봐도 좋다.”


 어차피 상대는 어린 소년이다. 굳이 하는 일이 무엇이고 신분이 어떻고 하는 질문까진 하지 않아도 좋을 터.


 기사는 레인이 이쪽에 위해를 가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란 판단이 서자 바로 돌려보내려 했다.


 레인은 레인대로 그나마 간략하게 끝난 인사에 만족하며 돌아가려 했다. 그가 살짝 묵례하고 뒤로 돌아섰다.


 그때였다.


“잠시만.”


 일행의 중심에서 고급스러운 방석을 깔고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던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레인이 막 떼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말을 건 여인은 일행의 장이었다. 동시에 일행이 호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니, 여인이라기에는 조금 어렸다. 고급스러운 여행복, 그리고 값비싼 장신구들이 그녀가 귀족임을 짐작하게 했다.


 레인이 뒤돌아보자 그녀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호위도 없이 혼자 여행이라니, 위험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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