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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정령(3) (16/249)

 16화. 정령(3)

“꺄아아악!”

 오크들에게 둘러싸인 소녀, 리나는 연신 비명을 지르며 정령을 부려 바람의 탄환을 쏘아냈다.

 어떤 적을 마주하든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 그런 것은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 버린 이 순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오크들의 험악한 외모에 완전히 겁을 집어먹고 쓸데없이 힘을 낭비했다. 오크들이 그르렁 하고 낮게 우는 소리가, 놈들이 들고 있는 무구로부터 비롯된 쇳소리가 그녀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꺄아악! 꺄악!”

 포위되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현 상황이 그녀를 절망으로 몰아갔다. 리나는 공포에 잠식되어 연신 바람의 탄환을 쏘아냈다.

 제멋대로 쏘아져 나간 탄환들은 오크들에게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그래도 훌륭한 위협 수단이 되어 오크들이 리나를 향해 함부로 달려들 수 없게는 해 주었다.

 그녀가 가진 정령사로서의 자질만이 현재 그녀의 목숨을 지켜주는 모든 것이었다.

 파삭!

 그러던 어느 순간, 허공에 밀집되던 바람이 탄환의 형상을 채 갖추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다.

“어? 어?”

 그녀가 당황하며 곧바로 탄환을 재생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로 그쳤다. 바람은 연신 뭉쳐지려다 이내 형상을 잃고 붕괴했다.

 얼마 되지 않는 힘이 지나치게 남발되어 고갈돼버렸다. 그것을 깨달은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으.”

 겁에 질린 리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연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위축된 표정으로 주변의 오크들을 둘러보길 잠시. 이내 소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정령의 힘이 사라졌음을 인지한 오크들. 그치들이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며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괴성을 내질렀다.

 공포에 잠식된 소녀의 눈가에 습막이 어렸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하고 혼자서 산을 오른 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몬스터들뿐.

 들려오는 것 또한 기분 나쁜 몬스터의 울음소리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명백했다. 리나는 차마 달려 들어오는 오크들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주먹 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쿠에에에엑!”

 -섬뜩한 파육음. 그리고 그에 맞물리듯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귓가로 전해져왔다.

‘······?’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지척까지 접근해온 오크. 그리고 그 오크의 미간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피에 젖은 검신.

 검은 빠르게 뽑혀 오크 뒤쪽에 서 있는 한 소년에게 회수되었다. 미간이 꿰뚫린 오크가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소년의 얼굴이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짙은 밤갈색 머리칼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눈동자, 그리고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날렵한 턱선까지. 그야말로 미소년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소녀가 풀썩 주저앉았다.

“······.”

 소년, 레인은 그런 리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바람 소리가 나도록 팔을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쿠에엑!”

“퀘에에에!”

 동료의 죽음에 광분한 오크들이 표적을 레인으로 전환해 달려들었다. 레인은 한 차례 숨을 고르고 곧바로 대응했다.

“우, 우와.”

 오크들이 순식간에 소년의 손에 들린 검에 베이고, 찔리고, 갈라져서 쓰러졌다. 리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 자리의 모든 오크가 목숨을 잃었다.

“후.”

 레인은 재차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소녀를 돌아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고.”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소녀를 살피는 소년. 소녀, 리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 * *

 레인이 오크들을 처치하자 로엘이 뒤따라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는 곧바로 시체들을 한데 모아 가죽을 슥슥 벗겨내기 시작했다. 여유시간이 그다지 없는 탓에 손놀림이 급했다. 얼마 있지 않아 몬스터들이 몰려올 터.

 리나의 시선이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년에게로 되돌아갔다.

“구,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

 레인이 가만히 리나를 내려다보며 답변했다.

 지근거리에서 살펴본 소녀는 상당히 귀여운 인상이었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금발, 거기에 특이하게도 머리 색과 같은 금안. 인형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외견이었다.

 레인은 소녀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어쩌다 혼자 여기까지 올라왔어?”

 레인의 물음에 소녀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소녀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할아버지 몰래 제멋대로 산을 올랐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잘못을 자각했다. 그런 상태였다. 그 타이밍에 이런 질문을 받자 마치 추궁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혼자 여기까지 오게 된 거냐고.”

 레인이 재차 질문했다. 소녀가 살짝 위축된 표정을 지었다.

 그 직후, 이쪽에 적의를 가진 다수의 기척이 레인의 기감에 걸려들었다. 아무래도 방금까지 있었던 전투의 소음을 듣고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모양. 그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 그게······.”

 그리고 그 얼굴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리나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소녀였다. 심지어 오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준 소년은 얼굴을 찌푸린 채 추궁을 해오기까지.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이 나이대의 꼬마들이 이런 때 보이는 반응은 뻔하다. 소녀는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앙!”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펠라키 산맥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온 힘을 다해 울어 재끼는 어린 소녀.

“?!”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레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여기서 애를 울리고 난리야. 몬스터 다 몰려들겠네.”

 한참 가죽을 배낭에 쑤셔놓고 있던 로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레인을 책망했다.

“나도 몰라.”

 영문을 모르는 것은 레인도 마찬가지. 그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이후 로엘이 소녀를 안아 올리고, 레인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뚫어내며 하산했다.

 기감을 동원해 최대한 몬스터들을 피해 가며 움직인 덕분에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소녀는 결국 로엘이 목 주변에 세침을 박아 넣고서야 조용해졌다.

 * * *

 천신만고 끝에 귀가할 수 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소녀를 앉혀 놓은 레인이 자신도 그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로엘 또한 그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래서, 이름은?”

“리나예요.”

 소녀는 아직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산엔 뭐하러 올라간 거고?”

“자, 자이언트 보어의 뿔이 필요해서······.”

 자이언트 보어(Giant boar)는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로 커다란 덩치에 콧등에 달린 단단한 뿔이 특징인 몬스터였다.

 레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이언트 보어의 뿔은 어떻게 구하려고 했는데?”

“사냥해서 구하려고 했어요.”

 리나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자이언트 보어는 고사하고 오크 따위에게 둘러싸여 목숨을 위협받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자이언트 보어의 뿔은 왜 필요한데?”

“할아버지가, 흐끅, 필요하다고, 흐끅, 하셔서.”

 좀 질문했더니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레인이 대놓고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넌 왜 애를 추궁을 하고 있냐.”

 로엘이 쓴웃음 지으며 레인을 제지했다. 아무래도 레인은 어린 소녀를 상대하기엔 영 부적절한 인물이다.

 일단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성이 있었다. 되도록 친절해 보이는 어조와 표정을 가장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오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바람의 탄환을 만들어 날리던데. 혹시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거야?”

“네.”

 소녀가 눈물을 삼키며 머뭇머뭇 답했다. 로엘은 빙긋 웃는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럼 네가 말로만 듣던 그 정령사라는 말이네?”

“네!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예요.”

 리나는 눈물을 닦아낸 후,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의기양양한 얼굴. 아무래도 자신이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엘은 그 뒤로도 정령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그녀가 기분을 회복할 수 있게 했다. 소녀는 신이 나서 로엘의 질문에 착착 대답했다.

 능숙하게 아이를 다루는 로엘의 모습에 레인이 살짝 감탄했다. 그러던 와중, 레인의 관심을 끄는 내용이 들려왔다.

“편의성?”

“네. 정령은 마법과는 달라서, 딱히 정형화된 활용법 같은 게 없거든요. 사용법이 무궁무진해요.”

“흠.”

 본래 레인은 정령이나 마법과 같은 이능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에겐 무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리나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고위 정령사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엔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활의 편의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가자 생각이 변했다. 이어진 대화의 내용에 따르면, 정령들의 편의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든 불을 지필 수 있는 불의 정령. 더위를 물리칠 바람을 부르는 바람의 정령. 심지어 청소나 세탁, 하다못해 세수까지 맡길 수 있는 물의 정령까지.

 거기까지는 말 그대로 ‘편리한’ 수준에서 그쳤다.

“몇몇 땅의 정령사들은 귀한 약초를 탐색, 채집하는 데 정령을 이용한다고 해요.”

 리나의 이 발언은 레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반응하게 만들었다. 옆에 앉은 로엘이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영약 채집 때문에 저러는군.’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로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대충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

 로엘은 이쯤이면 됐겠지 싶어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했지? 지금 그분은 어디에 계셔?”

“그, 그게.”

 리나는 손가락을 꼼질대며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로엘이 재차 부드럽게 묻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이 근방의 여관에 계셔요. 산에 오를 준비를 한다고 며칠 전부터······.”

“그런데 넌 왜 혼자서 산에 올라간 건데?”

 레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할아버지께서 며칠째 준비만 하고 계시니깐 지루해서······.”

“······.”

 레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소녀의 목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야, 야.”

 기껏 달래 놓았건만.

 로엘이 레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레인은 그것을 무시했다.

“가자.”

 레인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어, 어딜요?”

“어디긴, 너희 할아버지 계신 곳이지.”

 리나의 반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레인. 그러자 리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아, 안 돼요. 분명 할아버지한테 혼날 거예요.”

“그래서, 안 갈 거냐?”

 레인이 혀를 찼다. 혼나는 게 무서워 돌아가지 않겠다니, 참으로 어린애다운 투정이었다.

“안 돼! 못 가!”

 금빛 머리칼이 세차게 흔들렸다.

“후.”

 레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린아이의 투정에도 정도가 있다. 보다 보니 슬슬 짜증이 밀려들었다.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고 가서라도 그녀의 할아버지가 있는 곳에 던져놓고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마지막 경고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 리나가 그를 검지로 가리키며 급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오, 오빠는 강하죠? 그렇죠? 아까 오크들도 순식간에 해치웠잖아요?”

“누가 네 오빠냐.”

“그러니까, 산에 가서 자이언트 보어의 뿔 좀 구해다 주세요! 그것만 구해가면 할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화를 내시진 않을 거예요! 제발!”

“······.”

 레인의 이마에 파인 골이 한층 더 깊어졌다.

 대체 이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을 해야 하는 걸까.

 초면인 사람에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산속에 들어가 자이언트 보어를 사냥해 달라고 요청하다니.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게다가 정말로 뿔을 구해가면 혼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이 쓴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식이 부족하고 감정이 앞서는, 치기 어린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이었다. 레인이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했다.

 그렇다고 잘못된 점을 설명하고 이해시키자니 그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었고.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레인은 이 개념 없는 꼬마를 꽁꽁 묶어다가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있다는 여관 앞에 던져놓고 오기로 결심했다.

“······?”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던 레인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로엘이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냐고 눈빛으로 묻자,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리나를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이 꼬마의 원대로 해주자는 건가?’

 레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조금 전 리나와 나눈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마 녀석의 할아버지란 인물도 정령사라고 했던가?’

 아까 리나와 나눈 대화 중에는 그녀의 할아버지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도 그녀와 같은 정령사인데, 그 실력이 정말 뛰어나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인의 표정이 확 변했다. 살짝 로엘 쪽을 돌아보니, 이쪽의 생각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친근한 목소리와 표정을 가장했다.

“구해다 주지.”

“구해다 줄게.”

“저, 정말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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