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유적(1)
조직 ‘스콜피온’을 무너뜨린 날로부터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로엘은 그날도 빈민가 한복판에 자리 잡고 무료로 치료술을 베풀고 있었다. 참고로 오늘은 애나 모녀는 오지 않았다. 이젠 그리 손이 부족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참 진료를 하는 와중에 레인이 찾아왔다.
“뭐야? 영약 채집 안 갔어?”
“어쩐지 오늘은 묘하게 의욕이 안 나서. 조금만 있다가 갈 거야. 구경 좀 하자.”
“뭐 볼 게 있다고.”
레인은 로엘이 앉은 자리 옆쪽에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오늘은 환자가 별로 없네.”
“요새 계속 무료로 의료 봉사를 했잖냐. 이젠 숫자가 줄어들 때도 됐지.”
“그런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레인은 가만히 로엘이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많이 늘었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는데, 보아하니 이젠 뭐 부족한 점이 없었다. 유일한 단점이었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한 상태였다.
그런데 찾아온 환자들 사이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대충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묘하게 기품이 있는 아름다운 여인.
이목구비가 비슷한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딸인 듯싶었다.
“아.”
여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해서 찾아왔는데, 정말로 너희였구나.”
그녀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레인이 앉은 자세 그대로 턱을 괴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스콜피온 아지트에 붙잡혀있던 여자?”
“기억하는구나.”
여인은 빙긋, 하고 웃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레인의 말이 짧아졌음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흐음.”
레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알아보지도 못할뻔했다. 그때의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야말로 고아한 미인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그때엔 감사를 받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잖니. 너희들.”
“딱히 감사를 받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레인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렇더라도, 너희는 우리 모녀의 은인이야.”
여인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옆에 선 여자아이가 우물쭈물하더니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고마워.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른 고개 드세요. 너무 그러시면 저희가 부담스럽습니다.”
로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만류했다.
“조만간 본가로 되돌아갈 생각이야.”
“?”
“사실 가출했거든. 지금은 죽은 남편과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했지.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레인이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관심 없다는 듯한, 쓸데없이 서론이 길다고 말하는 듯한 무료한 눈초리.
여인은 그것이 되려 마음에 들어서 빙긋 웃었다.
“이번 일을 통해 여러모로 느낀 바가 있었거든. 언젠가 함께 되돌아가기로 한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데다 가문의 반응이 두렵기도 해서 지금까진 미뤄왔지만, 더 이상 그럴 수만은 없겠지.”
“잘 생각하셨네요.”
로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정적으로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실리적으로 봤을 땐 저 판단이 옳았다. 그녀 본인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녀의 딸을 위해서라도.
이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가장을 잃은 집안은 그저 삶이 고달파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의 경우엔 외모가 외모인 만큼 더더욱.
“피하지 않을 생각이야. 무슨 일이든 감내해서 반드시 이 아이가 설 자리를 만들겠어.”
“응원할게요.”
“고마워. 나중에 여유가 되면 찾아와줘. 기필코 제대로 자리 잡은 후에 성대하게 대접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레인이 여전히 무료한 얼굴로 내용을 확인하고 로엘에게 쪽지를 넘겨줬다. 로엘은 웃는 얼굴로 내용을 확인하곤 그것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젠 가볼게. 정말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후에 시간이 되면 반드시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로엘이 정중하게 배웅하고, 레인은 가만히 하품을 내뱉었다.
* * *
슬슬 찾아온 환자를 모두 치료해갈 무렵.
“너희 둘 중 누가 최근에 이 근방에서 유명세가 자자한 소년 의원이냐?”
한 사내가 두 소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춤에 장검을 매단 사내였다. 차림새로 미루어보아 용병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선 이쪽을 평가하듯,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었다.
레인이 이건 또 뭔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환자는 아닌 것 같은데.”
“맞아. 환자는 아니지. 이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의원에게 제안할 일이 있어 찾아온 사람이거든. 어쨌든, 누가 의원이지?”
“둘 다. 환자가 아니라면 그냥 돌아가지. 보시다시피 바빠서.”
레인이 퉁명스레 대꾸하며 뒤쪽을 가리켰다. 사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가 시선을 되돌렸다.
남은 환자는 둘뿐이었다. 그냥 대놓고 거절의 의사를 비친 것이다. 사내의 고압적인 태도가 못내 고까웠던 탓이었다.
“딱히 돈을 받고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라던데, 상관없지 않아?”
“넌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는 상관있는데.”
“음,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면 조금 당황스러운데. 미안하지만 거부권은 주지 않을 생각이거든.”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 매인 검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무슨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우리 쪽에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시간도 촉박하고. 이런 강압적인 방법은 취향이 아니다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네. 얌전히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알아듣기엔 무리가 없었다. 사내는 모종의 이유로 의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거부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갈 생각이었고.
‘왜 죽지 못해 안달이지.’
당연하게도, 두 소년은 사내의 협박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로엘이 옆에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레인이 진작 달려들어 흠씬 두들겼을 터였다. 어디서 같잖은 개수작을 부리냐며.
로엘이 레인을 제지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어투로 미루어보아 분명 동료들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사실 패거리가 몰려온다고 무서울 건 없긴 했다. 그렇지만 두려움과는 별개로 귀찮은 상황에 직면하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엘의 생각은 온건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저걸 어떻게 적당히 인적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슥삭 할 방법이 없나?’
다른 사람 눈에만 안 띄면 그만이다. 조금 더 계산적일 뿐, 기본적으로는 레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로엘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소년이 사내를 보는 시선이 바뀌게 되었다. 귀찮음과 짜증에서 흥미로.
사내가 고개를 가깝게 들이밀더니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곤소곤 이야기해온 내용 때문이었다.
“너희들에게도 그리 나쁘진 않은 이야기일 거야. 무려 유적 발굴 탐사대에 끼워주겠다는 거니까.”
* * *
유적.
흔히 ‘던전’이라고도 불리는 고대의 유산.
찬란한 고대문명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유물이 잠들어 있는 곳.
동시에 그 유물을 지키는 갖가지 함정과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곳.
발견하기부터가 극히 어렵기로 유명하며, 발굴에 착수하더라도 상당한 전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유물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그곳에 삼켜져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그런 곳.
수많은 영웅의 일대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유적이었다.
불세출의 영웅인 플루넴은 하르벤 유적에서 발굴해낸 ‘성휘(聖煇)’를 베이스로 각 종족의 비의를 결집시켜 ‘성검(聖劍)’을 제작, 대륙을 파멸 직전까지 몰아간 최악의 흑마검사 게르반을 베었다.
대현자 클라이럼은 플리체 유적에서 초고대 마도시대의 전격 계열 마도서를 획득, 이후 클라이럼 마탑의 초대 탑주가 되었다.
과거 대륙제일용병으로 칭송받은 용병왕 카벤트는 유적에서 발굴해낸 검술서와 아티펙트 덕에 검과 마법 모두에 능통한 마검사로 거듭나 세인들에게 칭송받았다.
물론 모든 유적에 그런 특별한 보물이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유적은 그냥 적당한 보물과 유적을 품고 있을 뿐. 심한 경우엔 유적 내부에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적’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유적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마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용병 사내를 쫄래쫄래 따라나선 두 소년, 레인과 로엘이었다.
‘역시 어린애들이라 그런지 미끼를 던지자마자 덥석 무는군.’
용병 사내는 뒤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지며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
두 소년은 이 근방에 신전이 없어 고용 불가능한 사제를 대신해 데려가는 것뿐. 말하자면 위급 상황을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빈민가 사람들에게 ‘신의’니 뭐니 하는 거창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 해도 일개 의원일 뿐이었다. 신의 기적을 행하는 정식 사제에 비하면 격이 한참 떨어지는.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유적탐사인 만큼 최대한 인원을 확충해 두려는 이유로 두 소년을 초빙했을 뿐. 단지 그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적탐사가 성공하더라도 두 소년의 몫으로 돌아갈 지분은 거의 없을 터였다. 아니, 애초에 두 소년이 살아서 돌아갈 수나 있을까.
그것도 모르고 희희낙락해서 따라나선 두 소년을 용병 사내가 비웃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뭣도 모르는 애송이만큼 다루기 쉬운 게 없다니까.’
사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킬킬 웃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년이 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군.”
“제 딴에는 자기가 우리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말로만 듣던 유적 탐사대에 끼어 볼 기회인데, 저 정도는 봐주자고.”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
두 소년은 용병 사내 모르게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그보다, 어쩔 거야? 유물이 발굴되면 가로채서 튀기라도 할 거야? 보아하니 우리 몫을 제대로 챙겨주지는 않을 모양인데, 알아서 챙겨야 하지 않겠어?”
“글쎄, 어쩔까.”
대화의 주제가 위험한 쪽으로 굴러가기도 했다.
이내 도착한 곳은 외성 안쪽에 위치한 여관이었다. 여관 1층은 식당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레인과 로엘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용병 사내가 사람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소개하자면-”
얼마나 유명하다느니, 얼마나 뛰어나다느니 하는 잡다한 설명을 걸러내고 정리하자면 이랬다.
먼저 용병단에 몸담지 않은 개인 자유 용병 열다섯. 특정 단체와 관련된 자들은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애초부터 배제했다는 설명이었다.
참고로 전원 A급 용병이었다. 레인과 로엘을 데려온 사내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급하게 섭외한 마법사가 2명. 꽤 쓸만한 실력을 지닌 이들로, 한 명은 길드에 공지를 내걸어 섭외했고 나머지 한 명은 인맥을 이용해 합류시켰다고 했다.
마지막이 이 무리의 장인 용병대. 유적을 찾아낸 장본인들이며, 용병대의 간판 등급은 무려 S. 규격 외 등급.
심지어 구성원은 전부 여성. 그 이름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적룡대’였다.
대주와 부대주, 그리고 단원 하나가, 그러니까 전체 인원 중 절반이나 되는 숫자가 검호급에 이른 초일류 검사였다. 그야말로 초호화 전력.
남은 셋 중 둘은 함정 설치와 제거, 정찰, 길 찾기 등 다방면에 뛰어난 특기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선천적인 이능의 힘을 지닌 특수능력자였다.
이들의 명성은 로엘도 한두 번 즈음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왕국에 위명이 자자한 이들이니까.
“그리고 이쪽은 방금 섭외해온 의원들. 이 근방에서는 꽤 유명한 모양이야.”
레인과 로엘 또한 유적 탐사대 일행에게 소개되었다.
“안녕하세요.”
“…….”
로엘은 곧바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고, 레인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일행을 슬쩍 둘러보기만 했다.
“의원? 그 꼬마들이?”
고용된 자유 용병들이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의원이 신관의 대역이라지만, 유적에 들어가게 되면 만약의 상황에는 그들에게 목숨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두 소년은 외견에서부터가 신뢰감을 주기엔 무리였다. 다른 건 제하고서라도, 일단 나이부터가.
“어머, 정말로 저 애들이 의원이라고?”
“우와, 우와! 진짜로?”
반면 적룡대 대원들은 반색했다.
일단 두 소년은 외견에서부터 먹고 들어갔다. 성형공으로 인해 바람직하게 성장하고 있는 얼굴이니 당연했다. 나이가 좀 어리지만, 오히려 여인들에겐 그것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참고로 적룡대 구성원들은 막내를 제외하면 모두가 두 소년과의 나이 차이가 상당한 이들이었다. 다들 최소 나이가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여인들.
용병 생황을 오래 하느라 다들 노처녀이긴 했다. 그렇지만 조금 일찍 가정을 꾸렸다면 레인과 로엘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대원이 전체 중 절반이나 되었다.
임시 동료일 뿐이라지만, 그래도 우락부락한 남정네들만 주변에 늘어나서 불편했던 차. 주변 용병들에 비해 확연히 눈을 즐겁게 해주는 어린 소년들이 나타난 것이니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단 실력은 믿어도 될 듯해. 주변에 평판이 자자하더라고. 몇몇 사람들은 신의라고까지 부르던데.”
“신의?”
신의라니, 굉장히 거창한 호칭이었다. 절로 의심이 갈 정도로. 사실 두 소년을 초빙한 용병도 직접 전해 들은 내용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래도 못 미더웠는지, 용병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소년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