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해프닝(3)
“자 그럼.”
레인은 기절한 여인을 어깨에 들쳐 멨다. 항간에 소문이 자자한 연쇄살인마다. 치안병에게 넘기면 현상금을 받을 수 있을 터.
“아, 저기.”
레인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물색 머리칼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
“도움을 줘서 고맙다. 오해해서 미안하고. 그렇게 위험한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소년이 허리를 숙여 가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그러자 레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지?”
소년의 감사 인사에 대한 레인의 답은 뜬금없는 추궁이었다.
“보아하니 상당한 수련을 쌓은 것 같은데.”
“어, 어? 아, 그렇지.”
“그런데도 이 여자의 행동거지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나? 약자처럼 연기하고 있었지만, 기질은 확연히 달랐는데.”
“아니, 그거야 그런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한 마디로 상대의 기질을 알아볼 실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상황에 취해 그걸 게을리했다는 말이로군.”
“······.”
세상은 흑백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없다. 겉으로는 피해자로 보이는 인물이 가해자일 수도, 가해자로 보인 인물이 피해자일 수도 있다.
레인은 전생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했다. 지금 눈앞의 소년에게 굳이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조금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건 좋아. 그렇지만 거기에 휘둘리진 마라. 보일 것도 안 보이게 되니까.”
“······.”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그냥 내키는 대로 한 일이니까.”
레인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물빛 머리칼 소년이 발걸을 붙들듯 입을 열었다.
“저들은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냐?”
소년이 용병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두 용병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끌고 온 여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물빛 머리칼 소년에게 당하지 않았다면 진작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
“내가 왜?”
“······치안병에게 가려는 것 아니었나?”
“치안병에게 이 여자의 신병을 인도하려는 건 맞는데.”
“이 녀석들도 넘겨야 하잖아. 그러니······.”
“그러니까 왜? 그 녀석들은 딱히 현상금도 안 걸려 있지 않나?”
“아니, 현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강간 미수범들이다. 당연히 처벌을 박데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데 레인의 생각은 소년과는 다른 듯했다.
“귀찮게 그럴 필요 있나. 제 발로 알아서 걸어가려 하지도 않을 텐데. 그냥 죽여 버리지?”
“!?”
“뭘 놀래? 어차피 이 여자 말마따나 죽어 마땅한 녀석들이잖아. 굳이 수고로움을 감수해가며 목숨을 부지시켜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게 무슨.”
예상치 못했던 레인의 발언에 소년이 기겁했다. 용병들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만악의 근원을 잘라내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거 없어도 더러운 짓 할 놈들은 다 하니까. 최선책은 아니지.”
레인이 전생에 몇 번 맞부딪친 동창(東廠)의 무인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용병들이 한층 더 겁을 집어먹고 다리를 오므렸다.
“겨, 겨우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는 건 좀.”
소년이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물러 터졌긴.”
레인이 가늘게 뜬 눈으로 소년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 녀석은 전생의 자신과 닮았다. 뒤처리가 어설픈 점까지도.
이런 놈들을 살려둬 봐야 반성은커녕 원한을 품고 뒤를 노려 오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전생에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실력을 지녔었음에도, 레인은 살해당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저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쌓아 올린 은원이다.
저런 송사리들에게 원한을 산다고 훗날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없애는 게 좋다. 잡초는 베어내는 게 아니라 뿌리째 뽑아내야 하는 법이다.
“난 역시 치안병에게 넘기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알아서 해라.”
일단 두 용병을 쓰러뜨린 건 소년이었다. 당연히 용병들을 처분할 권리도 그에게 있었다. 더 이상 간섭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 둘의 증언이 있어야 이 여자가 연쇄살인마라는 걸 입증할 수 있겠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이쪽의 입장에선 저 두 용병이 산 채로 치안병에게 넘겨지는 것이 이득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건 좋아. 그렇지만 거기에 휘둘리진 마라.”
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물색 머리칼 소년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장 나부터 주의해야겠지.’
걸음을 옮기며 레인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색 머리칼 소년에게 조언하듯 말했지만 실상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스스로 정한 삶의 지침 중 하나였다.
전생의 기억으로부터 배웠다. 정의로운 것과 무른 것은 다르다.
악인에게 아량을 베풀거나 새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주는 것은 그냥 자아도취다. 이후에 그들이 다시 벌일 악행까지 책임지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름은?”
멀어져 가는 레인의 등을 향해 소년이 물음을 던졌다.
“레인.”
“내 이름은 오베른이다.”
“안 물어봤다.”
* * *
“다녀왔습니다.”
소년, 오베른은 강간 미수범들, 즉 용병들을 치안병에게 넘겨주고 숙소로 복귀했다.
“산책은 잘 다녀왔느냐?”
그런 소년을 맞이해 준건 3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예. 할아버님.”
오베른은 사내를 ‘할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의아한 광경이었다.
겉모습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사내는 절대 그런 호칭으로 불릴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는 사내대로 그 호칭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느냐?”
“예?”
“잘 다녀온 것치곤 표정이 굳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
오베른이 자책하며 급히 표정을 풀었다. 아무래도 그런 일을 겪은 탓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했군.”
“예.”
결국, 오베른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게 되었다.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장년 사내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
“그런데 놀랍군. 분명 네 또래의 소년이었느냐?”
“예. 분명 그러했습니다.”
“네 실력도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인데, 그런 네가 감도 잡지 못할 수준의 실력자라······.”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동년배 중에 제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실력자가 있을 줄은.”
오베른이 조금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해지는군. 나중에 한 번 봤으면 좋겠구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보아하니 손자 녀석이 그 동년배 소년을 보고 상당한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향상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동년배 소년에게 자극받은 손자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더욱 정진한다니, 더 없이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사내, 대륙에 이름 높은 검가(劍家) - 카트넬 가의 전대 가주(家主), 크레필만 카트넬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손자의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 * *
현상금을 수령하고 집으로 돌아온 레인의 앞에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야 이거.”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에 제작자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장식품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붓고 터진 몰골로 한껏 뒤엉켜 있는 세 용병. 그중 한 녀석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상태였다.
“······.”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까뒤집고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껄끄럽게 느껴졌다.
“이러라고 가르친 침술이 아닌데.”
레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는데, 의식이 남아 있는 두 용병이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이쪽에 무언가를 호소해왔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 목소리를 내는 것도 불가능.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뿐. 상당히 잔인한 처사였다.
레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감상했다.
“확실히 실력은 많이 늘었네.”
그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품평을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용병이 그게 아니라는 듯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실내로 들어서자 소파에 거나하게 드러누워 있는 로엘이 눈에 띄었다.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태도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왔다.
“왔냐.”
“현관 앞에서 이상한 걸 봤는데.”
“행위예술가야. 행위예술가.”
“행위예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쪽 업계의 미래가 상당히 암울하다는 건 잘 알겠군.”
“장소를 빌려달라 하기에 앞마당을 내어줬지. 어찌나 간곡하게 부탁하던지.”
“그것참 온몸을 불사르는 열정이로군.”
“열정이 넘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레인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쓸데없는 잡담은 이쯤하고, 저 녀석들 진짜로 뭐야?”
“도둑.”
“빈집털이?”
“어.”
“일부러 앞마당에 저렇게 둔 이유는? 그다지 눈 건강에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확실히 조금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 일부러 보여주려고 저렇게 해 둔 거긴 하지만.”
“무슨 소리야?”
“아 그게, 이 녀석들을 뒤에서 조종한 녀석이 있더라고.”
“뭐?”
“너도 이름은 들어 봤을걸? 스콜피온이라고, 자작성 외곽 빈민가를 무대로 활동하는 암흑조직. 거기 조직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던데.”
“심문이라도 한 모양이지?”
“일단. 너무 쉽게 전부 불어서 좀 김이 새긴 했다만.”
로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바깥의 용병들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었을 터다. 눈앞에서 동료의 중심부가 작살 나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보게 한 인물이 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듣기로 이름이 러츠라고 했던가. 가명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저놈들을 꼬드겨서 한 번 찔러보는 용도로 써먹은 모양이더라고.”
“러츠?”
“어. 그러니까······.”
이어진 로엘의 설명, 아니 추측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로엘은 최근 몬스터의 사체를 여럿 처분했다. 그런데 딱히 그것을 숨기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판매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드러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걸 억지로 감추느라 힘을 빼느니, 그냥 적당히 드러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젠 레인의 무력 수준도 상당해져 웬만한 트러블은 걱정할 필요도 없기도 했고.
사실 다른 계산도 깔려있었다. 헤이슨 자작령에서 하루 동안 거래되는 몬스터 부산물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다. 로엘이 거래하는 물량은 그것의 극히 일부일 뿐.
그렇기에 그에 관심을 가질 녀석은 웬만해선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런데 그 판단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암흑조직에 관련된 인물 중에 로엘이 처분하는 몬스터의 부산물에 눈독을 들인 녀석이 있는 듯했다.
‘러츠라고 했지. 기억해 둬야겠군.’
로엘의 설명이 마무리되고.
레인이 뒷목을 긁적거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추측이 옳다면 로엘의 거래 장면을 목격하고 관심을 가진 건 분명 그 녀석이겠지.
머릿속에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그 나이대의 소년이 다루기엔 지나치게 가치가 높은 물품들. 그 물품들을 로엘이 처분하는 장면을 스콜피온의 말단 조직원이 우연히 발견한다. 그리고-
[직접 사냥을 한 것이라 보긴 어렵다. 분명 그 소년에겐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던지 뒤를 봐주는 녀석이 있다.]
그런 추측을 했겠지. 그렇다면 앞뒤가 맞는다.
곧바로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더하려고 했을 터였다. 적당한 용병들을 부추겨 실험대로 삼아서.
만일 뒤를 봐주는 녀석이 없다면 직접 들이쳐서 조직의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생각이었겠지.
‘나중에 제대로 날을 잡고 치워버릴 필요가 있겠어.’
만일 이쪽의 무력이 세 용병에 비해 떨어졌더라면 눈 뜨고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조만간 정리해야겠지?”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는지, 로엘이 그렇게 물어왔다.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침.
결과를 살펴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정찰을 나선 스콜피온의 조직원 러츠.
“허?”
그는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을 후광 삼아 엄청난 예술혼을 불태우는 세 사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