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유적(10)
소소한 잡담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너희도 실은 용병이었다고?”
“네.”
“등급은?”
“B등급입니다.”
“B? 그 정도 실력을 가졌는데?”
플레이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로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용병이 된 지 얼마 되진 않았거든요. B등급일 뿐 아니라 임시 딱지까지 달렸죠.”
“그렇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당장 적룡대 대원인 플로라 또한 B등급이었다. 그녀 또한 용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
“아쉽네. 너희가 남자만 아니었다면 당장 적룡대 대원이 되지 않겠냐고 오퍼를 넣었을 텐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는 이미 소속될 곳이 확정된 상태입니다. 제의를 받았더라도 긍정적인 답변을 드리긴 힘들었을 것 같네요.”
“이럴 땐 빈말로라도 아쉽다고 대답해야 하는 거다. 이 녀석아.”
“하하.”
플레이나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에 땔감을 몇 개 더 던져놓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둘에겐 정말 감사하고 있어. 사실, 너희가 아니었다면 우린 이곳에서 전멸했을 거라 생각한다.”
“설마요.”
“아니, 정말이야. 너희가 일행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니, 도저히 좋은 결말을 맞이했을 거란 생각이 들질 않더군.”
“…….”
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일 뿐이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쪽을 띄워주는 발언은 역시 부담스럽다.
“으음…….”
그런 와중에 플로라가 신음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고갈되었던 기력이 이제야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힘겹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 깨어나셨군요.”
“여기는?”
“아직 유적 내부에요. 정확히는 컨트롤 룸.”
“그렇구나.”
플로라는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배시시 웃음 지었다. 눈을 뜨자마자 망막에 비쳐든 대상이 로엘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요 녀석, 나는 보이지도 않지?”
플레이나가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아, 이모. 무사하셨네요.”
“너희들이 애써 준 덕분이지.”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가디언은?”
“무사히 처리했어요. 플로라 양.”
로엘이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 플로라가 움찔하더니 따라서 빙긋, 하고 웃었다.
“양은 뭐냐, 양은. 나이도 어린 게 느끼하게.”
플레이나는 닭살이 돋는다는 듯 팔을 긁었다. 조금은 과도한 리액션에 로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어색한가요?”
“많이. 용병이라는 녀석이 말투가 꼭 어디 귀족가 자제라도 되는 것처럼 징그럽기 그지없네.”
“…….”
로엘은 볼을 긁적였다.
나름 매너 있고 정중한 모습을 연출하려 했는데, 상대가 용병이다 보니 오히려 반감을 산 모양이었다. 호칭을 바꾸면 될 일이긴 하지만.
“그럼 호칭을 바꾸죠. 그러니까, 플로라…….”
‘씨’라는 호칭을 붙이려던 로엘의 의도는 곧바로 무산됐다.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자르고 치고 들어오는 플레이나로 인해서.
“누나. 누나라고 부르면 딱 적당하겠네.”
“예?”
“뭘 그래? 플로라가 나이가 더 많으니 누나가 맞고. 누나 정도면 호칭으로 적당하잖아?”
분명 호칭으로 적절하긴 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그 호칭으로 부르기엔 너무 급작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웬만큼 넉살이 좋지 못하다면 꺼려질 수밖에.
로엘이 재차 쓴웃음을 지었다. 플레이나가 의도하는 바가 뻔히 보였으니까. 그래서 적당히 수긍하고 호칭 문제를 일단락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플레이나의 발언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번엔 내 호칭을 정해야지.”
“?”
“네가 직접 정해봐. 날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까?”
그녀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압박감이 굉장했다.
로엘이 식은땀을 흘렸다. 플레이나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아챘다. 플로라의 호칭 문제를 지적한 것이 이것을 위한 포석이었을 줄이야.
플레이나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비례해 압박감이 한층 더 높아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설마 갈등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움찔.
“에이, 뭘 그리 고민하고 그래. 정 고르기 어렵다면 내가 정해줄까? 자, 따라 해봐. 누나~.”
“저…….”
“누. 나.”
로엘은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양팔을 들어 올려 항복 선언을 했다.
“예. 누님.”
“누님이라. 조금 딱딱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일단 그 정도로 봐주지.”
플레이나는 그제야 압박을 거두고 씩 웃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레인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가신 탓에 얼굴에 유쾌한 기색이 흘렀다.
“다른 대원들에게도 좀 다녀올 테니, 둘이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어.”
그녀는 그 말과 함께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쾌한 분이시네요.”
로엘이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나저나 걱정이야. 저래서 언제 시집을 가실지…….”
“다 들린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플레이나가 플로라의 말에 반응했다.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데다 플로라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었는데도. 역시 인간을 초월한 감각의 소유자인 초일류 검사다웠다.
“이크.”
플로라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플레이나가 가만 안 두겠다는 듯 주먹을 흔드는 시늉을 했다. 로엘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큭큭 웃었다.
“아.”
그러다 플로라가 휘청,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직 낮의 오버워크로 인한 피로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쓰러진 방향이 로엘 쪽이었다.
로엘이 곧바로 그녀를 받아 들어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하는 김에 본인의 다리를 베개로 그녀에게 내주었다.
플로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로엘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누르며 만류했다.
“그냥 그대로 쉬어요. 오늘 상당히 무리했으니까. 전 괜찮아요.”
로엘은 뭔가 살짝 고민하는 기색으로 턱을 긁적이다 이어서 말했다.
“누나.”
플로라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그녀는 도저히 로엘과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황급히 등이 보이도록 돌아누웠다.
“…….”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겉으로 되도록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플레이나도 플로라도 즐거운 분위기 속에 슬픔을 감춰놓고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그것이 치솟아 올라온 것이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플레이나는 용병계에 오래 몸을 담근 만큼 동료의 죽음에도, 우울한 감정을 털어내고 일어나는 데도 어느 정도 익숙했다. 그러나 플로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억지로 숨을 삼키며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음이 로엘에게 전해졌다. 흐르는 눈물이 로엘이 내어준 다리 위로 떨어져 옷을 적셨다.
로엘은 플로라가 현재 겪고 있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설픈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그는 다른 행동은 일체 않고 그녀가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유적에서의 밤이 깊어갔다.
* * *
레인이 일행과 다시 합류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유적 곳곳을 이 잡듯 뒤지며 돌아다니다 돌아온 모양.
성과가 있었는지 정말로 거대한 영약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어…….”
식물 줄기로 칭칭 얽어 놓은 거대한 약초. 그것을 바라보는 용병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들은 의원의 생리를 용병인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있어서 레인이 짊어지고 온 것은 전날 그렇게나 자신들을 괴롭혀온 괴식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암만 몸에 좋은 약초임을 머리론 알고 있다 해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영약은 정말로 거대했다. 일반 약초의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
아쉽게도 유적 내부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지만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굉장한 쾌거였다.
“진짜로 찾았네.”
“어.”
“기분 좋아 보인다?”
“안 좋을 리가 있겠냐.”
다른 용병들과 달리 그 약초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로엘은 잘 알았다. 그는 묘하게 들뜬 기색으로 다가온 레인을 치하해 주었다.
이후 일행은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 유적을 벗어났다.
“바깥이다!”
“와아아!”
유적 바깥으로 발을 내디딘 용병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겨우 하루밖에 머물지 않은 유적이었지만, 체감상 한 달은 체류했던 것만 같았다. 바깥세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간밤에 제대로 휴식을 취한 덕에 초일류 검사 셋이 포함된 일행은 앞을 가로막는 펠라키 산맥의 몬스터들은 별 무리 없이 격파하며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참고로 레인은 완전히 짐 덩이로 전락했다. 간밤에 전혀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에 결국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만 것이다.
“더럽게 무겁네, 진짜.”
로엘은 연신 투덜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 큰 사내놈을 업고 가야 하는 것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닌데, 함께 짊어지게 된 약초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플로라가 옆에서 쿡쿡 웃었다. 앞쪽에서 일행을 이끌던 플레이나 또한 로엘 쪽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웃음을 흘렸다.
* * *
영주성에 도달하자마자 일행은 유물을 팔아치울 대상을 물색했다.
자작령에는 마탑이 없었다. 대신 몬스터 사체가 심심찮게 거래되는 만큼 거상들은 많았다. 각자 발품을 팔고 인맥을 총동원해서 적당한 상인을 물색했다.
유물의 값은 마탑이 가장 잘 쳐주긴 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조금 값을 덜 받더라도 상인들에게 팔아치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영주성으로 귀환하면서 그들이 유물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많았다. 마탑이 있는 도시까지 물건들을 직접 운송하려 했다간 꼬여들 무뢰배들이 넘쳐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유물은 유물. 최상위 사치 품목이자 마법 연구재료다. 원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품목인 만큼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그것도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다음으론 용병 길드에 이번 유적 탐사를 보고했다. 원래는 진작 보고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유물을 처분하는 일에 비교해 우선순위가 밀렸기에 조금 늦어졌다.
용병 길드에서는 보고를 접수하고 일행에게 소량의 금화를 지급하며 치하했다.
길드에 소속된 용병이 유적을 탐사하는 데 성공하면 길드에선 그 유적 탐사 성공기를 길드를 홍보하는 용도로 써먹는다. 대신 탐사대에겐 소량의 금화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여기, A등급 용병패입니다.”
“감사합니다.”
레인과 로엘, 그리고 플로라는 이번 탐사의 성공을 업적으로 인정받아 임시 딱지를 떼어냄과 동시에 A등급으로 승격했다.
레인과 로엘의 경우 용병이 된 이후 겨우 세 차례 활동을 했을 뿐이지만, 워낙에 굵직한 일들만 처리해왔기에 임시 딱지를 떼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금으로 코팅된 A등급 용병패 겉면에는 와이번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전의 초라한 임시 발급 용병패와는 확연하게 비교되었다.
사실 두 소년이 단숨에 A등급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명성 높은 적룡대주의 추천이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 나름의 보답이었다.
어차피 곧 용병 일과는 멀어질 두 소년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다. 두 소년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승급 축하해. 자, 이건 너희가 부탁한 부산물 판매 대금.”
“아, 벌써 다 팔렸나요?”
유물을 처리하는 김에 그동안 쟁여뒀던 각종 몬스터의 부산물도 처분할 수 있었다. 적룡대원들에게 대리 판매를 부탁했다.
물론 수수료는 지급했다. 유물을 처분한 돈에 몬스터의 부산물을 판매한 값이 더해지자 상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일반인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정도는 되었다.
참고로 수익은 반으로 갈랐다. 조만간 헤어질 두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