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10/192)
  • [……왕이시여.]

    “불안한가 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데스의 입장에서 창연은 그들의 지배자. 그가 얻은 권능을 생각하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없앨 수 있었다.

    그런 힘을 지닌 창연은 외부인. 당장의 멸망을 이겨 내기 위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근본은 인간인 존재. 그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이었다. 창연이 획 돌아서 그녀를 공격하지 않으리란 보장.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 주리란 보장이. 그래서 계속 경험을 하게 시키고,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드는 것이었다.

    [왕이시여. 그게 아니라.]

    “조용히 해.”

    쿠웅.

    창연이 주먹을 쥐었다. 그 안에 담긴 의지들이 하나둘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강제로 창연의 신체에서 빠져나와 모습이 이루어졌다. 데스와 망자들이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네 생각대로, 얼마든지 건드릴 수 있으니까. 힘의 다양성은 몰라도 단순히 다루는 건 익숙하거든.”

    […….]

    데스가 머리를 숙인 채 침묵했다. 창연이 웃었다.

    “나는 너희의 설득에 따라 왕이 된 게 아니야. 순전한 내 의지로. 나의 판단 하에 너희의 지배자가 된 거야. 그러니까 지금 명령하지.”

    데스가 설득하였고, 정령왕이 이것저것 말해 줬지만 그건 그저 말일 뿐. 선택은 오롯이 창연의 몫. 그가 왕이 되는 것이 더 좋다 판단하였기에 왕이 된 것이었다. 저들은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날 설득하려 들지 마. 네 가치관은 나에게 별로 영향이 없으니까.”

    창연이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데스와 망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불안한 건 알겠는데, 수작질 부리지 말고 간단히 하자. 너희는 나를 왕으로 추대했어. 나도 일단 너희의 요구에 응해 줄 생각이니까. 너희도 나를 왕으로 대우해라. 괜히 어쭙잖게 입 열지 말고.”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무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와.”

    창연이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안개가 되어 창연의 신체 내부로 들어왔다. 창연이 혀를 찼다.

    “역시 이건 내 적성이 아니야.”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 시간보다, 전투를 한 시간이 더 많아서 그런지 협박하는 걸 그리 잘하지 못했다. 그냥 아예 때려 부수는 걸 더 잘했지.

    “잘못했으면 귀찮아질 뻔했네.”

    창연이 중얼거리며 허공을 열었다. 다시 한국의 길거리로 돌아왔다. 창연이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저들이 죽으면 남아 있는 힘의 일부가 그에게 흡수된다. 창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약간 찝찝하긴 한데.”

    따지고 보면 예전에도 몇 번 경험했던 일이다. 생명체가 죽으면 그가 품었던 힘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게 아까워서 여러 번 얻어 내려고 했었고, 실제로 성과를 얻기도 했었다. 그렇게 힘을 제법 길러 냈었다. 인간이 포함되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게다가 촉수의 세계에서 원념을 받아 낸 적도 있었다. 수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의 저주. 원한. 그것들을 일시에 받아 내고도 정신력에 흔들림이 없었는데, 이 정도는 버틸만했다. 단지 약간 쇼크일 뿐.

    데스의 말은 옳았다. 다만 그녀의 행동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창연이 중얼거렸다.

    ‘일단 말해 봐. 이걸 모아서 세계를 만드는 거냐?’

    2종 던전을 깨면서 얻은 힘. 그걸로 내재한 힘이 소폭이나마 늘었다. 거의 티도 안 나긴 하지만, 는 건 는 거였다.

    [네. 그렇습니다.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침략자들을 죽이고, 그 혼을 흡수하는 겁니다. 그리하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던전인가.”

    창연이 혀를 찼다. 유지력을 모으는 것도, 원전을 강화시키는 것도, 죽음의 힘을 모으는 것도 전부 던전으로 귀결되었다. 이 정도면 만능이나 다름없었다. 침략자들 입장에선 재앙이겠지만.

    “근데 그보다, 이걸 좀 더 다뤄야겠어.”

    아직 힘을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방식은 익혔지만 그 범용성의 문제였다.

    “기반이 죽음인 건 알겠는데, 어디까지가 가능하지.”

    [그건 활용성에 따라 달라 무어라 답변 드리기 힘들겠군요.]

    너무 폭이 넓었다. 생명체에게 절대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제약이 있는지, 생명체가 아닌 기계에도 활용할 수 있는지. 그것들을 알아야 했다.

    [활용을 익히시려면. 역시 침략자들의 세계가 좋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넓고 다채로운 곳이니까요.]

    “아니.”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

    16642008070777.jpg

    창연이 허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빙하가 부서지며 바닷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창연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남극이라. 정말 요상한 곳에 다 마련해 놨다니까.”

    [추운 곳이군요. 이곳에 침략자들의 세계가 있습니까?]

    “아니. 있긴 할 텐데. 지금은 그거 말고 다른 게 목적이야. 일단 이것 먼저. 실험해 보지.”

    창연이 손을 움직였다. 웅하며 파장이 대지를 쓸었다. 하지만 평소에 쓰는 방식과는 달랐다. 잿빛에 가까운, 회색빛의 안개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탐색은…… 되는군.”

    창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죽음으로 엉켜진 힘이지만, 어떻게든 다루면 기본적인 활용이 되었다. 다만 복잡하고, 효울이 떨어졌다.

    [아아…… 귀중한 힘이…….]

    “어차피 다시 모으면 되잖아. 써봤자 별로 쓰지도 않았구먼.”

    데스의 처량한 중얼거림에 창연이 답했다. 위치는 찾았다. 창연이 착지하고 손을 빙하에 붙였다.

    “이건 또 되려나.”

    스르륵.

    잿빛 안개가 퍼진다. 그것이 얼음의 내부로 스며들며 영역을 넓혀 갔다.

    “부서져라.”

    창연이 손에 힘을 준다. 스며든 안개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다. 얼음이 부식되며 천천히 사그라진다. 마치 세월의 흐름에 녹아내리듯이 액체로 변해 간다.

    “호오. 무생물인 물질에도 통하긴 하는군.”

    창연이 미소를 지었다. 죽음이란 일종의 시간의 변화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흘러 녹아내리는 형태가 되었다. 순식간에 넓은 영역의 얼음이 사라졌다.

    “찾았다.”

    녹아내린 얼음의 틈. 바다 위에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제법 크기가 커 어지간한 학교 수준은 되는 거 같았다.

    “바다에 어떻게 떠 있는 거지.”

    창연이 중얼거리며 그 위로 착지했다. 형태는 평범한 건물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가 착지함과 동시에,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뭐야! 어떻게 저놈이 여기를 찾아!”

    지부장이 기겁해 외쳤다. 카메라에 창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관리인이 이것저것을 조작하며 말했다.

    “저번에 계시 듣지 않았습니까? 창연이 우리의 지부를 찾고 있다고.”

    “아니. 알고야 있었지만, 여긴 남극인데!”

    “저놈에게 그런 게 통할 거 같습니까? 그냥 우리가 재수 없게 걸린 거예요.”

    관리인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가 조작을 끝내고 버튼을 눌렀다. 철컹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단 조작은 끝났어요. 미리 대비 좀 해 놔서 다행이지.”

    “대비 정도로 저놈을 못 막잖아!”

    지부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창연에 대한 계시가 따로 내려올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창연에게 박살 난 지부가 벌써 다섯 개쯤 됐다. 아직도 지부의 수는 많았지만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기껏해야 이자벨라가 가짜 지부 몇 개 건드린 정도. 창연이 제일 골칫덩어리였다. 관리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죠.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해 놨어요. 진짜 이런 수준까지 경비를 강화시킬 줄 몰랐는데. 이 정도면 아마 이탈자도 못 뚫을 걸요?”

    “저놈은 평범한 이탈자 수준이 아니잖아!”

    “그러면 죽는 거죠 뭘 그리 호들갑을 떠십니까. 품위 없게.”

    쿠웅!

    창연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각을 펼치자 건물의 꼭대기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 둘 셋…… 열? 이번엔 생각보다 많네.”

    크기가 커서 그런지 사람도 많았다. 창연이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자 넓은 광장이 보였다. 급하게 이동한 건지 식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창연이 그 안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파동이 퍼졌다.

    쿠우우웅!

    공기가 떨린다. 안에 널브러진 책상과 가구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다. 하나하나가 입자 단위로 분해되어 흩날린다.

    “이런.”

    창연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지나왔던 통로로 이동했다. 광장은 어느새 중앙에 있는 조그마한 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반입자 쇼크?”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그가 생각한 기술력보다 몇 단계나 우위였다. 게다가 딱 원하는 범위에만 영향력을 끼치다니.

    “똥줄이 타나 보군.”

    발전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새삼 이영애가 생각나 기분이 더러워졌다. 창연이 차게 식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충격파의 범위 안으로 들어간다.

    타다다다닥.

    팔을 두른 옷감이 천천히 허공으로 사라진다. 입자의 분해에 옷이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창연의 육체는 아무 상처도 없이 멀쩡한 상태.

    ‘맨몸으로 뚫어도 되지만.’

    마침 좋은 기회였다. 창연의 손끝에서 잿빛 안개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탄식도 흘러나왔다.

    [아아…….]

    “왜 이리 시끄러워?”

    안개가 퍼져 나갔다. 주위를 집어삼키며 광장 안을 가득 메웠다. 창연이 주먹을 쥐었다.

    퍼억.

    공기가 잠식된다. 순식간에 잿빛으로 물든다. 창연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옷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건…….]

    “됐네.”

    공간 자체가 변화하였다. 아예 별개의 영역이 강림했다. 오로지 죽음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광장 안에 내려왔다.

    [……이것은!]

    그의 안에 있는 데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에 있는 공간이 그녀가 바라던 세계. 죽음으로 새겨진 세계. 바로 그것이 나타났다.

    [왕이시여. 설마 벌써. 아니. 힘이 모자랄 텐데 어찌…….]

    “아직 완벽한 거 아니고, 소모품이야. 아마 5분 지나면 스스로 사라질걸?”

    [잠깐. 5분?]

    데스가 경악한 비명을 질렀다. 방금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소모된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모으고 있던 힘의 반절 이상이 소모됐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왕이시여! 제가! 제가 어찌 모은 힘인데!]

    “시끄러.”

    데스의 비명에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머리가 울렸다.

    [왕이시여!]

    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로서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하루 이틀이, 몇 년이 아니었다. 세계가 분리되고 나서, 아득할 정도의 세월이 지나고. 그녀가 이성이 생기고 난 후로 지키던 유일한 것은 하나. 힘의 보존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걸 절반이나. 그녀가 다시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조용히 해. 다 생각이 있어서 만든 거니까.”

    [……생각이라면.]

    “다짜고짜 만들면 뭐가 될 거 같냐. 시험이라도 해 본 다음에 만들어야지.”

    세계의 창조는 그도 처음이었다. 미리 시험 삼아 써 보는 게 좋았다. 창연이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세계란 말이지.”

    지금은 물질의 세계에 구현되었지만, 원래대로라면 비물질에 강림했을 거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만든, 온전하진 않지만, 지구와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세계. 오로지 그만의 세계. 창연이 허공을 붙잡았다.

    16642008070777.jpg

    그는 지금까지 온갖 세계를 봐 왔다. 촉수로 이루어진 세계. 폐허가 된 세계. 황폐해진 전사의 세계. 변화하는 세계 등등.

    하지만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죽음은 그 모든 걸 합친 것보다 더 이질적이었다. 창연이 안개를 붙잡았다. 일렁이며 파장이 퍼져 나갔다.

    “호오…….”

    창연이 흥미로운 눈으로 구현화된 세계를 둘러봤다. 반입자 쇼크는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다.

    “이거 확실히 신기하긴 하네.”

    이 좁은 공간. 기껏해야 20평 정도 남짓한 공간에 그의 세계가 강림했다. 지구의 법칙이 뒤틀리며 과학의 기술이 먹히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죽음만이 진리이며 산 자는 들어올 수 없는 세계.

    “부식되라.”

    창연이 주먹을 쥐었다. 공간 안에 자리한 반입자 쇼크기가 천천히 부식되어 사라진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다.

    “이런 느낌이라 이거지.”

    창연이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아까까지는 미묘했다. 쓸모가 없는 건 아닌데 지니고 있는 게 더 유용한 정도. 하지만 이리되면, 말이 달라졌다.

    공간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자리 없이 강림한 임시 세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데스가 탄식을 터트렸다.

    [아아아아…… 우리의…… 귀중한…….]

    “시끄럽다니까. 내가 뿅 하니 어떻게 만들어? 여러 번 써 봐서 익숙해지고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그대의 뜻대로.]

    “그럼 일단 너희가 쟁여 둔 힘은 다 써 본다.”

    [네?]

    데스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창연은 태연하게 다음 통로로 이동했다. 어느새 세계는 사라졌다.

    “연습이 좋은 거야.”

    16642008070777.jpg

    터어어엉!

    연달아 공기의 파장이 퍼진다. 창연이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앞을 바라봤다. 네모난 방 안이 충격파로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공기의 충격인가. 이거 또 신박한.”

    다가오는 물질이 강하게 반발할수록 더욱 강한 충격을 날리는 방식. 버틸 수는 있지만 그러면 또 옷이 찢어졌다. 창연이 손을 뻗었다. 회색 안개가 퍼지며 공간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데스가 포기한 듯한 신음을 냈다. 그런 그녀와는 관계없다는 듯 안개가 퍼지며 공간을 잠식했다. 네모난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서서히 제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됐네.”

    창연이 손을 털며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공기의 충격파는 없었다. 충격으로 인해 박살 난 것들이 하나둘 썩어 재가 되었다. 죽음의 세계가 강림했다.

    “이제 슬슬 적응이 좀 되네.”

    창연이 그의 세계 한가운데에 걸터앉았다. 처음에 비해 힘의 소모가 더 적었다.

    [왕이시여.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

    [그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어째서 저희의 세계를 강림시키는 겁니까? 남아 있는 힘은 이제 극히 적습니다. 왕의 다른 힘으로도 충분히 뚫을 수 있을 터.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원전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냥 피막 정도만 둘러도 뚫어 낼 수는 있었다. 데스가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아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했잖아? 익숙해져야 한다고.”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쪽이 너희한테도 이득이야.”

    [네?]

    “내가 아무것도 없이 쑤셔 박으면 어떤 세계가 나올 거 같냐?”

    창연이 혀를 찼다. 힘을 지키기만을 위해 살아와서 그런지 이럴 땐 시야가 좁아졌다.

    “깡으로 만들면 괜찮은 세계가 나올 수도 있지. 근데 힘의 소모가 너무 커.”

    지금 만든 게 세 번째로 만든 세계였다. 그리고 그 세 번의 경험 동안 상당히 변화하였다. 힘의 소모는 대폭 줄었으며 유지 시간도 상당히 길어졌다. 처음에는 5분이었다면 이제는 20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불안정하고.”

    처음 만든 세계는 아무래도 안정화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펑하고 터져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왕이면 확실하게 만들자. 어차피 힘의 소모가 있어 봤자. 이 정도면 지배자급 둘 정도 잡으면 다시 차잖아?”

    [지배자란 놈들이 그리 간단한 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창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지배자가 그리 어렵다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배신자들도 남아 있지.”

    지배자를 배신한 지배자. 인간을 강화시키고, 그들에게 제 생명과 세계마저 바치는 이들.

    물론 그런 만큼 순수한 지배자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약하지만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아직도 그들의 목적을 몰랐다.

    “데스. 넌 알고 있냐? 배신자들의 목적을.”

    [아니요. 저도 해당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애초에 그들이 배신했다는 것도 최근 들어서야 알았고요.]

    “껄끄럽네.”

    그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도 이탈자들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딱히 눈에 띄는 이는 없고, 한국에서는 더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한 번 최초의 던전도 가 보긴 해야겠네.”

    거인의 태도를 보아 얻어 낼 건 딱히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아예 무시하는 것보단 신경이라도 쓰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창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좁은 통로 사이의 탁자에 다과들이 놓여 있었다. 창연이 그중 하나를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경비가 상당했다. 반입자 쇼크에 공기 충격파. 게다가 단분자 칼날이 거미줄처럼 펼쳐진 방까지.

    ‘이 정도면.’

    설령 이탈자가 와도, 뚫기 힘들었다. 물론 이탈자도 편법이라지만 지배자를 죽인 존재. 개중 뛰어난 존재는 뚫을 수도 있겠지만, 몇은 오히려 역으로 죽어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서 만든 거지.’

    기술도 대단하지만, 이 정도로 건설해 낼 돈을 어디서 뽑아냈는지가 궁금했다.

    ‘대충 기억 읽어 보니까 계좌에 돈이 들어오는 거 같던데.’

    그거까지밖에 읽을 수 없었다. 들어온 돈으로 관련 자제를 사고 어디로 가져가면 발전된 기술이 펑하고 나타났다.

    ‘장비라도 있나.’

    이걸 이영애 혼자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만들 시간도 없었다. 무언가 다른 게 있을 게 분명했다.

    ‘여길 뚫으면 뭔가 나오긴 하겠지.’

    지금까지 본 지부 중에 가장 컸다. 창연이 과자를 입에 털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다시 거대한 광장이 보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불이 꺼졌다. 그리고 화염이 일었다.

    파지지지지직!

    전류의 창이 쏘아진다. 음속을 넘는 속도로 창연을 향해 내달렸다. 창연이 손을 뻗었다. 회색 안개가 흐릿하게 퍼졌다.

    쿠웅!

    창연의 손과 충돌하고 폭발했다. 잔류가 사방으로 터지며 광장을 후려쳤다. 폭음과 함께 천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귀찮아라.”

    창연이 나아갔다.

    16642008070777.jpg

    “거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은데요.”

    “망했네. 음. 그냥 죽자.”

    “그냥 죽긴 뭘 죽어!”

    지부장이 빼액 고함을 질렀다. 주위에 앉아 있던 젊은이들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떡하게요? 방법이라도 있어요?”

    “방법…….”

    “없잖아요? 그럼 죽어야지. 뭐 어때요. 다 그런 거지.”

    “이런 미친놈들이.”

    지부장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 의외의 모든 직원들은 전부 몇 달 전에 새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계시가 직접 내려 받아들이라 했던 이들. 그런 만큼 처음에는 유능했고, 기술이 뛰어났다. 지부장도 기뻐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이 이상하다는 게 보였다. 그들이 지배자를 추앙하며 지구의 변화를 바란다 하지만 기본은 인간이었다. 당연히 개개인의 욕구가 있었으며, 개성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우선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으며, 인간이 응당 가지고 있는 욕구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신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이질적인 이들이었다.

    마치 인형과도 같은 존재들. 껄끄러웠지만 계시가 직접 내렸기에 방법이 없었다. 지부장이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할 거야!”

    “흠.”

    멍한 얼굴의 소년 하나가 신음을 흘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나가도록 할게.”

    “나가게?”

    “그래. 아무리 그래도 지배자의 힘을 받은 존재. 우리는 그들의 천적. 막아 낼 수야 있겠지. 특이성이 있어서 확답은 못 하지만 말이야. 겸사겸사 정보도 전해 주도록 할게. 어차피 우리는 일부. 별로 귀중한 목숨은 아니잖아?”

    “그래. 잘 가.”

    “잠깐. 뭔 소리야?”

    지부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창연을 만나러 가다니. 미친 짓이었다. 이 안에 있어도 매한가지만 직접 보러 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 죽고 싶어? 가긴 어딜 가? 여기 있어.”

    “그럼 갔다 온다.”

    소년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지부장의 얼굴이 굳었다.

    “……지부장의 명령이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여기 있어.”

    “…….”

    소년이 멈췄다. 그가 몸을 돌려 지부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지부장의 몸에 오싹 소름이 돌았다.

    ‘……무슨.’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좀 달랐다. 눈동자가 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기겁해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이 천천히 꿈틀거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내부에 숨겨진 것이 보였다. 지부장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진정하고. 조용히. 당신은 그저 우리의 말만 따르면 되는 거야. 됐지?”

    소년의 모습이 비틀렸다. 괴물이 나타났다.

    3장. 비틀린 세계에서 온 자.

    “높기도 해라.”

    창연이 혼잣말을 했다. 벌써 열 개가 넘는 광장을 뚫고 지나왔다. 그런데 아직도 끝에 도착하지 못했다. 감각을 펼치자 아직도 꼭대기 층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천장 뚫어 버려도 되긴 하는데…….”

    그러면 도움이 안 됐다. 창연이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후려쳤다. 문이 박살 나며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넌 뭐야?”

    “안녕. 창연. 이름 높은 이탈자. 침략자들의 공포.”

    커피숍 의자 정 가운데에 소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기껏해야 열다섯 정도 됐을까. 머리카락이나 얼굴 형태를 보아 서양 쪽 아이였다. 창연이 심드렁하게 의자를 끌며 다가갔다.

    “그래. 그런데 넌 뭐냐?”

    “나야 이곳의 주민이지. 연구자기도 하고. 지킴이기도 하고. 최초의 사도기도 하고. 아무튼 이것저것.”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창연이 의자를 소년의 앞에 두고 앉았다. 그가 묘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너.”

    “만나서 반가워. 우선 감사를 먼저 표하는 게 좋을까.”

    소년의 눈이 희미하게 휘었다.

    “너 덕분에 빌어먹을 봉인에서 해방될 수 있었거든.”

    “그럼 감사만 표하고 꺼져.”

    “그건 힘들지. 그래도 계약이거든. 비록 하잘것없는 놈이지만, 약속은 지켜야지.”

    소년이 머리를 짓누르며 창연과 눈을 마주쳤다. 검은색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창연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등을 기댔다.

    “괴물 주제에 인간인 척을 하고 있네.”

    “정확히 말하면 너희 종족인 척. 착각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인간이란 건 각 행성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단 말이야. 헷갈릴 수 있다고.”

    “그게 중요하냐?”

    “아니. 별로 중요하진 않지. 그냥 알아 두라고.”

    소년이 웃었다. 창연이 흥미에 찬 눈으로 소년을 둘러봤다.

    “너 같은 게 지구에 존재할 수 있다고? 이건 좀 쇼큰데.”

    “우리는 좀 다른 개체거든. 아마 네가 봐 온 그 무엇과도 다를 거야.”

    “그래서 왜 우리 세계에 여기 왔는데.”

    “그거야 하나지.”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체가 변이하기 시작한다. 피부가 뒤틀리며 얼굴이 구겨지며 눈동자가 확장한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형태를 이룬다.

    [오로지 너를 죽이기 위하여다. 이탈자여.]

    괴물이 창연을 향해 말했다. 파장이 퍼지며 모든 것이 가루가 되었다.

    “거 이상하게도 생겼네.”

    창연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가 보아 온 괴물들 중에 손에 꼽히는 형태였다. 하반신은 인간의 형태지만, 상반신만 기형적으로 변이해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검은색 물질들로 뒤덮여 원래의 몇 배에 가까운 크기를 하고 있었으며, 양팔은 기묘한 형태로 부풀렸다. 그리고 상반신을 검은 팔들이 둘러싸 꿈틀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