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호위 의뢰(1)
소환진이 그려진 장소는 테미스가 머물고 있는 여관방. 레인은 테미스의 설명을 들으며 명상에 잠겼다.
“소환진이 작동하면 네가 부르고자 하는 존재의 이미지를 강하게 떠올려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령들 중에 네 부름에 응하는 존재가 있다면 네게 손을 내밀 것이다.”
“······.”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레인.
“그 손을 붙잡고 현세로 이끌어 내라. 그 후에 불러낸 정령에게 이름을 부여하면 그 정령과의 계약이 성립된다.”
레인은 테미스의 말을 되새기며 소환진의 변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내 소환진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이질적인 파동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계약하기 원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대지의 정령. 테미스로부터 그 대략적인 모습은 미리 전해 들었다. 레인은 조그마한 아이의 형상을 지닌 정령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려냈다.
동시에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지금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은 전생에 노획한 수많은 비전들 중 하나인 오행공(五行功)의 운용.
황궁 칠대고수 중 하나인 귀궁(鬼弓)을 쓰러뜨리고 얻은 절세적인 무공이었다. 특정 원소에 관련된 기운을 다루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레인이 판단하기에 자연 친화력이란 것은 오행(五行)의 기운을 얼마나 체내에 보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오행공의 공능이라면 충분히 정령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란 게 레인의 짐작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레인은 느낄 수 있었다. 염원하던 땅의 정령의 기척을.
피부로, 그리고 호흡으로 전해지는 주변의 감각을 통해 레인은 지금이 테미스가 말한 ‘정령이 손을 내미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인은 그 손을 맞잡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강하게 그렸다. 붙잡은 손을 끌어당겨 정령을 눈앞에 데려오는 의지를 강하게 일으켰다.
* * *
레인의 독문무공인 혼원공은 무공이되 무공이 아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레인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일종의 무공 활용법이다.
중원의 무공은 각각 두드러지는 특성을 지닌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무당파(武當派)의 무공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데에 특화되어있다.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의 무공은 수중, 선상 전투에 있어서 가히 무적이라 할 수 있다.
전생의 레인은 매번 달라지는 환경에서 수없이 생사투를 치렀던 인물. 노획한 무공들을 그때그때 필요한 상황에 맞춰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한 가지 무공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혼원공이란, 두 가지 공능을 지닌 무공을 창안해냈다.
어떤 공능을 지녔는지 설명하자면 이러했다.
첫 번째는, 체내에 축적된 수많은 종류의 기운을 압도적인 출력의 근원으로 삼는 것. 여러 성질의 기운을 회전을 통해 억지로 합일시켜 단숨에 뿜어내는 것이 그 요체였다.
두 번째는, 혼재한 수많은 내력들 중 원하는 종류의 것을 그때그때 선별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다른 성질의 내력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원하는 기운만을 뽑아내 사용하는 것이 그 요체였다.
레인이 오행공을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혼(混=섞일 혼)원공의 두 번째 공능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속임수. 정령이 좋아할 법한 기운만을 살짝 내보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분명 오행공은 자연 친화적 성향이 강한 심법이다. 하나 그 심법을 운용하는 레인의 내력은 혼원공의 수련을 통해 축적된 것.
그의 내력은 수많은 기운이 뒤섞인 탓에 본질적으로 혼탁한 성질을 띠고 있었다. 정령 소환 도중 변수로 작용하기 충분할 정도로.
소환에 응함과 동시에 그 혼탁한 기운도 함께 받아들이게 된 정령은, 본래 가지고 있던 대지의 속성을 잃고 검게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 * *
눈앞에 소환된 검디검은 아이의 형체.
레인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의도가 들어맞아서 소환을 성공시키긴 했다. 분명 성공하기는 했는데······.
“이건 뭐지?”
눈앞에 소환된 정령은 전체적인 실루엣만 보면 땅의 정령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 사이즈가 매우 작아 겨우 팔뚝만 하다는 것도, 동글동글한 머리에 귀여운 눈망울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명 테미스가 설명한 내용과 전체적으로 일치했다.
다만, 검었다.
들은 내용과는 다르게 달리 온몸이 시커맸다.
레인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때, 옆에서 테미스가 상당히 동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암흑정령이로군.”
“암흑정령?”
“그러니까-”
테미스의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암흑정령.
정령의 변이종.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지, 왜 생겨났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의 정령.
변이 전의 특성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기존과는 다른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정령. 그 능력이 유용한지 유용하지 않은지, 강한 힘을 지녔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개체에 따라 천차만별인 녀석이다.
정령사는 희귀하다. 그리고 암흑정령사는 그보다 훨씬 희귀하다.
그렇기에, 암흑정령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요컨대 완전히 미지의 존재라는 것이다. 상위의 정령을 부리는 테미스로서도 암흑정령은 오늘에서야 처음 보았다.
정령의 변이종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이 정령은,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계약을 맺고 그 능력을 개화시키기 전까진 해당 정령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릴 방도가 없다.
하다못해 계약자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조차도.
“······.”
레인이 살짝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땅의 정령을 부려 수많은 약초(영약)를 채집하려던 원대한 계획이 초장부터 와르르 무너졌다.
일단 한번 소환된 정령은 무를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선택지는 눈앞의 암흑정령과의 계약을 체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뿐.
역시 정령 소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레인이 어깨를 살짝 늘어뜨리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소환된 정령이 따라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따라 한 건가?’
실소를 흘린 레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것, 하지. 계약.”
“괜찮겠느냐?”
“기껏 불러내 놓고 그냥 돌려보내긴 아쉽죠.”
소환된 정령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레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묻자. 넌 나와 계약하고 싶은 것 맞지?”
동글동글한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끄덕끄덕.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애초에 레인의 부름에 호응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한 정령이다. 이제 와서 계약을 거부할 리가 없었다.
“좋아. 흑아(黑兒). 앞으로 네 이름은 흑아다.”
검은 동체에 아이의 형상을 지녔다는 데에서 착안한 이름. 암흑정령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선 척척 레인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이 레인의 그림자 위에 서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훅 하고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듯 자취를 감추었다.
“······?”
“특이하군. 계약자의 그림자를 자신의 거처로 삼는 건가.”
복잡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던 레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한 녀석과 계약을 맺었군.”
그렇게 레인은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여담이지만, 이후에 로엘도 소환을 시도해 보았다.
결과는 허탕. 그도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 * *
테미스와 리나는 며칠 후 자작령을 떠났다. 필요한 재료도 모두 구비했겠다, 더 이상 영지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오빠만큼 강해지려면 얼마나 수련해야 돼?”
떠나기 전에 인사하러 찾아온 리나가 레인에게 물었다. 검술을 익히려 마음먹었겠다, 상급자에게 조언을 듣고자 한 것이다.
“몰라.”
레인은 성의 없게 답변했다. 정령사의 성장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레인과 로엘은 쉬지 않고 산을 누비며 사냥에 열중했다. 소모된 자금을 보충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로엘이 레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용병?”
“어.”
사냥을 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부산물의 처분법.
“아무래도 부산물을 판매할 방도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사냥한 것에 비해 벌이가 영 시원치 않잖아.”
코모도 가죽이나 트롤의 혈액 같은 고가의 물건들은 현금화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비싼 만큼 처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현재 로엘이 부산물들을 처분하는 방식은 개인 판매였다. 그때그때 물건을 필요로 하는 상인들을 찾아가는 것. 되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판매할 물건이 너무 고가이면 그게 쉽지가 않았다. 간혹 급하게 매물을 구하느라 물품 소재 파악을 건너뛰는 상단이 나타나지 않으면 판매 자체가 힘들었다.
현재 그렇게 쌓인 고가의 부산물들은 거주지 지하에 마련된 비밀 공간에 보관되어 있는 중이었다. 어디에도 쓰이지 못한 채.
참고로 이전에 용병들에게 도둑질을 당할 뻔한 이후 비밀 공간을 제작했다. 두 소년 외에는 찾을 수 없게 은폐되어있는 공간을.
“그러니까 그냥 팔자니깐.”
“안 돼. 뒷일이 귀찮아져. 지난번에도 스콜피온의 조직원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꼬여 들었었고.”
“······.”
“오크 가죽 좀 처분한 정도로도 그랬는데 하물며 고가의 물품들은 어떻겠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달려들겠지.”
“이젠 웬만한 놈들의 시비 정도는 격퇴하는 데 그다지 문제도 없잖아. 그 스콜피온인가 하는 조직도 포함해서.”
“세상이 그렇게 힘의 논리만으로 돌아가면 참 좋을 텐데.”
“······.”
“가능한 적은 늘리지 말아야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렇게까지 귀찮은 상황을 감수하냐.”
로엘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분명 레인의 말대로 상당한 무력 기반을 쌓긴 했다. 동네 무뢰배 정도는 그 숫자가 몇이던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힘을 드러내 날파리들에게 경고할 거라면 확실하게 해야 했다. 어설프게 하는 건 안 하니만 못했다.
거기에 소모해야 할 노력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귀찮기도 했고.
“그래서, 용병 노릇을 하잔 게 그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전에 테미스 씨와 사냥을 하면서 생각했던 건데, ‘의뢰’를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
“그러니까, 테미스 씨와 같은 이유로 펠라키 산맥을 찾는 이들에게 의뢰를 받아 도움을 주고 보수를 챙기자는 이야기야.”
특정한 몬스터의 부산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많은 마법 실험을 반복하는 마법사들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 중 대부분은 보통 시중에서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간혹 그렇지 않은 것들도 존재하긴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전에 테미스가 구해간 자이언트 보어의 뿔이다. 결국 그러한 종류의 물건들은 본인이, 혹은 고용한 대리인이 직접 구하러 나설 수밖에 없다.
로엘은 그런 인물들을 타깃으로 한 영업을 제안한 것이다.
턱을 쓸며 고민하던 레인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 같았다. 새로운 이윤 창출 수단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수익성도 확실했다. 타깃층부터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이들이니까.
그 정도로 특수한 재료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필시 마법사 아니면 귀족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전혀 돈을 아끼지 않기로 유명한 자들.
하지만-
“손님은 어떻게 모을 건데? 아니, 그것보다. 그렇게 설치고 다니면 너무 우리가 드러나지 않겠어?”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길드를 이용하면 어느 정도 커버가 될 것 같더라고.”
길드.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인물들을 아우르는 대표 기관.
소속된 이들의 권리와 신원을 보호해 주고 소속된 이와의 거래를 원하는 이들에겐 편의와 신용을 제공한다. 간단히 말해 소속된 자들의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고 보면 된다.
그중 대표적인 예시가 용병들을 관리, 단속하고 그들에게 의뢰, 일자리를 알선하는 용병 길드다.
“길드를 이용하면 이쪽이 특정 의뢰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는 공고를 내걸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거기다 의뢰자에게 우리에 대한 신원 발설 금지를 요구할 수도 있고.”
“나쁘진 않겠네.”
“오크 가죽이나 찔끔찔끔 처분하느니 그렇게 한탕벌이를 하는 게 낫지. 이외에 남는 시간은 개인 수련에나 힘쓰고. 너 요즘 경지도 올라서 명상 시간을 늘릴 필요가 있다며.”
“으음.”
“일단 좀 더 알아볼 테니까, 천천히 결정해 보자고.”
* * *
그로부터 이틀 후, 두 소년은 헤이슨 자작령 내 용병 길드 지부를 찾아갔다.
과연 도시 내에 위치한 용병 길드의 지부라고 해야 할까. 주변 건물들에 비해 월등한 높이와 깔끔한 외견을 자랑했다.
건물 내부는 한산했다. 아무래도 이른 아침 시간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쪽에는 직원용 제복을 입은 상담사들이 카운터에 않아 대기하고 있었다.
건물 오른쪽 벽면에는 각종 의뢰서가 붙어 있고, 왼쪽에는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휴식공간에서 자신의 무구를 손질하는 용병들을 드문드문 발견할 수 있었다.
로엘은 곧바로 카운터로 다가가 직원에게 물었다.
“용병 등록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용병 등록은 접수처에서 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호적 조사를 비롯한 문답만으로 등록이 가능하며, 등록 시 F등급 용병패가 발급됩니다.”
카운터의 여직원이 업무용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술술 답해왔다.
용병 길드는 업무 효율성 증대, 그리고 의뢰의 달성률을 높이기 위해 용병 개인에게, 혹은 집단에 등급을 매겨 그 등급에 맞는 의뢰를 맡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높은 실력을 지녔을수록, 많은 경험을 쌓았을수록,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을수록 높은 등급을 부여받는다. 이제 막 용병계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등급은 말할 것도 없이 F.
대충이나마 용병이란 직업에 대해 조사한 레인과 로엘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는 특별 시험을 통과하면 처음부터 상위 등급의 용병패를 발급받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레인이 여직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레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이내 입가에 쓴웃음을 그렸다.
레인의 발언에 몇몇 용병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이내 피식 하고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