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6/192)
  • “결투?”

    “그래.”

    데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연을 바라봤다.

    “너는, 내 세계에서 무엇을 봤지?”

    “……황폐화된 전장.”

    “그래. 평범한 존재들, 제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은 그걸 보지 못한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갈색의 세계만을 볼 수 있지. 전장을 본다는 건, 그 존재가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가치?”

    “가치.”

    데리안이 웃었다. 공기가 밀리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떨었다.

    “내가 싸울 만한 가치.”

    “뭔 미친 소리를.”

    창연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지배자 종류가 많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놈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데리안이 그런 창연의 반응에 상관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존재를 중요시한다. 제 목숨을 걸고 투쟁을 넘어왔으며, 전장의 한가운데서 살아온 존재들. 충분히 존경받고, 경의 받을 자격이 있지. 그리고 난, 그런 이들과 싸우며 내 가치를 증명한다.”

    데리안이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그 가벼운 행동에 책상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영역의 확장?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종족의 보존도, 수명의 연장도 마찬가지. 위대한 자와 결투를 벌이는 것만으로도 내 삶과 경험이 충족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선, 너다. 창연.”

    데리안이 웃었다.

    “나와 싸워라, 창연. 네 가치를 증명해 봐라.”

    “내가 왜?”

    창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데리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너는 전장에 미친 미치광이다. 거절할 이유는 없을 거 같은데.”

    “……누구 마음대로.”

    “그야 간단하지. 네가 가진 힘이면 분명 이 세상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우리를 공격한다는 건, 네가 그따위 것들보다 우리와의 전장에 더 흥미가 있겠다는 소리지.”

    “…….”

    창연이 침묵했다. 데리안이 웃음을 흘렸다.

    “뭐, 본인도 알고 있나 보군. 사실 네 의견은 그리 큰 상관이 없다.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난 내 세계를 움직여 널 마중하러 갈 거다. 어차피 이 조그마한 세계에선 도망갈 곳도 없을 것. 게다가 네게도 이득이 있다.”

    “이득?”

    “그래. 우리가 내려 보내는 세계를 클리어하면, 너희에게 유용한 걸 주지. 하지만 너 정도 수준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는 것들이겠지. 우리 지배자들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 그래서 난 네게, 내 모든 걸 주겠다.”

    데리안이 웃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묘한 흰색 구체가 엉켜 있었다.

    “내가 쓰러트린 전사들, 무찌른 괴물들, 나의 경험이 이 안에 축적되었지. 나를 쓰러트리면, 그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된다. 거절할 이유는 없을 텐데.”

    “…….”

    창연이 묘한 눈으로 데리안을 바라봤다. 데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그런 짓을 안 해도 될 텐데, 왜 이러는 거지? 너희에게 생존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었나? 굳이 나랑 싸울 이유는 없을 텐데. 원전을 원하는 거 같지도 않고.”

    “말했지. 난 다르다고.”

    데리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연을 노려봤다.

    “내가 다른 이들과 같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건, 더욱더 강한 전사를 찾고, 모든 걸 걸고 그와 겨루는 것, 오직 그거 하나뿐이다. 생존? 목숨만을 부지한 삶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벌레와도 같은 삶일 뿐.”

    데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방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럼 곧 보도록 하지, 창연. 기대하고 있겠다. 아,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만 더 하지.”

    데리안이 창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관심이 있는 건 너 스스로 육체와 네가 만든 무기뿐. 원전 따위는 허용할 수 없다. 유념했으면 좋겠군.”

    데리안이 사라졌다. 창연이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뭔가 미묘하다 했더니 잔상이었다. 그것도 실체를 가진 잔상.

    “머리 아프군.”

    창연이 이마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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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모른다, 그런 놈.]

    “몰라?”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가 빙글빙글 몸을 돌렸다.

    [그들에 대해 알지만, 그 구성원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라. 데리안이라. 처음 듣는 거까진 아니지만, 이름과 대략적인 설명만 들어 봤다.]

    “그거라도 말해 봐.”

    [광전사. 전투에 미친 이탈자. 가장 원초에 가까운 놈.]

    소녀가 말했다. 창연이 신음을 흘렸다.

    “딴 건 그렇다 치고, 원초에 가까운 놈?”

    [원래 지배자란 건 그런 놈뿐이었다.]

    소녀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쪽 세계는 전장, 그 자체였다. 모든 종족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죽어 나갔지. 위대한 자들도, 선택받은 자들조차 덧없이 목숨을 잃어 갔다. 거기서 살아나고 정점에 위치한 존재들이. 바로 지배자라 불리는 존재들. 근본은 결국 끝없이 싸우는 존재들이었다.]

    “처음 듣는 말인데.”

    [너무 오래된 일이니까. 지금은 다르지. 영원한 전장이 끝나고, 안정이 찾아온 후 지배자들은 평화와 화합을 추구했다. 거기서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고 끝없이 싸워 온 존재. 그게 바로 데리안이다.]

    “미친놈이란 거네.”

    [뭐, 그렇지.]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놈이 왜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소녀가 애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성향을 가진 덕에 온갖 괴물과 싸웠고, 살아왔지. 여러모로 이질적인 놈이다.]

    “흐음.”

    창연이 목을 꺾었다. 껄끄러울 거 같았다. 힘도 힘이지만 전투 경험이 풍부하다니.

    “그럼 내가 부탁한 거, 어디까지 완성됐어.”

    [거의 다. 앞으로 하루 이내면 될 거 같다.]

    “좋아. 그럼 돌아가.”

    [……냉정하군.]

    소녀의 몸이 흩날려 사라졌다. 창연이 의자를 삐걱거렸다.

    ‘정보가 필요한데.’

    던전이란 오롯한 상대의 세계. 아무 정보 없이 들어가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전에 들어갔을 때는 별 위험 요소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판단하기엔 불안했다.

    최소한 기본적인 거라도 알아 놔야 했다. 그렇다고 긴 시간은 없었다.

    ‘……움직이는 던전.’

    전사 형태의 던전. 그건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마중을 온다 했으니 그가 있는 장소까지 달려올 가능성이 높았다.

    인도에서 한국까지, 던전이 달려온다. 아주 박살이 날 게 훤히 보였다. 지나가는 모든 게 던전에 집어삼켜지며, 황폐화가 되겠지.

    어차피 피하지도 못할 거 그 전에 들어가는 게 좋았다. 다만 좀 불안하기에 움직이기 어려울 뿐.

    ‘골치 아파라.’

    그래도 가긴 가야 했다. 창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렸다.

    “뭐지.”

    “……그러는 넌 뭐야.”

    창연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상대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가복,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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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내 세계로 갔다 왔다.”

    “파사나카스는 또 어디 가고.”

    “도움을 받았지.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가기 어려워서.”

    “……그놈을 믿어?”

    창연이 애매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가복과 파사나카스는 멸망한 세계와 그들을 멸망시킨 장본인. 서로 믿을 건더기는 하나도 없었다. 가복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용할 가치도 있고.”

    “이용 가치?”

    “그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관계지만. 아니,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잡힌 관계인가.”

    “……뭔데?”

    “내 종족의 부활이다.”

    가복이 답했다.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목적이라 했지.”

    “그래. 나 혼자 힘으론 힘들어서. 내 세계에는 중간 과정을 알아보려고 간 것이었다. 약간 애매하더군. 그래서 시간이 걸린 거고. 아무튼 넌 어디 갔다 온 거냐?”

    “정령계.”

    “……뭐라고? 그곳을 갔다고?”

    가복이 얼굴을 구겼다. 창연이 이채를 띠었다.

    “알아?”

    “그야 당연히. 서로 거래하던 대상이었으니. 흠. 거기는 이동할 수 없는 곳인데, 확실히 넌 신기하긴 한 거 같군.”

    “그래? 근데 마침 잘 왔다.”

    정보를 알아야 했는데 물어볼 놈이 생겼다. 가복이라면 분명 알 거였으니. 창연이 물었다.

    “너 데리안이란 놈 아냐?”

    “데리안? 그놈은 왜 묻지?”

    가복이 눈을 빛냈다. 창연이 답했다.

    “그놈이 나한테 왔으니까.”

    “……아, 짐작이 가는군. 전투에 미친놈이니.”

    “아무튼 설명해 줘 봐. 뭐하는 놈이야? 대략적인 건 정령계 주인한테 들었는데 잘 모르더라.”

    “그럴 거다. 확실히 특이한 놈이긴 하다.”

    가복이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전투에 미친 놈. 침략자 주제에 정정당당을 표방하는 놈이지. 도착한 세계에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면 찾아가고, 결투를 요청하지. 거절하든 승낙하든 어쨌든 싸우게 만든다. 그리고 이기지. 결론적으로 미친놈이다.”

    “역시 그런가.”

    “그게 끝이다. 숨기는 게 없는 놈이라 뭐라 할 것도 없다. 아, 그건 있군. 놈은 육체를 신봉한다. 무기도 마찬가지지.”

    “육체를?”

    “특이하게 이질적인 능력을 혐오한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극에 이른 이들하고만 싸우지. 네 힘은 분명 원전의 것이지.”

    “그래.”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복이 턱을 매만졌다.

    “그럼 아마 그건 안 통할 거다. 흠. 원전의 사용자인데도 그놈이 찾아오다니. 넌 확실히 특이하군.”

    “안 통해? 이게?”

    “그래. 설명해 주도록 하마.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가복이 손을 들었다. 미묘한 파장이 엉키며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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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연이 던전 앞에 섰다. 도끼와 갑옷을 입고 있는 전사 형태의 던전. 그가 지긋지긋한 얼굴로 바라봤다.

    “거지 같군, 정말.”

    [왔군.]

    던전의 입이 열렸다. 굵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경계하고 구경하던 인간들이 질겁했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왔군. 한 이틀 정도 더 기다리다가 안 오면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네 쪽이 급한 거야. 넉넉하게 일주일은 줘야지.”

    [기다리기 힘들어서 말이야. 그러면.]

    던전이 도끼를 들었다. 공기가 휘말리며 그 끝에 모였다. 주위 사람들이 기겁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초대하지. 내 세계에.]

    쿠웅!

    도끼가 창연을 향해 내려찍혔다. 육체와 도끼가 충돌하고, 세계가 겹쳤다. 창연이 몸을 털며 중얼거렸다.

    “요란하기도 해라.”

    [이런 걸 원체 좋아해서 말이야.]

    창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전과 똑같은, 황폐한 전장. 무기들이 버려진 세계의 가운데에, 데리안이 앉아 있었다. 전신에 찢어진 갑옷을 입은 상태.

    [전장에 온 걸 환영한다, 위대한 전사여. 그러면.]

    데리안이 손을 들었다. 쩌적 하고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가 살벌하게 웃었다.

    [시작할까.]

    “그러든가.”

    창연이 공간을 열어 손톱을 꺼내 들고, 다른 손엔 검을 들었다. 데리안이 웃음을 흘렸다.

    [무기인가. 뭐, 그거까진 허용 대상이다. 무기에도 전사의 혼이 담기는 법이니. 하지만 네 힘은 허용할 수 없다. 이곳은 전사들의 땅. 오로지 제 경함과 육체만으로 승부를 겨루는 곳일지어니]

    쿠우웅!

    균열이 확장된다. 망가진 무기와 갑옷들이 불안하게 떨렸다.

    [우리를 주시해라. 위대한 전사들의 혼이여.]

    키잉.

    데리안의 말과 함께 널브러진 것들이 떠오른다. 창연과 데리안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이룬다. 묘한 파장이 그들을 둘러싼다.

    [이것들은 내가 싸우고, 쓰러트린 전사들의 무기. 그들의 염이 담겨 있지. 이들이 주시하는 한 육체 이외의 것은 사용할 수 없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능력이지.]

    “이런 수단을 쓰는 건가.”

    확실히 좀 엉킨 느낌이었다. 아마 이탈자들의 힘이나, 다른 지배자들도 제 능력을 고스란히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근데.’

    창연이 묘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정작 그에게는 영 어정쩡한 느낌이었다.

    [싸움은 공평하다. 나도 육체로만, 그대도 육체로만. 불합리한 요소는 하나도 없다. 그대도 나도 똑같은 인간이니.]

    “네가 인간이라고?”

    [그래. 약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맞다. 모든 건 공평하다.]

    데리안이 자리에 일어나 손을 뻗었다. 바닥에 꼽힌 대검을 들고 이를 드러냈다.

    [그러면 한번 네 힘을 보여 보아라! 나를 죽여 내 존재 자체를 약탈해 가라!]

    데리안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대지가 폭발하며 널브러진 무기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창연이 몸을 낮추고 검을 휘둘렀다. 대검과 부딪히고 굉음이 터졌다.

    파동이 퍼진다. 공기가 밀리며 사방을 휩쓴다. 마치 폭풍이라도 일어난 듯 바람이 거칠게 그들 사이로 휘몰아친다. 잠시의 부딪힘 후, 서로 동시에 튕겨 나간다.

    쩌어어엉!

    “크음.”

    창연이 몸을 뒤로 빼며 팔목을 매만졌다. 저릿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이딴 힘으로 인간이라고?”

    그가 봐 온 괴물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도 부담을 받았는지 팔목을 휘두르고 있었다. 데리안이 웃었다.

    [그래. 서로 힘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이거지.]

    인간의 한계를 넘었지만, 그렇다고 괴물의 한계까지는 넘지 못했다. 둘 다 육체적으론 인간이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도달했다. 창연이 자세를 잡았다.

    ‘그리 강하진 않아.’

    데리안이 가진 능력. 육체 이외의 것을 사용 못 하게 하는 힘. 그것 때문인지 실질 무력은 다른 지배자와 다르게 모자랐다. 그렇다면.

    “초심으로 돌아가야겠군.”

    신화의 서를 얻기 전에도, 그는 괴물들을 잡고 다녔다. 그중엔 지배자와 비슷한 수준의 괴물도 있었다.

    창연이 검을 들었다. 데리안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래! 역시! 너는 강하다! 힘에 휘둘리는 멍청이들과 달리, 충분히 자신을 제어하고 있어! 원전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데리안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대검이 허공에 사선을 그리며 대지를 가른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균열이 사방으로 퍼지며 크레이터가 생겨난다. 파편이 해일처럼 주위를 휩쓴다.

    “요란하게.”

    창연이 혀를 차며 손톱을 당겨, 허공을 긋는다. 검은 궤적이 그려지며 파동이 퍼진다. 잔재 더미가 펑 하고 터져 나가 창연의 주위에 도달하지 못한다.

    “죽어라.”

    창연이 검으로 공간을 때렸다. 파동이 퍼지며 데리안을 덮쳤다. 강한 여파에 그의 몸이 미세하게 비틀린다. 그리고 그 정도 틈이면 충분했다. 창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손톱을 들이밀어 데리안의 머리를 부여잡고, 대지에 처박았다.

    콰아아앙!

    굉음이 터졌다. 공중에 뜬 검들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창연이 다시 손톱을 들고 내려찍으려 했다. 그 순간 섬뜩한 감각이 가슴을 후려쳤다.

    쩌엉!

    강한 반발에 의해 창연의 몸이 밀려난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팍을 내려 봤다. 동그래한 멍이 든 상태였다. 그리고 파공음이 울렸다.

    콰득.

    창연이 몸을 돌려 손톱을 후려갈겼다. 나무 파편이 튀며 창연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가 입가를 비틀었다.

    “이런 식으로 눈속임을 한다 이거지.”

    [눈속임이라니.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데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잔 상처가 생겨난 상태였지만,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 쓰러진 무기들이 드드드 떨리고 있었다.

    [무기를 허용한다고.]

    차앙!

    부러진 무기와 장비들이 허공에 떠오른다. 하늘 가득 파편들이 떠올랐다. 창연이 혀를 찼다.

    “이거 좀 불공평한 거 같은데.”

    [불공평하다니. 그럴 리가. 그대도 아직 여력이 있으면서. 그 모든 걸 보여라, 전사여.]

    데리안 손을 까닥였다. 동시에 하늘에 뜬 무기들이 창연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창연이 몸을 빙글 돌리며 피하고 뒤로 뺐다. 바닥에 처박힌 것들이 다시 떠올라 창연을 향해 날아왔다.

    “많기도 하군.”

    창연이 기가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등에서 스멀스멀 어둠이 흘러나왔다. 피막이 몸을 둘렀다. 창연이 손톱을 휘저었다. 검은 곡선이 전방에 그려졌다.

    콰드득.

    날아오던 무기들이 깨진다. 파편이 흩날리며 사방에 재처럼 퍼진다. 창연이 몸을 날리며 손톱으로 내려찍었다. 피막이 꾸물럭거리며 손톱에도 제 몸을 두르기 시작했다. 손톱을 거칠게 휘젓자 무기들이 튕겨 나가며, 거대한 공간의 여백이 나타나고, 거기로 데리안이 달려들고 있었다.

    [하하하! 그래! 너의 모든 걸 나에게 쏟아부어라!]

    “시끄러워.”

    창연이 검을 부여잡고, 내려찍었다. 데리안이 대검으로 몸을 가리며 돌진했다. 서로 충돌하고, 충격파가 퍼졌다. 웅 하며 공기가 모든 걸 밀어냈다.

    데리안이 대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휘둘렀다. 창연이 검을 비스듬히 들어 흘렸다. 그대로 손톱으로 가슴팍을 때렸다. 데리안이 빙글 몸을 돌려 피하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주위의 검 하나가 날아오며 데리안의 손에 들렸다. 창연이 황급히 검을 들었다.

    쩌엉!

    “크윽!”

    창연이 신음과 함께 밀려났다. 데리안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단검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창연이 검을 잡았다. 손톱은 반쯤 깨져 나간 상태였다.

    쩌어어엉!

    굉음이 터진다. 폭발이 시야를 가리며 모든 걸 검게 물들인다. 창연이 검을 잡고 내려찍는다. 데리안이 단검을 역수로 잡아 끼어 막고 잡아당긴다. 검이 당겨지자 창연이 재빨리 몸을 날려 이동하고 걷어찬다. 데리안이 팔을 들어 막고 단검을 휘두른다.

    창연이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피하고, 검을 당겼다. 카각이며 단검과 검이 서로 긁히는 소리를 냈다.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고 잠시의 소강 사태가 지속되었다. 창연이 숨을 골랐다.

    ‘강하네.’

    순수한 실력. 그게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봐 온 지배자들과는 역시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수많은 세월. 그 모든 시간을 그저 전투에 몰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힘. 상당히 껄끄러웠다.

    [하, 하하하! 그래, 이거야!]

    데리안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흥분으로 뇌수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강하다. 눈앞의 존재는 그가 만난 존재 중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혔다. 주 힘을 봉인시켰는데도 이 정도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데리안이 입가를 핥았다. 이미 바짝 말라 침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죽는다. 가시덤불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위태위태한 전투.

    하지만 데리안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거였다. 아무리 자극적인 것을 즐겨 봤자 전투의 흥분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여자도 사치도 하등 쓸모가 없었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 오직, 기나긴 삶을 살며, 그 시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강대하며 위대한 존재들과의 혈투뿐. 그가 이를 드러냈다.

    [좀 더! 좀 더! 좀 더!]

    데리안이 고함과 함께 섬전처럼 이동한다. 창연이 손톱을 내던지고 검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콰아아앙!

    굉음이 다시금 퍼진다. 어느새 주위의 땅은 제 형체를 잃은 상태였다. 초월적인 힘이 연달아 충돌하여 공간을 일그러트리고 세상을 개변시킨다. 던전의 벽이 견뎌 내지 못하고 천천히 제 형태를 잃어 간다.

    콰앙!

    다시금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고, 파편이 터져 나왔다. 창연이 혀를 찼다. 거인의 유산. 검에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데리안이 부서지는 무기를 버리고 다른 무기를 들었다. 거칠게 내려찍고, 창연이 반파된 검을 들어 막았다.

    카창!

    “썩을.”

    무기가 깨져 나갔다. 연이은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검날이 산산이 조각났다. 창연이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데리안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설마 이걸 무기가 견뎌 내지 못할 줄이야……. 흥이 식는구나.]

    “망할.”

    창연이 검을 내려다봤다. 나름 거인의 힘이 담긴 검인데 부서지다니. 거인이 아니라 모든 힘을 쓰지 못하는 게 큰 것 같다.

    [뭐 어쩔 수 없군. 너와 나는 인간의 한계란 게 있기에, 육체적인 면에선 그리 강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무기와 장비가 가장 중요하다.]

    데리안이 바닥에 꽂힌 창을 꺼내 들었다. 창연이 긴 세월 동안 괴물들을 그 육체 하나로 쓰러트렸다면, 그건 데리안도 마찬가지. 인간이란 범주에선 거의 끝에 달한 거나 마찬가지. 그렇기에 그리 큰 실력 차이는 없었다. 있다면 장비의 차이.

    [물론 너는 원전의 주인이니 무기의 중요성이 덜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곳에서 갈리는구나. 네 준비가 덜한 것이니. 아쉽지만 이대로 끝을 내야겠군. 즐거웠다.]

    후욱.

    데리안이 창을 휘두른다. 공기가 갈라지며 창연을 노린다. 창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기다리지. 흠. 좀 불안해서 테스트한 다음 쓰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나.”

    창연이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옅게 중얼거렸다.

    “봉인된 마법의 흐름이 엉키었다.”

    [뭐……?]

    기류가 타고 창연의 손에 엉킨다. 데리안이 멈칫했다. 분명 이 공간은 타 능력의 사용이 금지된 곳이었다. 지금까지 그걸 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창연이 사용하는 건, 명백히 육체 이외의 것이었다.

    [너, 무슨.]

    “이곳에서 풀리리니. 제가 가진 것을 토해 내었다.”

    콰득.

    공간이 구겨졌다. 균열이 거미줄처럼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데리안이 멍하니 그걸 지켜봤다. 창연이 후려쳐 균열을 확장시키고,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너희는, 이걸 잘 모르는 거 같아.”

    물론 신화의 서의 사용은 불가능했다. 대다수의 힘들이 엉켜서 쓰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그리고 그걸 상대가 두고 볼 리 없으니, 봉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수의 힘은, 내제된 일부 문장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힘들. 엉킨 흐름을 부수고 억지로 불러오는 방식. 아마 이게 원전이 자동으로 기재한 문장 같았다. 창연의 생각이 정답인지 데리안이 쓰게 웃었다.

    [……뭐지. 내가 알기로 원전에 그런 능력은 없었는데 말이야.]

    “걱정하지 마. 나도 원전을 쓸 생각은 없으니까. 쓸 수 있는 것 중 쓸모 있는 것도 없고. 그냥 뭐 하나 가져오려고.”

    창연이 손을 뽑아 들었다. 공간이 드드득거리며 박살 났다. 그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쓸 만한 무기 하나를.”

    거대한 망치가 나왔다. 어지간한 사람의 몸보다 더 큰 해머. 손잡이부터 머리 부분까지 전부 둔탁한 색깔로 이루어진 형태. 모양 자체는 평범한 망치의 모양이었다.

    [……미치겠군.]

    데리안이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저 단순한 형태의 망치에 담긴 힘이 느껴졌다. 절로 맥이 풀릴 정도였다.

    “역시 만족스러워……. 화가 풀릴 정도로 만들어 주었군.”

    창연이 중얼거렸다. 그가 망치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에 따라 바람과 기류가 움직였다. 잠시 후 거친 폭풍이 형성되었다.

    [이런.]

    “이 정도면.”

    창연이 웃었다. 그가 과거에 쓰던 장비들. 그것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힘 자체는 우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가 말했지. 장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막아 봐.”

    창연이 망치를 휘둘렀다. 폭풍이 데리안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가 집채만 한 대검을 들어 휘둘렀다. 거기서 생긴 바람과 폭풍이 충돌하며 거세게 주위를 후려갈겼다.

    [크으으윽!]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다. 바람에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고, 검이 끼긱거리며 날이 갈린다. 데리안이 기합을 지르며 대검을 내려찍었다. 폭풍이 갈라지며 바람이 걷혔다.

    [겨우 이 정도론!]

    “그래?”

    창연이 망치를 부여잡고, 하늘 높이 들었다. 그대로 땅에 내려찍었다. 동시에 지각이 요동쳤다.

    해일이 퍼진다. 흙과 부서진 장비들로만 이루어진 해일이. 그것들이 하늘을 가리고 대지를 부순다. 원형의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모든 걸 덮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데리안이 대경하며 땅을 박찼다. 하늘 높이 날아 범위 밖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해일의 영역은 던전 전체로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파도에 파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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