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7/192)
  • [크아아아!]

    비명과 함께 쓸려 나간다. 그가 이를 악물며 몸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를 중심으로 여백이 생기고, 데리안이 주먹을 휘둘렀다. 해일에 구멍이 생겨나며 하나의 길이 나타난다.

    [……넌.]

    그의 주위로 무기들이 날아온다. 하나씩 엉키고 엉켜 거대한 형상을 이룬다. 데리안이 그걸 창연을 향해 휘둘렀다. 창연이 망치를 부여잡고,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아앙!

    무기의 집합과 망치가 충돌하며 집합이 깨져 나간다. 하나하나 재로 변해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 데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하하!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창연이 망치를 내려찍었다. 데리안이 팔을 교차해 막으려 들었지만 충돌하자마자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간다. 저편 끄트머리에 처박히며 피를 토해 냈다. 그가 클클거렸다.

    [크큭…… 그래. 내가 실수를 했군. 온전한 인간이 아니구나. 무언가 섞여 있어.]

    “작별이다.”

    창연이 질주해 망치를 휘둘렀다. 대지가 일그러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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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즐거웠다. 내 삶에 있어 최고의 순간이었어.]

    데리안이 웃었다. 팔과 다리는 곤죽이 되어 사라지고, 뱃가죽도 뜯겨져 내장이 흘러나왔다. 머리도 피가 철철 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만족스러웠다.

    [하하. 오늘 아주 즐거웠어. 설마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개안을 한 기분이다. 이러고 죽는다는 건 좀 아쉽지만, 그것도 순리겠지.]

    “그러냐.”

    창연이 덤덤히 말했다. 이런 지배자도 있을 줄이야. 그가 지금까지 본 놈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한 듯 데리안이 말했다.

    [지배자란 것들은 개성이 강한 놈들이 많다. 내 타입도 수두룩하지. 어떤 것에 미쳤기에, 그런 오랜 삶을 살 수 있는 거다.]

    “내가 본 놈들은 너 빼고 죄다 엇비슷하던데.”

    [그야 그런 놈들만 문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오니까. 그게 아닌 놈들은 그냥 차근차근 내려오지. 그러면 이제, 합당한 보상을 줘야겠군.]

    데리안이 손을 들었다. 기류가 엉키며 회색 구체가 뭉쳐졌다.

    [받아라, 승리자여. 너의 것이다.]

    구체가 날아와 창연의 몸에 파고들었다. 들어온 부분을 중심으로 몸을 향해 묘한 감각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

    창연이 신음을 흘렸다. 기억과 본능, 경험들이 그의 뇌를 후려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데리안이 즐거운 듯 중얼거렸다.

    [어떤가. 느낌이 아주 끝내주지 않나? 다른 놈에게도 경험시키고 싶었는데 아주 잘되었어.]

    “……거지 같군.”

    그가 아닌 다른 존재가 파고드는 듯한 느낌. 불쾌했다. 데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나도 그거 때문에 초반엔 질색했으니까. 하지만 슬슬 느껴질 거다. 어떤 감각인지.]

    “그건 그러네.”

    창연이 주먹을 쥐었다. 경험이, 본능이, 반사 신경이, 그 모든 게 몸에 새겨진다. 경험해 본 적 없는 것들이 숙달된다.

    ‘이거 확실히 대단하군…….’

    실질적인 전력의 상승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주 기술이 신화의 서고, 지금 얻은 능력은 대부분이 신체의 활용에 대한 것이기 때문.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가치가 있었다. 단순히 육체로만 쓰자면, 방금까지의 그가 셋이 같이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직접 이루지 못한 게 껄끄럽다면 껄끄럽지만 어쩔 순 없었다. 그가 경험할 수 없는 경험들도 쌓였으니 이해할 수밖에.

    [그러면 이제 날 죽음의 저편에 보내 줬으면 하는군.]

    “아니. 그 전에 좀 물어보지. 넌 다른 지배자들에 대해서 아나?”

    [음? 글쎄. 내가 그놈들과 그리 친한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쪽에서 날 피했지. 그래서 잘 모른다.]

    “흠…… 그러면 하나만 묻지.”

    창연이 망치를 들었다.

    “이쪽에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놈의 정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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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수작? 무엇을 말하는 거지.]

    “인간들을 세뇌해서 너희 세계를 불러오려는 놈.”

    [……그런 놈이 있다고? 그거 이상한데.]

    데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해.”

    [우리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거고. 개미처럼 본다고 하면 되지. 그런데 세뇌라니.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지배자가 있을 리가. 게다가 가능하냐의 문제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세뇌란 건 결국 지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것도 특정 인간을 골라서 세뇌한다면 더더욱. 즉 너희 세상에 내려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알기엔 그런 지배자는 없다.]

    “……지배자가 아닐 수도 있다면.”

    [음? 그건 가능하겠군. 하지만 지배자가 아닌 존재가 그런 힘을 발휘할 리는 없다.]

    창연이 눈을 감았다. 거슬리는 존재는 있었다. 그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희 수장이라 불리는 놈은?”

    [……그분을 네가 어찌 알지?]

    데리안이 이채를 띠었다.

    ‘대답이나 해 봐.“

    [가능하실 거다. 하지만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을 터. 과한 생각이다.]

    “그건 어떨지 모르지.”

    옛날에, 그를 제가 만든 임시의 세계로 초대했던 놈. 암흑으로 이루어진 검은 얼굴.

    편린이라 할 정도의, 극히 일부만을 목격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상당했다. 바르나로크도, 근본 없이 꿈틀거리는 촉수도, 눈앞의 데리안보다도, 훨씬 강력한 존재. 본체는 얼마나 강할지 잘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

    그런 존재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식의 수작을 부리는 괴물. 지배자가 무리라면, 그놈 말고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데리안이 말했다.

    [뭐, 정 궁금하면 라플라스라도 만나러 가지 그러나.]

    “라플라스?”

    [전지의 지배자다. 제 힘과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 세상의 모든 걸 주시하는 놈이지. 아마 그놈이라면 알 거다.]

    “그놈은 어디 있는데.”

    [그건 네가 찾아야지. 너무 날로 먹으려 하는군.]

    “쯧.”

    창연이 혀를 찼다. 고생을 꽤나 해야 할 거 같았다.

    5장. 버려진 세계.

    [그럼 나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었으면 좋겠군. 버틸만 하지만 아프긴 하구나.]

    “알았어. 나와.”

    창연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공간의 틈바구니로 조그마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리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드래곤? 아니지. 너무 작은데. 무슨 생물이지?]

    “지배자도 모르나.”

    [캬아. 캬아.]

    손바닥만 한 검은색 드래곤이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데리안이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

    [이거 또 흥미로운. 바르나로크와는 별개의 개념 같구나. 나도 잘 모르겠군. 아무튼, 그걸 왜 소환한 거지? 마지막으로 구경이라도 해 주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 용용아.”

    [캬아.]

    창연이 무심히 말했다.

    “먹어 치워.”

    [캬아.]

    드래곤이 펄쩍 뛰어 데리안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며, 그대로 데리안의 몸을 물어뜯었다.

    콰득. 콰득.

    [허. 참.]

    데리안이 멍하니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이거 또 신박한 마무리구나.]

    “네가 죽으면 던전이 사라지니까. 미안.”

    [뭐 상관없다. 이 정도야 기다려 줄 수 있지. 아, 그리고 넌 온전한 인간이 아니구나.]

    “뭐라고?”

    [반절은 인간인 내가 하는 말이니 정확할 것이다. 기반은 인간이긴 하지만…… 무언가 섞여 있어.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섞여 있다고?”

    [그래. 나도 그 이후는 잘 모르겠군. 라플라스에게라도 가지 그러나. 그놈은 알 터이니]

    “흠.”

    드래곤이 천천히 데리안의 육체를 먹어 치웠다. 어느새 상반신의 절반을 제 입에 집어넣었다. 꾸국거리며 신체가 변이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네.’

    창연이 손을 들었다.

    “잘 가.”

    손이 사선을 그렸다. 데리안의 몸에 균열이 생겨나갔다. 데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너희 인간의 신화처럼 발할라도 있으면 좋겠구나…….]

    미소 띤 얼굴이 무너진다. 데리안의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창연이 묘한 눈으로 그 시체를 바라봤다.

    ‘특이한 놈이야.’

    지배자 중에 이런 놈도 있다니. 여러모로 인식이 바뀌는 기분이었다.

    쩌저적.

    던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창연이 문을 열어 지구로 이동했다. 전사 형태의 던전, 그것이 천천히 스러지고 있었다.

    ‘이걸로 다섯.’

    그가 죽인 지배자의 숫자. 창연이 알기로 지배자의 숫자는 열댓. 이제 절반 가까이 온 거였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창연이 사라지는 던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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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캬아. 캬아.]

    창연이 드래곤을 바라봤다. 괴물을 먹어 치우면 먹어 치울수록 강해지는 괴물. 상대가 강하면 더 많이 강해진다.

    상승폭이 제법 적었지만, 이번에 먹어 치운 존재는 지배자. 모든 괴물의 정점에 달한 존재.

    그런 걸 먹고 약할 리가 없었다. 약하면 창연 입장에선 분통이 터졌다. 지배자의 시체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데 그걸 버리고 먹인 거니.

    창연이 던전에 들어갔다. 3종 던전. 도시의 중심부에 있어 껄끄러운 던전이었다. 처리를 요청하기에 냉큼 받아서 들어왔다. 이유는 두 가지. 드래곤의 확인과, 그가 얻은 무기의 테스트.

    “무난하네.”

    정글 형태의 던전. 대충 보아하니 뱀과 독충들이 있는 던전 같았다. 그리 특이한 던전은 아니었다. 창연이 손을 들었다.

    “이곳에서 풀리리니. 제가 가진 것을 토해 내었다.”

    콰득.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창연이 그 안에 손을 집어넣고 꺼내 들었다. 거대한 거무튀튀한 색의 망치가 들려 나왔다.

    “진짜 괜찮긴 한데…….”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가 그가 준 재료를 이용해, 만든 장비. 그렇다고 마냥 좋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단점도 분명 있었다. 창연이 가볍게 망치를 흔들었다. 그러자 폭풍이 일었다.

    콰아아아앙!

    광풍이 폭발해 던전 내부를 휩쓴다. 수풀과 넝쿨들이 휘말리며 허공을 난다. 순식간에 넓은 방향으로 거대한 터널이 생겨난다. 던전의 끝에 닿아 공간이 출렁여 하늘에 파문이 일었다.

    “……너무 세.”

    창연이 찝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어가 안 되었다. 가볍게 움직인 것만으로 세계가 일그러질 힘이 담겨 있었다. 과유불급이라 해야 하나. 강하지만 사용이 힘들었다.

    “이전에도 이 정도 수준은 없었는데. 흠.”

    이러면 지배자들을 상대로 쓰기도 제약이 있었다. 세계 자체가 뒤흔들리니 지구에서 못 쓰는 건 당연하고, 지배자의 특성이 어떠냐에 따라 역으로 당할 수 있었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지만.’

    반대로 말하면, 특성에 따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거였다.

    망치에 담긴 힘은 창연도 놀랄 정도의 힘. 데리안은 육체만을 믿고 그것만을 다뤘기에 더 수월하게 잡은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하다는 게 사라지진 않는다. 좋으면 좋지 나쁘지는 않았다.

    “용용아.”

    [캬아아아.]

    드래곤이 날갯짓했다. 크기는 처음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피부색도, 광택도 마찬가지. 하지만 담긴 힘은 변했다.

    ‘게다가 이질적인 부분도 포함되었어.’

    어떤 방식인지 궁금했다. 창연이 허공을 붙잡아 괴물을 붙잡았다. 거대한 이구아나가 창연의 손에 들렸다. 그걸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조져.”

    우웅.

    파동이 퍼지며 드래곤의 눈이 변했다. 드래곤이 고함을 질렀다. 울음소리가 퍼지며 이구아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드래곤이 흡족하게 웃으며 그 위로 올라탔다.

    [캬아. 캬아. 캬아.]

    “……뭐?”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던전 내의 괴물이, 드래곤이 올라탔는데도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게 자세를 고정했다.

    명백했다. 던전 내부에 귀속된 괴물이, 드래곤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캬아.]

    드래곤이 울음을 흘렸다. 이구아나가 움찔하더니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창연의 앞에 다가왔다.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며 창연의 어깨에 올라탔다.

    “흐음.”

    창연이 이구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구아나는 저항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창연이 중얼거렸다.

    “분석.”

    키잉.

    이구아나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들이 파악된다. 창연이 가만히 분석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거 신기한데.’

    던전 내의 괴물들은 던전 주인의 부하. 단말로 귀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창연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세뇌시키기 힘들었다. 단말을 부숴 억지로 지배하에 둘 수는 있지만 불안하고, 던전의 주인이 오면 쉽게 깨져 나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이구아나는 완벽하게 복종된 상태였다. 귀속의 방향 자체가 드래곤으로 변하였다. 이제 이구아나는 제 옛 주인도, 명령만 내려지면 거리낌 없이 물어뜯을 거였다.

    ‘……괴물은 괴물이란 건가.’

    지금 당장은 그리 큰 가치가 없겠지만, 점차 강해질수록 가치가 올라갈 게 분명했다. 잘하면 4종 던전, 어쩌면 지배자의 던전에서조차, 불필요한 싸움을 피할 수 있을 터이니.

    “그럼 이건 됐고.”

    창연이 손을 뗐다. 일단 드래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았다. 그렇다면 무력의 강화. 창연이 드래곤을 붙잡고 공간을 도약했다. 눈앞에 거대한 거미가 보였다.

    [키륵?]

    거미가 당황한 울음을 냈다. 창연이 드래곤을 내던지며 파동을 발했다. 용의 눈빛이 변하며 거미를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캬아! 캬아!]

    [키르륵!]

    집채만 한 거미와 손바닥만 한 드래곤이 싸우기 시작했다. 창연히 지켜봤다. 드래곤이 발톱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의 칼날이 거미를 후려쳤다. 거미가 다리를 움직이며 사방을 거칠게 휩쓸었다.

    ‘조그만 놈이 잘도 싸우네.’

    약간 드래곤이 밀리는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비등비등한 거 같았다. 지배자를 먹였는데 3종 보스와 비등비등하다라. 연비가 매우 나빴다.

    [캬아아아!]

    드래곤이 몸을 뺐다가 돌진한다. 몸을 빙그르 돌리며 가속해 거미의 몸통과 충돌한다. 충격음과 함께 거미의 가슴팍에서 녹색 피가 터진다.

    [키르르륵!]

    거미가 다리를 휘저으며 드래곤을 붙잡으려 했지만 요리조리 피하며 발톱을 휘둘렀다. 거미의 전신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키르르…….]

    그렇게 두 시간가량 싸우자 거미가 쓰러졌다. 드래곤이 아가리를 들이밀어 거미의 시체를 물어뜯었다. 몸이 꾸국거리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겠네.’

    지배자 여럿은 먹여야 쓸 만할 것 같았다. 창연이 애매한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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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반갑군, 창연.”

    파사나카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흥미로운 눈으로 창연을 바라봤다.

    “소식은 들었다. 정령계에 갔다 왔다고? 어땠나? 거긴 우리도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라 미지의 영역인데 말이야.”

    “그리 특이한 건 없었어. 네 동족이 하나 있었던 거 말곤.”

    “아, 악마 말인가.”

    파사나카스가 콧잔등을 긁었다.

    “원체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놈이라…… 정령계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일 줄이야. 끈덕진 놈이군. 아무튼, 축하한다, 창연. 이걸로 다섯 명이겠구나.”

    파사나카스가 웃었다.

    “지배자가 한 종족의 손에, 그것도 객체 하나에 이리 많이 죽은 처음이야. 재미있군. 게다가 데리안이라! 그 미친놈을 잡다니. 이거 참.”

    “너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놈이냐?”

    “그렇지. 전투에 미친 지배자. 제 부하도 하나 없이 오로지 무기들만을 가진 존재. 게다가 인간 태생이니, 여러모로 이질적이지.”

    “인간이라.”

    데리안이 말했었다. 자신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그리 긴 수명을 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창연이 물었다.

    “그놈은 어떤 놈이야?”

    “우리의 세계에도 인간은 있었다. 다만 항쟁을 견디지 못하고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 우리가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군. 그들도 살아가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지. 하지만 데리안은 달랐다.”

    데리안은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싸우고 싶었다. 목숨을 걸고 누구를 쓰러트리며 강해지고 싶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마을을 나서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처음엔 약했다. 인간답게 약한 괴물들과도 생사를 겨뤘지. 하지만 점차 강해지고, 고대의 힘을 얻으며 강해졌다. 게다가 원전의 힘을 일부 받아 수명을 늘렸고,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섰지. 대단한 놈이다. 그런 만큼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흐음.”

    수명은 원전 덕분인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강해진다라. 확실히 창연과 비슷했다.

    “너네 이제 몇 명 남았냐?”

    “그리 많진 않다. 이제 여덟. 그쯤 남았겠지. 그들만 다 죽이면 네 승리다. 축하한다.”

    “그거 고맙군.”

    “그나저나 나를 왜 부른 거지? 용건을 말했으면 좋겠군.”

    파사나카스가 물었다. 창연이 가복을 통해 그를 불렀다. 이런 잡담을 하기 위해 부른 건 아닐 거였다.

    “별건 아니고. 너.”

    창연이 이를 갈았다. 감정의 변화에 공기가 사납게 변하여 그들을 둘러쌌다.

    “지금 지구에 개수작 부리는 놈, 아냐?”

    “개수작이라면, 숭배에 관련된 건가?”

    파사나카스가 태연하게 공기를 흘리며 말했다.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배자인 너에게 물어보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상관없다. 다른 지배자들이 죽든 말든, 나만 생존해 있으면 되니까. 답을 하자면 나도 모른다. 지배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을 표하고 있지. 이상하니까.”

    파사나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것은 그들도 이상하게 느끼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지배자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있다면 이탈자나 창연, 이런 소수뿐. 대다수에겐 개미를 보는 심정이지. 일일이 세뇌하는 복잡한 짓은 하지 않는다. 강림하지 않으면 무리기도 하고.”

    “……너희 수장이란 놈은.”

    “음? 창연, 네가 그분을 어떻게 알지?”

    “나한테 왔었으니까.”

    창연이 대충 설명했다. 파사나카스가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거 참. 우리도 모르게 움직이셨을 줄이야.”

    “아무튼 말해 봐.”

    “수장이다. 그 외에는 나도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세상에 존재하고 계셨으니. 종족도, 힘의 종류도, 그 본체도. 전부 모른다.”

    “……그런데 수장이라고?”

    “왜냐하면 강하니까.”

    파사나카스가 즉답했다.

    “지배자란 것들은 전부 개성이 강하지. 그런 이들을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힘이 있어야 한다. 전부가 달려들어도 제압할 정도의 힘을. 그분께선 그 힘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의 수장이 되신 거다. 질문에 답하자면…… 가능성은 있다.”

    파사나카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도 제대로 모르니. 한다 하면 할 수야 있겠지. 네 말을 들어 보면 굳이 강림하지 않더라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거 같고. 마음에 들지 않군. 명색이 수장이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럼 그놈은 어떻게 족치는데?”

    “모른다. 간간이 화합할 때만 오시고 평소에 어디에 계시는지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

    “흠.”

    껄끄러웠다. 분명 그놈들은 창연을 노리고 있었다. 겨우 지점 한두 개 족치는 거로는 피해를 주기도 힘들었다. 파사나카스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라플라스라도 찾지그래. 그놈을 알 테니.”

    “……그거 데리안도 말했는데, 그놈은 뭐야?”

    “만물을 아는 지배자. 누구보다 위에 있는 존재.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괴물.”

    파사나카스가 말했다.

    “힘을 바친 대신 정보를 얻은 지배자다. 우리들도 그놈은 건드리지 않고 있지. 아마 지상에 내려와 있긴 했을 거다. 위치는 나도 모르고.”

    “찾아야 하는 건가.”

    “그래야겠지. 일단 마음에 들면 이것저것 전부 알려 주는 놈이니 마음에 들 고민이나 해라. 협박도 안 먹히는 놈이니까.”

    “알았어.”

    “그럼 용건은 끝인가. 관심 없었는데, 나도 찾아보긴 해야겠군. 누가 그런 짓을 하는 건지.”

    파사나카스가 구겨진 얼굴로 일어났다. 그가 나갔다. 창연이 애매한 얼굴로 책상을 바라봤다.

    ‘어째 풀린 게 없군.’

    지배자들은 잡아내고 있지만, 가장 거슬리는 수장이 문제였다. 그걸 조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거 같았다.

    ‘……찾아야겠어.’

    창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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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았다.]

    “뭘.”

    이자벨라의 뜬금없는 말에 창연이 답했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말했다.

    [괴물들에게 협력하는 개자식들의 다른 지부. 몇 군데 위치를 더 알아냈다. 이탈자들이 좀 알고 있더군.]

    “호오, 어딘데.”

    창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자벨라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에 셋. 그리고…… 한국에 하나.]

    “우리나라에?”

    [그래. 사람 없는 해안가 쪽에 위장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거 참. 바로 근처에 있었네. 좌표 좀 찍어 봐. 가게.”

    [근데 뭔가 껄끄럽다, 창연.]

    “뭐가.”

    [마치 일부러 알려 준 거 같았다.]

    “일부러?”

    [그래.]

    이자베라가 애매한 듯이 말했다.

    [앞의 두 개는 이탈자들이 미리 알고 있던 것. 하지만 후자는 최근에 얻은 정보라더군. 그것도 정체 모를 누군가 찾아와서 건네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이면.]

    “날 노린 거다?”

    [……가능성은 높지.]

    “껄끄럽긴 하네. 근데 상관없어.”

    가만히 있는 게 더 불안했다. 놈들은 점점 발달하고 있었다. 2년 전이랑 지금이랑의 차이를 생각하면, 시간은 최대한 안 주는 게 좋았다.

    게다가 그가 가만히 있다고 놈들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그냥 깔끔하게 움직이는 게 편했다.

    “아무튼 고마워.”

    [……그래.]

    창연이 통화를 껐다. 얼마 안 있어 그에게 좌표 문자가 왔다. 그리 멀지는 않았다. 창연이 이동하려는 순간이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가복이 물었다.

    “지배자들과 협력한다는 그놈들 찾으러 가나?”

    “그래.”

    “흠. 나도 갈 수 있나? 창연.”

    “넌 왜?”

    “확인할 게 있어서.”

    가복이 덤덤히 말했다.

    “그들의 방식은 아무래도 신기하단 말이야. 과학과 세계를 결합하다니. 건질 게 있을 거 같다.”

    “뭐, 상관없어. 손잡아.”

    가복과 손을 잡고, 공간을 도약했다. 모래사장이 보였다. 창연이 모래를 짓밟았다.

    “탐색.”

    우웅.

    파장이 퍼지며 모래사장을 휩쓸었다.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창연이 그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광풍.”

    콰아아앙!

    바람이 휘몰아친다. 모래가 흩날리며 바다가 거칠게 밀려난다. 그 사이로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건가. 화려하기도 하군.”

    “최신식이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건물이었다. 이제부터 무너질 거지만. 창연이 손을 모았다.

    “붕괴.”

    쩌적.

    건물이 파르르 떨린다. 기반부터 흔들리며 금이 간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바닥부터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함정이 있을 거 같으면 그냥 멀리서 부숴 버리면 됐다. 가복이 찝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것저것 준비했을 텐데 불쌍하기도 하군.”

    “그것도 그러네.”

    창연이 건물을 향해 공간을 도약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파편에 깔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 이런 미친…….”

    “안녕.”

    “……이 미친 이탈자! 다짜고짜 무너트리다니!”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널 어떻게 할까…….”

    이전의 경험을 보아 이놈도 가진 정보는 거의 없을 거다.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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