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정령(1) (14/249)
  •  14화. 정령(1)

    “그워어억!”

     괴성과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레인이 경신법을 발휘, 슬쩍 자리에서 비켜섰다.

     직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내리치는 끈적끈적, 울퉁불퉁한 표피에 감싸진 주먹. 그 둘레가 레인의 몸뚱어리에 비견되었다.

     레인은 상대를 차분한 눈으로 응시했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덤벼드는 눈앞의 대형 몬스터를.

     트롤.

     몬스터들 중에서도 상위의 포식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물 중 하나.

     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신장. 두껍고 긴 팔이 특징이다.

     트롤의 팔은 거의 통나무에 비견될 정도로 두껍다. 그러나 트롤이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그 덩치도, 인간쯤은 가볍게 눌러 죽일 힘도 아니다.

     트롤이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재생력에 있다.

     트롤은 거의 모든 상처를 순식간에 자가 치유하는 압도적인 재생력을 지니고 있다. 설사 팔을 잘라낸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팔이 돋아나올 정도.

     그 압도적인 재생력은 수준급의 무력과 경험을 겸비한 기사들이 여럿 모여 있다고 해도 트롤을 경시하지 못하게 한다.

     먹이사슬 계급만 놓고 보면 오우거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존재지만, 인간에게 있어선 그 반대였다. 상성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몸집이 작은 인간에게는 훨씬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그워어어어억!”

     레인은 재차 날아드는 트롤의 주먹질을 가볍게 피해냈다.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검을 내질렀다. 그의 검이 수차례 트롤의 팔을 얕게 베어냈다.

     베어낸 자리에서 잠시 붉은 피가 흐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과정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된 장면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의가 꺾일법한 회복력. 가히 불사신이 연상되는 수준이다.

    “······.”

     상대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음에도 레인의 눈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본인의 공격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현 상황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묵묵하게 주먹을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에 트롤은 속수무책으로 꿰뚫리고, 베이고, 갈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재생했다.

    “그워어어어어!”

     트롤이 광분해서 양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괴성을 내질렀다. 레인이 그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좋아.

    언뜻 보기엔 이쪽의 체력과 내력만 소모되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형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적어도 레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트롤은 압도적인 재생력으로 상처를 치유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이고 자극적인 고통은 감정의 격화를 부른다. 고통을 받는 대상이 거친 흉성을 지닌 몬스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레인은 전투에 있어 평정심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안다. 전생에 그것을 질리도록 경험했다.

     그렇기에 알았다. 방금 전에 트롤이 내지른, 고통과 분노에 찬 괴성이 지금 벌이고 있는 전투의 분기점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쾅!

     트롤이 들어 올렸던 팔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레인이 훌쩍 뒤로 물러나 회피했다.

     트롤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졌다. 그에 반해 레인의 움직임은 처음과 같이 차분하고 날카로웠다. 한 점의 위축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해서 상대를 자극시키는 상처를 입혔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를 약 올렸다. 트롤이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갔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결국 트롤의 흉성이 폭발했다.

     몸을 통째로 날려 몸통 박치기를 시도해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최소한의 방어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그 거체 곳곳에 수없이 많은 허점들이 드러났다.

     방어를 배제한 공격 일변도의 전투 방식. 레인이 바라던 바였다.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나 지루한 공방을 이어왔다.

     확 하고 옆으로 신형을 날렸다. 지금까지 가볍게 움직이던 것과 상반되는 갑작스러운 가속. 갑자기 시야에서 레인이 사라지자 트롤이 당황했다.

     쾅! 콰드드득!

     몸통 박치기가 뒤편에 위치한 나무에 작렬했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막대한 충격에 나무가 뿌리째 뽑혀 뒤쪽으로 쓰러졌다. 반동으로 트롤 또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순간을 노려서 레인이 달려들었다. 지근거리에 다다르자마자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였다. 그대로 내력을 발끝으로 방출,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트롤이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을 감행하게 된 데에는 자만심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상대방의 빈약한 공격 따위 자신에겐 절대 치명타가 될 수 없다는 자신감.

     무의식이란 것이 무서워서, 레인의 소극적인 공격들에 익숙해진 트롤은 자연스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목숨을 건 전투 와중이다. 잘못된 판단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법.

     레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트롤의 얼굴 앞에 다다랐다.

     촤악!

     검을 횡으로 휘둘러 두 눈에 깊은 상흔을 만들었다. 트롤이 비명을 내지르며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손상된 눈이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그러나 그보다도 빨리 몸을 움직이는 레인.

     바닥에 내려선 뒤, 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 재차 도약했다.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 트롤의 턱이 맞닿았다. 그 순간 레인이 손에 잔뜩 끌어모은 내력을 바깥으로 밀어내, 폭발시켰다.

     퍼엉!

     가죽 공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인은 그 반동을 이용해 허공에서 한 바퀴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리고 곧바로 트롤의 가슴팍에 재차 내력을 잔뜩 끌어올린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퍼엉-!

     재차 울리는 가죽 공 터지는 소리.

     막대한 충격파가 피부를 타고 흘러가 신체 내부를 헤집었다. 겉은 손상시키지 않고 그 내부에만 타격을 입히는 상승의 기예였다.

     일격에 뇌가 곤죽이 되고 이격에 심장이 박살 났다.

    “그워어억!”

     쿵.

     아무리 재생력이 높은 트롤이라고 해도, 아니 그 어떤 생명체라도 뇌와 심장이 한꺼번에 파괴된 채로 생명 활동을 이어나갈 수는 없다. 트롤의 육중한 거체가 뒤로 넘어가며 굉음을 울렸다.

     쓰러뜨린 적을 뒤로하고 내려선 레인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더럽게 끈적거리는군.”

     풀잎을 뜯어내 손을 닦고, 곧바로 시체가 된 트롤의 혈관에 준비해 둔 대롱을 박아 넣었다. 이내 붉은 피가 대롱을 통해 준비해 둔 가죽 자루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채혈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집했다. 멀뚱하게 채혈 과정을 바라보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평소와는 달리 사냥의 뒤처리에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본디 펠라키 산맥이라는 땅은, 넘쳐나는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도록 항시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진 사냥을 나설 때마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상황이 달랐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트롤은 오크와 같은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몬스터와는 달리 단일 개체로써 활동한다. 그렇기에 동료가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트롤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펠라키 산맥에서도 먹이사슬 상위권에 위치한 몬스터.

     오크와의 전투로 인한 소음이 주변의 몬스터들을 불러들인다면, 트롤과의 전투로 인한 소음은 오히려 주변의 몬스터들을 쫓아낸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적어도 트롤의 피를 뽑아낼 시간 정돈 아슬아슬하게 벌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시간 동안 트롤의 ‘영역’ 안쪽은 몬스터들이 함부로 침범해오지 않는 안전지대가 된다는 뜻이었다.

     레인은 불과 며칠 전에 대형 몬스터 사냥은 위험하다고 판단, 훗날을 기약했었다. 한데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은 오늘 재차 사냥을 개시했다.

     영약을 섭취해 내력이 급증한 덕분이었다. 이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출력이 높아졌다. 강해진 만큼 사냥이 수월해졌다.

     약초를 캐며 주위를 살피던 레인은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흑화구엽초(黑花九葉草).’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선 곳에는 특이하게도 꽃잎이 검은 구엽초가 있었다. 품은 기운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 꽃잎의 색이 변색된 이 약초는, 백년하수오 못지않은 효능을 지닌 준영약이었다.

     레인은 미리 준비해 둔 자그마한 목함을 품속에서 꺼냈다.

     행여 뿌리 한 올 상할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캐낸 영약을 그 속에 고이 넣어 봉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채집을 마무리한 그가 트롤의 헌혈 현장으로 복귀했다.

    “괜찮군.”

     대롱을 뽑아내 정리한 후, 그가 가죽 자루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트롤은 상당히 돈이 되는 몬스터였다. 뼈와 가죽, 그리고 살점은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지만, 뛰어난 재생능력의 원천인 혈액은 그 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그 피를 이용한 마법 연구가 수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관이 혈액을 정제하면 그것을 재료로 포션을 만들 수도 있었다.

     마시거나 상처에 뿌리면 급속도로 몸이 치유되는 기적의 의료 약품. 포션(potion). 그것은 웬만한 베인 상처쯤은 순식간에 아물게 할 정도로 뛰어난 효과를 자랑한다.

     포션은 귀중품인 만큼 가격대가 높았다. 주재료가 되는 트롤의 혈액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최후의 공격을 가할 때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트롤을 즉사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검격은 큰 상흔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니까. 대량의 출혈이 발생해서야 본말전도였다.

     묵직한 자루의 무게에 레인이 내심 흡족하게 웃었다. 사냥을 시작한 이래 최고로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된 듯싶었다.

     * * *

     가정교사 일을 마치고 마법사의 서재에 들어선 로엘. 그가 몇 권의 서적을 참고해가며 미리 구해 온 종이에다 무언가를 쉴 새 없이 끄적였다.

    “이거 돈이 엄청 깨지겠는데.”

     스스로 정리한 내용을 훑어보며 내린 감상.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 펜을 굴리길 몇 차례.

    “내가 벌어들인 금액만으로는 무리고, 레인에게 손을 벌려야겠군.”

     마법이 돈이 많이 드는 학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것을 피부로 느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뼈아팠다.

    “이참에 나도 의원 일 그만두고 레인 따라 몬스터 사냥이나 다녀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금이 모자랐다. 구상한 물건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을지조차 알 수 없는데, 현재의 수입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목돈을 벌어들일 수단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사냥 정도. 직접적인 전투 능력은 떨어지지만, 적어도 사냥을 따라나서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레인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사냥의 효율이 대폭 높아지게 될 테니까. 아무래도 솔로 헌팅보단 그룹 헌팅이 효율이 좋을 수밖에 없다.

    “흐음.”

     빙글빙글.

     손 위에 놓인 펜을 계속해서 굴려 가며 로엘은 고민했다. 그러길 잠시, 다시 무언가를 종이 위에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 * *

     로엘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기 길에 대장간에 들러 주문했던 물품들을 수령했다. 각 부품을 각각 다른 대장간에 의뢰한 탓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미 레인이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방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는지 좋은 냄새가 났다.

     로엘이 방에 짐을 정리하고 나오자 레인이 식사를 권해왔다. 로엘의 몫도 있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레인. 할 말이 있는데.”

     식사를 하면서, 낮에 생각해 뒀던 대로 사냥에 참여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곧바로 긍정적인 답변이 되돌아왔다.

    “좋아. 나도 마침 서포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고.”

     솔로 헌팅은 비효율적이다. 사냥도, 부산물을 챙기는 것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거기다 일정량 이상 수확물이 쌓일 때마다 하산해서 짐을 집에 가져다 둬야 한다.

     서포터가 있다면 일을 분업할 수 있다. 도축 자잘한 일은 서포터에게 맡기고 레인은 사냥에만 전념하면 된다. 수확물도 서포터가 전부 들고 다닐 테니 중간중간 하산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너 이상의 적임자는 없겠지.”

     사냥 중 쉴 새 없이 경신법을 사용하며 돌아다니는 레인이다. 그 사냥 템포를 따라올 수 있는 서포터는 흔치 않았다.

     거기다 애초에 레인은 타인과 페어를 짜고 무언가를 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로엘 정도만이 예외에 속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엘의 제안은 레인에게 있어서도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잘 부탁해.”

    “그래. 그리고 사냥에 나서기 전에 네 전력도 좀 강화해 두자.”

    “?”

    “영약 하나 먹어둬라. 사냥 다니다 보면 체력 소모가 심할 텐데, 미리 내력을 증진시켜두면 도움이 될 테니까.”

    “귀한 것 아니었어?”

    “귀하긴 한데, 희소성은 그다지 안 높더라고. 적어도 이 세계에선. 얼마든지 더 구할 수 있어.”

    “좋아.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도록 하지.”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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