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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정령(5) (18/249)
  •  18화. 정령(5)

     테미스가 펠라키 산맥을 찾은 이유는 어느 안면 있는 마법사에게 연구 재료를 구해다 주기 위해서였다.

     그 재료란 것이 산맥 내에 자생하는 각종 약초들부터 여러 몬스터들의 부산물들까지 다양했다. 하루 이틀 산을 오른다고 전부 구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참고로 리나는 그것들 중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두 소년에게 자이언트 보어의 뿔만을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후우.”

     일행은 산을 올랐다. 레인과 로엘이 선두에 섰다.

     사냥은 순조로웠다. 순조로워도 너무 순조로웠다. 테미스는 그룹 사냥을 진행하는 내내 놀랍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두 소년을 뒤따라 이동하는 동안 불필요한 전투는 거의 치르지 않았다. 이렇게나 몬스터가 넘쳐나는 산맥임에도. 솔직히 이렇게 편한 사냥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레인이 기감을 넓게 퍼뜨린 채 이동하면서 몬스터와의 충돌을 되도록 피했기에 가능한 일. 참고로, 지금이라면 영약을 섭취한 로엘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신기하군, 어떻게 이렇게까지 몬스터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거지?”

     테미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발했다.

     몇 번에 걸친 전투를 통해 레인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확실히 견식 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나이대의 소년 중엔 따를 자가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테미스의 시점으로는 레인의 무공 수준보다도 산을 제집처럼 누빌 수 있는, 그 ‘감각’이 더 놀라웠다.

    “마치 검호(劍豪)의 초감각을 보는 것만 같군.”

     이 발언을 통해 두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이쪽 세계의 검사들은 일정 경지에 오르면 저절로 주위를 아우르는 감각을 얻는다는 것을.

    “매일같이 사냥을 하는지라. 이 산에 대해선 손금 보듯 꿰고 있습니다.”

     로엘은 테미스의 물음에 적당히 답변했다. 빙긋 웃는 얼굴. 아예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대답도 아니었다.

    “그렇군.”

     테미스는 짐짓 속아 넘어가는 척해 주었다.

     리나는 옆에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테미스는 레인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내심 쓴웃음을 흘렸다.

     산에서 오래 사냥을 해서라니, 너무 어설픈 변명이 아닌가. 로엘의 말대로라면 산을 무대로 활동하는 베테랑 약초꾼이나 헌터들은 모두 두 소년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사실 로엘도 별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일 뿐, 테미스가 정말로 믿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레인 오빠는 대단하구나.”

     제대로 통성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리나는 11살이었다. 그녀는 레인이 마주친 몬스터들을 강력한 검격으로 쓰러뜨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일일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발했다.

     어린아이는 주변의 영향을 받기 쉽다고 했던가. 그녀는 레인의 모습을 지켜보다 ‘검술’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이미 머릿속엔 정령술과 검술 모두에 능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상태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졸라 정말로 검술을 익히게 된다.

     로엘에겐 그다지 관심을 표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로엘은 그다지 대단한 활약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이들은 이런 면에선 상당히 노골적이다.

    “쉿.”

     레인이 기척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목표한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것을 눈치챈 테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 몬스터, 슬레일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완전히 성체가 된 녀석으로, 동체 길이가 대충 봐도 10미터는 가볍게 넘길 듯싶었다.

     슬레일은 거대한 뱀의 외형을 가진 몬스터다. 대형 동물조차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아가리, 그리고 웬만한 생명체는 순식간에 즉사시킬 맹독을 가지고 있다.

     테미스가 레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레인이 곧바로 슬레일을 향해 내달렸다.

     동시에 이질적인 힘의 파장이 퍼져나갔다. 테미스가 정령의 힘을 빌려 강력한 일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

     레인은 파충류 특유의 눈빛을 번뜩이는 슬레일의 전면으로 달려들어 도약, 검을 휘둘렀다. 아지랑이처럼 검에 덧씌워진 검기(劍氣)가 흐릿한 빛을 발했다.

     슬레일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그 거대한 동체를 뒤틀어 검을 피해냈다. 레인이 그대로 바닥에 착지하자, 슬레일이 거대한 송곳니로 그를 노렸다.

     스치기만 해도 일반인이라면 중독되어 즉사. 오라(Aura)를 다루는 뛰어난 실력의 검사라도 해독 포션이 없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그런 공격에, 레인은 전혀 동요치 않고 대응했다.

     거대한 아가리가 한 치 앞까지 다다랐을 때, 레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그 자리에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특수한 보행기술을 이용해 슬레일의 감각권 바깥으로 이동, 꼬리 쪽에 모습을 드러내 검을 휘둘렀다.

    “캬아아아아아아!”

     슬레일이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꼬리에 난 깊숙한 검상이 거대한 뱀의 흉성을 폭발시켰다. 레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거칠게 몸부림치는 슬레일의 주의를 끌었다.

     슬레일이 무서운 몬스터라지만 결국 그 위험성의 주체가 되는 것은 머리다. 다른 신체 부위는 적어도 레인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레인으로썬 상대하기가 편했다.

     레인은 슬레일이 움직이는 동선을 파악해 슬쩍슬쩍 피하기만 했다. 이미 충분히 슬레일의 주의를 끌었다. 이젠 더 이상 자극할 것 없이 시간만 끌면 그만이었다.

    “지금!”

     테미스가 소리쳤다. 정령이 만들어낸 힘의 파동이 정점에 달한 것을 느낀 레인이 곧장 몸을 빼냈다. 직후,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캬아아악!”

     슬레일의 목이 떨어졌다.

     거대한 동체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 테미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하군.”

     반면 로엘은 테미스만큼 만족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딱히 메리트가 크진 않네.’

     정령사와의 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는 수준은 아니었다. 딱히 테미스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우리가 규격 외이긴 한 모양이로군. 이만한 실력자도 성에 차질 않는 것을 보면.’

     레인이 현재 맡은 역할은 본래 로엘의 것이었다. 로엘이 주의를 끌면 레인이 강력한 일격을 먹이는 형식.

     테미스의 합류로 전체적인 사냥 속도는 빨라졌지만 그뿐이었다. 이전보다 현저하게 빨라진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에 부산물을 배분할 것을 감안하면 손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크고.’

     사냥을 끝마치고 다음 사냥감이 위치한 장소까지 이동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버리는 시간도 상당했다.

    “······.”

     보아하니 레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씩 답답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슬슬 내가 나설 차례로군.’

     상념을 털어낸 로엘이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목이 떨어진 거대 뱀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준비해 둔 단검을 빼 들고 내력을 주입했다. 예기가 현저히 높아진 검으로 슬레일의 가죽을 벗겨냈다.

     얻어내야 할 부산물은 가죽과 독낭. 가죽은 비싸게 팔리고, 독낭은 테미스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 중 하나다.

     테미스가 정령을 부려 상승기류를 만들었다. 슬레일의 목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대량의 혈액. 그리고 도축으로 인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저런 점은 확실히 유용하군.’

     로엘이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애초에 레인이었다면 최소한의 상흔만으로 적을 쓰러뜨렸을 테지만.’

     굳이 목을 떨어뜨리거나 하지 않아도 생물을 죽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근본적으로 테미스는 정령사인만큼 근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는 레인과는 전투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원거리 공격을 날리는 만큼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선 공격 범위가 넓어야 하겠지.

     빠르게 부산물을 수습하고, 준비해온 자루에 담아 배낭에 넣었다. 그리곤 곧장 피 냄새나는 전투의 현장을 벗어났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정령사는 쉽게 만나보기 힘드니까.’

     로엘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아쉬움을 털어내었다.

     * * *

     해가 저무는 저녁 시간.

     일행이 사냥을 마치고 복귀하는 와중, 테미스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는 와중에 조우한 소규모의 오크 무리.

     레인의 활약으로 몬스터와의 조우는 최소화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곳은 몬스터들의 보금자리인 펠라키 산맥이다. 몬스터와 아예 마주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레인과 로엘 두 사람뿐이었다면 높은 기동력으로 그마저도 회피했을 터였다. 테미스가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레인은 오크 무리의 접근을 사전에 감지, 선공을 감행했다. 여섯 오크를 전부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은 채 1분이 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로엘이 뒷정리에 나섰다. 순식간에 가죽이 벗겨진 사체를 내려다보는 테미스의 입에서 덧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허.”

     전투 개시부터 자리를 벗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채 5분이 지나지 않았다. 테미스는 나설 차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리나는 진작 체력적인 한계를 맞이했다.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모양. 뜻밖에 고생을 시키고 있는 참이었다.

    ‘빨리 내려가서 쉬게 해 줘야겠군.’

     솔직히 이렇게까지 강행군이 될 줄은 몰랐다.

     두 소년의 체력을 고려해 짧은 사냥을 예상하고 데려온 손녀다. 그냥 경험을 길러주려는 취지로 동행시켰건만, 두 소년의 능력은 자신의 상상을 훨씬 웃돌았다.

     사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구하고자 한 재료들을 벌써 절반 이상 구했다. 전적으로 두 소년의 능력 덕분이다.

     솔직히 두 소년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외견은 어린아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체감한 그들의 실력은 상상 이상. 대형 몬스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고 능숙하게 그 부산물을 챙기는 두 소년의 모습에 테미스는 할 말을 잃었다.

     열 명 이상의 용병을 고용한다 해도 두 소년과 함께 움직이는 지금에 비해 효율이 떨어질 터였다. 이런 소년들이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 늙은이가 영 기준에 차질 않는 모양이군.’

     실상 오늘의 사냥은 손녀가 생명의 은인인 소년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 졸랐기에 하루만 시간을 할애한 것에 불과했다. 두 소년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오히려 이쪽의 합류가 저들에겐 손해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로엘이라는 소년 쪽은 표정을 읽기 힘들지만, 레인이라는 소년은 답답해하는 기색이 언뜻언뜻 느껴졌다.

    “이젠 대충 몬스터들의 영역은 벗어난 것 같은데.”

     앞서가던 소년 중 하나, 레인이 한 차례 하품을 내뱉으며 사냥 종료를 선언했다. 이렇게나 강행군을 했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아 보이는, 오히려 권태로움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선 앞으로도 함께 사냥할 것을 제안하고 싶었다. 정령 소환을 언급하며 부탁하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그렇지만 손녀의 은인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테미스는 그냥 나머지 사냥은 알아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날 사냥한 물품을 적당히 나눴다.

     일반적으론 검사보다 정령사가 월등히 높은 비율을 할당받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래도 고급 전력이니까.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그런 통상적인 분배법이 통용되지 않았다. 레인은 당연하다는 듯 사냥 결과물의 절반을 챙겨갔다.

     테미스 또한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레인과 로엘은 충분히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활약했으니까.

     테미스는 슬쩍 웃으며 물었다.

    “이 늙은이가 괜히 찾아와서 젊은이들을 귀찮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괜찮습니다. 그보다 리나가 고생을 많이 했군요. 상당히 피곤해 보이네요.”

     로엘이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리나를 눈짓하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산행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던 탓일까.

    “힘들었겠지. 곧바로 돌아가야겠군. 제대로 쉴 수 있게 해줘야겠어.”

     테미스는 손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 * *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다. 정령 소환 의식을 치르기로 약속한 당일.

     레인은 테미스가 완성한 정령 소환진 안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테미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자세인 게냐?”

     레인은 별것 아니라는 듯 눈을 감으며 답했다.

    “이 자세로 앉아 있으면 집중이 잘 됩니다.”

    “그 이상한 자세가? 그것참, 묘하군.”

     의문을 드러내는 것도 잠시, 테미스가 소환진 주위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정령을 불러들이는 힘을 증폭시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할 물건들이었다.

     배치를 끝마친 뒤, 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치곤 들여야 하는 금액이 보통이 아닌데······.”

     자신이 말해놓고서도 괜히 쓴웃음을 짓는 테미스였다.

     저 나이대 소년들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웬만해선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시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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