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8/192)
  • “세뇌부터 시작하자. 나머진 나중에 하고.”

    “이 개자식이!”

    그 순간 남자의 눈이 빛났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창연이 손가락을 튕겨 그걸 박살 냈다. 무언가 장치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을 거 같아?”

    “하, 하하하하! 하하하!”

    남자가 광소를 터트렸다. 창연이 움찔했다. 무언가 공기가 변했다.

    “나의 신이시여! 나의 지배자시여! 당신의 의지를 달성하였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내려 주십시오!”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공간이 꾸국거리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이질적임 감각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

    “어라.”

    “오라! 저주받은 세계에! 우리의 주인이 준비한 곳으로!”

    “……잠깐, 이거.”

    가복이 신음을 흘렸다. 공간이 바뀐다. 전혀 다른 세계가 풍경에 덧칠된다. 검고 짙고, 끔찍한 세계. 검은 목소리가 창연의 귀로 파고들었다.

    [친히 준비한 세계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역시.”

    전에 들었던 목소리. 창연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세계가 바뀌었다.

    [크아아아!]

    [캬르르르르르!]

    가장 먼저 들린 것은 괴물의 울음소리. 그리고 굉음과 폭음들. 창연이 남자를 붙잡은 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이거 참.”

    창연이 혀를 찼다. 그 옆에서 가복이 신음을 흘렸다.

    “뭐지, 이건.”

    “철저하게 준비했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창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이 검었다. 칙칙한 흑색 기류가 흘러나오며 주위의 물질들이 흐릿하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늘도 검은 구름이 가리고 있었고, 대지도 질척질척하여 걷기 힘들었다.

    [카오오오오!]

    콰아앙!

    굉음과 함께 괴물이 하늘을 날았다. 닭과 같이 생긴, 하지만 검고 거대한 괴물이, 날개를 펄럭이며 검은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광풍이 창연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다른 세계인가.”

    그것도 상당히 이질적인 세계. 괴물들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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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큭…… 칵칵칵! 꼴좋다! 빌어먹을 이탈자! 그리고 괴물!”

    창연의 손에 붙잡혀 끌려온 남자가 광소를 터트렸다. 창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팍을 짓밟았다.

    “조용히 해.”

    “커억!”

    “여긴 또 어디야?”

    “큭큭…… 여긴 다른 세계! 괴물들의 전장! 위대한 지배자님들마저 껄끄러워했던 세계다! 너 따위가 살아남을 수 없다!”

    “뭘 잘했다고 소리 질러? 닥쳐 봐.”

    “커허억!”

    발에 힘이 들어간다. 남자의 갈비뼈가 뚜둑거리며 금이 간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퍼졌다.

    “가복, 여기에 대해 아는 거 있어?”

    “……들어는 봤지만, 정말 존재할 줄은 몰랐는데.”

    가복이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어둠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흔들렸다.

    “……버려진 세계다.”

    “버려져?”

    “그래. 힘을 갖추었지만, 지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들. 탐욕스럽게 힘을 탐하는 괴물들. 세상에 풀어놓으면 멸망할 때까지 모든 걸 먹어 치우는 탐욕의 형상. 그 모든 것이 모인 세계.”

    가복이 일어났다. 시선이 지평선을 향했다.

    “검은 세계다. 침략자들이 그들조차 위험하다 느끼는 괴물들. 그 전부를 집어넣었다는 세계지.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흠. 이거 안 먹히네.”

    창연이 허공에 손을 넣었지만 끼긱 하고 일그러져 튕겨 나갔다. 타 차원으로 향하는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 소녀에게 받았던 문은 아예 작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퍼진 기운이, 그 모든 걸 막고 있었다.

    “하하! 말했을 텐데! 너희는 전부 여기서 죽을 거라고!”

    남자가 끄극거리며 외쳤다. 창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

    “봉쇄.”

    “……!!!”

    “이제야 좀 조용하네. 신화의 서는 되는 거 같고.”

    남자가 입을 열려 했지만 바늘로 꿰매진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창연이 중얼거렸다. 일단 가진바 힘은 전부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정령……은 안 되는군. 다른 세계와의 차단인 건가.”

    “이거 골치 아픈데.”

    [카아아아아!]

    순간 울음이 그들 앞에서 들렸다. 머리 여럿 달린 뱀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남자의 외침 때문에 주위가 자극된 것 같았다.

    [카아아아!]

    뱀이 아가리를 들이밀며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주위의 어둠이 엉키며 형상을 이루어, 그들을 향해 흔들렸다.

    “감히!”

    가복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몸이 비틀리며 순식간에 커져 나간다. 하늘이 닿을 정도로 커지며, 그가 주먹을 들었다.

    [괴물 따위가.]

    [캬캬캬캬!]

    콰아아앙!

    주먹이 대지를 내려찍는다. 어둠이 훅 하고 밀리며 땅이 박살 난다. 가복이 당황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무슨!]

    [캬캬캬!]

    뱀이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묘한 울음을 내며 가복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팔뚝을 깨물었다. 가복이 고함을 지르며 뱀의 몸통을 붙잡았다.

    [이까짓 놈이!]

    [캬아아아!]

    삐거덕 소리를 내며 뱀이 억지로 들린다. 하지만 뱀이 오히려 힘을 주며 팔을 더욱 세게 조였다. 팔이 꾸국거리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가복이 이를 갈았다.

    [감히! 지성 따위도 없는 괴물이! 나를!]

    쿠우웅!

    가복의 육체가 더더욱 거대해진다. 가까이서는 하나의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커지자 뱀의 육체가 뿌득거리며 찢어진다. 가복이 거칠게 중얼거렸다.

    [죽어라.]

    뱀을 부여잡고, 땅에 처박았다. 천지가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해일처럼 주위로 밀려났다.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뱀의 전신이 박살 났다.

    [캬아아아아!]

    [후…….]

    가복의 육체가 다시 줄어든다. 전신이 땀투성이였다. 물린 자국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건.]

    “일단 이동 좀 하자. 덕분에 어그로 다 끌렸네.”

    창연이 혀를 찼다. 주위에서 울음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 정도로 난리 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창연이 그들과 괴물의 시체를 붙잡았다. 그리고 허공을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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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 내부에서의 공간 이동은 되는 건가. 그거 불행 중 다행이네.”

    “……이거 회복이 안 되는군.”

    가복이 신음을 흘렸다. 팔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변질하고 있었다. 창연이 그 부분을 붙잡았다.

    “이쪽 놈들은 독도 가지고 있나.”

    “나는 어지간한 독성에는 면역이 있는데…… 이건 다르다. 팔에 점점 감각이 사라지는군.”

    “정화. 회복. 치유.”

    빛이 변질하는 팔을 감쌌다. 약간 기세가 줄긴 했지만 전부 사라지지는 않았다. 창연이 뱀의 시체를 들어 이빨을 살펴봤다.

    “이건 또 정통적이네.”

    하얀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현실의 뱀과 같은 독. 창연이 액체를 받아 혀로 핥아봤다.

    “……뭐 하는 거지?”

    “맛 좀 보고 있지. 이거면 되겠군.”

    창연이 다시 가복에게 다가갔다. 팔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분석. 치유. 회복. 복원.”

    키잉.

    묘한 파장이 팔을 감싼다. 상처 난 부분에서 독이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잠시 후 창연의 손에 하얀 액체가 들린다. 실실 웃던 남자가 눈을 동그라하게 떴다.

    “됐다.”

    “……뭘 한 거지?”

    “독 뺀 거지 뭐야. 한 하루 지나면 정상적으로 될 거야. 이건 좀 챙겨 놔야지.”

    창연이 독을 공간을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가복이 신기한 눈으로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검게 변질한 부분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독은 단순히 치유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전부 분석하고, 어떤 방식인지 알아내야 가능한 거 아닌가? 그런데 가능하다니.”

    “많이 당해 봤으니까. 그나저나…… 이런 놈이 널리고 널렸다는 거지.”

    가복도 제대로 싸워야 겨우 잡을 수 있고. 가지고 있는 독은 상당히 껄끄럽다. 팔에 물려서 다행이지 목에 물렸으면 몸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이 정도 놈들이라.’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창연이 입을 열었다.

    “가복, 여기서 탈출했다는 놈들 있어?”

    “……내가 아는 하엔 없다. 철저하게 봉인된 곳이다. 정령계와 비슷하게 일방통행이지.”

    “아예 가둬 버리려는 건가. 그 개자식이.”

    창연이 이를 갈았다. 그 목소리. 그건 예전에 봤던 검은 얼굴, 그놈과 똑같았다. 지배자들의 수장.

    역시 그놈이 수작질을 부리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날 죽이고 싶은 건가.’

    하지만 살짝 이해가 안 갔다. 그들의 원하는 건 원전. 그렇다면 창연을 죽여서는 안 되었다. 지배자 중 원전을 그리 원하지 않는 놈도 있었지만, 그놈은 원전을 원하고 있었다.

    ‘내가 죽어도 회수가 되나?’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가복이 손을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여기 있어 봤자 될 거 없으니, 이동하는 게 어떤가.”

    “그렇긴 해야지. 아참. 먹어 치워.”

    [캬우.]

    공간이 열리며 드래곤이 나타난다. 이 정도의 괴물이면 제법 강해질 거란 생각이었다. 드래곤이 주위를 둘러보고 멈칫했다.

    [……캬캬! 캬캬캬!]

    그리고 광소를 터트렸다. 눈에 소름 끼치는 빛이 서렸다. 창연이 움찔했다. 평소와 다른 반응.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뱀의 시체로 달려들었다.

    콰득. 콰드득.

    [캬아아!]

    “……뭐야?”

    마치 원수라도 된 듯이 물어뜯는다. 가복이 떨떠름히 중얼거린다.

    “뭐냐, 저건.”

    “나도 몰라. 어?”

    창연이 신음을 흘렸다. 육체가 변이한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엔 좀 더 이질적이었다. 색깔이 짙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라, 육체도 미세하게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캬아아아아.]

    시체를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드래곤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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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어어어!]

    검은색의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전신에 성한 곳 하나 없지만, 멀쩡히 살아 움직인다. 창연이 지긋지긋한 얼굴로 망치를 든다.

    “제발 좀 죽어라.”

    쩌어엉!

    망치를 내려찍자 파동이 퍼진다. 웅 하며 어둠이 밀리고 지렁이의 몸뚱이가 산산조각 난다. 그대로 망치를 잡고 후려친다.

    [크, 크어어어어!]

    지렁이가 하늘을 날 듯이 튕겨 나갔다.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비지만, 죽지는 않았다. 창연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몸 절반이 날아갔는데도 안 죽네.”

    [지겹군.]

    어느새 거대해진 가복이 발을 내려찍었다. 쿵 하며 지각이 변동해 사방을 휘몰아쳤다. 그렇게 몇 번을 더 후려갈기자 겨우 움직임이 멈췄다. 창연이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진짜 더럽게 튼튼하네.”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시간을 후두려 팼는데 죽지 않았다. 생명력 하나는 봐 온 괴물 중에 제일이었다.

    “이딴 놈투성이라, 왜 처박아 둔 것인지 알겠군.”

    [캬아아아!]

    “……저거 또 저러네.”

    드래곤이 괴성을 지르며 시체에 날아갔다. 아가리를 들이밀며 엄청난 속도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체가 변이했다.

    ‘……뭐가 뭔지.’

    일단 바깥의 괴물보다, 이 안에 있는 놈들을 먹을 때마다 상승 폭이 훨씬 크다. 몇 십 배가량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치 지금까지는 어울리지 않는 걸 먹다가 이제야 제 몸에 맞는 것들을 먹는 것 같았다.

    “저건 어쩌면 이 안의 생물일 수도 있겠군.”

    “이 안의 생물?”

    “그래. 말했지. 이 세계에서 이들은 서로를 집어삼키며 강해진다고. 지금 네가 가진 드래곤은, 딱 그 설명 그대로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 거 같긴 한데, 안에서 못 나온다며?”

    “모른다. 예외는 언제나 있을 수 있으니까.”

    “흐음.”

    창연이 턱을 괬다. 산과 같은 크기였던 지렁이가 이제는 머리밖에 남지 않았다. 저 조그마한 몸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놈을 던전에서 구했다라.’

    마이클이 구해 낸 것. 던전 자체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이젠 궁금했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저런 게 튀어나왔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네.’

    “근데 이렇게 걸어서 뭐 찾을 수 있는 게 있나.”

    “모른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좋지 않은가. 사방이 어둠투성이라 감지도 제대로 안 되고.”

    “거지 같네, 정말.”

    창연이 얼굴을 구기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무언가라도 찾기 위해 방향을 잡아 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괴물과 어둠뿐. 가물가물했다.

    “음? 저기 뭐가 보이는데.”

    “어라.”

    그러던 중 앞에서 하얀 무언가가 보였다. 창연이 다가갔다. 뭔가 부서진 파편 같은 물체. 가복이 만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뭔 재질이지. 감각이 요상한데.”

    “……이게 왜 여기 있어?”

    “뭔지 아나?”

    창연이 답하지 않았다. 그가 한가득 일그러진 얼굴로 파편을 들었다.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건, 그가 아주 잘 아는 힘의 종류였다.

    ‘원전.’

    원전이란 하나의 물체로 만들어진 것. 창연이 갇혔던 던전에서 봤고, 유용하게 써먹었던 것.

    아니, 사실상 현재의 그를 존재하게 만든 것.

    이것은 그것의 파편이었다.

    [카아아아!]

    [크어어어!]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지평선 근처에서 거대한 그것들이 서로 아가리를 들이밀며 힘을 발한다. 파장이 퍼지며 멀리서 지켜보는 가복에게까지 다가온다.

    “정말 지겹게도 싸우는군.”

    가복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들어온 지 이틀째. 그동안 괴물들의 싸움이 멈췄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전쟁의 세계,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키에에에!]

    순간 그의 근처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가복이 몸을 돌려 주먹을 후려쳤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밀려났다. 캬륵 소리가 퍼졌다.

    [캬르르르]

    “벌레 주제에.”

    잠자리 형태의 괴물. 물론 크기는 어지간한 인간보다 더 거대했다. 가복이 언짢은 얼굴로 대지를 밟고, 질주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잠자리가 기겁해 몸을 빼려 했지만 가복이 날개를 부여잡고 땅에 내려찍었다.

    [캬아악!]

    콰드득.

    그대로 머리를 붙잡고 힘을 준다. 뿌득 소리와 함께 머리가 박살 났다.

    “지겹군.”

    가복이 중얼거렸다. 요 이틀간 습격받은 횟수는 삼십 번이 넘었다. 처음 만났던 놈처럼 강한 놈은 없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거슬리는 건 매한가지.

    “이놈은 언제 나오는 거야?”

    가복이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하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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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오.”

    동굴 안에서 창연이 감탄사를 흘렸다. 검은색의, 아주 조막만 한 파편. 이것의 본래 크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티끌만 한 크기. 하지만 그럼에도 담긴 힘은 경시할 수 없었다. 능히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이곳에 있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창연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파편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왜 여기 있지?”

    그는 원전을 봤었다. 근처에서 한 몇 년 정도 생활했었기까지 했다. 적어도 현시점에서, 그보다 원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봤던 원전은, 완벽했다. 부서진 것 하나 없었으며 온전한 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이건 분명 일부의 파편. 이런 게 있을 리가 없고, 만약 그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해도, 왜 이 세계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흐으음.”

    창연이 신음을 흘리며 파편을 쥐었다. 동시에 파문이 일었다. 대지와 허공을 타고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쿠웅!

    그리고 굉음이 일었다. 쩌적 하며 바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의 공간이 왜곡됐다. 세상이 개변하였다.

    “……미친!”

    가복이 비명을 지르며 동굴 안에 달려왔다. 그가 창연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뭐 한 거냐! 갑자기 세상이!”

    “테스트. 힘은 불안하지만, 되긴 되네.”

    창연이 태연히 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됐네.”

    세상이 뒤바뀐 상태였다. 지금까지 몇 번 바꾼 적이 있지만, 지금의 건 질이 달랐다. 땅이 포장이라도 한 듯 지평선 근처까지 넓게 펴진 상태고, 공기가 변해 호흡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뒤바뀐 땅 끝 부분에는 거대한 힘이 뭉쳐 외부의 침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가복이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의 상식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창연이나 지배자들은 세계를 자기 입맛대로 주물럭거렸기에 이것도 그것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면 특이할 건 없었다.

    “자꾸 호들갑 떨지 마, 이런 거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건 말도 안 돼.”

    가복이 거칠게 내뱉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들이 만진 것은 제 세계이기에 가능한 일. 그러나 이 세계에서 창연은 외부인이었다. 그 뜻은.

    “……이방자 주제에, 세계의 법칙을 건드릴 수 있다고?”

    가복이 아연하게 창연의 손에 들린 파편을 바라봤다. 저것이 원전이 가진 힘.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침략자들이 원전을 잃어버린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겠구나.”

    만약 그들이 온전한 형태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지구 따위는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였다. 제약? 유지력? 그런 건 상관없다. 그냥 원전을 이용해 그 룰 자체를 뒤틀어 버리면 끝나니.

    “그건 나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

    창연이 눈을 감고 원전을 쥐었다. 다시 파장이 퍼져 세계를 향해 달려갔다. 그를 자극하는 감각들에 창연이 눈을 떴다.

    “……계획을 바꿔야겠군.”

    그가 입가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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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체류해야겠어, 가복.”

    “……뭐라고?”

    가복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질색한 표정으로 괴물의 시체를 들었다.

    “계속 이딴 걸 먹으라고?”

    “아직 찾을 게 있거든. 게다가 아직 탈출 방법도 없잖아. 이 세계에는 아직도 있어야 해.”

    “그 파편으로 탈출할 수 있지 않나?”

    “힘들어. 원래라면 가능한데, 이건 너무 쥐꼬리만 해서.”

    창연이 파편을 흔들었다. 벌써 가진 힘의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 편의를 위해 세상을 개변시켰지만 소모되는 힘이 너무 컸다. 앞으로 한두 번 더 쓰면 평범한 파편으로 변할 거였다. 충전이 가능하겠지만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대충 감지 펼쳐 보니까 이런 게 몇 개 더 있는 거 같더라.”

    “……미치겠군. 이런 게 더 있다니.”

    “아무튼 그래서 세상을 바꾼 거야. 이왕 지내는 거, 좀 더 편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군…….”

    “그냥 살아. 다른 방법 없으니. 그러면…….”

    창연이 괴물의 시체를 살펴봤다. 일단 겉모습은 크기와 색깔 빼고 비슷했다. 창연이 작은 단도를 꺼내 속을 갈라 봤다. 검은 피가 튀며, 검은 속살이 드러났다.

    “이거 어떠려나.”

    “……돌겠군.”

    창연이 웃으며 시체를 바라봤다. 몇 달 정도는 안 먹고 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가능은 해도 몸에 부담이 온다 해야 하나. 컨디션이 떨어졌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건 이것뿐. 물론 창연의 다른 아공간에 괴물이 종류별로 있긴 하지만, 그건 컬렉션이었다. 먹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걸 찾는 게 더 재밌고.’

    그래서 가복에게 컬렉션에 대해선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하면 분명 그걸 먹자고 할 게 분명했으니.

    창연이 잠자리의 시체를 양손으로 잡고 잡아당겼다. 반 토막이 나며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창연이 무어라 말해 아래에 작은 용기를 만들었다. 그 안으로 피가 흘러들어 갔다.

    “그러면.”

    창연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몸을 토막 냈다. 입에 들어가기 쉬운 크기로 잘리며 그걸 한군데에 모았다. 가복이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이전부터 느낀 거지만…… 넌 참 능숙하구나. 경험이 담겨 있어.”

    “너도 촉수를 씹어 먹지 않았나?”

    “그건 그냥 내 감정에 취한 것이지, 그걸 즐기지는 않는다. 근데 넌 즐기고 있군…….”

    “재밌으니까. 흠.”

    창연의 손에 불길이 타오른다. 그 위로 잘린 고기를 올렸다. 타닥이며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건 뭐.”

    콰아아아아아!

    창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하늘 높이 치솟아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불의 기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에이 씨. 냉각.”

    창연이 혀를 차며 불을 끄고, 얼음을 일으켰다. 쩌억 하며 고기가 순식간에 식으며 불의 기둥이 사라진다.

    “불로 굽는 건 아닌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군.”

    어차피 아직 시간은 많다. 천천히 찾으면 될 거였다.

    “그럼 이제 찾아야지.”

    원전의 파편들. 그건 제법 멀리 있었다. 가까운 건 가깝지만 그래도 상당한 거리를 가야 했다.

    “가복 넌 여기 정보를 찾고 있어라. 난 원전을 찾을 테니.”

    “알았다. 아, 그리고 이놈은 내가 데리고 있지.”

    [캬아. 캬아.]

    가복이 품에서 드래곤을 꺼냈다. 드래곤이 울음을 흘리며 창연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단단하게 쥔 손이 놓치지 않았다. 창연이 실소를 흘렸다.

    “왜?”

    “이거 분석 좀 해야겠어.”

    가복이 담담히 말했다. 그가 이질적인 걸 보는 눈으로 드래곤을 내려 봤다.

    “이곳 세계의 놈 같지만, 바깥에 있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던전 내부에. 여러모로 궁금하단 말이야. 어쩌면 새로운 방식을 제공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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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웅.

    공간이 열린다. 창연이 손을 쑤셔 몸을 구겨 넣는다. 퐁 하는 울림과 함께 바깥으로 이동한다.

    [카아아아!]

    그리고 동시에, 괴물이 달려든다. 창연이 실소를 흘리며 대지를 밟는다. 중력이 괴물을 짓눌러 터트려 버린다.

    “빈대떡이 되었네.”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자마자 달려오다니. 밀려 나간 괴물의 수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창연이 몸을 가리며 허공을 도약했다. 공중을 밟고 몸을 날렸다. 손에 쥔 원전이 다시금 파장을 발했다.

    “가장 가까운 위치는…….”

    은근히 멀었다. 전력으로 달려도 하루 내리 걸릴 정도.

    “역시 더럽게 크구나.”

    창연이 중얼거렸다. 용왕의 세계보다도, 촉수의 세계보다도 컸다. 파편이 없었다면 그 끝까지 감지할 수 없었을 거다.

    [크어어어!]

    그가 허공을 박차는 순간 아래의 대지가 박살 났다. 흙의 해일이 퍼지며, 기다란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창연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창연이 혀를 차며 공간을 열었다.

    “이곳에서 풀리리니. 제가 가진 것을 토해 내었다.”

    콰드득.

    공간이 열리며 망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연이 부여잡고 괴물을 향해 후려갈겼다. 웅 하는 굉음과 함께 중력이 변이하였다.

    콰아아앙!

    대지가 무너진다. 지진이라도 난 듯 조각조각 분리되며 형태를 잃는다. 괴물은 머리가 통째로 터져 나가 바닥에 쓰러진다. 창연이 찝찝하게 땅에 착지한다.

    “너무 세네, 진짜.”

    대충 힘을 보아하니, 안 쓰면 오래 걸릴 것 같아 썼지만 너무 과했다. 일격에 대지가 전부 박살 났으니. 창연이 한숨을 쉬며 괴물의 시체에 다가가 살펴봤다.

    “이 정도면 되려나.”

    창연이 파편을 들었다. 괴물의 시체에 붙이고 입을 열었다.

    “본질을 흡수하는 힘이 강림했다.”

    콰득.

    시체가 구겨진다. 묘한 기류가 빠져나오며 파편을 향해 흡수되기 시작한다.

    쩌엉!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체가 다시 한번 쪼그라든다. 원래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은 크기로 변해 간다. 그리고 파편이 변이한다.

    꾸국.

    파편이 묘한 소리를 내며 비틀린다. 아주 미세하게, 눈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지만 분명히 커져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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