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3/192)
  • “그걸 나한테 믿으라고? 또 무슨 목적이기에 이 안에 쳐들어온 거냐?”

    [히이이익!]

    박쥐가 비명을 날카롭게 퍼트렸다. 창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힘을 살짝 풀었다.

    ‘……지성이 있는 괴물이라.’

    대화가 통한다. 그것만으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 망할 세계에서 빠르게 정보를 얻을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일단 내 영역에서 멀쩡하군.’

    비틀린 존재도 그랬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창연의 세계는 따지면 하위호환.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호흡이 그리 필요 없는, 사는 데에 필요한 기초가 적은 놈들이다.

    [어…….]

    “흠.”

    창연이 손을 뗐다. 그의 주위로 파장이 퍼져 박쥐를 둘러쌌다.

    [사, 살려 주시는 건가요?]

    “그래. 일단은.”

    창연이 손을 뻗었다. 무형의 기운이 박쥐를 둘렀다.

    “넌 무슨 목적으로 이 안에 들어온 거냐. 대답에 따라 네 운명이 결정될 거다.”

    [저, 전…… 생존자가 있을까 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상한 공간을 발견해서 혹시나 해서 들어온 거고요…… 부, 불순한 의도는 정말 없었습니다! 바로 나갈게요!]

    “아니. 나가지 마.”

    지성이 있는 괴물. 위험하던 안전하던 놓칠 수는 없었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리며 턱을 톡톡 만졌다. 박쥐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기…… 근데. 그…….]

    “창연.”

    [네. 창연 님은 누구신가요…….]

    “침략자.”

    창연이 말하고 실소가 터졌다. 그들의 세계를 침략하는 놈들. 그들과 같은 이명을 쓰다니. 하지만 이 단어가 가장 정확했다.

    ‘데스.’

    [……위험한 괴물 같지는 않군요. 저의 눈에는 그리 대단한 힘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저런 종족이 존재한다는 걸 예전에 얼핏 들은 기억이 있고요.]

    ‘나도 그래.’

    이 영역 안에서 그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이 박쥐가 그런 존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대화를 하지.”

    창연이 바위처럼 보이는 암석에 걸터앉았다. 그가 박쥐를 노려봤다.

    “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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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저는 말씀드린 거처럼 에스텍인데요…… 이름은 파라가스고.]

    “그건 알고. 그 에스텍이란 종족이 무엇인지. 뭘 하는 종족인지를 말이야.”

    [아…….]

    파라가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묘한 눈으로 창연을 바라봤다.

    [혹시 창연 님은…… 다른 세계의 존재인가요?]

    “그걸 어떻게 알지?”

    창연이 이채를 띠었다. 단박에 그걸 추론하다니. 파라가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에는 자주 왔었으니까요. 창연 님처럼 생긴 존재는 없었지만, 심심하면 타세계에서 건너왔습니다. 저희 종족은 나름 유명한 종족. 모른다면 그거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맞아.”

    창연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가스가 탄성을 흘렸다.

    [역시 그러시군요…… 쩝. 모처럼 건너오셨는데, 이거 세상 꼴이 말이 아니네요.]

    “원래 이 꼴이 아니었나?”

    [네. 그렇죠. 한 언제더라. 일 년인가. 그전만 해도 이런 꼴은 아니었어요.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이었죠.]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지배자님 때문이죠. 뭐.]

    파라가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세계는 원래 지배자님이 계셨어요. 옛날에는 난폭하긴 했어도, 나름 잘 이끌어 주시고 다루어 주셨죠. 근데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으시더라고요. 원래 있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어서 신경 안 썼죠. 자주 사라지는 분이기도 하셨고. 그런데 일 년 전. 갑자기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뭐. 펑.]

    박쥐가 날개를 쳤다.

    [미치셨는지 갑자기 모든 걸 집어삼키시더라고요. 위대한 분들이 막으려 들었지만 명색이 지배자. 힘을 좀 잃어버리신 거 같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강하시죠. 덕분에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그래?”

    창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일 년이라. 그즈음 풀려났던 건가.’

    갇혀 있느라 힘의 손실이 있어서 그걸 회복하기 위해 세계를 집어삼킨 거 같았다. 어차피 지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놈. 이 세계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뜻이겠지.

    “……근데.”

    창연이 입을 열었다. 말을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산 거냐?”

    [네? 살아요? 뭐가요?]

    “아니. 됐다.”

    창연이 고개를 저었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틀린 존재가 갇힌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그걸 체험한 듯이 말하고 있었다. 죽음의 개념이 비틀린 세계. 생명체를 만나니 실감이 되었다.

    [저기…… 근데.]

    “응?”

    파라가스가 우물쭈물 거리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혹시 먹을 거 있으세요?]

    “뭐?”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좀 오랫동안 굶어서. 지장이 없긴 한데 아무래도 활동에 제약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뭐 먹는데.”

    창연이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파라가스가 냉큼 물었다.

    [아. 네. 살아 있는 생명체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래.”

    창연이 공간을 열어 괴물을 꺼냈다. 바실리스크가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오오…… 이건.]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먹어라.”

    [가, 감사합니다!]

    파라가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바실리스크가 몸을 거칠게 움직이며 반항했다.

    바실리스크는 나름 강한 괴물. 현대에 나타나면 4종급은 될 거다. 하지만 파라가스가 태연히 전신을 붙잡고 힘을 주자 땅에 처박혔다.

    쿠우웅!

    [크어어어!]

    [얌전히 있어.]

    약하다 하지만 그 기준은 창연과 지배자들의 기준. 객관적으로 보면 파라가스도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괴물에 아가리를 들이밀고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피가 튀며 비명이 사방으로 퍼졌다.

    [오. 오오오!]

    “뭐야. 입에 안 맞아?”

    [아뇨! 엄청 맛있는데요!]

    씹어 먹던 파라가스가 기경을 질렀다. 그가 빛나는 눈으로 창연을 바라보고 다시 입을 들이밀었다.

    [뭐지? 이쪽의 것들이랑 맛이 많이 다르네요! 좀 더 복합적이고 깊이 있는 맛이. 되게 진한…….]

    “몰라. 나한테 말해 봤자.”

    창연이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짐작은 갔다. 이 세계의 괴물들은 전부 내부가 살점뿐. 바실리스크는 내장과 뼈, 근육의 밀도가 전부 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맛이 다를 거라곤 생각했었다.

    [이거 최고네요. 어디 거지.]

    “내 세계.”

    [아. 그러셨지. 근데 지금까지 찾아온 타 세계인 중엔 이런 맛이 없었거든요.]

    파라가스가 계속해서 입에 구겨 넣었다. 그때마다 그의 신체에 담긴 힘이 변화하였다.

    ‘……유지력 비스름한 건가.’

    창연이 그걸 살폈다. 신체를 유지하고 이 세상에 들러붙게 할 수 있는 힘. 그게 증폭했다. 먹으면서 강해지는 괴물 같았다.

    [아아.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만끽했네요.]

    잠시 후 파라가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몸뚱아리보다 몇 배는 큰 바실리스크를 뼈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 치웠다.

    [그런데 목적이 무엇입니까?]

    “글쎄.”

    [제가 볼 때 창연 님은 그냥 관광을 목적으로 온 거 같지는 않거든요.]

    파라가스가 날개를 퍼덕였다.

    [먹을 것도 주시고. 죽이지도 않으시고. 그러시니 저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전부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봤자 별 거 없지만…… 티끌만 한 힘이라도 있으면 좋은 거잖아요.]

    “그래.”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매를 좁히며 파라가스를 바라봤다.

    ‘……이놈에게 말해도 되려나.’

    말하는 걸 보면 비틀린 존재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거 같지만,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주민. 어떻게 나올지는 몰랐다.

    “……그래.”

    창연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위험하던 말던 진행을 해야 했다.

    “난 지배자를 죽이러 왔다.”

    말이 내뱉어져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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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파라가스의 얼굴이 굳었다. 창연이 무심히 그를 바라봤다. 그가 한참을 고민하다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나. 그러죠. 뭐가 궁금하신가요?]

    “안 말려?”

    [말릴 이유가 있나요?]

    파라가스가 이죽거렸다.

    [예전에도 그리 좋은 지배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죠. 하지만 일 년 전. 돌아오고 난 이후로는 달라요. 저희를 무너트리고 모든 걸 망가트렸죠. 이제 와서 지킬 이유가 있나요?]

    파라가스가 우울하게 말했다.

    [오히려 죽여 버려야 이 빌어먹을 재앙이 끝나죠. 그래 봤자 이미 늦었지만.]

    “흠.”

    대충 정신을 읽어 보자 거짓은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과 분노로 점칠 되어 있었다.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럴 힘이 있으신가요? 아니.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명색이 지배자. 거기에 담긴 힘은 경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강해 보이긴 하시지만 그 정도에 이르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걱정하지 마. 충분하니까. 넌 방법이나 말해. 심연에 존재한다고 했는데, 거기가 어디야?”

    [거기까지 아시네…… 별건 아니에요. 정말 심연이지. 이 세계의 정 가운데. 가장 깊은 곳. 재앙의 낙인에 모든 괴물이 죽어 나간 곳.]

    파라가스가 날개를 펄럭였다.

    [지배자는 그곳에 있어요. 그런데 아마 도달하기 힘들 거예요.]

    “왜.”

    [음…… 가 보시면 알 거 같네요. 별로 멀진 않아요. 따라와 보실래요?]

    “그러지.”

    파라가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창연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세 시간가량 걷자 갈수록 공간에 들러붙은 점성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촉감이 거슬릴 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는데 이제는 움직이기 힘들어질 정도였다.

    [뭐야. 이거.]

    [지배자에게 일정 거리 다가가면 원래 이래요. 평범한 존재는 움직임조차 힘들게 만들지요. 좀만 더 와 보세요.]

    앞으로 나아가자 점성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도착했다. 창연이 황당한 얼굴로 앞의 장막을 퉁퉁 건드렸다.

    [이건 또 뭐냐.]

    [이게 관문이에요. 이걸 못 뚫으면 접근도 못 해요.]

    [허어.]

    점성이 진해지다 못해 아예 세계를 굳혀 버렸다. 말랑말랑하지만 진한 탄력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파라가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괴물들이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없애지 못했어요. 단순히 점성이 진해진 공기가 아니라, 지배자의 힘이 깃든 장막이에요. 그보다 격이 낮은 존재는 티끌만 한 타격도 못 줘요.]

    [그렇다 이거지.]

    [네. 그래서 힘들 거라 했잖아요. 이걸 뚫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우웅.

    창연을 중심으로 공기가 밀려났다. 점성의 액체가 흩어져 공간이 생겨났다.

    [응?]

    파라가스가 날갯짓을 멈췄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창연 님?]

    [빌어먹을 것들 내 눈앞에서 치워라.]

    언령이 세계에 새겨졌다. 장막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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