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100/192)
  • “네가 만든 놈이긴 해도…… 경험은 내가 우위거든.”

    쿠우웅!

    화산이 구겨지며 다시금 대지에 처박힌다. 그는 원전을 반평생 다뤘다. 그에 반해 상대는 기껏 만들고 안정화하지 못해, 끽해야 파편만을 다뤘겠지. 경험의 차이는 명백했다.

    “일단은 이 정도가 한곈가.”

    “이거 참.”

    가복이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시야에 닿는 범위를 넘어, 세계의 절반 가까이가 창연의 손아래 떨어졌다. 꾸국거리며 어떻게 요동치려 했지만 대지에 짓눌려 머리조차 들이밀지 못했다.

    “찾았다.”

    창연이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거슬리게 파장을 퍼트리던 놈의 위치를 알아냈다.

    ‘원전을 가지고 있겠지.’

    남은 절반. 그것들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족치고 가져오면 될 것이었다. 겸사겸사 돌아갈 방법도 찾고.

    창연이 주위를 쓸었다. 세계의 절반이 그의 영역이 되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열이 뻗쳐서 감각적으로 펼친 거지, 실제로 지배할 거란 생각은 그리 없었다. 그냥 피해를 주면 좋고 아니면 위치 파악하는 용도. 그 정도로만 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지배가 되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뭐라 표현하기 어렵군.”

    창연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가복은 멍하니 내뱉었다. 그의 입장에선 창연처럼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계란, 그 지배자의 것. 외부인이 부술 수는 있어도 이치를 바꿀 순 없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 원전이 가능하다는 걸 듣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멍 때리지 말고 좀 도와주기나 해. 어디 보자…….”

    창연이 눈을 감고 감각을 펼쳤다. 힘을 품은 것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느껴졌다. 개변과 함께 휩쓸려 죽은 것들.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움직이지 말아 봐.”

    창연이 대지를 밟았다. 쿵 하며 땅이 부르르 떨렸다. 그에 따라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대지가 해일처럼 요동쳐 창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위로 괴물들의 시체가 있었다.

    “많기도 하군.”

    “범위가 범위다 보니까. 일단 정리 좀 하자. 원전을 품은 것도 있네.”

    두 마리 되는 것 같았다. 원전을 품은 괴물은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방금 발휘된 힘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창연이 손을 흔들어 그것들을 다른 괴물과 분리했다.

    “몇 개 정도는 용용이한테 주고, 나머지는 내가 챙겨야겠어. 충전 좀 해야지.”

    방금 쓴 힘 때문에 제법 소모가 되었다. 이 정도 숫자면, 상당량을 회복할 수 있을 거였다. 창연이 괴물들의 시체를 한데 모으고 파편을 들었다.

    “가로되 흩어진 것들은 제 소속을 찾기를 기원하였다.”

    문장과 함께 괴물들에게 담긴 힘이 파편에 흡수되었다. 나머지 두 개의 파편을 챙기고 결합했다. 그러자 힘을 쓰기 전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럼 됐고.”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이제 하나만 남았다. 원전을 만든, 그를 이용하려 한 지배자를 죽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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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해라.”

    창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다. 지상의 콜로세움과 같은 모습. 하지만 크기는, 눈으로 전부 보기도 힘들 정도의 크기.

    “대충 미국 정도 크기가 되려나……. 생각보다 크나 보군.”

    창연이 중얼거리며 망치를 꺼냈다. 가복은 없었다. 그가 낄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다. 대충 설명하자 예상외로 순순히 받아들였었다. 거무튀튀한 망치가 들렸다.

    “손님 받아라.”

    쿠우웅!

    망치가 대지를 내려찍고 균열이 퍼졌다. 콜로세음의 기반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어디 있니, 친구야.”

    창연이 흥얼거리며 안으로 걸어갔다. 떨어지는 돌 더미를 박살 내며 거리낌 없이 전진했다.

    [훌 륭 하 구 나.]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었다. 뇌로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의지.

    쿠웅.

    무너진 잔해들이 부르르 떨리며 웅 하고 떠올랐다. 하나하나 형태를 이루며 다시금 건설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처음과 같은 콜로세움이 건설되었다.

    [너 는 가 치 가 있다.]

    쿠르르…….

    땅이 무너진다. 틈이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 를 볼 가 치 가.]

    그 존재는 이형적이었다. 거미와 비슷하지만 개의 형상을 가진. 말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독수리의 날개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매의 부리와 사자의 발톱, 인간의 머리와 문어의 발을 갖춘, 온갖 것이 혼합된 형태.

    “……그런 가치는 필요 없는데.”

    창연이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똑바로 바라보기 메스꺼운 생김새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보는 것만으로 미쳐 버렸을 정도. 괴물이 미소를 지었다.

    [자. 네 가 가 진 것 을 보 여 주 라. 하 나 가 된 그 것 을.]

    “이거 말하는 거냐?”

    창연이 품에서 파편을 꺼내 들었다. 뭉쳐서 어느 형상을 이루기 시작하는 원전. 괴물이 캬르륵 웃었다.

    [그 래. 바 로 그 거 다. 이 제 이 빌 어 먹 을 곳 을 나 갈 수 있 겠 어.]

    “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 말이야.”

    [넌 줄 것 이 다.]

    괴물이 몸을 흔들었다. 그에 따라 공기가 부르르 떨렸다.

    [아 니. 주 게 될 것 이 다.]

    확신으로 점철된 의지. 거기서 느껴지는 기운에 창연이 혀를 찼다.

    ‘역시 나머지는 이놈이 가지고 있군.’

    [나 는 왕 을 먹 는 자. 바 브 리 아.]

    괴물의 의지가 머릿속을 후려쳤다. 웃음이 퍼짐에 따라 정신이 불안하게 비틀렸다.

    [네 혼 과 육. 그리고 그 힘.]

    우웅.

    바브리아의 의지가 점점 선명해졌다. 하늘이 열렸다. 그 틈새 사이로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강대한 힘의 파장에 몸이 짓눌릴 정도. 창연이 자세를 낮췄다.

    [모두 나의 것이다.]

    그리고 빛이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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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물질로 화했다. 압도적인 힘의 응축이 대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창연이 피막을 전신에 둘렀다. 망치를 당겨 선을 그었다.

    ‘일단 한 번 봐 볼까.’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쓰는지. 세계의 개변으로 격돌했지만 그건 너무 거대해서 알아보기 힘들다. 창연의 주위로 파동이 퍼진다.

    차아앙!

    빛이 깨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둘러싼 콜로세움과 충돌하며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린다. 바브리아가 킬킬 웃는다.

    [소용없다.]

    쿠우웅!

    대지가 갈라졌다. 틈 사이에서 검은 용암이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창연이 허공을 박차 피하고 손을 흔들었다. 기운이 엉켜 퍼져 나가 용암을 짓눌렀다.

    [이 세계는 나의 것.]

    공기가 변한다. 질척이며 무거운 형태를 이루며 창연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거칠게 몸을 흔들어 날려 버린다.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응. 그거 이미 깨졌어.”

    이미 창연은 세계의 일부를 손에 넣었다. 그의 주위로 공간이 열렸다. 검붉은 촉수들이 튀어나와 바브리아를 향해 휘몰아쳤다. 이질적인 공기를 밀어내며 전진했다.

    [근본 없는 자의 것인가.]

    바브리아가 조롱기를 담으며 거미의 팔을 까닥였다. 공간이 왜곡되며 촉수들이 짓이겨졌다. 창연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뭐 이딴 게 있어?”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원전의 특징. 안에 담긴 모든 문장을 이용해, 그 무엇을 상대로든 우위를 점하는 것.

    ‘……나를 상대하던 놈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겠군.’

    본인이 쓸 때는 잘 몰랐는데, 상대하니 알 것 같았다. 이건 반칙이었다. 바브리아가 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부질없다. 그들 수십이 모여, 그 절반이 무로 돌아간 후에야 간신히 나를 추방했는데. 그 일부로 될 성이 있겠느냐.]

    “그러게.”

    창연이 망치를 들고 몸을 날렸다. 공간을 도약하며 바브리아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진다. 망치를 휘두르고, 바브리아를 감싼 둥근 막과 충돌한다.

    쩌억.

    금이 간다. 균열이 막 전체로 퍼져 한 대만 더 치면 부서지겠지만, 바브리아가 그럴 틈을 줄 리가 없었다. 바브리아가 팔을 까닥였다.

    [억눌리고, 짓이겨지고, 분쇄되어라.]

    공간의 이동이 금지당하고, 중력이 변화하며, 무형의 힘이 전신을 뒤흔든다. 창연이 망치를 흔들어 튕겨 냈다.

    “흐음.”

    [이 힘은 위대하다.]

    바브리아가 외쳤다. 살점 사이로 보이는 눈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내가 만들어 낸. 나만의 신화. 나만의 의지. 오직 나의 것으로만 이루어진 것들.]

    바브리아는 이 세계에 처박히고 절망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가 그들을 향해 복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근처에 있는 것들은 지성 따윈 없는 괴물들뿐. 무언가를 만들어 낼 재료도 없었고, 세계와의 분리로 정령과 같은 타 차원의 존재를 불러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바브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괴물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바브리아조차 무시할 수 없는 놈들이 있었지만 그는 불사. 죽음을 왜곡한 존재. 긴 시간 끝에 근처의 괴물을 전부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 시체들을 가지고 은신처에 처박혔다. 시체에 담긴 힘을 조합하고 엉키고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의 형태, 원전이 만들어졌다.

    [원전이란, 신화란 것은 그 세계의 역사. 시간의 변화. 그것들이 축적되어 힘이 되는 것.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안정화가 문제지.]

    원전을 만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시체에 담긴 힘이라 그런지, 아니면 근본이 되는 금속이 없어서 그런지 원전은 폭발했다. 조각조각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황급히 움직여 다시 한데 모으려 했지만 움직였을 때는 괴물들이 전부 먹어 치운 후였다. 변질되어, 빼앗는다 하더라도 다시 만들 수는 없었다. 무력감과 절망감에 바브리아는 포기했다. 대지 깊숙이 처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왔지.]

    바브리아가 손을 까닥였다. 음파가 퍼져 창연의 몸을 후려쳤다.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갑자기 세계에 변동이 일어나더구나. 덕분에 나도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지. 정말, 내 생애 중 그리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 적은 처음이었다. 원전을 결합하는 놈이 이 세계에 들어오다니.]

    바브리아의 주위에서 연달아 파장이 퍼졌다. 그것들이 창연에게 달려들었다. 창연이 망치를 휘두르며 막아 냈다. 바브리아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창연을 바라봤다.

    [네놈을 죽여 그 시체를 먹으면, 온전한 결합이 가능하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 미천한 인간. 이제 버러지들의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겠어.]

    “놀고 있네.”

    검은 선이 그어지며 공격이 차단되었다. 창연이 망치를 어깨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혹시나 해서 말해 주는데. 너희 세계.”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이미 멸망했어.”

    [……뭐라고?]

    바브리아가 멈칫했다. 창연이 중얼거렸다.

    “진짜 몰랐나 보네.”

    [인간. 자세히 말하라. 그게 무슨 소리지?]

    “간단해. 너희 세계는 멸망했고, 그놈들은 방랑인이 되었어.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지.”

    [그게 무슨…….]

    바브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아주 잠시. 곧 떨림이 멈췄다. 바브리아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 이거지.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다면 방랑인이 된 그놈들을, 먹어 치우면 되는 문제니.]

    스륵.

    검은 막이 펼쳐졌다. 테트리스가 맞춰지듯 공간이 천천히 물든다.

    [그 전에 너를 삼켜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의 안에서 일부로서 살도록 하라.]

    “지랄을.”

    창연이 이죽거렸다.

    “한 가지 더 말해 주면.”

    창연이 대지를 밟았다. 웅 하며 하얀 막이 펼쳐진다. 테트리스처럼 공간을 차지한다. 바브리아가 썼던 것과 같은. 색만 다르지만 힘의 방향, 질, 크기 모두 똑같은 것. 바브리아가 멈칫한다.

    [……이게 무슨!]

    “네가 만든 원전은 열화판이야.”

    쿠웅!

    공간이 서로 충돌하며 깨져 나간다. 창연이 파편을 들었다.

    “게다가 다루는 방식도 조잡해.”

    키잉.

    파편에서 파장이 퍼진다. 테트리스가 만들어지듯 다시금 공간이 점유한다. 바브리아가 멈칫하며 팔을 까닥였다. 어둠이 공간을 잠식하고 창연의 힘과 충돌했다.

    [이건.]

    바브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모든 게 똑같았다. 힘의 방향. 질. 크기. 아까와 같은 조건. 하지만 그의 힘이, 창연에 의해 뭉개지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어떻게 쓰는지 알려 주지. 대가는 네 모든 것이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공간이 천천히 나아간다. 속도는 느리다. 평범한 인간도 진즉 보기만 했다면 피할 수 있는 속도. 하지만 바브리아는 피하지 않고 마주 힘을 발했다. 테트리스처럼 공간을 천천히 차지하며 충돌한다.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창연의 힘을 막지 못한다. 하얀 힘이 어둠을 집어삼킨다. 창연이 킬킬 웃었다.

    “처음에도 느끼긴 했지만, 진짜 못 다루는구나.”

    그냥 무작정 때려 박는 방식. 힘의 컨트롤 따위는 없었다. 파편의 힘에 취해 단순한 방향으로만 날리는 그런 걸로, 창연의 것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먹어라.”

    하얀색이 바브리아를 감쌌다. 그제야 눈치채고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공간이 둘려지며 바브리아의 모습이 가려졌다.

    “힘의 방식도 되게 간단하네.”

    분명 상당한 힘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쓰는 것처럼 체계적인 문장이나 그런 방식은 없었다. 그저 시간의 흐름이 힘으로 축적되었을 뿐.

    처음에는 반편이기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바브리아가 쓰는 힘을 보자 알 수 있었다. 그냥 단순한 힘의 응축,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쪽 세계가 지성 없는 놈들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사건과 기록이 힘이 되는데 그냥 치고받는 것밖에 안 하니 고차원적인 힘이 만들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크으…….]

    콰앙!

    하얀 공간이 부서진다. 그 안에서 바브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과 눈에서 검은 진액이 뚝뚝 흐르는 상태였다.

    [……이럴 순 없어. 이건 내가 만든 힘. 어떤 힘인데!]

    괴성과 함께 바브리아에게서 힘이 퍼진다. 응축된 동그래한 파장이 근처에 있는 모든 걸 부수며 전진한다. 지배자조차 정통으로 맞으면 재로 돌아갈 힘. 창연이 가볍게 손을 젓는다.

    “안 된다니까.”

    [아…….]

    힘이 흩어진다. 엉킨 기류가 흩어지며 창연이 든 파편으로 흡수된다. 바브리아가 절망에 찬 상태로 중얼거렸다.

    [……왜.]

    “말했지. 네가 가진 것은 열화판이며, 조잡하다고.”

    창연도 일단 절반을 가지고 있다. 서로 영향력은 동등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힘을 다루는 방식으로 갈리는데, 그건 창연이 압도적인 우위였다.

    “만든 놈이라고 잘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당연한 사실을 바브리아는 망각하고 있었다. 집착 때문인지, 아니면 광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사실은 컸다. 창연이 원전을 들었다.

    쿠우웅!

    [크윽!]

    힘이 바브리아를 짓누른다. 대지에 아무 영향도 없이 그저 바브리아, 그 하나만에 힘이 가해진다. 몸이 삐거덕거리며 망가지기 시작한다. 바브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말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내가 얼마나 긴 세월을, 긴 세월을 버텨 왔는데. 그놈들과 그 자식에게 복수를 하려고. 겨우 이따위 결말을…….]

    “잘 가. 네 시체는 유용하게 써 줄게. 네 힘도.”

    콰득.

    몸이 짓이겨졌다. 진액이 사방으로 튀어 창연의 몸을 적셨다. 한 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지배자 치고는 맥없는 죽음이었다. 창연이 혀를 찼다.

    “뭔가 묘하군.”

    만약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쉽게 죽지 않았을 거였다. 바브리아가 말한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창연도 제법 고생할 게 분명했다. 지배자 수십이 달려들어 간신히 봉인한 고대의 괴물. 거기에 담긴 의미는 가벼운 게 아니니까.

    하지만 현재로선 그런 힘 따위가 없었다. 원전에 너무 집착해 본인의 힘을 잃어버린 것인지, 그 외에 힘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괴물일 뿐.

    ‘일단…….’

    창연이 바브리아의 시체에 다가갔다. 진액을 들어 매만졌다. 짙으면서 점성을 가지고 있는 액체. 냄새를 맡아 보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거 쓸 수 있으려나.’

    평범한 진액은 아니다. 그런 놈의 피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힘이 담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챙겨야지.”

    왕을 먹는 자. 그 이명에 걸맞은 힘을 보여 주진 못했지만, 신체에는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공간을 열어 피와 살점을 집어넣었다.

    “찾았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에 반쯤 이루어진 형태가 있었다. 원전의 절반. 창연이 웃으며 그걸 들었다. 하나씩 양손에 들고 합쳤다.

    “결합.”

    쿠웅!

    충격파가 퍼져 콜로세움을 후려친다. 안 그래도 불안 불안하게 흔들리던 것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굉음과 함께 먼지가 퍼져 시야를 가린다. 두 개의 파편이 서로 꾸국거리며 결합하기 시작한다.

    “나와라.”

    창연이 입가를 비틀며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파편이 비틀리며 서로를 향해 겹쳐졌다. 웅 하고 강한 빛이 시야를 가리고, 정적이 감돌았다.

    “예상외로 쉽네.”

    힘이 힘인 만큼 고생할 줄 알았는데 그냥 단박에 되었다. 그것도 별로 힘도 쓰지 않았다.

    “이게 원전인가…….”

    광채가 가라앉고 원전의 모습이 보였다. 독특한 형태였다. 서클이 겹겹이 겹쳐 서로를 반사하며 왜곡시키고 있었다. 크기는 창연의 손에 들릴 정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어디 보자.”

    창연이 꼼꼼히 훑어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거 되겠군.”

    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대략적인 게 아닌 모든 성능을 파악하려면 창연도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창연이 공간을 열고 이동했다.

    “안녕.”

    “……끝났군.”

    가복이 한층 초췌해진 얼굴로 인사했다. 창연이 물었다.

    “왜 그래?”

    “네놈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거슬려서. 신경을 곤두서고 있는지라 심력 소모가 크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나.”

    “됐어. 여기.”

    창연이 원전을 들었다. 가복이 멈칫하다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젠 놀랍지도 않군. 그래서 이동할 수 있나?”

    “그래. 열려라.”

    창연이 공간을 잡고 손을 당겼다. 쩌억 하며 공간이 갈라지고, 너머로 오피스텔 내부가 보였다.

    “됐네.”

    창연이 손을 구겨 넣었다. 몸이 차원을 관통하며 지구로 이동했다. 창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아. 역시 지구가 좋아……. 다른 세계는 싫어. 너무 복잡하단 말이야.”

    “시간은 별로 이상이 없다. 아니, 오히려 쥐꼬리만큼 흘렀군. 기껏해야 하루인가.”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도 되나…….”

    “그럼 이제 이놈은 어떻게 할 거냐.”

    “읍! 읍!”

    젊은 청년이 경악에 찬 눈으로 창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세계는 그들의 신이 친히 내려 준, 절망의 세계.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점지은 세계.

    그런데 창연은 그곳의 주인을 죽이고 돌아왔다. 그것도 더 강해진 채로. 그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으으읍!”

    “시끄럽다.”

    쿠웅!

    가복이 바닥에 내려찍었다. 청년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죽일 거냐? 어차피 이놈으로 정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하지 않았나.”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창연이 청년을 들어 버려진 세계로 던졌다. 보스를 잡았고, 그가 품은 원전을 얻었다. 전부까지는 아니어도 세계의 일부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럼 난 볼일 좀 보고 있을게. 알아서 할 거 해라.”

    창연이 열쇠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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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어디 보자.”

    창연의 주위로 진액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이름 없는 주인의 세계. 거기서 테스트하고 있었다.

    창연이 진액을 쥐어 들자 주루룩 올라왔다. 연결된 부분을 억지로 뜯어냈다.

    “더럽게 끈덕지네.”

    점성 하나는 최고였다. 점성만으로도 괜찮은 게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나름 왕을 먹는 자의 시체인데, 무언가가 있겠지. 창연이 손에 힘을 주었다.

    꾸구구국.

    “……이거 피 맞아?”

    단단하기도 더럽게 단단했다. 힘이 가해지자 한군데로 뭉쳐 단단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창연이 혀를 차며 내던졌다. 떨어진 진액이 꾸물거리며 저들끼리 달라붙기 시작했다.

    “허이구야.”

    창연이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식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개별적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냥 하나로 합쳐야겠네.”

    분명 죽은 놈의 것인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창연이 점액을 치우고 살점을 들었다. 바브리아가 짓눌려 죽었지만 살점, 가죽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진액도 전부 구멍으로 흘렀고.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였다.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창연이 애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브리아의 육체는 이질적이었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정말 모든 것이 혼합된 형태.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시험이나 해 봐야지.”

    화륵.

    창연의 손에서 불이 일었다. 백염이 주위를 불사르며 살점에 달라붙었다. 화륵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온도 내성은 높네.”

    백염인데도 그을림 하나 없었다. 창연이 불을 끄고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쩌적이며 냉기가 퍼졌다. 공기조차 얼어붙으며 얼어붙은 공간이 형성되었다.

    ‘……이것도 손상이 없고.’

    카창!

    얼음이 깨지며 흩어졌다. 창연이 입김을 불며 살점을 둘러봤다. 처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지.’

    창연이 살점을 매만졌다. 그냥 평범한 온도였다. 방금의 냉기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 시험 삼아 화염을 발하고 만져 보기도 했지만 온도엔 변화가 없었다.

    “허, 참.”

    창연이 혀를 찼다. 아예 변화가 없다니, 이건 새로웠다.

    “어디 한번 이것도 버티나 보자…….”

    오기가 생겼다. 창연이 공간을 열어 망치를 꺼냈다. 어깨에 들쳐 메고, 내려찍었다. 쿵 하며 충격파가 퍼졌다.

    “……뭐야?”

    창연이 얼굴을 구겼다. 여파로 큰 호수 정도는 생길 거라 예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살점이 충격을 흡수한 것처럼.

    “이거.”

    창연이 살점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점이 아니네.”

    확실했다. 이건 물질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겉모습과는 전혀 별개의 것 같았다. 창연이 주먹을 내려찍었다.

    차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가 퍼졌다. 창연이 미소를 지었다. 살점이 묘하게 뒤틀려 확장했다. 끼긱거리며 제 형태를 변형시키고 있었다.

    “대충 감이 잡히긴 하네.”

    하지만 지금 할 순 없었다. 제대로 써먹으려면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창연이 아공간을 열어 살점과 진액을 집어넣고 열쇠를 매만졌다. 이름 없는 지배자의 세계에서 나오고, 다시금 공간에 손을 넣었다. 검게 물든 진득한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

    창연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초췌한 얼굴의 청년이 질겁해 뒤로 물러났다. 창연이 손을 흔들었다.

    “해제.”

    “아아! 어……?”

    청년이 고함을 멈췄다. 봉인된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이를 갈았다.

    “……이 빌어먹을 불신자! 날 죽여라!”

    “아니. 죽이진 않아. 너에게서 얻을 게 있거든.”

    “하! 얻을 거! 웃기지 마라!”

    청년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그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외쳤다.

    “나에게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다! 정신 지배? 기억 전송! 아무렇게나 해 보아라! 그분께서 그런 것들도 대비하지 않았을 거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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