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난전(1)
쏟아져 내리는 모래의 비.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바윗덩어리.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혼란스러운 감정이 가득 담긴 인간의 비명 소리.
“으아아아!”
“너 이 미친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내 잘못 아니야!”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가는 사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
웅크린 채 머리를 감싸 쥐는 사람.
그리고 아까 잠형 검술을 선보인 용병의 멱살을 틀어쥐고 짤짤 흔드는 탐색꾼 용병.
패닉에 빠진 주위 인물들을 시야에 담은 채, 레인은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움직여야 하지? 이 상황에선 기사고 용병이고 보조역이고 전부 위험하다. 실력이 어떻고 하기 이전의 문제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레인! 의뢰인과 그 주변인의 보호가 최우선이다! 빨리 움직여!”
그 와중 상황에 맞지 않게 침착한 로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확한 방침이 담긴 외침.
레인은 곧바로 몸을 날려 의뢰인인 레이나에게 접근, 왼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꺅!”
곧바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발검.
쩌억!
바위는 절삭음과 함께 반으로 갈라져 레인이 위치한 자리를 비껴갔다. 레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을 검집으로 되돌린 후 이동, 이동, 이동.
쏟아지는 바위를 피하며 두 기사의 뒷덜미를 손가락에 걸어 낚아챘다. 너무나도 빠른 움직임. 레이나가 헉하고 숨을 삼켰다.
“꽉 잡아.”
레인이 기사들에게 다른 기사들을 끌어안을 것을 지시했다. 다섯 명의 기사가 ‘어어’ 하는 사이에 그의 손에 두 줄로 주렁주렁 매달렸다.
“으헉!”
“우아아아!”
직후 그가 곡예를 넘듯 허공을 날았다.
뿌리째 뽑혀 굴러떨어지는 나무를 밟고 도약,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에 휩쓸리지 않도록 부피가 큰 바위들을 밟아 재도약.
재해의 현장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레인은 계속해서 경신법을 발휘했다.
기사들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야에 비치는 광경이 휙휙 바뀌니 어지러움이 일었다.
“의뢰주를 확보했으면 다음은 보충역들! 휩쓸리면 가장 위험할 것 같은 사람들 위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와중에 들려오는 로엘의 외침 소리. 레인은 곧장 어느 지점으로 달려가며 한쪽 팔로 안아 들고 있던 의뢰주를 허공으로 내던졌다.
“꺄아······ 크엑!”
이어 검지로 떨어지는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목이 졸렸는지 볼썽사나운 신음을 내뱉는 소녀에게 관심을 줄 틈은 없었다. 곧바로 자유롭게 된 손가락을 활용, 산사태에 말려들기 직전인 용병을 낚아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레인의 손에 주렁주렁 매달리게 된 용병들. 그렇게 레인은 총 열 사람의 무게가 실린 양손을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그런 뒤 떠밀려오는 흙더미들을 피해 도약, 도약, 도약.
반복한 도약의 끝에 레인은 본인의, 그리고 손에 들린 이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산사태는 그리 긴 시간 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일대를 울리던 굉음은 메아리로만 남고, 주변은 안정되었다.
“…….”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넘어 지면에 착지한 레인이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
경신법을 익힌 로엘은 물론 무사했다. 그 와중에 그도 나름의 방법으로 용병들을 구해냈다. 총 여섯 명의 용병이 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많은 이들이 다쳤다.
대부분 경상이었지만, 중상을 입은 이들도 몇 있었다. 레인에 비해 경신법이 미숙한 로엘 또한 조금 무리했는지 왼쪽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인원이 부족하다.’
그리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 둘.
레인이 로엘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두 명이 부족해.”
“호위 용병 둘이야. 구해내기 전에 산사태에 휩쓸려 비탈길 아래로 떠밀려갔어. 그러니…….”
로엘이 ‘내가 가서 구해오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레인이 비탈길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야!”
그 뒷모습에 대고 로엘이 소리쳤다.
그 외침을 무시한 것인지, 듣지 못한 것인지. 레인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로엘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뒤쪽에서 용병들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산사태가 일어날 줄은…….”
“그보다 저 두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용병들의 경외심 섞인 목소리에 로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짜증이 난다 해도 웬만해선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로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빌어먹을.”
암만 그라고 해도 감정 조절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조금씩 쌓여온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레인에게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자신의 판단이, 레인을 제지한 그 행동이 결국 위험을 불러들였다.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그 상황에선 그 판단이 옳았다.
시간을 되돌려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같은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쯧.”
로엘은 레인이 구해낸 용병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쏠렸다.
그가 똑바로 향한 곳에는 예의 그 탐색꾼 용병이 있었다.
“구, 구해줘서 고맙…… 으억?!”
우물쭈물 감사 인사를 표하던 용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로엘이 기습적으로 무릎으로 차올려 낭심을 가격한 탓이었다.
용병이 중심부를 감싸 쥐며 바닥에 엎어져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말 좀 쳐 들을 것이지.”
씹어뱉듯 중얼거리는 로엘.
물론 그의 발언은 본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탐색꾼 용병은 사실 그리 크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용병 업계는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끝장. 그의 포지션에 간섭하려 들면 반발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린애처럼 땡깡이나 부리고 있으니.’
로엘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왼손 검지로 꾹 눌렀다. 이내 그가 조용히 품속에서 쇳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고생깨나 하겠군.”
주위에는 온통 부상자.
아니, 부상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용병계에서 한가락 하는 실력자들인 만큼 비상용 포션 하나 정도는 구비 해두고 있을 테니.
아마 중상자든 경상자든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터였다. 보조역을 맡은 용병 넷에게도 고용주 측에서 포션을 제공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무워어억!
쿠에에에!
귓가를 파고드는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울려 퍼진 소음이 몬스터들을 불러들였다.
산사태가 일어나 생긴 굉음. 그것까진 괜찮았다. 야생 동물과 같은 육감을 지닌 몬스터들은 그것이 재해임을 감지할 테니까.
애초에 주변에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그치들이 진작에 산사태의 징조를 감지하고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굉음과 함께 주변으로 퍼져나간 인간의 비명 소리였다. 몬스터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소음.
로엘이 쇳덩어리의 윗부분을 뒤로 잡아당겼다. ‘철컥!’하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이전에 쓰고 수리를 안 해둬서 내구도가 떨어졌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오는 주변 인물들을 무시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주위 모든 이들이 궁금증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것. 대충 성인의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의 잿빛 쇳덩어리.
그것은 지구에서 권총이라 불리는 무기였다.
* * *
무워어어어!
가장 먼저 일행을 습격해온 건 인간의 신체에 소의 머리를 가진 괴수, 미노타우로스였다. 크기만이라면 오우거조차 능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초대형 몬스터.
“진형을 갖춰라! A급 용병이 선두에······!”
탕!
임시로 리더 역할을 맡은 용병이 채 지시를 다 내리기도 전. 굉음이 울려 퍼졌다.
미노타우로스의 무릎을 타고 도약, 어깨에 올라선 로엘이 머리를 향해 격발해 즉사시킨 것이었다.
로엘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도, 그렇지 않던 이들도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크륵!
미노타우로스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신형을 허물어뜨렸다.
이 세계의 문명을 한참 웃도는 병기의 위력은 내력이 실린 검격과도 맞먹을 정도. 거기에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는 일류 검사조차도 반응하기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
암만 대형 몬스터라도 그런 병기에 머리를 적중당했으니 살아남을 도리가 없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즉사(卽死)의 권능을 지닌 마구(魔具)……?”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로엘은 그 말을 듣고 픽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구라는 표현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현대의 무기를 재현해내기 위해선 부족한 요소를 마법으로 메꿀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 무구의 본질은 이능의 힘에 의한 기적보다 지식의 힘으로 일궈낸 문명의 기적에 더 가깝다.
“몬스터들이 몰려듭니다! 진형을 갖추십시오!”
“의뢰주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상위 용병이 전열을, 보조역들은 후열을!”
“기사분들은 그때그때 전황이 밀리는 곳으로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로엘이 연속해서 내력을 실어 외쳤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일행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로엘의 지시에 따랐다.
로엘은 혀로 입술을 축여 긴장감을 달랬다. 저절로 재장전이 되도록 제작했음에도 괜히 권총 윗부분을 뒤로 당겼다 놓기를 몇 차례.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의 대대적인 습격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좌측에서 출현한 오크 여섯 개체와 우측에서 출현한 오우거 한 개체. 로엘은 오크들을 용병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오우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신형을 쭉쭉 늘리며 접근해오자 오우거 또한 반응을 보였다.
워억!
거의 통나무나 다름없는 팔을 내리쳐오는 오우거.
로엘의 기습에 맥없이 쓰러졌던 미노타우로스와는 명백히 다른 움직임. 개체의 크기는 더 작을지 몰라도 가진 힘과 순발력은 미노타우로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콰앙!
오우거가 내리친 대지가 움푹 파였다. 산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소라 지반이 단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깊이가 심상치 않았다.
왼쪽으로 도약해 오우거의 공격을 회피한 로엘은 신형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접근했다. 이 상황에서는 멈추거나 물러나는 것이 훨씬 위험했다.
휘둘러 오는 팔을 피하길 몇 차례. 그가 정확한 타이밍에 도약했다.
횡으로 휘둘러져 오는 왼팔에 발을 딛고 연이어 도약, 재차 휘둘러져 오는 오른팔을 밟고 재도약. 그대로 오우거의 머리 위쪽에 안착했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자 고개를 들어 올리는 오우거. 로엘이 오우거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
격발.
탕! 탕! 탕!
미노타우로스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외피를 뚫기 위해 같은 자리를 세 번 연속으로 노렸다.
결국 뇌에 금속 탄환이 침입했다. 오우거는 바람 빠진 비명을 내뱉더니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오!”
그 거체에 깔리지 않도록 미리 도약했던 로엘이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뒤쪽에서 오크들과의 가벼운 교전을 마친 용병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당장 본인인 로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곤란한데.’
당연한 말이지만, 권총은 멀리 떨어진 적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였다. 로엘처럼 일부러 접근전을 자처해가며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로엘은 지금까지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접근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최대한 탄환을 아끼고 격발 횟수를 줄여야 하는데, 로엘 자신은 숙련된 사수가 아니니까.
로엘은 전생에 무기 개발자이긴 했어도 무기 사용자는 아니었다. 현생에도 그리 연습에 힘을 쏟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하게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접근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가진 탄환의 개수가 한정되어있기에 더더욱. 언제 여분이 바닥날지 모르니 낭비는 금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각 개체의 힘이 약한 대신 숫자가 많은 소형 종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 또한 금물. 오로지 강력한 소수 개체인 대형 종 몬스터만을 골라 요격해야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탄환이 전부 떨어지든 권총의 내구도가 다해 망가지든. 끝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 암살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권총의 내구도를 상당히 소진했으니 그 시기가 멀지 않을 터.
“후…….”
로엘은 한 차례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레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버텨야 했다.
지금 일행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상황이 악화될 터였다.
레인과 다시 합류하기 전까지는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 당분간 꼼짝없이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의미 없는 소모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로엘의 부담감을 가중시켰다.
또다시 철컥, 하고 의미 없는 재장전. 초조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로엘은 외쳤다.
“각자 자리를 지키고 체력 배분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낙오자가 합류하면 곧바로 자리를 벗어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