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장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을 죽였다! 이젠 우리를 부당하게 제지하는 자도, 우리의 행보를 가로막는 자도 없다!]
거대한 몸집을 지닌 사내의 외침.
군중이 포효를 내질렀다. 확성 마법으로 증폭된 사내의 목소리마저 묻혀버릴 정도로 광기에 찬 포효였다.
사내의 머리 위로 비죽 솟아오른 한 쌍의 뿔에서 붉은색의 스파크가 튀겼다. 그의 감정이 격앙되었다는 의미였다.
[오늘! 우리는 신의 심장을 제물로 바쳐 차원의 문을 열 것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땅으로, 우리는 진군하게 될 것이다!]
[그 대지에 거주하는 열등한 존재들을 몰아낼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쟁취해낼 것이다! 마계의 척박한 대지를 벗어나 새로운 터전을 개척해낼 것이다!]
사내의 외침에 군중이 환호했다. 오랜 세월 척박한 대지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 사내의 외침은 한 줄기 빛, 혹은 구원과도 같았다.
군중이 사내의 이름을 연호했다. 사내와 함께 그들의 신을 죽인 71명의 군주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 또한 간간이 들려왔다.
소란이 가라앉는 데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내는 좌중이 소요를 가라앉힌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라! 이것이 우리의 신을 죽이고 그 가슴을 갈라 뽑아낸 심장이다!]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에는 요요하게 빛나는 둥근 구체가 들려 있었다. 구체는 거대했으며, 선혈을 연상시키는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오오오오오!”
“저게 바로!”
그들의 신은 그들의 염원을 외면했다. 그들의 소망을 헛된 것이라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일축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의 신을 죽였다. 72명의 악마 군주 아래 결집한 강대한 마족의 군대는 수많은 희생의 끝에 신의 목을 베고 그 심장을 뽑아냈다.
군중 중 누구도 그들의 신이 죽었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반대로 기뻐하고 감격에 찬 환호성을 터뜨리는 이는 수없이 많았다.
[······.]
사내는 심장을 거대한 마법진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수많은 황금과 미스릴, 각종 주물에 고위 마족의 피까지 이용해 만든 마법진이였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마법진의 핵이 되는 자리에 마신의 심장이 놓이자 그로부터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압도적인 빛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굉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대한 구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작되는 건가!”
누군가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에게 새로운 터전을!”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를!”
군중은 그들의 염원을 담아 구호를 외쳤다. 그들 종족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음에 마음속 깊이 기뻐하며.
사내는 군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소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지금부터 마법진이 발동하기까지 1시간이 남았다! 1시간 후면 저 차원 너머의 세상에, 그 풍요로운 대지에 우리의 발을 디딜 수 있게 된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여! 길을 비켜다오! 저 풍요로운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하등한 존재들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새로운 터전을 제공할 불멸의 군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사내의 외침에 일대 장관이 연출되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군중이 재차 환호하며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널찍한 길을 따라 그 대열의 끝이 보이질 않는 군대가 절도 있게 진군했다.
중간중간 거대한 마수의 등에 올라탄 군단장들이 눈에 띄었다. 군중은 그들의 이름마저 연호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렇게 군대가 마법진 앞에 정렬하고, 사내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를 한참. 마법진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구성하던 모든 매개체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 형이상학적인 구조의 마법진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공중의 마법진이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한가운데에 미약한 일그러짐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이내 그 일그러짐은 마법진이 그려진 범위를 넘어 산만큼이나 넓은 범위를 잠식해 들어갔다.
일그러짐은 이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검은 문으로 화했다. 그렇게, 거대한 통로가 완성되었다.
끊임없이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사내는 격정 어린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차원의 문을 넘어간다! 반드시 저 풍요로운 대지를 이곳에 모인 형제자매들에게 선사할 것을 약속하겠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당신을 믿겠습니다! 바알!”
사내를 포함한 72명의 군주가 가장 먼저 문을 넘었다. 그 뒤를 끝이 보이질 않는 군단의 행렬이 뒤따랐다.
모든 행렬이 문 너머로 사라져 모습을 감출 때까지 군중은 환호성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만 자신들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72 악마 군주. 즉, 마왕.
그리고 그 휘하 72만 마족 군단.
그들의 수호자이자 만마의 아버지인 마신을 죽이고 그 심장을 꺼내 차원의 문을 열다.
마계 역사상 최강, 최악이라 평가받는 군대.
엘레노어 대륙을 먹어 치우기 위해-
-진군(進軍).
* * *
이후 마족의 대군은 처절한 대패를 경험하게 된다.
운명의 장난일까. 그들이 하등하다 멸시했던 엘레노어 대륙의 생명체들은 후세에 마도 시대, 혹은 마도 문명이라고 불리게 되는 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용을 비롯해 인간과 아인종, 주술민족까지. 대륙의 모든 종족들이 화합해 꽃피운 찬란한 문명은, 마족의 대군으로썬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 위풍당당한 진격이 무색하게도, 마족의 대군은 전멸 직전까지 다다르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 압도적인 대군의 3분의 2가 증발하고 만 것이다.
[반드시 이 수모를 갚고 말겠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결의했다. 그저 감정적인 결단이 아니었다. 그 결의를 실현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 수단이란, 다름 아닌 ‘마신의 심장’.
그들이 차원의 문을 여는 데에 사용한 것은 네 조각으로 나뉜 심장 조각 중 하나였을 뿐. 앞으로도 기회는 세 번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자신들의 세력을 후대로, 또 그 후대로 물려줌으로써 그대로 온존시키며. 아니, 더더욱 그 세력을 불려가며.
반면 엘레노어 대륙의 문명은 쇠퇴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용족이 일제히 모습을 감췄고, 그것을 시작으로 종족 간 화합이 무서운 속도로 깨어져 나갔다.
화합을 기반으로 이뤄진 마도 문명이 무너져 내린 것은 물론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긴 했으나······.
[과거의 수모를 갚기 위해 왔다!]
그즈음에 다시 차원문을 복구시킨 마족의 대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오히려 과거보다도 강력해진 압도적인 군세가.
엘레노어 대륙인들은 경악했다. 반면 마족들은 기세등등했다. 마족의 대군은 이번에야말로 대륙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족의 대군은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의 끝에, 엘레노어 대륙인들은 마족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마족들은 크게 한탄하며 귀향길에 올랐다.
재침공을 가능하게 해 준 심장의 존재가 알려져 남은 두 개의 조각 중 하나를 탈취당하기까지 했다. 이번 패배는 정말로 뼈아팠다.
그러나 마족의 입장에서 아주 성과가 없는 전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 대륙이 전화에 휩싸인 이번 전쟁으로 인해 엘레노어 대륙의 문명 수준은 한층 더 쇠퇴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온갖 비전을 일신에 지닌 기인이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과거의 문명을 재현하기 위한 수많은 유물들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소모되어 버렸다.
전쟁에 참여해 대륙에서 마족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인한 영웅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다음 전쟁이 벌어졌을 때 대륙은 마족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정황상 대륙의 문명은 날이 갈수록 쇠퇴할 터. 언젠가 다시 문명이 부활할 날은 올 테지만, 적어도 그것이 마족의 재침공 시기보다 빠르진 않을 터였다. 이번 전쟁처럼.
인류의 존망을 두고 여러 현자들이 격렬한, 하나 의미 없는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사이, 영웅은 행동을 취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왕에게서 탈취한 마신의 심장 조각을 이용했다.
그는 시간의 현자와 운명의 현자를 은밀히 불러들여 마신의 심장을 조작했다.
그 거대한 힘을 내포한 붉은 구체가 무사히 ‘전송’될 수 있도록. 마족들이 재침공해올 머나먼 미래에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 개화할 수 있도록.
어찌 보면 도박이었다. 마신의 힘이 대륙인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마왕들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여기긴 힘들었고.
그러나 심장을 쏘아 올려 보낸 영웅은 그저 담담하게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마치 이것으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마쳤단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들은 은거했다.
현자들은 답이 나오지 않는 토론에 지쳐 뿔뿔이 흩어졌다.
사람들은 마족의 위협에 대해 점차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족의 존재가 동화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이미지로 굳어졌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