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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정령(4) (17/249)

 17화. 정령(4)

 레인은 곧바로 집을 나서 산을 올랐다.

 기감을 넓게 두르고 산 곳곳을 헤집고 다니길 한참, 자이언트 보어를 발견해 순식간에 참살했다.

 곧바로 복귀.

 살점과 피, 심지어 힘줄까지 덕지덕지 묻은 뿔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리나가 ‘헉’ 하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로엘이 쓴웃음 지으며 뿔을 보기 좋게 손질했다.

 뿔을 굳이 구해 온 이유는 간단했다. 일종의 선물이자 뇌물이었다. 명절에 시댁에 챙겨가는 선물 세트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리나를 데리고 그녀의 할아버지가 묵고 있다는 숙소 쪽으로 향했다.

 벌써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짙게 드리운 시간. 리나의 할아버지도 지금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나가 말한 여관 근처에 다다르자 그 앞에서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의 노인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해 질끈 묶은 백발. 손녀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인지 먼지가 여기저기 묻은 가죽옷.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리나가 노인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리나!”

 리나의 할아버지, 테미스는 안도감 가득한 얼굴로 리나를 안아 들었다.

 그는 손녀가 품에 안기자마자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부터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곤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후’하고 한숨을 불어냈다.

 그것도 잠시.

“이 녀석!”

 그가 리나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리나는 무언가 항변하려 했지만 테미스의 훈계가 더 빨랐다.

“혼자서 사라지면 어쩌자는 거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머리를 문지르면서 입을 삐죽이던 리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자이언트 보어의 뿔을 구해 왔다구요.”

 그 답변에 테미스의 부리부리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다 그녀가 들고 있는 거대한 뿔이 정말로 자이언트 보어의 뿔임을 알아보고 기겁한 얼굴을 했다.

“뭣! 너 이 녀석, 혼자서 산에 올라갔던 거냐!”

“네!”

 리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뿔을 구해온 자신에게 칭찬이 쏟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듯.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레인이 혀를 찼다.

 당연하게도, 칭찬은 일언반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녀석! 펠라키 산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혼자 함부로 올랐단 말이냐! 이 할애비가 심장 떨어져 죽는 꼴을 볼 셈인 게냐! 방에 들어가 있어라! 오늘 단단히 혼날 테니 그리 알아라!”

 리나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자이언트 보어의 뿔까지 구해왔는데.

 자신에게 매정하게 구는 할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느낀 것인지, 지금의 상황이 부당하다 느낀 것인지.

“으아아앙!”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흩뿌리며 여관으로 뛰쳐 들어갔다.

 테미스는 손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두 소년에게 돌렸다. 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 줄 수 있겠나?”

 * * *

 여관은 2, 3층은 숙소, 1층은 식당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 식당의 테이블 중 하나. 그곳에 레인과 로엘, 그리고 테미스가 마주 앉았다.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테미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 뿔은 저기 있는 네 친구가 사냥해서 구했다는 것이냐?”

 자이언트 보어는 흉폭하고 위험한 몬스터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닌 펠라키 산맥 내에 서식하는 대형 몬스터. 레인 또래의 소년이 사냥하기엔 지나치게 그 위험성이 높다.

 레인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리나에게 물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쓸데없이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러 퉁명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상대가 이쪽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지 못하도록.

 레인에게 있어, 테미스가 자신을 의구심을 가지건 가지지 않건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진짜로 자이언트 보어를 사냥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것의 진위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리나가 구함을 받은 것도, 뿔을 구해 온 것도 전부 눈앞에 드러난 진실이다. 그 이외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테미스는 그런 레인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가 굳이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겠지.”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일단, 고맙다. 리나를 구해줘서.”

“······.”

 일의 전말이 어찌 됐건, 일단 레인은 리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테미스는 먼저 레인에게 순수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레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감사 인사를 받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탓이다.

“거기에······ 저 뿔까지.”

 테이블 한쪽에 기대 둔 자이언트 보어의 뿔을 보며 테미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정말로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군. 혹시 내게 바라는 일이 있나? 웬만한 부탁은 전부 들어주지.”

 로엘이 빙긋하고 웃었다. 계획했던 대로 상황이 잘 풀렸다.

 이렇게 곧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을 보니 역시 연륜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쪽이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알아채라고 뿔까지 구해온 것이긴 하지만.

 로엘은 기다렸다는 듯 솔직하게 용건을 밝혔다. 이런 때 쓸데없는 겸양을 떠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사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좀 과잉 친절을 베푼 감이 없잖아 있죠.”

 테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냐?”

“리나로부터 고위 정령사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로엘은 ‘고위’라는 말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무언가 요구할 때 상대를 적당히 띄워줘서 나쁠 것이 없다.

“저희도 정령과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리나의 억지를 들어주면서까지 이 노인에게 부탁하고자 했던 것.

 혹시 정령사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 가능하다면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자.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계획.

질문을 마친 로엘이 기대가 담긴 시선으로 테미스를 응시하자- 

“그건.”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백히 좋지 않은 반응이었다.

“힘들까요?”

“글쎄, 힘들다기보단 보다 근본적인 문제지.”

“?”

“일단 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은 알고 있나?”

“압니다.”

“그렇다면 자질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는 아나?”

“······?”

“엘프다.”

“예?”

“그 자질이 있고 없고를 판별해주는 존재가 엘프란 말이다.”

 인간과 비슷한 외견을 지닌 이종족들. 그중에 엘프라는 종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로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명 미(美)의 종족이라 불린다고 했던가.

 그런데 정령사의 자질을 알아보는 것과 그들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테미스가 말을 이어왔다.

“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인간’은 거의 없지. 반면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소환진을 한 번 그리기 위해서 소모해야 할 돈은 절대 적지 않아.”

“흐음.”

“정령사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인간은 넘쳐나도록 많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자질을 확인하기 위해 그 비싼 소환진을 그려낼 수는 없겠지? 성공 확률이 거의 없는 도박이니까.”

“확실히.”

 듣고 보니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엘프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

“엘프는 종족 특성상 모든 개체가 정령사의 자질을 지니고 있지. 그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정령사의 자질을 지닌 인물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은?”

“그래. 안 그래도 이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종족인 엘프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올 리도 없지 않느냐. 지금 내가 너희의 부탁을 들어주고자 해도, 해 줄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는 도박’ 정도다.”

‘그런 건가.’

 확실히 리스크에 비해 성공 확률이 너무 희박한 도박이다. 선뜻 손을 대기 힘들었다. 그러나 기껏 이런 자리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그냥 포기하자니 그건 아쉬웠다.

“테미스 씨나 리나가 정령사가 되기 전에 두 사람의 자질을 알아봐 준 엘프가 있었겠죠. 그 엘프에게 도움을 구할 순 없는 건가요?”

“그분은 현재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지. 거기까지 갈 생각이 있다면 추천장 정도는 써 줄 수 있다만.”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쓴웃음 섞인 답변이 되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은 너무 멀다. 애초에 그만한 거리를 다녀올 여유도, 돈도 없다. 한마디로 엘프의 협력을 얻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결국 나중을 기약해야 하는 건가, 하고 로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던 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테미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리나에게 듣기로, 정령사의 자질이 자연과의 교감 능력과 관련이 있다더군요.”

“정확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만 일반적으론 그렇게 알려져 있다. 솔직히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라 지금까지도 이야기가 분분한 가설이지.”

 테미스의 답변을 들은 레인이 검지로 뒷목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럼 시도나 해 보게 해 주십시오. 정령 소환.”

 * * *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사냥을 나설 준비를 마친 두 소년은 생각지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리나와 그녀의 할아버지, 테미스였다.

 두 소년은 우선 두 사람을 앉히고서 간단한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내어왔다. 음식 욕심이 상당한 레인 때문에 집안에는 항상 간식거리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내 레인이 리나와 테미스의 맞은편에 앉아 쿠키 하나를 입에 물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벌써 준비가 끝났나요?”

‘준비’라는 것은 어제 부탁한 ‘정령소환진’을 그릴 준비를 말한다. 어제, 테미스는 우려의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결국 레인의 요청을 수락해주었다.

 참고로 소환진을 제작하기 위한 대금은 양쪽에서 분담해 지불하기로 했다.

 손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들이기도 하고 해서, 보은의 의미로 테미스가 한 사람 몫을 지불해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테미스에게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관계로 두 소년이 부담하기로 했고.

 지난 한 달간 벌어들인 금전을 탈탈 털어 대금을 마련했다. 솔직히 뼈아픈 타격이었다. 당장 오늘 사냥을 통해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내일부터 굶어야 할 판국이었으니.

 아무래도 정령 소환진을 구성하는 재료 상당수가 엘프들의 영토, ‘대수림’의 특산물이라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마법진은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필요한 재료를 구비하기 위해선 시간이 걸리는 탓에 분명 일주일 정도 후로 날짜를 잡았다. 두 소년이 조손(祖孫)의 방문에 당황한 건 그 탓이었다.

“그런 건 아니다. 그건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단순히 재료를 구입하는 것뿐 아니라 가공하는 데에도 시간이 들어가니까.”

 테미스는 고개를 흔들며 레인의 물음에 답했다.

“오늘은 함께 사냥하러 가자는 제안을 하려고 온 거예요!”

 리나가 뒷말을 덧붙였다. 묘하게 들뜬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로엘이 테미스에게 시선으로 묻자 테미스가 허허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너희들이 구해다 준 뿔 이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어서 그런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나와 함께 사냥하러 가지 않겠나?”

“아······.”

 하긴, 그러고 보니 굳이 펠라키 산맥까지 찾아와서 달랑 뿔 하나만 구해 가려 했을 리가 없다. 보통은 목적으로 하는 여러 재료들 중 뿔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

“너희들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 악명 높은 펠라키 산맥에서 자이언트 보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냥할 정도라면 필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겠지.”

“······.”

“그래서 이 늙은이가 호위를 좀 부탁하려고 온 게다. 이왕이면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나? 함께 사냥한 후에 수익을 적절히 배분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 같은데.”

“흐음.”

 로엘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다.

 마법사, 혹은 정령사가 검사를 호위로 두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형(異形)의 힘을 구사하는 그들은 가진 바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강력하지만, 육체적 스펙은 그에 미치지 못해 정작 자신들의 몸을 지킬 수단이 부족한 편이니까.

 마검사나 정령검사 같은 다방면에 능한 이들도 있고, 직업적 한계 따윈 가볍게 초월한 괴물들도 존재하는 모양이지만.

 고위 정령사와의 협동 사냥. 분명 이쪽이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긴 했다. 그러나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임에도 로엘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아무리 손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지만 이렇게 덥석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나?’

 실력이 어떻다느니 하는 문제를 운운하기 이전에, 자신들은 테미스와 어제 처음 만났다. 즉, ‘타인’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테미스 쪽에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불쑥 찾아와 그룹 사냥을 제안해 온 저의가 조금 의문이었다.

“뭐 좋습니다. 정령사와의 합동 전투도 한 번쯤 경험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고.”

 그런데 레인이 먼저 멋대로 수락해 버렸다.

“······.”

 로엘이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돌아보자 레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로엘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나중에 로엘이 왜 그렇게 간단히 수락했냐고 물었을 때 레인은- 

“그냥 네가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거야. 상대방이 이쪽에 적의가 없다면 저의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고.”

 -하고 간단하게 답변했다. 뭔가 단순히 고민을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짚고 넘어갔음을 알 수 있는 발언.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친손녀의 은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을 가지는 사람은 세상에 그다지 없다.

 로엘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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