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각자의 길(3)
레인은 가져온 영초를 잘게 썰어서 그늘진 곳에 잘 말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워낙 분량이 많다 보니 말릴 장소를 찾는 것만도 일이었다.
그래서 창고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돗자리를 넓게 깔고 그 위에 썰어둔 영초를 넓게 퍼뜨려 공을 들여 말렸다.
“쯧. 아까워라.”
영초를 잘게 썰어내어 말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내재된 기운이 상당량 소실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거대해서 두고두고 먹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편이 그나마 가장 기운 손실이 적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레인은 잠시도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혹시나 말리는 도중에 들쥐 한 마리, 아니, 벌레 한 마리라도 접근할까 걱정한 탓이었다.
혼자선 하루 종일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억지로 로엘을 불러다가 함께 창고를 관리했다. 당연하게도, 로엘은 투덜댔다.
“……뭐야 이게.”
“어쩔 수 없어. 이만한 분량을 통째로 관리하려면.”
“나 오늘은 누나랑 쇼핑 나가기로 했었다고.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사과하고 약속 취소하고 왔더니…….”
“불평은 거기까지만 해. 네가 챙겨갈 몫도 있으니니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엘도 할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주위를 경계하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너 최근에 그 적룡대원이랑 많이 어울리더라? 그쪽은 아주 대놓고 널 좋아하는 기색이었고.”
“…….”
유적 탐사 이후, 플로라는 로엘을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그게 굉장히 티가 났다. 주위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쉽게 알아챌 정도로.
“너도 싫은 기색은 아닌 것 같다?”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얼굴 예쁘고, 능력 있고, 성격까지 좋은데.”
로엘은 순순히 인정했다. 내심 로엘을 놀려먹으려던 레인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담백하게 인정해 버리면 오히려 놀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로엘은 레인이 하려는 말을 잘랐다.
실질적으로 그녀와 로엘이 이어지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레인이 말하려 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엘은 얼마 뒤면 자작령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미 로카인에게 마탑 입문 의사를 전하고 그 날짜까지 정했으니까. 그게 유적 내로 진입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날짜를 레인이 백작령으로 떠나는 시기에 맞췄으니 남은 시일은 겨우 열흘 남짓. 그 시간이 플로라와 로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다.
로엘이 제국으로 건너가 버린 후엔 두 사람이 연애 감정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질 터였다. 각종 통신기기가 넘쳐나는 21세기 지구에서도 장거리 연애는 힘든 법인데 이 세계에선 어떻겠는가.
두 사람이 앞으로 연인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결국을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플로라나 로엘이 적룡대, 혹은 마탑 입문을 포기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벌써부터 거리를 둘 필요는 없지. 뭘 잘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어때서. 상대를 기만한 것도 아니고.”
자세한 내용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로엘은 앞으로 자신이 소속될 곳이 있으며 곧 자작령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플로라에게 이미 밝혔다.
이야기가 잠깐 일단락되고.
레인이 턱을 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약을 전부 단환으로 제조하려면 시일이 빠듯해. 미안하지만 조금만 도와줘. 이거 말리는 작업만 끝내고 나면 데이트건 뭐건 맘껏 해도 좋으니까.”
“그래.”
“이왕이면 나중에 데이트하는 김에 이것들 보관할 궤짝이랑 실어서 이동할 마차도 좀 구해 주고.”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그리고 나 여행하는 동안 먹을 식량도 좀. 사는 걸 잊고 있었네.”
“뭔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그 뒤로도 두 소년의 잡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순식간에 열흘이 지나갔다.
레인은 열흘 내내 환단을 제조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았다. 그가 빌린 창고 안쪽은 매일같이 약 향이 떠나가질 않았다.
그가 환단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종이에 싸서 궤짝에 넣어 정리한 후 그것을 전부 마차에 실었다. 그렇게 백작가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로엘은 레인을 도와 이틀 정도를 보내고 남은 시간 동안 적룡대원들과 어울려 다녔다. 주로 플로라와 함께 다녔고, 지속적으로 다른 대원들과도 친교를 다졌다.
그러던 와중 플레이나가 레인이 뭘 하는지 궁금하다며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기세 좋게 창고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그녀에게 레인은-
“바쁘니까 돌아가시죠, 아줌마.”
-라고 답해 그녀를 길길이 날뛰게 만들었다. 그녀가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려는 것을 주위 대원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로엘은 그제야 그녀가 왜 자신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강요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원흉이 바로 근처에 있었을 줄이야.’
로엘은 허허롭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헤어질 때가 다가왔다.
그동안 제법 친해진 적룡대원들이 두 소년을 배웅해 주었다. 이들이 위치한 곳은 외성 바깥쪽 관도 근방이었다.
“이젠 작별이라니, 아쉽네.”
“그러게요.”
한쪽에선 로엘과 플로라가 아쉬운 눈빛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묘하게 애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안 물어봤네. 어디로 가는 거야?”
“하슨 백작가.”
“귀족가에 영입된 거란 말이지.”
플레이나는 반대쪽에서 레인에게 행선지와 일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귀찮아하는 레인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행선지가 어디야?”
플레이나가 한쪽에서 한참 플로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로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제국.”
레인은 짧게 답했다.
“제국?”
플레이나는 뜻밖의 대답에 머리를 갸웃했다.
제국에 가는 것치곤 로엘의 짐이 너무 단출했다. 당장 국내에 위치한 하슨 백작령을 목적지로 삼은 레인마저 마차를 장만했는데, 로엘은 달랑 배낭 하나만 메고 있었다.
배낭이 빵빵하게 차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든 것의 90퍼센트 이상이 일전에 레인이 채집한 거대 약초로 만든 무언가임을 플레이나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보기엔, 전혀 장거리를 여행하려고 준비한 티가 나질 않는데?”
적룡대 부대주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물어왔다. 참고로 적룡대원들은 로엘과 플로라가 묘한 분위기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끼어들기가 뭣해서 나머지 전원이 레인 쪽에 붙어있었다.
“마중하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마중?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꽤나 지체 높으신 양반인데, 어지간히 저 녀석이 눈에 찬 듯싶더군요.”
참고로 레인은 그녀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나름 연습한답시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어투가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일행은 레인이 말한 ‘로엘을 마중할 사람’을 기다렸다. 적룡대원들은 마중 나오는 이가 아마 마차를 끌고 올 것이라 짐작해 대로 쪽에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기다리던 도중 플레이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로엘과 플로라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살살 놀려댔다.
특히 플로라에게 ‘로엘이 굉장히 지체 높은 분의 마음에 들어서 굉장한 대우를 받으며 스카웃되는 모양이다’라며 ‘미리 꽉 잡아둬야 하지 않겠냐’고 괜히 압박감을 줘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리다 잠시 뒤.
일행의, 정확히는 적룡대원들의 얼굴이 한껏 경악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쩍쩍’하고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초일류 검사들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다음으로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나머지 대원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허공.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은 마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확장되어 그 크기를 불리더니,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그렇게 생겨난, 말 그대로 허공에 생성된, 어떤 통로.
적룡대원들은 그 통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그리고 전율했다.
모를 수가 없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강자. ‘공간의 대현자’ 로카인 파르테인의 독문마법.
<공간 이동(Space Movement)>.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된 적룡대원들의 몸이 굳었다. 반대로 이것이 익숙한 두 소년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이 영감님, 뭘 하다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심지어 레인은 하품과 함께 불경스러운 말을 뱉어냈다.
그 검은 공간 너머에서부터, 배꼽까지 내려오는 백색의 수염과 멋들어지게 기른 백색 머리칼이 확 눈길을 끄는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가뿐히, 아무런 소음도 없이 지상에 안착했다.
노인은 주변을 슥 하고 한번 여유롭게 둘러보더니 곧바로 로엘을 발견하곤 입가에 반가운 미소를 그렸다.
“그래, 갈 준비는 마쳤느냐?”
“예. 딱히 준비할 것이 많지도 않았던지라.”
로엘이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런데 못 보던 얼굴들이 있군.”
“이번에 유적을 함께 탐사하면서 친해진 분들입니다. S등급 용병대인 적룡대죠.”
갑작스럽게 로카인에게 소개된 여인들이 크게 당황했다. 대주인 플레이나가 허둥지둥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탑주님. 적룡대를 이끌고 있는 플레이나라고 합니다.”
“아, 만나서 반갑네.”
로카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바로 가겠느냐?”
로카인이 물었다. 로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은 너무 놀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플로라에게 싱긋 웃는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이만 갈게요.”
“그, 그래.”
플로라는 넋을 놓고 있다가 한 템포 늦게 로엘의 말을 받았다. 그녀가 뒤늦게 로엘을 돌아보았을 땐, 이미 그가 노인 바로 앞까지 다다른 뒤였다.
“그럼, 가자꾸나.”
노인은 또 다른 공간의 문을 생성했다. 그리곤 먼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로엘은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통로에 들어서기 직전에 로엘이 잠깐 멈춰서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레인이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적룡대원들이 얼떨떨하게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공간의 문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사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적룡대주였다. 그녀는 곧바로 남은 한 소년, 레인이 있는 곳으로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로엘이 소속될 곳이라는 게 바엘른 마탑이었어?”
“그렇습니다만.”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대답. 플레이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무려 바엘른 마탑이다. 거기다 대현자로 대륙에 위명이 자자한 탑주가 직접 마중하러 오기까지 했다.
레인이 귀족가의 일원이 되는 일도 충분히 굉장한 일이지만, 이건 비교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 이렇게 담담한 반응이라니.
플레이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너무 어려서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도 이만 갑니다. 아줌마.”
“아줌마라고 하지 마!”
플레이나는 충격의 여파가 채 가시기 이전임에도 ‘아줌마’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해 빽 하고 소리쳤다. 레인은 그녀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흔들었다.
말 한 마리가 이끄는 소형 마차가 관도를 따라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마차는 적룡대원들의 시야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멀어졌다.
“후…….”
적룡대원들이 조금 아쉬운, 그리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플로라가 특히 서글픈 얼굴을 했다.
플레이나는 플로라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얹고 쓰다듬으며 적당히 위로해 주었다.
“굉장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녀석들이었어.”
그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