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0/192)
  • 정리 

    “그러긴 하겠네.”

    헌터들이 가진 장비들. 그리고 그들이 부여받은 힘. 그 모든 것들은 이들의 것. 단말이 끊긴다는 건 곧 힘의 연결도 끊긴다는 소리. 충분히 가능한 소리였다. 다람쥐가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저희를 막기 위해 이것저것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아이템은 이제 그들의 생활용품이 되었으며, 각 건물마다 던전의 방비용으로 마련하지요. 헌터라는 직업도 생겨났고, 던전관리사라는 직업도, 나라의 소속도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혼란이 오겠지.”

    [맞습니다. 저희가 그냥 이대로 있는 것보다 더한 혼란이 오겠죠. 그런데도 괜찮으십니까?]

    “글쎄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대다수의 인간. 그들이 판단하고 합의해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걸 일일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분명 잡음이 끼고,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그래도 해.”

    [그들을 책임지시겠다는 겁니까.]

    “책임? 내가 왜.”

    창연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말했다. 그는 책임을 질 이유가 없었다.

    “행동에는 크든 작든 여파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그 모든 걸 책임지는 인간은 없어. 나는 단지 그 여파가 클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시겠군요.]

    “게다가.”

    창연이 당치도 않는다는 눈으로 지배자들을 바라봤다.

    “책임을 진다면 너희가 져야지. 왜 나한테 떠넘기려고 그래?”

    [저희가 책임을 질 수 없으니…….]

    “그래서 말 안 하는 거잖아. 그냥 넘어가.”

    그의 행동이 알려지면, 저주하고 증오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 하지만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을 터. 그거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근데 이탈자들도 힘이 사라진다고? 그들은 본인 스스로의 힘 아니야?”

    창연이 배신자들의 연결을 끊어, 이제는 온전한 힘이 되었다. 하지만 다람쥐가 옅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비록 연결이 끊겼다지만 기본적으로 부여받은 힘. 그들이 소유권은 없습니다. 단말이 끊기면 주인 없이 허공으로 흩어질 힘이지요.]

    “이자벨라는.”

    [아…… 그녀는 잘 모르겠군요. 부여받았다지만 온전하게 물려주었기에. 결과를 봐야 알 거 같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대가 만들어 낸 아이템들도 멀쩡하겠지요.]

    “그거야 당연하고.”

    [네. 결국 온전한 힘을 가진 것은 오로지 당신 하나. 이능이 없는 세계의 절대자나 다름없지요.]

    다람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오는 되어 있으십니까.]

    “각오라 할 것도 없어.”

    창연이 심드렁히 말했다. 그가 날뛰어서 세계를 지배할 것도 아니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숨기면 끝이었다.

    “난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고스토치. 위대한 세계의 지배자시여. 저희의 뜻은 일치하였습니다.]

    [좋다.]

    공간 너머의 고스토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럼 처리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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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연이 가만히 뒤에 서서 고스토치가 하는 걸 바라봤다. 허락을 받아 최소한의 방어막이 사라졌다. 점차 공간이 뚫리며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구경하고 있는 창연의 옆으로 파사나카스가 다가왔다.

    “왜.”

    “아니. 아니다. 그저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말이야. 결국 넌 우리 지배자들을 구해 주는구나.”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창연이 대충 답했다.

    “근데 너는 지구에 남는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넘어가네.”

    “내가 내 세계를 버린 것은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세계는, 내 흥미를 자극하기에 차고 넘치지. 굳이 지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도 그렇겠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지.”

    파사나카스가 지배자들을 바라봤다. 페르시아고 고르보르고, 서로 적대하던 이들이 담담히 함께 있었다.

    “고르보르야 말할 것도 없고, 페르시아 또한 의무와 속죄에서 해방될 수 있지. 페이텐은 세계의 주박을 벗을 수 있으며, 다른 지배자들은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본인의 세계까지 같이 이동하니. 거부할 이유는 없다. 고맙군.”

    “너네가 이제 지구만 건드리지 않으면 됐어.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으니까.”

    “건드릴 일도 없을 거다. 넘어가면 우리도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느라 바쁠 테니, 지구가 몇 세대가 바뀌기 전에는 여유도 나지 않을 테다.”

    “그럼 잘 됐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지. 고맙다. 창연.”

    파사나카스가 떠나갔다. 그가 떠난 이후로 페르시와 고르보르. 카르케네스. 그리고 다른 지배자들이 한 번씩 다가왔다. 대충 이야기하고 떨쳐 내자 어느새 공간이 완전히 열렸다.

    [들어가라. 너희의 세계도 자동으로 건너올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주인이시여.]

    지배자들이 공간 너머로 이동했다. 머뭇거리던 페르시아마저 들어가자, 이젠 창연밖에 없었다.

    [끝났다. 그럼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겠지.]

    “그래.”

    창연이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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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음? 주인이군.]

    창연이 아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그니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거 같군.]

    “미안 좀 바빠서.”

    [상관없다. 어차피 주인과 나는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가?]

    [크아아아!]

    드래곤이 울부짖으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아그니가 손을 휘둘렀다. 백색의 불꽃이 휘몰아치고 드래곤이 불타 사라졌다.

    [이것들은 질리지도 않는군.]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때에 맞춰서 이 세계에서 벗어나 달라고.”

    [응?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혼란이 적을 테니까.”

    갑자기 힘이 사라졌다. 그런데 정령이란 존재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면 분명 딴마음을 먹는 사람이 생길 거였다. 창연의 말을 듣고 아그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거 참 대단한 걸 다 하는군. 이건 정령계의 주인님도 하지 못했던 건데.]

    “아무튼 대답은?”

    [상관없다. 일시에 공간을 열고 벗어나면 되는 문제니까.]

    “좋아. 부탁할게. 인형이나 드래곤은 이미 다 처리하고 와서 너희만 남았다.”

    [다른 정령들에게도 말하고 오겠다. 그런데 주인은 괜찮나?]

    “뭐가.”

    [이 세계에 힘이 사라지면 주인이 논란의 핵이 될 텐데.]

    “상관없어. 나도 힘을 잃은 척하면 되니까.”

    [흠…… 여차하면 나라도 불러라. 그대는 나의 주인이니까.]

    “알았어. 수고해라.”

    아그니가 홍염에 휩싸여 사라졌다. 창연이 턱을 쓰다듬었다.

    ‘뿌린 아이템들도 같은 시간에 거두면 되겠지.’

    갑자기 뿅하고 사라지면 눈에 띄니, 그냥 깃든 힘만 거둘 생각이었다. 다른 것들도 사라지니 그러면 문제는 없겠지.

    창연이 공간을 넘어 오래된 세계로 이동했다. 고스토치가 갈라진 공간의 연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나. 그럼 이제 슬슬 끝내면 된다.]

    “그래.”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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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자들은 뭐하고 있는데?”

    [일단 각자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힘이 있으며, 지성을 갖췄으니 어지간해선 죽지 않겠지.]

    “이영애는.”

    [모른다. 찾으려 하는데 몸을 가리고 있더군. 라플라스도 보이지 않고 말이야.]

    “또 뭔 수작질인지.”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 마지막이었다. 수작을 부릴 여유도 얼마 없었다. 창연이 턱을 까닥였다.

    “어쨌든, 일단 해 봐.”

    [알았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해 주지.]

    “뭘.”

    [지배자는 너희 인간들이 모든 이형의 힘을 잃을 거라 말했지.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고스토치가 웃음을 흘렸다.

    [이적을 경험한 자는 계속하여 이적을 찾는 법이지. 너희는 이미 통로가 열렸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리던, 결국 인간들은 이형의 힘을 되찾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겠지.]

    “그러는 건 상관없지. 누군가가 간섭한 게 아닌, 그들 스스로 변하는 거니까.”

    [그냥 알아 두라는 의미다. 그럼 닫도록 하지.]

    쿠우웅…….

    공기가 떨린다. 균열이 점차 일그러지며 축소하기 시작한다. 창연이 가라앉은 눈으로 균열을 바라봤다.

    저것만 닫히면 모든 게 끝난다. 이제 지구에는 괴물들이 사라질 거고. 이 세계와 분단이 된다. 그럼 그가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무언가 다른 존재와 만날 일은 없을 거였다.

    콰득.

    하지만 공간의 일그러짐이 멈췄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고스토치가 당황해 내뱉었다.

    [무슨.]

    [키에에에엑!]

    통로가 뒤흔들린다.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온다. 지네와 같은, 지배자에 필적할 괴물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난다. 창연이 얼굴을 구긴 채 망치를 꺼냈다.

    “아. 진짜.”

    [이 무슨! 갑자기 다른 곳이 연결되다니!]

    “흐음. 처음 시도해 보는 건데. 됐네. 여차하면 내 목숨도 바칠 생각이었는데.”

    느긋한 목소리가 괴물 사이에서 울렸다. 창연이 망치를 휘둘러 괴물들을 짓이기며 내뱉었다.

    “이 새끼가.”

    “안녕. 이럴 줄 알고 있었지?”

    지네의 틈바구니에서, 이영애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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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엑! 키에엑!]

    지네들이 쉬지 않고 튀어나온다. 이 세계의 존재는 아니었다. 좀 더 먼, 다른 곳의 괴물들. 이영애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네. 나쁘지 않아.”

    [이영애! 어째서! 아니, 그보다 네가 어떻게 통로에 간섭을…!]

    “너무 대놓고 보여 줬습니다. 그러면 분석하여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영애가 씁쓸하게 말했다. 창연이 손을 흔들었다. 어지럽게 얽힌 파장이 흔들리고 지네들이 폭발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괴물이 뛰쳐나왔다. 생물 네다섯 개는 혼합한 듯한 키메라.

    [쿠어어어!]

    창연을 보고 눈을 빛내더니 그대로 돌진했다. 창연이 튕겨 나가며 손을 내려찍자 콰드득하며 짓눌렸다. 하지만 형체가 붕괴하지 않고 버티며 몸을 움직였다. 창연이 혀를 차며 다시 한 번 손을 놀렸다.

    콰득.

    중첩된 힘에 전신이 우그러져 처박혔다. 이영애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죽이는 거야.”

    창연이 하나 죽일 때마다 또 다른 괴물이 튀어나왔다. 점차 강해져 이대로 가면 그도 방심할 수 없는 괴물이 나올 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알아서 강해질 수밖에.

    [제자여. 어째서……!]

    “저는 목표를 잃었었죠.”

    그녀가 이곳에 와, 고스토치의 제자를 칭한 건 창연을 옛 세계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돌아와 보니 창연은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나온 상태였다. 그것도 그녀보다 훨씬 강대한 힘을 지니고.

    청춘과 모든 시간을 바쳤지만, 그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꺼졌다. 그녀는 그걸 버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창연의 힘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만들었었다.

    “처음 스승님을 찾아갔을 때 전 죽을 각오를 했었습니다. 생명에 미련을 버렸죠. 그를 만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제가 모든 걸 바친 결과가 덧없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목표를 바꿨다?”

    괴물의 틈바구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거친 파동과 함께 괴물들이 갈려 나갔다. 창연이 피투성이인 채로 주먹을 쥐었다.

    콰드득.

    공간이 구겨졌다. 괴물의 침입이 차단되었다.

    “말했어. 마지막 기회라고. 다시 한 번 건드리면 죽인다고.”

    힘이 사방을 휩쓸었다. 창연이 거칠게 내뱉었다.

    “각오는 했겠지.”

    힘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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