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호위 의뢰(4)
로엘은 파르엘에게 그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조곤조곤 설명했다.
만약 의뢰 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그룹 사냥이었다면 문답 무용으로 주변 동료들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로엘의 설명에 파르엘의 안색이 상당히 흐려졌다.
“후우.”
로엘이 재차 한숨을 불어냈다.
의뢰주가 지금의 말을 듣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의뢰를 취소하기라도 한다면 이번 의뢰는 여기서 끝이다. 기껏 찾아온 첫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미리 말을 해 놓지 않을 수도 없다. 그것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니까. 상대가 서운한 감정을 품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보아하니, 의뢰주는 펠라키 산맥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하다시피 한, 그야말로 샌님이었다. 의뢰를 신청한데다 직접 사냥에 참여하기까지 했기에 당연히 산의 위험성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는 상정하지 못했다. 기본 지식은 지녔는지 미리 물어뒀어야 했는데 상대의 여유로운 기색에 휘말렸다.
무의식중에 괜찮을 것이라 판단해 버렸다. 첫 의뢰 수행인 만큼 경험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었다.
“······미안하다.”
다행히도 의뢰주는 좋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곧바로 사과를 해왔다. 로엘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사전에 의뢰주에게 필요한 정보를 들어두지 않은 저희들의 잘못도 큽니다.”
의뢰주도, 로엘도 서로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고 사과했다. 일단 이것으로 해프닝은 일단락되었다.
“······?”
그때, 레인이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기감까지 돋워보았지만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레인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하는 와중에 미안한데, 일단 내려가지. 내려가서 재정비한 후에 다시 올라오는 것이 좋겠어.”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의뢰주를 동반한 첫 사냥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 *
레인과 로엘, 그리고 파르엘은 일단 여관으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로엘은 먼저 파르엘에게 필요한 것을 물었다.
“우선 파르엘 씨는 마법사죠?”
“그래.”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시나요?”
“기본 속성 마법. 그중에서 화염 계통의 마법이 특기야.”
“화염이라.”
“꽤 고위의 마법까지도 사용 가능해. 웬만한 대형 몬스터라도 일격에 즉사시킬 수 있······.”
“그렇지만 펠라키 산맥에서는 무용지물인 능력이지.”
레인이 가차 없이 일축했다.
“······.”
파르엘이 쓰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장에서면 모를까,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산에서 사냥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능력이지. 사냥한 몬스터의 사체를 훼손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주변의 몬스터란 몬스터는 전부 끌어들이니까.”
레인의 어조가 냉담했다. 지켜보던 로엘이 손날을 세워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윽.”
레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보자, 로엘이 눈을 부라렸다. 그리곤 파르엘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상대는 의뢰주’
‘이미 끝난 이야기’
입 모양을 읽어낸 레인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로엘은 주의를 돌리기 위해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화염 계통 마법 이외엔 어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기본 4대 속성 관련 하위 마법은 전부 익혔어. 애초에 이것조차 익히지 않으면 마법사라고 할 수도 없다만······.”
“그렇군요.”
“일단 내게서 화염 계통 마법을 제외한다면 거의 남는 게 없다고 보는 것이 좋을 거야.”
“흐음.”
“역시 산맥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려나?”
파르엘은 약간 자신감이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정 자신이 없으시면 그냥 저희 둘이서 필요한 재료들을 구해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레인과 로엘의 실력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경우엔 의뢰의 내용이 전혀 달라진다. 산맥에 진입하려는 의뢰자의 길잡이 겸 호위가 아니라, 아예 의뢰자를 대행하는 일이 되니까.
당연히 의뢰 비용도 비싸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의뢰자는 부수적인 수입을 얻지 못하게 된다. 필요로 하는 물품 이외의 부산물을 전혀 취득하지 못하게 된다.
“으음.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출은 좀 줄이고 싶은데. 이왕이면 경험도 좀 쌓고 싶고.”
파르엘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레인과 로엘이 알 길은 없지만, 현재 파르엘은 가출 중이었다. 가능한 지출은 줄이고 싶었다.
“괜찮겠죠.”
“?”
“화염 계통 마법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룹의 일익을 담당하실 수는 있을 겁니다.”
“어떻게? 내가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난 화염 계통 마법을 빼면 시체라고 봐도 무방해. 제대로 된 공격 수단조차 없으니······.”
“이전에 바람 계통의 정령을 다루시는 분과 그룹을 맺어 사냥을 나선 적이 있었죠. 연륜이 있으셔서 그런지, 정령을 다양한 용도로 상황에 맞춰 사용하시더군요. 그걸 조금 따라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
“차차 이야기도록 하죠. 일단 사냥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 * *
다음 날, 세 사람은 다시 산을 올랐다. 이번엔 쓸데없는 충돌 없이 목표로 한 몬스터를 가장 먼저 마주했다.
어제의 일로 시야가 조금은 넓어지게 된 파르엘. 그는 두 소년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화염 계통 마법 한 번에 그렇게나 몰려들 만큼 우글거리는 몬스터를 어떻게 전부 피해서 다니는지도 놀라웠고, 두 소년의 연계 사냥 능력은 더욱 놀라웠다.
로엘이 빠른 발놀림으로 몬스터의 시야 범위 내에서 주의를 끌면 시야 밖에 위치한 레인이 단숨에 기습으로 숨통을 끊는다. 단순한 전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특히 레인이라는 소년의 검술은 그 나이의 소년이 지녔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뛰어났다.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일격. 그 한 수로 대형 몬스터인 미노타우로스의 미간이 꿰뚫렸다. 마탑에 고용되어 있는 웬만한 기사나 용병보다도 나아 보였다.
5미터에 이르는 거체가 지면에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피가 흘렀다.
“파르엘 씨.”
로엘이 파르엘을 부르고, 파르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들바람(Gentle Breeze)>.
마력으로 인해 생겨난 인위적인 바람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위쪽으로 불었다. 공기의 흐름이 위쪽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주위로 퍼져야 할 피 냄새도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되었다.
로엘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거면 된 걸까?”
“충분합니다. 펠라키 산맥이란 장소에 한해서는 이런 식의 마법 활용이 굉장히 유용하죠. 몬스터들이 몰려들 시간을 대폭 늦출 수 있으니까.”
로엘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사체로부터 뿔을 뽑아내고 가죽을 벗겨냈다, 이어서 팔, 다리, 배를 갈라 힘줄을 뜯어냈다.
미노타우로스나 오우거의 힘줄은 질기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활과 같은 무기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곤 한다. 일단 고급 재료로 분류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로엘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파르엘이 마법을 사용했다.
<수구(Water Ball)>.
구체의 형상을 띈 물의 응집체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감사합니다.”
레인은 감사 인사와 함께 몸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몸에 묻은 피뿐만 아니라, 뽑아낸 뿔, 그리고 힘줄도 대충 닦아냈다.
이전에는 우선 수통으로 대충 씻어내고 나중에 주변에 흐르는 개울이나 계곡을 찾아가곤 했다. 그 시간이 절약되었다.
빠르게 자리를 뜰 준비를 마친 후, 파르엘이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했다.
<흙무덤(Clay Tomb)>.
남은 미노타우로스의 잔해에 흙이 뒤덮였다. 적어도 육안으로는 이곳에 사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간혹 사냥을 마치고 떠난 후에 사체를 발견한 몬스터가 자리에 남은 냄새를 따라 레인과 로엘의 뒤를 추적해 오는 경우가 있다.
실력이 실력인지라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다. 이렇게 사체를 가려두면 그런 상황을 줄일 수 있다. 굳이 맨땅으로 보이는 곳에 관심을 표하는 몬스터는 적을 테니까.
로엘은 빙긋 웃음 지으며 파르엘을 칭찬했다.
“이제 그만 갈까요?”
“그래.”
파르엘이 쓴웃음 지었다. 일단 도움이 된다곤 하지만, 솔직히 사냥은 저 둘이서 다 해결하고 자신은 서포트를 할 뿐이었다. 이래서야 누가 누구를 도우미로 고용한 건지.
“그럭저럭 도움이 되는군.”
레인이 힐끗 시선을 주며 한 말은 솔직히 조금 건방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권위 의식이 있는 귀족 출신도 아니고, 애초에 성격 자체도 그리 모나지 않은 파르엘이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었다. 알아서 지적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로엘의 손날이 레인의 뒷머리를 가격했다.
“너 인마.”
레인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이 자못 유쾌해서 파르엘은 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다만 레인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듯싶었다. 어쩐지 어제부터 신경이 상당히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였다.
그가 갑자기 인상을 무섭게 주위를 잠깐 살피는 듯싶더니,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부터 계속 무언가를 신경 쓰는 눈치던데. 무슨 일 있어?”
“······신경 쓰지 마. 움직이자.”
그 후로도 별다른 이상 사태 없이 착실히 사냥을 진행해 나갔다. 세 사람의 호흡은 제법 잘 맞았다. 빠른 속도로 원하는 물건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다만, 생각보다 빠르게 한계가 찾아왔다. 파르엘의 체력이 다한 것이다.
축적한 내력을 운행해 피로를 없앨 수 있는 레인이나 로엘과는 달랐다. 마법사인 파르엘의 체력은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체력은 그다지 높지 않군.”
무릎을 붙잡고 숨을 고르고 있는 파르엘을 내려다보며 레인이 말했다.
“내 체력이 부족하다기보단 너희들이 지나치게 쌩쌩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이전에 함께 사냥했던 정령사는 체력이 부족해서 사냥을 파장 내지는 않았었는데.”
“테미스 씨는 경험이 많은 만큼 체력을 분배하는 요령이 있었던 거겠지. 그보다 레인 너, 자꾸 파르엘 씨를 자극할 법한 말 좀 하지 마라, 좀.”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아니 딱히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닌 것 같으니까. 괜찮아. 이전에 내가 저지른 일도 있고 하니.”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중, 레인이 우뚝 하고 발을 멈췄다. 그리곤 지나온 길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
“무슨 일이야?”
“?”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레인은 시선을 뒤쪽으로 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레인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질감의 정체가 이거였나.”
“무슨 소리야?”
“아주 무더기로 있는데.”
“그러니까 뭐가?”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암살자 집단이 아닌가 싶다.”
“뭐?!”
* * *
암살자의 숫자는 도합 25명. 아니, 그들을 이끄는 리더 하나를 더해 26명.
암살자들은 타깃과 두 호위 용병이 산을 오른 후 어느 정도 텀을 두고 그 뒤를 쫓았다. 추적향(追跡香)을 이용했기에 타깃을 따라가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저기 있군.”
마침내 리더가 타깃을 발견했을 때, 타깃은 굉장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산행으로 힘이 빠진 것이겠지.
마법사는 대체로 체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좋은 상황이었다.
호위로 보이는 용병은 하나. 분명 둘이라고 들었는데, 한 녀석은 그새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몬스터가 넘쳐나는 땅인 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다.
“포위망이 갖춰지면 바로 타깃을 습격한다.”
리더가 지시를 내렸다. 뒤쪽에 위치한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올 때부터 타깃을 둘러싸는 식으로 산개해서 움직였다. 아마 앞으로 5분 이내에 완벽한 포위망이 구축될 터였다.
참고로, 각각의 암살자들에겐 타깃에게 사용한 것과 다른 종류의 추적향이 묻어있었다. 그것으로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되도록 빠르게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
리더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상대는 화염 계통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 혹여 빠르게 처리하지 못했다가 타깃이 자포자기로 마구 마법을 남발하게 되면 상황이 골치 아파진다.
그렇다고 해도 타깃이 죽는 것은 변함이 없긴 했다. 무려 25명의 암살자가 포위망을 갖췄다. 자신까지 포함하면 26명.
타깃에게 미래는 없었다. 다만 마법의 여파로 몰려들 몬스터가 걱정될 뿐.
‘사실 이 인원의 절반만 있었어도 충분했을 텐데.’
솔직히 과잉전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겨우 마법사 하나 해치우는 데에 투입된 것 치곤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 워낙 거액의 보수를 제시해온 청부였던 탓에 상층부가 조금 무리해서 전력을 실어줬다.
‘그나저나 타깃이 고용한 호위가 십 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소년들이라더니, 정말이었군.’
문득 금발 머리를 한 소년이 시선에 들어왔다. 분명 부관이 보고했던 소년 용병일 터였다.
솔직히 감상을 말하자면 조금 황당했다. 저런 어린 소년이 호위라니.
‘최근에 용병이 된 녀석들이라 했던가.’
부관의 보고에 따르면, 단숨에 B등급 판정을 받았다는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실력이 있다는 것일까.
‘그래 봐야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 인원을 감당할 정도의 실력자는 아니겠지만.’
한 녀석은 이미 죽어버린 듯싶고.
“포위망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부관이 작은 목소리로 보고해왔다. 리더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대충 숨을 고른 모양이었다. 마침 타깃이 다시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리더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시작한-”
“역시 이 녀석이 머리였군.”
타깃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습격 개시를 지시하려던 리더는 갑작스레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밤색 머리칼 소년이 피에 절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시야 한구석에 위치한 부관은 바닥에 엎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뭐, 뭣!”
리더는 크게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암살자인 자신이 상대에게 이렇게 손쉽게 간격을 허용하다니. 상대가 이렇게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왔음에도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