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9/192)
  • 콰앙!

    마침내 시체가 전부 사라진다. 그 모든 게 파편 내부로 흡수된 상태. 창연이 파편을 들어 살펴본다.

    “……되긴 됐네.”

    파편에 담긴 힘이 늘어났다. 아주 미세해 알아차리기도 힘들지만 어쨌든 늘어난 건 늘어난 것.

    “이거.”

    창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원전에 흡수된다는 건 이것들과 원전이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 그건 약간 껄끄러운 소리였다.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확인이나 해 봐야지.”

    창연이 다시 공간을 도약했다. 문을 열어 일순간에 수십 번 이동한다. 지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거리를 이동하자 힘의 파장이 느껴졌다. 원전의 파편. 그리고 그건,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썩을.”

    창연이 거칠게 내뱉었다. 표정이 한가득 일그러져 있었다. 어째 불안하다 싶더니. 그가 구겨진 얼굴로 아래를 바라봤다.

    [크으으으…….]

    쿵. 쿵.

    거대한 괴물이 걸어간다. 하나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크기. 네 개의 다리로 걸어가고 검게 물든 몸이 꿈틀거린다. 기다란 머리가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든다.

    [우우…….]

    꾸극.

    울음이 퍼지고, 공간이 잠식된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짓눌리며 압축한다. 순식간에 산골짜기가 거대한 평야로 변화하며, 주위에 있던 괴물들이 전부 생명을 잃는다. 괴물이 그 시체를 향해 다가간다.

    “돌겠네.”

    창연이 중얼거렸다. 저 괴물의 안에서 원전의 파편이 느껴졌다. 괴물이, 원전을 집어삼킨 거였다.

    [우우…….]

    괴물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때마다 대지가 쿵쿵 울리며 불안하게 흔들린다. 짓눌린 괴물들의 시체를 씹어 먹기 시작한다.

    “……이거 골치 아픈데.”

    창연이 허공 위에서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발휘된 힘은 일반적인 괴물의 힘과는 좀 달랐다. 좀 더 근본에 가까운 것. 그가 사용하던 힘과 비슷했다.

    ‘게다가.’

    시체를 먹어 치울수록 힘이 더더욱 증폭하고 있었다. 비록 그 폭은 매우 미세하지만, 괴물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상당히 강해질 게 분명했다.

    [우우.]

    시체를 씹어 먹던 괴물이 움찔했다. 창연의 손아귀 안에 들린 것이 부르르 떨렸다. 손을 펴자 파편이 빛을 발하며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공명?”

    [우우우우…….]

    괴물이 고개를 들어 창연을 올려다봤다. 검게 일렁이는 눈과 마주치고, 괴물이 울음을 흘렸다.

    [우우…….]

    꾸국.

    주위의 공간이 변이한다. 공간이 서로를 향해 왜곡하며 균열이 퍼진다. 죽음의 공간이 사방으로 퍼진다.

    “왜곡. 반발.”

    키이잉.

    창연이 피막을 두르며 입을 연다. 공간의 왜곡이 퍼져 서로 충돌하여 원래대로 돌아온다. 창연이 손을 모은다.

    ‘즉발로.’

    상대도 원전을 사용했다. 비록 파편뿐이며 원래의 힘 따위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 요소. 괜히 시간을 줄 필요는 없었다.

    “바람의 무리가 엉켜 정령으로 변해 대지를 질주했다.”

    우웅.

    창연의 손에 미세한 바람이 생겨난다. 괴물이 경계 어린 눈으로 숨을 모았다. 바람이 서서히 불어난다. 곧이어 거대한 정령의 형상을 이룬다.

    “짓밟아.”

    콰아아앙!

    창연의 말과 함께 정령이 질주한다.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속도로 괴물을 향해 달려든다. 괴물이 모았던 숨을 내불었다.

    [우우우우우…….]

    쩌저저적!

    공간의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며 정령을 후려친다. 퍼벙 하고 몸의 일부가 사라지며 형상이 무너지지만 근본은 바람. 아예 없애 버리지 않는 이상 가진바 힘은 그대로다. 괴물과 충돌하며 굉음이 터진다.

    콰아아앙!

    [우어…….]

    괴물의 몸이 흔들린다. 발이 비틀거리며 대지를 밟는다. 창연이 혀를 찬다.

    “이 정도 문장으론 소용도 없군.”

    원전을 품어서 그런지 자체적인 저항력도 있는 것 같았다. 창연이 다시 손을 모았다.

    “별 무리가 하늘에 우수를 지었다. 바다가 그 빛을 받아 대지에 잔향을 이루었다. 잔향이 엉켜 바다에 변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우우…….]

    괴물이 울음을 흘렸다. 다시 한번 공간의 균열이 퍼져 나가 창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창연이 혀를 차며 문을 열어 이동했다.

    “경계하는 건가.”

    짧은 문장은 저 정도를 잡을 만한 힘이 없고, 긴 문장은 오랜 시간 집중해야 했다. 중간에 타격이 오거나 정신력이 흔들리면 바로 깨졌다. 이게 바로 약점. 이전에도 이것 때문에 제법 타격을 입었었다.

    “그래도.”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눈앞의 괴물은 원전. 그 일부를 품고 있는 존재. 그렇다면, 그걸 잘만 다룬다면.

    “약점의 제거도 가능하지.”

    창연이 공간을 열어 망치를 꺼냈다. 그대로 가볍게 허공을 후려쳤다.

    쩌억.

    공간의 균열이 역으로 퍼져 나가 괴물을 향해 달려갔다. 괴물이 다시 입을 열어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그보다 창연이 빨랐다. 창연이 문을 열어 괴물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다물어.”

    콰아아앙!

    [우어어어!]

    망치가 머리를 후려갈긴다. 괴물이 부르르 떨며 몸을 비튼다. 창연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바닥에 착지한다.

    “김빠진 신음만 내는 줄 알았는데, 나름 힘 있게도 지르는구먼.”

    ‘그나저나 타격이 없네.’

    창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 급소라 할 수 있는 머리를 갈겼는데 큰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우어어어어!]

    괴물이 땅을 짓밟으며 거세게 울음을 울렸다. 파장이 퍼지며 기운의 해일이 창연을 덮쳤다. 창연이 망치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대지를 내려찍었다.

    “무너져라.”

    쿠구구구구…….

    [우. 우어?]

    균열이 부채꼴로 퍼져 나가며 대지가 무너졌다. 괴물이 발판이 사라지고 불안정하게 변했다. 울음을 멈추고 엉거주춤 자세를 잡으려 하지만, 바닥의 균열은 끝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우. 어어…….]

    대지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꺼졌다. 호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균열이 확장했다. 괴물의 몸이 깊숙이 들어가 흙과 광석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창연이 그 위에서 다시금 손을 모았다.

    “별 무리가 하늘에 우수를 지었다. 바다가 그 빛을 받아 대지에 잔향을 이루었다. 잔향이 엉켜 바다에 변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쿠웅!

    대지가 들썩인다. 흙의 잔재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들썩거린다. 하지만 그 충격에 주위의 흙이 떨어져 원래대로 돌아온다. 창연이 말을 이었다.

    “별 무리의 힘이 바다에 담기고, 그 일부가 힘이 되어 서로를 반사하였다. 대양이란 만물을 비추는 세계의 어머니일지어니. 많은 이들이 그 힘을 차지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쿠웅! 쿠웅!

    잔재가 더더욱 거칠게 흔들리며 들썩였다. 주위의 흙이 떨어지지만 그보다 더 많은 양이 밖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괴물의 눈이 보였다.

    “하지만 대양이란 저주받은 대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곳. 여행을 떠난 이들 대부분이 대양 아래 그 생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일부. 아무 힘도 없고, 그저 나뭇조각 하나에만 의존한 채 대양을 이동한 이가 마침내 잔향에 도착하니.”

    콰아아앙!

    [우우우우우우!]

    흙이 폭발하며 갈색 비가 내린다. 괴물이 거칠게 몸을 일으킨다. 바닥을 짓밟으며 숨을 모은다. 창연이 괴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잔향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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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연의 손을 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존재했다. 일렁이는 미세한 힘의 파편. 미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꺼질 듯한 불꽃.

    [우어어어어!]

    괴물이 입을 열었다. 고함이 퍼지며 공간이 무너졌다. 모든 것이 깨지며 순식간에 검은색만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검은 물결을 바라보며 창연이 주먹을 쥐었다.

    우웅.

    미세한 파장이 일었다. 원형의 힘이 대지를 휩쓸며, 검은 공간과 충돌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연의 몸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우우…….]

    괴물이 의아한 눈으로 검게 물든 창연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무언가를 하려 했던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괴물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든 끝났다. 저것에 물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오랜 세월이 경험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우어.]

    괴물이 아가리를 벌렸다. 눈앞의 존재를 먹어 치우면,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괴물이 창연을 물어뜯으려는 순간이었다.

    쩌적.

    공간의 균열에 금이 갔다. 괴물이 멈칫했다. 동시에 금이 사방으로 퍼지며 깨져 나갔다. 그 안에서 창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을 뻔했네.”

    [어우.]

    괴물이 멍하니 창연을 바라봤다.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지금까진 전부 죽었는데. 인지를 벗어난 일에 괴물이 멈칫하고, 창연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

    그리고 망치가 허공을 갈랐다. 괴물의 머리와 충돌하며 굉음이 터졌다. 괴물이 팽이처럼 퉁퉁 튕겨 나가 땅을 굴렀다. 고통 어린 울림이 퍼졌다.

    [우어어어어!]

    “잘 되는군.”

    창연이 망치를 내려다봤다. 거무튀튀한 색에 다른 색이 물들었다. 초록색의 빛. 그것이 망치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창연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이걸 쓸 수 있겠네.”

    그가 방금 쓴 힘은, 그가 가진 문장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력한 문장. 담긴 힘은 간단하다. 힘의 강화, 그리고 증폭. 하지만 그 수준이 달랐다.

    가볍게 움직이면 대지가 무너지고 해일이 인다. 주먹질 한 번에 대륙이 토막 나며 공간의 균열이 지평선까지 뻗어 나간다. 순수한 힘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그 힘을 견딜 수 있는 게 없었다. 특정 물건에 강림하여 깃드는 방식인데, 담긴 힘이 그런 만큼 견딜 수 있는 게 없었다. 창연의 육체도 매한가지.

    일단 쓰고 주먹질을 하면, 그대로 터져 나간다. 처음 사용했을 때 양팔과 양다리가 터져 며칠간 고생했었다. 그래서 봉인하고 있었는데, 망치는 버틸 수 있었다. 창연이 웃으며 괴물에게 다가갔다.

    [우어. 우어어어어어!]

    괴물이 비틀거리다 고함을 질렀다. 다시금 검은 공간이 들이닥쳐 시야를 가렸다. 창연이 가볍게 망치를 흔들었다.

    쩌엉!

    힘에 공간이 짓눌린다. 검은색이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간다.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잘 가.”

    창연이 망치를 잡고 들었다. 기류가 엉키며 대지가 불안하게 떨렸다. 괴물이 발악하듯 비명을 질렀다.

    [우어어어어어!]

    쿠우웅!

    망치가 내려찍히고, 충돌이 일었다. 토사물이 사방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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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구, 에구.”

    창연이 어깨를 두들겼다. 먼지 때문에 코가 막혔다. 창연이 손을 흔들어 치우고 걸어갔다.

    “너무 과했나.”

    창연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못 쓰던 걸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감각을 펼치자 멋모르고 걸어가던 괴물들도 여파에 여럿 죽은 것 같았다.

    “좀 흩어졌네. 이거 되려나.”

    망치에 정통으로 맞아서 반절이 날아갔다. 창연이 파편을 들어 괴물의 몸체에 붙였다.

    쿠웅!

    파장이 울리며 몸체가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힘의 기류가 파편으로 흡수된다.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좋아…….”

    꾸국! 꾸구국!

    파편의 형태가 변이하며, 몸체의 수축이 가속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의 시체가 사라진다. 창연이 손을 뻗어 떨어지는 파편을 붙잡는다.

    “이제 두 개.”

    원래 가지고 있던 파편도 두 배가량 커졌으며, 담긴 힘 또한 제법 불어났다. 그리고 새로 얻은 파편. 창연이 붙잡은 손을 폈다. 이질적인 형상의 파편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알겠네.’

    원전의 파편은, 그가 사용했던 원전의 것이 아니었다. 힘이 늘어나니 감이 잡혔다.

    본래에 있던 원전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 낸 원전. 기반이 되는 힘은 이곳, 괴물들의 힘.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괴물이, 여기 있다고?’

    창연이 신음을 흘렸다. 그냥 넘길 소리가 아니었다. 만약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원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규격 외였다. 정령의 왕이건 침략자건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힘을 가진 존재. 신이라 불러 마땅할 존재.

    ‘그래도 완전한 형태는 아니군.’

    지금 이 파편이 그 증거였다. 억지로 떨어진 것과 같은 형태. 아마 만들어 내고 바로 다음 순간, 힘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였을 거다. 그래서 사방으로 흩어져 이 꼬라지가 된 것이다.

    명백히 불안한 힘. 하지만 창연은 웃었다.

    창연이 두 손을 합쳤다. 꾸국이며 틈새 사이로 검은빛이 새어 나왔다.

    “분리된 하나가 결합하였다.”

    쿠웅!

    충격파가 울리며 주위의 돌무더기들이 밀려난다. 창연이 손을 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두 개의 파편이 서로 합쳐진 상태였다.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부속품과 같은 명백한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난 가능하네.’

    그는 이것들의 결합이 가능했다. 창연이 가진 힘은 온전한 원전.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 이루고, 어떻게 만들어야 폭주하지 않고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원전이라.”

    파편을 전부 모으면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연이 몸을 일으켰다.

    “하나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파장이 터진다. 괴물과 인간의 무기가 충돌하며 여파가 사방을 휩쓴다.

    [캬아아아!]

    거대한 매 형상의 괴물이 울음을 터트린다. 날카로운 음파가 퍼져 모든 걸 깨부순다. 그 한가운데에서 창연이 망치를 부여잡고 내달린다. 땅을 박차며 거칠게 휘두른다.

    쩌어엉!

    [캬아악!]

    괴물이 자지러지며 땅에 처박힌다. 창연이 망치를 들어 내려찍는다. 대지가 갈라지고 피가 사방으로 튄 후, 괴물의 움직임이 멈춘다.

    “끝.”

    창연이 망치를 빙글 돌려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품에서 파편을 꺼냈다. 처음보다 몇 배는 거대해진 파편. 그걸 시체에 붙이고 흡수했다.

    꾸구국.

    크기가 쪼그라들며 그 힘이 파편에 깃들고, 커진다. 시체가 전부 흡수되고 파편이 하나 더 나타난다. 창연이 그걸 받아 들고 두 개를 서로 합쳤다.

    “이제 슬슬 안정화되네.”

    창연이 파편을 둘러봤다. 처음에 비하면 슬슬 하나의 형태라 해도 될 모습이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적인 형태지만, 그래도 형태는 형태. 절반쯤 이루어졌다.

    당연히 그에 따라 힘의 증폭도 상당했다. 처음에는 힘이 너무 적어 아껴 써야 했지만 이제는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얼마나 남았으려나…….”

    창연이 지긋지긋한 얼굴로 지평선을 바라봤다. 주변은 전부 박살 난 상태였다.

    ‘반절쯤 된 거 같은데.’

    다르게 말하면, 이제 겨우 반절. 이 안에 얼마나 처박혀 있는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일단 일주일. 어쩌면 이주일. 상당히 시간이 지났다.

    ‘일단.’

    가복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정도로 이루었으니 슬슬 분석도 해 보고, 돌아갈 방법도 찾아야 했다. 창연이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키이잉.

    “……또네.”

    창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슬리는 파동이 몸을 후려쳤다.

    며칠 전부터, 파편을 다섯 개 모았을 때부터 간간이 파장이 몸을 훑었다.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이 느껴졌다.

    거슬리지만 방법이 없었다. 철저히 정체를 숨기고 보내고 있는 터라 위치도 몰랐다. 게다가.

    ‘……강해.’

    지금의 그가 상대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수준. 딱히 악의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무시하는 게 편했다. 창연이 문을 열고, 허공을 밟았다.

    [캬아! 캬아!]

    드래곤이 신 나게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가복이 그 위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냐?”

    “음? 왔나. 잠시 명상하고 있었다.”

    가복이 훌쩍 뛰어 지상에 착지했다. 몸 이곳저곳 생채기가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래도 심심해서 말이야. 근처 괴물들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뭐 발견한 거 있냐?”

    “어.”

    창연이 파편을 꺼냈다. 가복이 가만히 바라보다 멍하니 내뱉었다.

    “돌았군.”

    “왜 그래?”

    “……아니다. 왠지 내가 멍청하게 느껴져서. 저런 힘을 기물에 품을 수 있다고…….”

    “허탈할 필요 없어. 이게 이상한 거니까. 일단 절반가량은 모았어. 문이 열리나 열리지 않나는…… 이제부터 시험해 봐야지.”

    창연이 파편을 들었다. 웅 하며 공기가 떨렸다. 내재한 힘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고 공간이 영역을 불렸다.”

    콰득.

    허공이 깨진다. 균열이 퍼지며 너머로 세상이 보인다. 고층 빌딩이 들어선 세계.

    “됐네.”

    창연이 웃으며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퉁 하고 튕겨 나갔다. 그가 황망한 얼굴로 공간을 꾹꾹 눌렀다.

    “뭐야. 안 돼?”

    “열리긴 했는데.”

    “그건 나도 보여. 근데 이동이 안 되네.”

    창연이 혀를 찼다. 서로 연결이 되었지만, 저쪽에서만 올 수 있는 일방통행의 문 같았다. 창연이 신음을 흘렸다.

    “……안 되겠네.”

    딱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정령계 때처럼 억지로 들어가는 방법도 불가능해 보이고. 그림의 떡이었다.

    “아니지…….”

    일방통행의 문.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써먹으면 됐다. 창연이 파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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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또 어디냐, 주인.]

    아그니가 허공 너머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창연이 태연하게 답했다.

    “버려진 세계. 검은 세계라나 뭐라나.”

    [이건 또.]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갑자기 연결이 안 되기에 어디 이상한 데라도 갔나 싶었는데…… 정말 이상한 곳에 와 있었구나.]

    “뭐, 그렇지. 가서 니네 주인 좀 불러 줘.”

    [알았다.]

    아그니가 찝찝한 얼굴로 사라졌다. 잠시 후 하얀 빛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헤에. 이런 세계에 있었나? 뭔지 알겠네. 나도 말로만 들어 봤지 보는 건 처음인데.]

    “알긴 아나 보네. 그럼 일단 이거 묻자.”

    창연이 파편을 들어 그녀에게 보였다. 소녀가 침묵했다. 정적이 흐르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뭐지.]

    “왜?”

    [어째서 그것이……!]

    소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힘이 퍼지며 창연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창연이 가볍게 힘을 발해 상쇄시켰다.

    “진정하지, 일단.”

    [……그래, 그래야겠군.]

    소녀가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뭐야? 왜 그딴 걸 나한테 보여 주는 거야?]

    “보시다시피, 이동이 안 되거든. 이걸로 문을 만들어 봤자 일방통행이 되어서 달리 방법이 없나 해서.”

    [흐음.]

    소녀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도와주기 싫네. 그딴 게 다시 세상이 풀리면 어떤 파장이 생길지 아니까. ……그래도 우리의 세계를 도와줬으니, 염치없는 놈이 될 순 없지. 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가 막고 있어서다.]

    “막고 있다고?”

    [그래. 이건 나도 좀 신기한데.]

    소녀가 애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세계는 그런 게 없는 세계인데. 아니지. 그렇게 따지면 원전이 있는 게 더 웃긴 건가. 저들끼리 봉쇄되고 시간이 오래 흘렀으니 가능성도 있나…….]

    “뭐라는 거야? 혼잣말하지 말고 알아듣게 말해 봐.”

    [끙. 생각 좀 정리한 거다. 네가 지금 있는 세계는 버려진 세계. 검은 세계. 침략자들이 껄끄러운 괴물들을 전부 집어넣은 곳이지. 그렇기에 대지는 황폐해져 있고, 공기는 존재를 짓누르고, 생명은 천천히 죽어 가는 그런 땅이지.]

    소녀가 신화를 풀어내듯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괴물들도 살아남기 힘든 곳이야. 지성을 가진 자는 지성을 잃고 본능만이 지배하는, 그런 곳. 당연히 세계를 지배하는 놈 따위는 없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를 보면 좀 달라진 거 같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몇 천 년 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지배자가 생겼다는 소리냐?”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모르겠네.]

    소녀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 거슬리게 하는 시선. 설마 그게.

    [네가 가진 그 원전의 파편도 아마 그놈이 만든 것일 거야. 만들어 낸 놈이니 당연히 공간을 여는 걸 막을 수 있을 테고. 일방통행은 되는 걸 봐서 전부는 무리인 거 같지만. 흠, 그러면…… 혹시 무언가 느껴져?]

    “어, 시선 하나.”

    [그러면 너에게 관심이 있나 보네.]

    “관심?”

    [그래. 공간을 틀어막은 걸 보니, 널 이용해서 뭔가를 할 생각인 거 같은데. 음…… 그거까진 잘 모르겠네.]

    “…….”

    창연이 침묵했다. 소녀의 말을 들어 보자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원전은 파편의 형태로 있었다. 만들어지긴 했다만 형태를 유지하진 못했다는 것.

    그리고 창연은, 그런 원전을 다시 복구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처음보다 완벽한 형태로.

    “……하.”

    창연이 실소를 흘렸다. 주의의 공기가 짓눌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괜히 알려 줬나.]

    “아니. 잘 알려 줬어.”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날 이용한다 이거지.’

    즐거운 소리였다. 창연이 어깨를 폈다.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고마워. 덕분에 감이 잡히네.”

    [그래. 다음에 만날 땐 멀쩡하길 기원할게.]

    공간이 닫혔다. 창연이 유쾌한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거 참. 내가 그런 놈들 어지간해선 전부 죽였는데.”

    “……잠깐.”

    가복이 얼굴을 찡그린 채 창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여파 정도는 생각하지 그러나. 만약 정말 지배자가 있다면 골치 아파진다. 이 세계가 상대의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창연이 원전을 이용해 세계를 뒤튼다 해도 상대는 세계의 주인. 그 지배력이나 범위나 전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세계를 자유자재로 다루지 않는 지배자도 있었다. 당장 용왕이나 이름 없는 지배자가 그리했으니. 하지만 이놈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특이성을 생각하면 변형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원전을 지닌 게 분명하니, 그걸 다루면 수월할 거였다.

    “괜찮아.”

    하지만 창연은 웃으며 파편을 쥐었다.

    “내가 더 잘 다루니까.”

    쿠웅!

    지각이 요동쳤다. 대지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창연이 중얼거렸다.

    “개변하라.”

    콰앙!

    충격파가 터졌다.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복이 멍하니 내뱉었다.

    “미쳤군.”

    드드드드…….

    산이 무너진다. 그 부스러기를 대지가 아가리를 벌려 집어삼키고, 그걸로 땅을 평평하게 편다. 괴물들이 고함을 지르며 도망가지만 이건 세계의 개변. 겨우 부속품에 속한 존재가 벗어날 순 없다. 결국 땅의 변화에 갈려 들어간다.

    “확장해라.”

    창연이 다시금 내뱉는다. 쩌억 하며 공간에 균열이 퍼진다. 공기가 변화하며 이질적인 색을 띤다. 초록색의 기운이 퍼지며 모든 걸 집어삼킨다.

    “이래도 반응이 없네.”

    창연이 입가를 비틀며 손에 힘을 주었다. 파편에서 다시 한번 파장이 퍼졌다.

    “그럼 내 입맛대로 해야지.”

    쿠구구…….

    세상의 개변이 끝없이 뻗어 나간다. 시야에 닿는 모든 걸 집어삼키고 형태를 바꾼다. 기반. 그 뿌리 자체가 변이한다.

    쿠우웅!

    그 순간, 굉음이 터졌다. 대지가 쩌적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화산이 모습을 보였다.

    “무거운 엉덩이를 드셨군.”

    창연이 킬킬거리며 다시금 원전을 발했다. 대지가 요동치며 화산을 아래로 집어넣으려 들었다. 저 멀리서 파장이 일며 화산이 꾸국거리며 비틀렸다. 검은 용암이 대지로 흘렀다.

    “어설퍼.”

    창연이 조롱기를 담아 내뱉었다. 손에 힘을 주자 용암이 순식간에 굳는다. 그대로 깨져 대지 아래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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