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해프닝(2)
레인은 영주성 내 노점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귀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딱 로엘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
밀 빵 하나를 입에 밀어 넣으며 골목길을 지나던 레인이 귓가를 파고드는 소음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꺄악!”
“조용히 해! 죽고 싶지 않으면.”
여인의 뾰족한 비명 소리와 남성의 윽박지르는 목소리. 근방에서 소요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흐음.”
괜스레 신경이 쓰여서 소음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근처의 담벼락 위에 자리 잡은 그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둠에 완벽하게 녹아든 레인의 존재를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놔, 놔 주세요! 악!”
“흐흐. 앙탈 부리기는.”
그곳에는 용병으로 짐작되는 두 사내와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인 하나가 있었다. 여인은 한 사내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음?”
딱 보기에도 불한당들이 좋지 않은 의도로 여성을 끌고 가는 모습이다. 한데 미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 즈음에서 하자고.”
“흐흐. 그러지.”
사내들은 그렇게 말하며 여인을 끌고 어두침침한 골목 구석으로 들어갔다. 웬만해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위치였다.
레인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다른 사람의 기척이 기감에 걸려들었다. 이번에는 레인과 동년배의 소년이었다.
귀티 나는 얼굴에 물색 머리칼. 실용성 높아 보이는 가죽 갑옷 차림에 두 자루의 검을 양쪽 허리춤에 걸고 있었다.
“분명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이쪽인가?!”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방금 전 여인이 낸 비명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있었다.
“······.”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레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괜히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분명 전생의 자신이 저 나이에 저런 느낌이었다.
“꺄악!”
“입 다물어 이년아!”
“가만히 있으면 나쁜 꼴 보진 않을 거다.”
마침 또다시 소음을 일으키는 이남일녀. 물색 머리칼 소년이 곧장 반응했다.
“이쪽인가!”
소년은 용병들이 여인을 끌고 들어간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내, 소년은 여인의 옷을 우악스럽게 벗기려 하는 용병들을 발견했다. 여인은 필사적으로 가슴팍을 붙잡고 저항하고 있었다.
소년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이 악당들! 무슨 짓이냐!”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두 용병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난입자가 소년 한 명뿐임을 확인하고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을 붙잡고 있던 용병이 동료 용병에게 눈짓했다. 동료 용병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당? 우리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꼬마야.”
그가 소년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며 말했다. 행여나 도망쳐서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듯, 신중하게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힘없는 아녀자를 겁박하다니!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는 것이냐! 당장 저 여인을 풀어줘라!”
소년은 잔뜩 격분해서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그에 용병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소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또 다른 사람이 이곳을 발견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일 뿐.
이곳은 애초에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이지만, 지금은 소년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용병도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혹시라도 제2의, 3의 목격자가 출현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증폭했다.
“그 입 닥쳐라!”
마침내 용병이 검을 뽑아 들고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입을 막을 생각이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면 소리를 지를 수 없을 테니까.
“이젠 살인멸구까지 하려 드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봐주지 않겠다!”
소년이 양쪽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교차시킨 검을 내밀어 용병의 공격을 받아 냈다.
“하압!”
소년은 검을 휘둘러 용병의 공격을 떨쳐냈다. 그리고 곧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윽?!”
소년의 실력은 상당했다. 어린 외견만 보고 방심해 달려들었던 용병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여러 차례 금속이 맞부딪치며 불똥이 튀겼다. 여인을 붙잡고 있던 용병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바로 여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도망치면 죽여 버린다.”
협박하듯 여인에 말한 용병이 싸움에 참전했다. 싸움은 이대 일의 양상이 되었다.
“그것참.”
그 상황을 지켜보던 레인이 무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년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
원래라면 몇 합 만에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를 굳이 시간을 들여가며 몰아쳤다. 동료 용병이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눈치채고 달아나지 않도록. 그리고 그가 싸움에 참전하도록.
소년의 의도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두 사람 모두 도망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이젠 쓰러뜨리기만 하면 된다.
다만-
“정작 중요한 걸 눈치 못 챘군.”
전생의 나처럼, 이라는 뒷말을 삼키며 레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담벼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 *
“크윽!”
“이, 이 자식!”
용병들은 수적 우위가 무색하게도 형편없이 밀려났다. 소년의 움직임이 확 달라졌다.
발놀림이 빨라졌다. 일격 일격이 무거워졌다.
몰아치는 쌍검술의 폭풍. 종내에는 검의 표면이 미약하게 일렁이는 기운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오, 오라(Aura)?!”
용병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봐도 열두셋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의 실력이 상상을 가볍게 넘어섰다. 그저 검 휘두르는 법을 조금 익힌 일반인에 불과한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소년이 오른손에 들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절삭력이 현격하게 높아진 검이 궤적에 걸려든 용병들의 검을 그대로 반 토막 내고 지나갔다.
“억!”
용병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소년은 양손에 든 검을 하나씩 용병들의 목에 겨눴다.
“순순히 따른다면 목숨만은 빼앗지 않겠다.”
소년이 차갑게 말했다.
용병들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무기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저항할 수단이 없다. 얌전히 치안병에게 인솔될 수밖에.
그리고 잠시 후.
“괜찮으세요?”
용병들을 포박한 소년이 고개를 돌려 여인에게 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안심하세요. 이제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대로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네.”
여인은 허둥지둥 소년의 옆으로 다가갔다.
“크흠. 그, 그런데 옷을 좀······.”
그런데 막상 여인이 다가오자 소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방금 전 험한 꼴을 당할 뻔했던 터라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아! 자, 잠시만요.”
여인이 급하게 옷자락을 추슬렀다. 그리고, 소년의 주의가 완전히 흐트러진 것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큭?!”
직후, 여인이 단말마와 함께 고꾸라졌다.
“?!”
“쓸데없이 손 놀리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목소리의 근원지는 뒤쪽. 소스라치게 놀란 소년이 급히 검을 뽑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손날로 여인의 뒷목을 후려친 정체불명의 인물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소년이 표정을 무겁게 굳히며 소리쳤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접근해왔는데도 전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상대의 실력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난입자는 소년의 대응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여인 쪽으로 시선을 둔 채 재차 말했다.
“손 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말과 동시에 발을 들어 올렸다. 마치 여인의 손등을 짓밟아 버리려는 것처럼.
“멈춰!”
기겁한 소년이 검을 휘둘렀다. 쯧 하고 혀를 찬 상대가 슬쩍 뒤로 물러나 검격을 피했다.
“후.”
난입자가 귀찮다는 얼굴로 한숨을 불어냈다. 소년은 여인을 보호하듯 난입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소년은 내심 한 번 더 놀랐다. 방금 전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자신과 동년배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다.
난입자가 소년에게 말했다.
“비켜.”
“그럴 순 없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여자는 네가 생각하는 불쌍한 약자나 피해자 같은 게 아니야.”
“······?”
다음 순간, 쓰러져 있던 여인이 확 하고 몸을 뒤집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난입자가 서 있던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콰득!
“꺄악!”
난입자가 여인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려던 손까지 봉인당한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습격자, 레인이 말했다.
“최근 용병들을 노린 살인사건이 기승이라던가.”
* * *
레인의 발언에 여인이 움찔, 하고 반응했다.
“······!”
물색 머리칼 소년은 기겁했다.
난입자가 갑작스레 눈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슥한 곳으로 용병들을 유인해서 해치우고 그들이 가진 금품을 갈취하는 강도가 있다 했었지. 아직 잡히지는 않았고.”
“으윽!”
여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발을 뗀 레인이 허리를 굽혀 숨을 헐떡이고 있는 여인의 가슴팍을 뒤적였다.
“······!”
아무렇지도 않게 여인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그 모습에 물색 머리칼 소년이 상황에 맞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이내 레인의 손에 몇 가지 물건이 들려 나왔다.
각각 다른 종류의 단검 3개에 조그마한 유리병 하나. 유리병 안에는 딱 봐도 독으로 짐작되는 검은 액체가 담겨있었다.
‘어라.’
유리병을 확인한 순간 레인이 무언가 알아챈 듯 피식 웃었다.
직후, 레인의 주의가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판단한 여인이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소매에서 발출되어 날아간 것은 가느다란 쇠침. 분명 그 끝에는 독이 묻어있으리라.
레인은 날아드는 쇠침을 눈으로 보지도 않고 가볍게 공중에서 낚아챘다. 그의 감각은 이미 일반인의 그것을 가볍게 초월해 있었다.
물론 실수로 쇠침에 찔렸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이런.”
최후의 한 수마저 통하지 않자 여인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타인을 해하려는 자는 자신이 해를 입을 상황도 각오해야 하는 법. 몰래 목숨을 노리다 발각됐는데 상대측에서 온건한 대응을 해올 턱이 없다.
여인이 뒤이어 찾아올 보복을 잠시라도 늦추려는 듯,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대,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
“보아하니 저 애송이와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던데. 그렇다고 너 정도의 실력자가 저런 저급한 용병들과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왜 날······.”
“길에 쓰레기가 보여서 치우고 있지.”
“뭐?”
여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러다 이내 격하게 분노했다.
“웃기지 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너 연쇄살인마 아니었나?”
“하지만 그래 봐야 저런 놈들이잖아! 기회 좀 생겼다고 아녀자를 멋대로 끌고 가서 강간하려 드는 구더기들이잖아! 죽어도 싼 녀석들이잖아! 아니, 그보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재미있네. 더 해봐.”
“저런 놈들 좀 죽인 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오히려 잘했다는 칭찬을 받아도 무방하다 생각하는데?!”
“그리고?”
“기습을 가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네가 먼저 공격해 와서 반격한 것뿐이잖아! 솔직히 이런 상황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리고?”
고저의 변화가 없는 목소리. 그리고 똑같은 질문.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위축된 여인의 목소리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저 애송이를 기습하려 했던 건 확실히 잘못이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나타나서 사냥감을 채 가버린 녀석이라고. 부아가 치밀잖아. 애초에 죽일 생각까진 없기도 했고.”
레인이 이제 상황을 이해했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뒤쪽에 서 있는 소년을 돌아봤다. 소년의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굳어졌다.
레인이 시선을 다시 여인에게로 돌렸다.
“주절주절 늘어놓고는 있는데, 내가 널 놓아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군. 안 그래?”
여인에게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레인이 그녀를 그냥 놓아준다는 것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윽.”
“저놈들은 악인이니 내가 지은 죄는 죄가 아니다. 악인을 처벌한 것뿐이다. 이게 네 주장의 요체지?”
“······.”
“내 감상을 들려주자면 ‘별 같잖은 개소리를 다 듣겠군.’이다. 이제 더 할 말 없지?”
“자, 잠깐!”
콰득.
여인은 채 끝까지 발언을 잇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