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서장
바라마지않던 마법사 인맥의 등장이다. 리스크가 조금 컸지만, 로엘은 친근감을 표해오는 노인에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힘없는 자가 보물을 쥐고 있으면 빼앗기는 법이다. 그리고 로엘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가진 보물을 지키기엔 턱없이 힘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진 그 보물을 꼭꼭 숨겨왔다. 충분한 힘을 기를 때까지 참을 예정이었다. 막연히 보물을 세상에 드러내는 시기는 먼 미래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시기를 한참 앞당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대륙에 이름 높은 대현자가 호의 어린 태도로 이쪽에 접근해 온 것이다. 이 노인을 등에 업을 수만 있다면 보물을 더이상 썩히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로엘은 노인에게 자신이 가진 거대한 지식의 편린을 드러냈다. 이 세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그 지식의 일부를.
흔히들 마법사들의 지식욕은 국왕의 권력욕을 넘어선다고 한다.
마법이란, 체내에 축적한 마력을 대기 중의 마나와 공명시켜 그 배열을 임의로 뒤트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 마법사 본인이 가진 지식이, 경험이, 마력 운용 능력이 뛰어날수록 보다 더 복잡하고, 더 뛰어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중에서도 지식은 마나를 재배열해 어떤 현상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부분에 관련된 것.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선 그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마법사들이 새로운 지식에 목을 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마법사들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마법실험에 몰두하고, ‘미지’에 열광하며, 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현인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갈망한다.
세간에 대현자라 칭송받는 로카인 파르테인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마법사. 그가 관심을 보일 여지는 충분했다. 협상의 여지는 충분했다.
앞서 말한 대로 리스크가 크긴 했다. 상대가 악독한 마음이라도 먹었다간 곧장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물론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여러모로 높다는 계산이 깔리긴 했다. 상대가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던가. 어차피 이쪽이 알아서 가져다 바치겠다는데 굳이 강경책으로 나올 리가 없다던가.
대가로 요구한 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그 정도 대가를 감수하기 싫어서 외부 유출의 가능성을 높이면서까지 정신 조작 계열 현자에게 손을 벌릴 만큼 상대가 어리석지도 않을 터.
이래저래 생각해 봐도 문제가 될 소지가 적었다. 로엘은 거침없이 도박을 감행했다.
사실 비슷한 일을 해본 경험이 이미 있었다. 아무래도 전생에 ‘그런’ 삶을 살았다 보니 그쪽 경험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런 식의 줄타기엔 능숙했다.
그땐 참 젊은 혈기에 쓸데없는 고생을 자처했었다고, 로엘은 그렇게 생각하곤 했지만.
이야기를 되돌려서.
로엘은 지식의 전수를 대가로 로카인에게 모종의 제안을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로카인은 로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로엘은 초대형 스폰서를 등에 업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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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명의 소년 용병들이 거주하는 집에 머물고 있다. 타협의 결과다.
사실 스승님께 붙들린 이상 당장 끌려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의외로 스승님이 선처를 베풀어 주셨다. 당장 마탑으로 복귀시키지는 않으시겠다고.
그 대신, 더 이상 싸돌아다니지 말고 이 집에 머무를 것을 강요받았다. 이미 이야기가 되었는지 집주인인 두 소년은 선선히 그것을 승낙했다.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로엘과 스승님 사이에 모종의 이야기가 오간 듯싶다.
이곳의 주인인 두 소년은 굉장한 인재들이다. 솔직히 천재라는 찬사를 받아오며 살아온 나조차 이 두 소년에 비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선 레인이라는 소년은 무려 초일류 검사다.
솔직히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기 참 힘들었다. 그냥 괴물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13살의 나이에 초일류의 대열에 발을 들이다니, 상식을 벗어났다.
거기다 로엘이라는 소년. 이 소년은 다른 의미로 괴물이다.
무려 스승님씩이나 되는 인물을 스스럼없이 대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완전히 친해져 버렸다. 요즘은 함께 체스를 두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승님은 대륙 전체에 그 위명을 떨치는 인물. 그런 인물을 만난 지 하루 만에 자신의 후견인으로 만들었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기에 그렇게 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도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도 않았다.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스승님의 지시로 그에게 하나의 언어를 가르쳤다.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룬 어를.
룬 어는 초고대의, 그러니까 용(龍)과 인간, 그리고 이종족이 함께해 찬란한 마도 문명을 꽃피웠던 시대의 대륙공통언어다.
마법의 종주이자, 지금은 멸망한 용족의 언어인 룬 어. 당연하게도 언어 자체가 마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의 대륙공통어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마법 관련 어휘가 이 ‘룬 어’에 담겨있기에, 마법을 익히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배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애초에 기본 서적을 제외한 모든 마법 관련 서적이 룬 어로 기록된다. 마법에서 룬 어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룬 어는 익히기가 꽤나 까다롭다. 지금의 언어와는 그 구성이 다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상형문자(象形文字)다.
현 대륙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수많은 마법적 어휘를 전부 내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솔직히 현시대의 대륙공통어를 익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한참 마법을 배우는 중인 나조차도 지금까지 깨우치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것을 로엘에게 가르쳤다.
처음에는 분명 독학으로 익힌 몇 자밖에 알지 못하던 그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네.]
-라고 말한 것이 농담이기라도 한 것처럼, 20일 만에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나머진 나중에 마탑에서 배우기로 결정했다.
하늘은 불공평하다. 분명 그렇다.
몇 년에 걸쳐 쌓아온 지식을 단 20일 만에 추월당했다. 상실감이 생각보다 엄청났다. 허탈하달까, 시원하달까.
솔직히 말이 되질 않는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장난으로 날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장담할 수 있다. 이 녀석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다. 지금껏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사용한 천재라는 단어는 그저 날 띄워주기 위해, 아부하기 위해 사용된 수식어에 불과했다.
최근엔 마법의 기초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서적을 통해 어느 정도 독학한 모양이지만, 제대로 배우는 것은 또 다르다.
마탑의 인물이 비 관계자에게 함부로 마법을 가르쳐도 될 리가 없지만, 탑주인 스승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나 스승님의 마음에 든 것일까.
“……라고 해. 이 정도가 대략적인 마법에 대한 설명이야.”
“의외로 간단하군요.”
녀석은 정말로 어렵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학문을 빠르게 습득하는 게 말이 되는 건지. 일반적이라면 차근차근 공부하고, 이해하고, 복습해가며 몇 달에 걸쳐 습득해야 하는 그런 내용인데.
마법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 하루 만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요약해 둔 자료를 마련해 두었다가 쭉 읽어 내리기만 하는 것쯤이야 몇 시간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르침도 뭣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기록을 읽은 것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가르침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들은 학생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본질적인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냐고 한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아까 ……라고 했는데, 그럼 ……라고 생각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상당히 핵심적인 부분에 가까운 질문이다. 적당히 아는 척하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이것만 봐도 이 녀석이 정말로 그 방대한 지식을 제대로 습득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그런 시시한 수준이 아니다.
하나를 설명하면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대입, 그를 통해 관련된 수많은 자잘한 내용을 알아서 머릿속으로 산출, 습득한다. 그것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 정도 수준의 사고능력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질 않는다.
솔직히 말해, 잠재성만 놓고 본다면 마탑 내 최고의 자질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그녀조차 넘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단 어떤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할지는 대충 감이 잡히네요.”
“그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저 많이 배운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 탑주님과 체스 두기로 약속한 시간이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같이 가자. 나도 구경하게.”
이후 자리를 옮겼다. 이내 마탑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찾아온 스승님과 거실에서 체스를 두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듣기로, 지금까지의 전적은 무패. 스승님이 단 한 판도 따내지 못했다 한다. 오늘 구경하려고 한 것도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가운데 앉아 조용히 게임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주로 스승님의 표정이.
솔직히 게임 자체는 너무 압도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걸려드셨군요.”
“크음.”
가차 없이 스승님 측 체스 말 하나가 판밖으로 밀려났다.
스승님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눈치챌 정도로 안면 근육이 실룩인다.
이런 일면도 있으셨구나, 우리 스승님…….
주름이 가득한 손을 들어 룩(Rook)을 전진 배치.
좋은 수다. 일시적이나마 밀리던 전황을 고착시켰다. 불리한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 요즘은 어떠하냐? 마법은 배울 만하더냐?”
여유를 가장한 질문. 분위기를 전환하려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대체적인 것은 배웠습니다. 최근엔 룬 어를 배웠지요.”
“룬 어를? 어렵진 않더냐?”
“까다롭더군요. 파르엘 씨가 가르쳐 준 것을 전부 소화하는 데에 20일이나 소요했습니다.”
“흠. 20일? 그 정도면, 룬 어의 기본형 정도를 배웠을 정도의 시간인가?”
“그것보다는 조금 더 배웠습니다.”
‘조금 더’가 아니에요. 스승님.
“흐음, 노력하려무나. 너라면 분명 자질이 있겠지.”
‘자질이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스승님. 괴물이라고요, 괴물.
“감사합니다. 체크.”
“끙······.”
힘드신 것 같습니다, 스승님.
“최근 들어 점점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만……. 어째 점점 더 강해지는 듯싶군. 처음 체스를 두었을 땐 그래도 조금 팽팽한 느낌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상대도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점점 상대하기 쉬워지고 있긴 하지요.”
“헛헛. 늙은이 체면 다 구기는군.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
“굳이 말하자면 익숙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항상 게임을 진행하시는 패턴이 일정하시다 보니.”
“무의식중에 고착화된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냐?”
“예. 틀을 깨지 않으시면 저를 이기긴 힘들 겁니다.”
“그것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네에게 무리한 주문을 하는구나.”
오오.
뭔진 모르겠지만 방금 무언가 심오한 대화가 오고 간 것 같다.
기억해 둬야지.
“아, 일전에 구해주신 재료는 감사합니다. 요즘 만들어 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 그건 좀처럼 구할 수가 없더군요.”
“됐다. 내겐 그다지 구하기 어려운 물건도 아니었고.”
“그래도 그렇게 곧바로 구해다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갑자기 웬 겸양을 그리 떠느냐. 거절할 수도 없는 조건을 내걸고 이 늙은이를 등에 업으려 들었던 녀석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하하.”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하고 있던 도중, 용병 길드에 들렀다 온다던 레인이 돌아왔다.
“다녀왔다.”
“어땠어? 의뢰라도 들어왔어?”
“어. 들어왔어.”
“오.”
“지금 나갈 거야. 준비해.”
“조금만 기다려 줘. 금방 끝날 것 같으니까.”
“아니, 아니. 이 늙은이가 젊은 사람들 시간을 뺏어서야 되겠느냐. 일이 있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도 뭣하니, 그냥 정리하자꾸나. 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왜 거의 이겨가는 사람은 전데 그렇게 봐준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스승님이 빠른 손길로 판을 정리했다. 로엘은 별수 없이 준비를 마치고 레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스승님은 얼마 있지 않아 마탑으로 되돌아가셨다.
“…….”
그렇게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
왔구나.
얼마 전에 성내의 상회에 부탁해 둔 물품들이 배달 온 모양이다. 곧바로 마중 나가 물품을 수령했다.
배달 온 물건은 각종 마법 실험 장치들이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등산까지 해가며 여러 재료를 손에 넣었다. 그걸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니 이참에 개인 수련 공간 겸 실험실을 하나 차릴 생각이었다.
물품을 전하러 온 인부들에게 인사하고, 현재 내가 머무는 방으로 자재들을 배치했다. 이내 조금 부족하긴 해도 훌륭한 실험실이 완성됐다.
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가출한 탓에 요 몇 달간 마법 수련을 꽤나 등한시해왔다. 오늘부터라도 다시 재개하자. 우선 해 보고 싶었던 실험부터.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로엘의 비정상적인 학습 능력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괜히 조바심이 치밀어 오르던 참이었다. 난 지금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실험실로 바꾼 방 전체를 한번 둘러보자 조바심이 다소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원 없이 실험하자. 가출 전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밤을 지새우더라도 만족할 때까지 실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