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1/192)
  • [이상하게 생겼다고? 아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올바른 모습이다.]

    괴물이 움직였다. 소년의 조그마한 발이 바닥을 박차고 창연을 향해 돌진했다.

    [너희가 아닌, 우리의 올바른 모습이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콰아아아앙!

    폭음이 터진다. 광장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검은 팔이 움직인다. 공간을 휘저으며 창연을 후려친다.

    “그래?”

    창연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쩡하는 울림과 함께 검은 팔이 튕겨 나갔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안 부서져?”

    [이 육체는 단단하지. 설령 이탈자의 힘으로 공격하더라도, 무너트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쿠우웅!

    검은 팔이 공간을 휘젓는다. 넓게 확장되며 광장 안을 사납게 긁는다. 창연이 손을 휘둘러 튕겨 내며 피막을 둘렀다.

    “막는다 이거지.”

    콰아앙!

    창연이 돌진해 주먹을 후려쳤다. 괴물이 황급히 검은 팔로 몸을 둘렀다. 육체와 주먹이 충돌하며 쪼개지는 소리가 울렸다.

    쩌어엉!

    [으음.]

    “단단하긴 하네.”

    괴물이 신음을 흘리며 팔을 흔들었다. 검은 팔이 거칠게 흔들리며 모든 걸 부숴 갔다. 창연이 혀를 차며 몸을 날렸다.

    “결계. 차단. 방벽.”

    우우웅.

    빛이 광장을 감싼다. 검은 팔이 벽을 두들겼지만, 금만 갈 뿐 부서지지 않는다. 창연이 자세를 낮췄다.

    “요란스럽게 하지 말자.”

    [그건 어려운 일이지. 소란이야말로 우리의 원점인 것을.]

    “그러면 조용하게 만들어 줄게.”

    창연이 가라앉은 채로 돌진했다. 허공을 열어 손톱을 꺼내 들고 휘둘렀다. 괴물이 검은 팔을 휘둘렀다. 쿵하며 충격파가 퍼지며 공간이 웅웅 떨렸다.

    쩌어억!

    창연이 팔에 힘을 주며 다시금 휘둘렀다. 검은 팔과 충돌하며 사방을 요란스럽게 울렸다. 괴물이 몸을 둘러싼 검은 팔을 순식간에 확장시켰다. 사방으로 퍼지며 빈틈없이 주위를 쓸었다.

    콰과과광!

    창연이 그 틈바구니 사이로 움직이며 손톱을 움직였다. 팔들이 갈라지며 여백이 나타났다. 돌진해 괴물의 앞에 도달하고, 손톱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으음.]

    “이제 좀 조용하겠네.”

    창연이 손에 들린 검은 팔을 살펴봤다. 잘려 나갔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펄떡거렸다. 창연이 손에 힘을 주었다. 팔이 뿌드득거리며 요동쳤다.

    [키이이이이익!]

    “이거 자체가 생물인가.”

    창연이 더욱 힘을 주었다. 팔이 견디지 못하고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기묘한 생명체. 당연히 지구에 있는 물질은 아니었다. 그의 안에 담긴 데스가 중얼거렸다.

    [이건 설마…….]

    “뭐 아는 거 있냐?”

    [맙소사.]

    데스가 한탄했다. 그녀가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왕이시여. 저건 어찌 보면, 지배자들의 천적에 가까운 생명체입니다. 저런 거까지 소환하다니. 그놈도 정신이 나갔나 보군,]

    데스가 투덜거렸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설명해 봐. 난 아직 이런 거까지는 파악할 수 없단 말이야.”

    [먼 옛적에 봉인된 생명체입니다. 바브리아와 같은 계통이라 할 수 있죠. 저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의 부분입니다.]

    “부분?”

    [잘 알고 있구나. 죽음.]

    소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육체가 점차 쪼그라들고 있었다. 검은 눈이 살점 사이로 보였다.

    [흐흐. 이 육체는 한곈가. 하필이면 우리가 강림할 수 있는 근본인 검은 팔을 뜯어 가다니. 노리고 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 한 건지. 아니지. 경험의 산물인가.]

    “알 바냐?”

    [아무튼 잠시 후 보도록 하지. 이건 선물이다.]

    [우어어어어!]

    소년의 육체가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뜯어 나간 팔이 요동쳤다. 창연이 혀를 차며 내던졌다. 꽈배기처럼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부풀어 올랐다.

    [크어어어어!]

    무너진 형태가 몸을 일으켰다. 집채만 한 것이 천천히 일어났다. 고함을 지르며 창연에게 달려들었다. 창연이 손을 들었다.

    후욱.

    잿빛 안개가 퍼지고, 괴물을 둘러쌌다. 괴물이 팔을 휘둘러 광풍을 일으켰지만 사라지지 않고 달라붙었다.

    “사라져.”

    [크어어어!]

    콰드득.

    안개가 힘을 발한다. 시간의 흐름에 전신이 천천히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크어! 크어어어!]

    “안 죽어?”

    하지만 죽지 않는다. 새 살점이 다시 돋아나며 썩은 살을 내보낸다. 데스가 담담히 말했다.

    [저들은 저희의 상극. 물리적인 타격만으로 죽일 수 있는 괴물들입니다.]

    “……뭐하는 놈들이야?”

    창연이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리며 검을 들었다. 괴물에게 달려들어 내려찍었다. 반 토막이 나며 천천히 쓰러졌다.

    “그럼 설명해 봐. 이것들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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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는 죽음.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개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옛 세계에서는 지배자들조차 저희에게 대적하지 못하였죠. 그건 수장도, 설령 바브리아도 마찬가지. 기본적으로 불사라 죽일 수는 없지만 빈사 상태로는 만들 수 있었죠.]

    “하지만 저들은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창연이 괴물의 시체를 살펴봤다. 절단면으로 살점만이 보일 뿐. 생명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장기나 뼈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괴물입니다. 옛 세계도 아닌 다른 세계.]

    “근데 네 힘은 다른 세계여도 먹히지 않냐?”

    당장 지구에도 먹히고 있었다. 데스가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네. 기본적으론 그렇죠. 하지만 그건 옛 세계와 이 세계가 기본적인 원리는 같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계의 틀이라 해야 하나. 기반, 법칙. 세세한 부분이 다를지언정 큰 부분은 비슷하지요. 그렇기에 저희가 이 세계에 죽음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네.]

    데스가 이를 갈았다.

    [저들은 아예 별개의 세계. 법칙도, 틀도, 기반도 전부 다른 세계의 존재들입니다.]

    “흐음.”

    창연의 괴물의 시체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뿌지직 소리를 내며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나는 내부를 보며 창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특이하긴 하네.”

    뇌도 없었다. 눈동자나 입 또한 그저 바깥으로 보이기만 할 뿐. 정작 그 안을 이루는 구조체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구의 기준으로 따지면 생명체로서 성립도 되지 못했다.

    [무게가 존재하는 화염. 색깔을 지닌 바다. 검은색 태양빛…… 그 모든 게 비틀렸습니다. 죽음조차 비틀렸으니 저희의 힘의 대다수가 먹히지 않습니다.]

    “이런 놈들이 왜 너희 세계에 있었던 거냐?”

    [모릅니다. 칠흑의 개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물리적인 타격은 통해 천천히 쓰러트릴 수는 있었지만 죽음이 비틀린 존재들. 그 근본을 없앨 순 없어 봉인으로 끝냈지요. 근데 그런 게…….]

    데스가 이를 갈았다.

    [수장도 미쳤군. 아무리 그라 해도 이놈들을 제어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터. 같이 멸망이라도 하자는 건가?]

    “역시 그놈인가.”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버려진 세계에 보낸 것도, 변형하는 던전을 보낸 것도 전부 그놈이 한 짓. 현재로선 만악의 근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냥 골치 아픈 것도 아니군요. 왕이시여. 힘을 발해 저것을 흡수하십시오.]

    “그래.”

    창연이 시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잿빛 안개가 나왔다. 천천히 시체를 둘러싸고, 부식되기 시작했다.

    “어라?”

    [비틀린 존재지만 활동을 멈춘 상태.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렇기에 그대의 발아래에 놓입니다.]

    비틀린 존재가 품은 힘이 흡수된다. 창연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흑색에 가까운 회색의 기류가 창연의 몸으로 들어온다.

    “이건 무슨.”

    흡수가 끝난다. 창연이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린다. 흡수되었다는 거 자체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양이 문제였다.

    “……네가 지금까지 꿍쳐 논 힘의 1/5는 모였는데?”

    데스가 그렇게 발광을 하던, 아끼고 아끼고 아껴야 한다고 말했던 힘들. 그게 너무 간단하게 모였다. 데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죽음의 개념이 제 개념과 다른 존재들. 그 모순 때문인지, 그런 만큼 품은 힘 이상의 기운이 흡수되더군요.]

    “이거.”

    괜찮았다. 이 정도면 그의 계획보다 더 빠르기 진행할 수 있었다. 창연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수장도 혼자선 힘들 텐데 어찌…….]

    “일단 만나 봐야겠네.”

    창연이 몸을 낮췄다. 그대로 도약해 천장을 후려쳤다. 부서지며 파편이 흩날리고, 위층의 모습이 보였다. 창연이 연달아 무너진 바닥을 밟았다. 순식간에 꼭대기 층에 도착하고 착지했다.

    “안녕.”

    창연이 손을 흔들었다. 거기에는 남자와 여자 여럿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한 노인이 부들부들 떨며 앉아 있었다. 노인의 머리에 팔을 얹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탈자. 우리가 보내 준 놈은 진즉 처리했나 보지?”

    “그 정도야 간단하고. 그…… 가운데에 있는 놈이 내가 원하는 놈인데.”

    “이놈?”

    남자가 노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노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며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남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물고기를 낚았으면 미끼는 줘야 하는 법이지. 가져가려면 얼마든지 가져가.”

    남자가 노인을 던졌다. 창연이 받아 들었다.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창연을 붙잡았다.

    “일단 들어가 있어라.”

    창연이 공간을 열어 노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쓸었다. 총 여덟. 그 중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지. 정말 고맙다. 네가 날뛰어 준 덕분에 그놈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어.”

    “그럼 꺼지라니까.”

    “그건 무리지.”

    남자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무튼. 그놈이 똥줄을 탄 이유를 알겠어. 하긴. 이 정도 수준이면은 답이 없다 느끼겠지. 너는 정말로 인간이 아닌 거 같구나.”

    [왕이시여. 잠시 저를 내보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창연의 몸에 회색 안개가 퍼져 나갔다. 흐릿한 안개가 미녀의 형상을 이루었다.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너도 오랜만이군. 이 세계의 죽음.”

    [닥쳐라. 비틀린 존재.]

    데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가 싱글벙글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말지. 우리 서로 나쁘지 않은 사이 아니었나. 좋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한 가지 물어보지. 어떻게 이 세상에 강림했지? 너희를 봉인한 힘은 수장 혼자서는 해제할 수 없을 터인데.]

    “아. 그래. 확실히 그놈 혼자서는 어렵지. 이거 참. 나도 놀랐어. 설마 인간이 차원의 문을 열고 봉인을 해제할 줄이야.”

    “뭐?”

    창연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남자가 발을 까닥이며 말했다.

    “수명이란 개념은 없지만 나름 긴 삶을 살았다 해도 되지. 그동안 별의별 존재를 다 봐 왔지만, 그 여자는 그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단순한 육신으로만 이루어진 인간이, 공간을 뚫고 지배자들의 봉인을 해제하다니. 꿈의 세계에라도 들어온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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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여자.’

    그 대상은 단 하나였다. 창연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그거 혹시 젊은 애였냐?”

    “음? 내가 인간의 형상을 잘 모르지만, 아마 이탈자. 그대랑 비슷해 보였을 거다.”

    “그렇다 이거지.”

    창연이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대상은 하나였다. 창연이 입가를 구겼다.

    “어디서 봤어.”

    “당연히 봉인이 풀린 직후에 봤겠지. 어디서겠느냐. 호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반응을 보아, 너와 관계가 있는 인간 같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해. 어디야.”

    “말해 줄 이유가 있겠는가. 그 여자는 여러모로 흥미 대상이라 두고두고 관찰하고 싶단 말이야.”

    남자가 싱글벙글 웃었다.

    “창연이라 했나. 그대도 흥미 대상이지. 인간으로서 그 정도까지 강해지다니. 심지어 지배자들조차 두려워 떠난 옛 세계에서 살아남고, 그들이 그리 원하는 원전을 얻어 냈다니 말이야.”

    인간으로서만이 아닌, 그 어떤 존재도 이루기 불가능한 업적. 그걸 창연은 생존을 위하여 이뤄 냈다.

    “어찌 보면 그대는 전 우주와 전 시간을 통틀어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라네. 만약 이런 저급한 세계가 아닌 좀 고차원적인 세계라면, 그대의 이름은 역사에 새겨지며 신으로 추앙받았을 테지. 죽여야 한다는 게 아까울 정도야.”

    “누가 누굴 죽여?”

    “그리고 그건 그 여자도 마찬가지지.”

    남자가 창연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야만적인 세계라면 모를까. 좀 더 지성적인 존재들이 뭉친 세계면, 그녀 또한 추앙받겠지. 그대처럼 신까지는 아니어도 최초의 현자. 또는 최초의 마법사로 불릴 거야. 너희 같은 존재가 한 세계에 둘이나 나타나다니. 이건 기적이라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의 확률이란 말이야.”

    남자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창연을 바라봤다.

    “너희의 세계는 아무 쓸모없는 볼품없는 세계였지만, 이젠 누구나 탐내는 가능성의 땅이 되었어.”

    [……네가 원하는 건 뭐지?]

    얌전히 듣고 있던 데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얌전히 그놈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너란 존재는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이 좁은 건물에 틀어박혀, 인간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니. 네가 바라는 건 무엇이냐. 비틀린 존재.]

    “네 말이 맞아. 죽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가 벌어지며 입꼬리가 귀에 닿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울렸다.

    [기적을 뛰어넘는 존재가 동시대에 둘이나 나타났다. 그건 그 둘이 대단한 인간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세계가 대단한 세계라 그런 걸까. 후자의 확률은 낮지만 시도할 이유는 충분하지.]

    [설마……!]

    데스가 이를 갈았다. 남자의 모습이 비틀린다. 검은 팔이 몸을 두른다. 그 주위에 있던 다른 인간들도 형상이 뒤바뀐다.

    [그래. 그놈과 거래를 했지. 네 말을 따르는 대신, 이 세계를 내놓으라고. 흔쾌히 수락하더군. 자기는 다른 세계로 가면 된다며 말이야.]

    [이런 미친놈들이…….]

    “누구 마음대로.”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피막이 몸을 두르며 공간이 열렸다. 창연이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거무튀튀한 망치를 꺼내 들었다.

    [하하. 정령의 망치인가. 이거 참. 어마어마한 걸 꺼내 들었군.]

    변이한 검은 팔들이 꾸물거리며 남자에게 모였다. 그 몸을 가리며 달라붙었다. 육체가 점차 부풀어 오르며 비대해지고, 팔들이 한둘씩 튀어나왔다. 검은 팔들이 엉키고 엉켜 거대한 팔을 만들었다.

    [그럼 나도 그에 합당한 힘을 보여 줘야지.]

    존재들이 합쳐진다. 그가 아까 쓰러트렸던 놈과 같은 놈 여덟이 하나가 된다. 그에 따라 힘이 증폭한다.

    [우리는 원래 하나인 존재. 그것이 세계의 벽을 뚫기 위해 흩어졌지. 자. 이탈자. 한 번 네가 가진 것을 나에게 보여 줘 봐라.]

    “세상을 가리는 장막이 펼쳐졌다. 넓게 퍼져 외부와 차단된 영역을 만들어 내니. 그 안으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였으리라.”

    우우우웅.

    장막이 펼쳐 가며 영역을 두른다. 바다와 건물을 걸치며 안을 감싼다. 창연이 망치를 흔든다.

    “이러면 바깥에는 영향 안 가겠지.”

    [호오. 그게 바로 원전. 이전에도 몇 번 봤지만 개인이 이리 사용하는 건 처음 보는군.]

    “아무튼 말을 안 할 생각이라 이거지. 그럼 간단하지.”

    콰아아앙!

    망치의 여파로 건물이 동강 난다. 반 토막이 나며 천천히 해수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널 죽이고 시체를 헤집으면 되는 거야.”

    [그거 나쁘지 않지.]

    괴물의 육체가 폭발한다. 진액이 사방으로 분출하며 순식간에 확장한다. 그리고 나타난 건 또 다른 형태의 괴물.

    쿠구구구구…….

    [키에에에에!]

    거대한 팔들로 이루어진 생명체. 둥근 구체의 형태가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나타났다. 기다란 팔들이 사방을 휘저으며 파도를 일으켰다. 해수면이 갈라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세계는 우리의 것이다.]

    “내 거야. 새끼야.”

    창연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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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어어어어!]

    팔들이 비명을 지르며 움직였다. 하늘을 뚫듯이 치솟으며 창연을 향해 내리꽂혔다. 창연이 망치를 들어 후려쳤다.

    쩌어어엉!

    팔들이 튕겨 나간다. 검은 피들이 허공을 흩날리며 이리저리 흔들린다. 충격파로 해수면이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장막 내부에서만 날뛸 뿐. 바깥은 고요했다.

    “물리적인 타격만 먹힌다 이거지.”

    저들의 세계와 이쪽 세계의 공통점은 단 하나. 물리적인 힘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비틀린 상태.

    “좀 골치 아프군.”

    [아아. 역시 강하구나. 넌. 좀 더 거대한 개체가 와야 수월할 거 같군.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지.]

    쿠우우웅!

    팔들이 펼쳐진다. 하늘을 가려 빛조차 통하지 않으며 검은 세상을 만든다. 그대로 회오리치며 창연의 전신을 향해 달려든다.

    “쯧.”

    창연이 혀를 차며 망치를 내려찍는다. 바다가 폭발하며 물이 사방으로 튄다. 총탄처럼 튀어 나가 팔들을 후려갈긴다. 창연이 그 아래로 몸을 떨어트린다. 검은 팔들이 내달려 그 머리를 붙잡으려 든다.

    “걸렸네.”

    창연이 빙글 몸을 돌려 사선을 그었다. 공간이 갈라지며 충격파가 퍼졌다. 검은 팔들이 절단 나 하늘로 튀었다. 괴물이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말도 안 되는 힘이야. 너 같은 존재가 존재하다니. 아주 흥미로워. 하지만 나도 얌전히 죽어 줄 순 없지.]

    콰아아아앙!

    괴물의 육체가 다시금 확장한다. 장막의 끄트머리에 닿을 정도로 커지며 해수면을 밀어낸다. 잘려나간 팔의 부위가 다시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죽음의 개념을 벗어났다고 그랬었나.”

    [왕이시여. 저 비틀린 괴물은 기본적으로 재생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격에 전신을 잿더미로 만들거나, 반 토막을 내지 않는 이상 영원히 움직이는 생명체입니다.]

    “귀찮게.”

    창연이 혀를 차며 공간을 도약했다. 괴물의 육체에 착지해 망치를 들었다. 굉음이 퍼지며 괴물의 육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으음.]

    콰과과광!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육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다시 재생됐다. 창연이 쓰게 웃으며 망치를 들었다

    쿠우우웅!

    충격파가 퍼진다. 이전보다 더 강한 공격이 괴물의 육체를 후려쳤다. 하지만 다시 재생됐다. 괴물이 비대해진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고통이란 감각이 없어서 말이야. 헛고생이다.]

    “그래?”

    창연이 차게 식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괴물의 전신을 두른 검은 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슬슬 감이 잡히는군. 너는, 나의 재생을 이겨 낼 정도의 힘이 없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다면 간단하지. 깨져라. 장막이여.]

    파창!

    그들을 둘러싼 장막이 깨진다. 원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며 외부와의 차단이 풀린다. 괴물이 킬킬거리며 검은 팔로 창연을 가리켰다.

    [네가 가진 힘 중 통용되는 건 단순한 무력. 그 하나뿐. 하지만 그것은 그리 대단하지 않구나. 망치에 담긴 정령의 힘 또한 나에겐 무용지물이지. 이러면 가능성이 있겠어.]

    “흠.”

    창연이 망치를 들었다. 그걸 내밀며 내뱉었다.

    “하늘의 천막이 생명체를 둘러싸자, 광채가 일었다.”

    파지지지지직!

    흐릿한 막이 괴물을 감싸고, 번개가 튄다. 빛으로 인해 바닷물이 증발하며 저 멀리 있던 얼음들조차 녹아내린다. 그리고 광채가 사라지고, 괴물이 멀쩡한 몸을 드러냈다.

    [말했지 않나. 먹히지 않는다고.]

    괴물의 표정이 곡선을 그렸다.

    [원전이란 절대적이지.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힘.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건 너희의 세계라는 점이 한정된다.]

    괴물이 천천히 창연을 향해 다가왔다. 그때마다 바닷물이 밀려 해일이 일어났다.

    [나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힘이다. 모든 것을 품은 원전이라 해도 있었던 일이 기록된 것들. 비틀린 개념까지는 품을 수 없는 법이지. 절망에 빠진 채 죽어라.]

    “글쎄.”

    창연이 망치를 집어넣었다. 이걸론 죽일 수 없었다. 저건 재생이라기보다는 복구에 가까웠다. 그냥 원래대로 돌아오는 힘. 패 봤자 떨어질 힘도 아니었다.

    “원전을 노려서 보낸 놈이네. 이 정도면 확실히 예전이면 힘들었겠어.”

    창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에 따라 파장이 일며 주위를 휩쓸었다. 괴물이 웃으며 전진했다.

    [발악인가.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결말은 같으니.]

    [왕이시여. 무엇을 하시려고.]

    창연이 눈을 감았다. 데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의 세계를 만들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타격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근본적으로 비틀린 존재.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봐.”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건 개념이 비틀렸기에 닿지 않는 괴물.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파고들면 됐다.

    ‘……유지력.’

    근본 없는 촉수가 그에게 주었던 힘. 세계를 유지하고 불러오는 유지력.

    당시에는 왜 줬는지 몰랐다. 그는 불러올 세계 따위는 없었기에 별로 쓸모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세계를 만드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힘.’

    창조하고 이루고 개념을 만들며 이치를 새기는 힘. 그걸 유지 보수하는, 창조와 관련된 전능의 힘. 지배자들의 권능. 유지력이 어느 정도 있었기에 죽음의 세계를 데스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제법 늘었어.’

    유지력의 증가. 원전의 강화. 죽음의 증폭. 처음 바브리아의 원전을 얻어 냈을 때보다 많은 힘을 이루어 냈으며, 강화되었다. 이쯤이면 충분했다.

    “내가 탈출했다고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얼간이는 아니거든.”

    그는 나왔을 당시 최강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위치에 만족했다면 유흥과 놀이를 즐기며, 힘의 강화도 없이 천천히 제힘을 잃어 갔겠지. 그래도 강력한 힘인 건 매한가지지만, 지배자들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즉 용왕에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나태해지지 않았다. 바깥에 나오고 유흥 따위는 하루도 즐기지 않았다. 그는 탐구를 했으며, 새로운 지식을 얻고, 그걸 자신에게 적용했다.

    “그 덕분에, 널 조질 방법이 생겼지.”

    창연이 손을 뻗었다.

    “너에게 명한다. 네가 가진 개념. 이치. 상식. 비틀림. 그 모든 걸 잃고 이 세계에 물들어라.”

    세계가 괴물을 덧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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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괴물이 멈칫하며 힘을 발한다. 반발하며 다가오는 힘을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소용없다. 덧칠된 힘은 벗겨지지 않고 전신을 둘렀다. 그리고 괴물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 런.]

    괴물이 지금까지 토한 적 없는 숨을 토했다. 산소를 받아들이기 위해 호흡을 들이켰다. 하지만 살점으로 가득한 신체가 받아들지 못하고 거부했다.

    [이런 말도…….]

    괴물이 꺽꺽거리며 입을 열려 하지만, 나오는 말은 문장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쿠우우웅…….

    전신이 무너진다. 몸을 구성한 팔들이 뜯어져 바다로 떨어지며 천천히 전신이 부식되기 시작한다. 괴물이 크르륵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이건 대체…….]

    “간단해. 네가 가진 개념들을 이쪽 세계로 바꿔 버린 거야. 네 육체만을 제외하고.”

    생명체는 산소를 들이켜야 한다.

    생명체가 장기가 있어야 행동할 수 있다.

    생명체는 복구하는 신체를 가질 수 없다.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한다.

    세계의 근반을 따르지 않는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지구에 존재하는 개념들. 이치와 법칙. 그것이 지구의 개념을 따르지 않는 생명을 덧칠했다.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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