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5/192)
  • “뭐지, 이건.”

    [캬아?]

    창연의 목소리에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조그마한 붉은 눈이 그를 향하고, 드래곤이 발을 박차 날갯짓했다. 펄럭이며 하늘을 날았다.

    [캬. 캬.]

    하지만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기우뚱거리며 자꾸 추락하려 하지만 어떻게든 그의 어깨에 착지했다. 그리고 몸을 비비적거렸다.

    [캬아.]

    “이건 또.”

    창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그에게 호의를 가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부모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타난 놈들이 전부 죽이려 달려든 걸 생각하면 예상외였다. 창연이 드래곤의 목을 잡아 들었다

    “……분석.”

    키잉.

    묘한 파장이 퍼지며 드래곤의 몸을 감쌌다. 그에 대한 정보가 창연을 향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연이 잠시 바라보다 드래곤을 놓았다.

    [캬아.]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해 창연의 어깨에 다시 올라탔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약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겉보기와 동일하게 극히 미약한 힘만이 담겨 있었다. 직접 경험해 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면 1종 던전도 간당간당할 거 같았다.

    ‘일단…… 종류는 용족인가.’

    겉보기에도 드래곤이니 당연했다. 일반적인 형태는 그가 지금까지 잡아 온 놈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르다면 크기와, 안에 있는 무언가 이질적인 것.

    ‘뭐지, 이건.’

    드래곤의 내부에 이상한 게 느껴졌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좀 꺼림칙한 것이었다.

    ‘평범하진 않은 거 같네.’

    평범했다면 내다 버릴 거였다. 쓸모가 없다면 의미가 없으니. 창연이 열쇠를 들었다.

    “나와라, 용용아.”

    [캬륵?]

    공간이 열리고 바깥으로 이동했다. 드래곤도 문제없이 따라 나왔다. 그럼 이제 테스트를 할 시간이었다. 창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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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냐? 그건.”

    이자벨라가 이상한 걸 보는 눈으로 창연의 옆을 바라봤다. 작은 드래곤이 책상을 뒹굴고 있었다. 창연이 짧게 말했다.

    “몰라.”

    “괴물 같은데. 너 설마, 그놈들하고 거래를 했나?”

    “그럴 리가. 이건 내가 따로 구한 거야. 아무튼, 뭐 짐작 가는 거 있어?”

    “흠…….”

    이자벨라가 드래곤을 노려봤다. 드래곤이 찔끔 몸을 떨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런 건 처음 보는군. 드래곤인데 이리 작다니.”

    “너도 모르나.”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아무튼 어떻게 된 거냐, 창연. 2년 동안 어디에 가 있던 거지?”

    “다른 세계에 가 있었어.”

    “……뭐라고?”

    이자벨라가 얼굴을 구겼다. 창연이 설명했다. 정령계. 그리고 거기에 있던 지배자. 들을수록 이자벨라의 얼굴이 가지각색으로 변했다. 말이 끝나자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등을 기댔다.

    “이질적이군.”

    “몰라, 나도.”

    “흠. 그럼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2년이라니……. 네가 거기에 며칠 있었다 했지?”

    “일주일 내외.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어.”

    “그 정도로 2년이 지나다니. 이건 유념해 둘 만하군. 던전에 잘못 들어갔다 골치 아파질 수도 있겠어.”

    “그거야 원래 그랬는데.”

    “뭐, 그렇지. 다만 뇌리에서 지우고 있었을 뿐. 확실히 위험하긴 하겠군.”

    이자벨라가 애매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창연이 물었다.

    “그럼 2년 동안 뭐 달라진 거 있어? 대중에 알려진 거 말고, 좀 기밀적인 이야기로. 일단 가복하고 파사나카스, 이 둘은 어딨어? 안 보이던데.”

    나오고 감각을 펼쳐 봤지만 잡히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얼굴을 구겼다.

    “나도 모른다. 룰러 놈들은 여전히 싸돌아다니고 있다. 파사나카스는 원래 찾기 힘든 놈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너랑 다녔던 가복, 그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언제인데.”

    “네가 사라지고 반년 후. 초반엔 좀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고,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더군. 감지도 안 되고. 그냥 포기했다.”

    “흠.”

    창연이 머리를 긁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종족의 부활이 주목적이었으니.

    이자벨라와 대충 이야기하다 보냈다. 창연이 어깨를 매만지며 손을 들었다. 웅 하고 공간이 열리며, 그 너머로 인간 형상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안녕. 반가워.]

    “별로 반갑지는 못하고. 그래서.”

    창연이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할 거야.”

    [음…….]

    소녀가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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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미안. 까먹고 있었어. 내 세계에서 나오지 않은 지 옛날 옛적이라.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어.]

    “덕분에 2년이 날아갔고.”

    [……미안. 너희 세계에서 2년이란 제법 큰 시간이겠지.]

    소녀가 머리를 숙였다. 창연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파악을 못 했으니 마냥 내 탓이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 그래도 말이야.”

    [뭐라 할 말이 없네. 이미 지나간 시간. 돌리려면 돌릴 수는 있겠지만…… 그럼 엉켜서 뒤틀릴 테고. 내가 따로 만족할 만한 보상을 주도록 하지. 어때.]

    “뭐, 그렇게 해.”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따져 봤자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을 파악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정령계에 들어갔을 거였다. 거기서 얻은 정보는 2년이란 세월을 바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었으니. 가족이 죽거나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이건 그냥, 무언가를 얻기 위한 대화였다. 소녀가 턱을 괬다.

    [뭘 주면 좋을까. 아. 일단 네가 맡긴 그건 절반쯤 되었어. 얼마 안 있어 될 거야. 음…… 좋아.]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문을 주지.]

    “문?”

    [그래. 가만히 있어 봐.]

    소녀가 창연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창연이 찝찝한 얼굴로 말했다.

    “또 입에 구겨 넣는 건 아니겠지.”

    [그때는 약해서 그랬고, 이제는 상관없어. 간단한 동작으로도 되지.]

    소녀가 창연의 이마를 두들겼다. 묘한 파장이 이마에서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감각이 확장하며, 새로운 영역이 열렸다.

    “이건 뭐야?”

    [문이다.]

    소녀가 답했다. 창연이 감각을 확인했다. 신체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녀가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우리 정령들은 원하는 장소로 이동이 가능해. 상대 쪽에서는 간섭할 수 없는 일방통행이지. 너에게 그 문을 준 거야. 이제 네가 원하는 장소에 마크를 하면, 갈 수 있을 거야.]

    “그래?”

    4장. 전사의 세계.

    창연이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간 이동이란 말인데, 그럼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소녀가 상처 입은 얼굴로 말했다.

    [나름 큰맘 먹고 준 건데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거 같네.]

    “공간 이동은 지금도 가능하니까.”

    [음, 설명이 부족했나. 이건 공간 이동이 아니야. 일방적인 통로야. 사전 동작도 필요 없이 그저 이동만 하면 돼.]

    “그래?”

    [그래. 말하자면…… 공간 이동은 상대측에서 막을 수 있지. 왜곡을 걸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이건 막을 수 없어. 게다가 차원과 세계의 불균형도 무시하지. 무슨 말인즉.]

    소녀가 웃었다.

    [던전과 던전을, 세계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단 소리지.]

    “오.”

    창연이 이채를 띠었다. 그건 괜찮은 말이었다. 지금은 그도 던전을 이동할 때, 깨거나, 아니면 장치가 있어야만 통행할 수 있었다. 근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이 원할 때 이동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상당히 이득이었다.

    “그거 확실히 좋군.”

    [엎드려서 절 받는 심정이네.]

    소녀가 투덜거렸다. 창연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 정도면 됐네. 아, 그리고 이거 뭔지 알아?”

    [캬아.]

    창연이 드래곤을 보여 주었다. 소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그건.]

    “몰라?”

    [모른다. 용 같은데 너무 작군. 키메라……도 아닌 거 같고. 흠. 신기하네. 나한테 잠시 빌려 줄 수 있나? 해부 좀 해 봐야겠어.]

    [캬, 캬아!]

    “싫어 인마.”

    결국 그녀도 모른다는 거였다. 창연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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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냐?”

    [캬아?]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연이 혀를 찼다. 무리인 것 같았다.

    “말도 안 통하고. 그럼…….”

    창연이 눈을 감았다. 웅 하고 그에게서 미약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았다.

    [캬. 캬. 캬.]

    “이건 되는군.”

    창연이 눈을 떴다. 말이 아닌, 파장으로 명령의 전달. 세세한 명령은 무리지만 공격, 복귀와 같은 대략적인 건 가능했다.

    “그러면.”

    테스트를 해야 했다. 드래곤이 과연 어느 정도로 쓸모가 있을지.

    일단 지금 보이는 거론 1종 던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반인과 싸워도 패배할 정도였다. 정말 저 정도밖에 안 된다면 곤란했다. 애써서 괴물의 알을 구한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다만 무언가 이질적인 게 느껴지니, 그걸 기대하고 있었다. 그로서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것. 어쩌면 상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창연이 눈앞의 던전에 들어갔다. 드래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던전은 현실에 몇 남지 않은 1종 던전. 마음먹자면 얼마든지 없앨 수 있지만, 종류별로 어느 정도 남겨 두는 게 좋을 거 같아 1종 몇 개는 없애지 않고 있었다.

    창연은 허락을 받고 들어온 상태였다. 뭐 할 게 있다니 단박에 승인이 났다. 원래 들어오려면 절차가 되게 복잡한 걸로 아는데, 단순했다. 무척.

    “편하긴 하네.”

    던전의 형태는 강가 옆에 딸린 숲. 나타나는 괴물은 고블린 군락. 평범한 사람도 식칼 하나 들고 가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약했다. 고블린 로드는 좀 강하지만 그래 봤자 1종이고.

    “추적.”

    창연이 손을 뻗었다. 파장이 던전 내부를 후려쳤다. 창연이 허공을 붙잡았다.

    “추적. 공간. 도약.”

    그리고 고블린 하나가 나타났다. 식사하고 있던 건지 한 손에 익은 물고기를 든 채 멍하니 창연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기겁해 도망가려 했지만, 창연이 손짓하자 방벽에 가로막혔다.

    [캬륵! 캬아아악!]

    고블린이 게거품을 물며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방벽 내부에 울렸다.

    “말 알아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놈이랑 싸우면 살려 줄게.”

    우웅.

    창연을 중심으로 파장이 퍼졌다. 드래곤의 눈매가 변했다. 고함을 지르며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블린도 죽을 순 없다는 건지 드래곤을 향해 마주 달렸다.

    [캬아아악!]

    [캬르르륵!]

    괴물 두 마리가 서로 충돌한다. 고블린이 팔을 들어 드래곤을 후려친다. 퍽 하고 손바닥만 한 몸이 흔들린다. 날개를 펴 자세를 잡더니 빠르게 돌진해 고블린의 가슴팍과 충돌한다. 고블린이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톱으로 할퀴기 시작한다.

    [캬악! 캬악!]

    [캬아아아아!]

    “으.”

    창연이 꺼림칙한 눈으로 둘의 싸움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눈이 썩는 느낌이었다. 항상 수준급의 싸움만을 봤는데, 이런 싸움이라니. 어린애가 서로 투닥거리는 느낌이었다.

    [캬르르륵!]

    얻어맞고 있던 고블린이 양팔을 휘저었다. 거기서 생긴 바람에 드래곤이 움찔거렸다. 날개를 파닥여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고블린이 팔짝 뛰어 드래곤을 붙잡았다.

    [캬악! 캬아악!]

    [캬르륵!]

    고블린이 손을 마구 휘둘렀다. 드래곤이 어떻게 빠져나가려 하지만 기본적인 힘과 크기의 차이 때문인지 무력하게 흔들리기만 했다. 고블린이 땅에 내려찍었다.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악!]

    “뭔 고블린한테도 져?”

    창연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러면 인간한테도, 어쩌면 어린아이한테도 진다는 소리. 창연이 손을 흔들었다. 고블린의 머리가 퍽 하고 터지며 쓰러졌다.

    [캬아! 캬아!]

    드래곤이 시체 위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창연이 애매한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봤다. 이거 너무 쓸모가 없었다. 데리고 다니면 은근히 신경이 거슬릴 거 같기도 하고. 그러면…….

    창연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렸다.

    “어라?”

    [캬우.]

    콰드드득.

    피가 튀었다. 창연이 멍하니 그걸 지켜봤다. 드래곤이, 고블린의 시체를 잘근잘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이 비틀렸다.

    몸의 광택이 진해진다. 발톱이 더욱 날카롭게 갈리며 이빨이 뒤틀린다. 드래곤이 울음을 흘렸다.

    [캬악! 캬악!]

    꾸드득.

    어느새 고블린의 몸 반절을 처먹기 시작했다. 창연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몸뚱이 뭐 저리 많이 들어가?”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놈인데 그보다 몇 배는 큰 고블린을 전부 먹어 치우고 있었다. 창연이 가만히 드래곤을 바라봤다. 미묘하지만, 아주 티끌만 하지만, 조금 전보단 더 강해졌다.

    ‘먹어 치우면서 강해지는 방식인가.’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드래곤이 저런 방식으로 강해진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래곤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근데 생긴 거나 내부 형태나 다 드래곤이고. 머리 아프네.’

    그래도 일단 방식은 알았다. 이질적이긴 하지만, 먹어 치우면서 강해지는 형식. 그렇다면 간단했다. 모든 괴물들을 아가리에 처넣으면 됐다. 그럼 언젠가는 강해지겠지.

    쓸모가 없어 버리려 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았다. 창연이 손을 뻗었다. 고블린은 어느새 뼈만 남았다.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며 창연에게 날아왔다.

    “그럼 다른 던전이…….”

    일단 3종 던전을 가 봐야겠다. 먹어 치우는 놈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세질 수도 있었다. 창연이 허공에 손을 갈랐다. 공간이 열리며 그 안으로 몸을 이동했다. 바깥이 나왔다.

    “던전 위치 좀 알아야겠군.”

    창연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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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연이 손을 흔들었다. 파장이 퍼지며 앞을 향해 뻗어 나갔다. 달려들던 괴물들의 짓눌려 하나둘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샤아아아!]

    그와 동시에 굉음이 터졌다. 거대한 개미가 거미줄을 타고 창연에게 내려왔다. 창연이 자세를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거미가 다리를 들었지만 쩌억 소리와 함께 그대로 몸체를 꿰뚫어 버렸다. 진액이 터지며 창연의 몸을 물들였다.

    “더러워라. 정화.”

    진액이 불타 사라진다.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드래곤이 세차게 날갯짓을 했다.

    [캬각! 캬각!]

    “먹어.”

    그대로 날아와 거미의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몸이 변이하며 꾸국 소리를 냈다. 창연이 가만히 드래곤을 바라봤다.

    ‘확실히 강해지긴 하는군.’

    그동안 던전 여러 개를 싸돌아다녔다. 3종 세 개, 그리고 4종 두 개. 그때마다 드래곤은 모든 괴물을 먹어 치웠으며, 착실히 강해지고 있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다.

    “그래 봤자 2종 던전 수준이지만.”

    창연이 한숨을 쉬었다. 먹어 치우는 건 좋았다. 그리고 강해지는 것도. 다만 그 상승 폭이 적어도 너무 적었다.

    3종, 4종 던전의 보스를 먹어도 그리 크게 강해지지 않았다.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아주 적은 부분만을 흡수하는 느낌이었다. 잘만 써먹으면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지만, 그 잘만 써먹는 게 상당히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방법은 알겠군.’

    1종보다 2종이, 2종보다 3종이, 3종보다 4종이 더 상승 폭이 컸다. 씹어 먹는 괴물이 더 강할수록 상승 폭이 높았다. 그렇다면.

    ‘지배자의 던전.’

    그것들을 집어삼키면, 쓸 만할 정도까지 될 거였다. 마침 나타났다고 그랬다. 이쯤이면 하나가 더 나타날 시간. 슬슬 처리해야 했다.

    ‘절벽에 있다고 했지.’

    위치는 아마 인도 쪽. 자세한 건 들으면 됐다. 창연이 드래곤을 붙잡았다. 아직 덜 먹었는지 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태연히 허공을 갈라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이거 진짜 편하네.”

    소녀에게 받은 문.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는 문. 아무 힘의 소모도 없고 제약도 없어 편리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는 던전 들락날락할 때 무거운 장치를 써야 했고, 그것도 가끔 먹통인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간간이 던전을 부수고 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젠 그럴 걱정이 없었다. 원하면 언제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면 연락이나 해 봐야지.’

    창연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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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창연이 받은 서류를 살펴봤다. 정부에 요청하자 몇 시간 만에 온 정보였다. 가만히 내용을 읽어 내리자, 제법 흥미로웠다.

    “살아 움직이는 던전이라.”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파트 하나 정도. 지금까지 나타난 지배자의 던전들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질적이었다. 이름 없는 지배자를 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다만 형태는 확실히 특이했다. 왜냐하면, 던전이 바로 인간의 형태였다.

    광석으로 이루어진, 투구와 갑주를 걸치고,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있는 인간 형태의 던전. 장식품인 줄 알고 다가간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던전인 걸 깨달았다.

    처음엔 이질적인 던전인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두었다. 안에 갇힌 사람도 무사히 구출했고. 내부에 무언가 괴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관광 명소로 이용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점차 이상 현상이 보였다.

    밤이 지나자 던전 주위로 땅이 파여 있었다. 어떤 헌터가 깽판이라도 치고 갔나 생각해 조사했지만, 근처에 있던 헌터 모두가 알리바이가 있었다. 원체 이상한 세상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주위의 땅이 박살 나 있었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그들이 CCTV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던전이 움직이고 있었다. 도끼로 땅을 농사하듯 싹싹 긁어 홈을 만든 거였다.

    당연히 나라가 뒤집어졌고, 수색대와 헌터들이 파견됐다. 움직이는 던전. 위험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헌터들과 이탈자 몇이 들어갔지만 거기서 또 문제였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몬스터도, 보스도. 그 무엇도. 그런데 던전은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던전에 맞닿는 모든 것은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 방벽을 쳐도 의미가 없다는 소리. 결국, 기도나 하며 던전이 움직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는 거였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창연이 중얼거렸다. 현재 5종 던전은 독특한, 단순히 강할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것도 포함해서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던전은 5종이라 불리고 있었다.

    ‘내부에 없다라…… 그게 되나.’

    창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이 없는 던전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게 그가 알고 있는 상식. 몇 번 뒤집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상식은 상식. 어지간해선 뒤집어지지 않았다.

    ‘일단 가 봐야겠군.’

    창연이 손을 뻗었다. 허공이 갈라지며 몸이 움직였다.

    다른 나라의 풍경이 보였다. 언제나 보던 네모난 고층 건물이 거의 없는 나라, 인도.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대한 인간 형상이 보였다.

    “이건가.”

    창연이 착지했다. 이미 허락은 받았기에 거창한 절차는 필요 없었다. 가만히 던전을 올려다봤다. 마치 전사와도 같은, 중세의 바이킹과 같은 느낌이었다.

    “지배자는 맞는 거 같네.”

    겉보기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남달랐다. 최소 이름 없는 지배자급. 어쩌면 그 이상.

    창연이 몸을 구겨 넣었다. 갈색 공간이 모습을 보였다. 창연이 황망히 주위를 둘러봤다.

    “뭐야, 이건.”

    황폐화된 세계였다. 검이 부러진 채 대지에 꽂혀 있으며 방패와 무기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파여 있고 하늘이 우중충한 색으로 물든, 이질적인 세계.

    “뭐야?”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말은 못 들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갈색의 땅이라고 들었는데, 정작 보아하니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네. 게다가 이름 없는 지배자랑은 다른데.”

    그건 아무것도 없는 세계라면, 이건 원래부터 이런 세계 같았다. 시야에 닿는 범위 그 모든 것에 전쟁의 흔적이 남겨 있었다.

    “특이하긴 하네.”

    창연이 앞으로 걸어갔다. 꽤 넓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지라 끝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느껴지는 감각에도 걸리지 않았다.

    “……뭐야.”

    창연이 허공을 갈라 밖으로 나왔다. 그냥 감지 못 한 줄 알았는데 진짜 없다니. 정찰대와 창연이 본 풍경이 다른 것도 이상했다.

    ‘이런 던전이 있을 수 있나.’

    창연이 떨떠름하게 던전을 올려다봤다. 이러면 뭐 방법이 없었다. 던전 자체를 무너트릴 수도 없었다. 명색이 지배자의 던전. 단단하기 그지없을 테니.

    “그냥 다른 곳이나 가야겠군.”

    특급 던전은 아직도 몇 개 있었다. 창연이 공간을 도약해 한국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정보 몇 개 얻고 다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 순간, 꺼림칙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뭔.”

    창연이 기가 찬 얼굴로 대지를 밟았다. 무형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며 반발을 일으켰다. 방 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건 또 누구야.”

    이쪽으로 오라는 초대였다. 그것도 이탈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 창연이 찝찝한 얼굴로 공간을 도약했다. 힘이 발휘된 장소로 이동하자, 카페가 보였다.

    “……카페?”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 주위 회사가 있는지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다. 의심스러웠지만 분명 발휘된 위치는 저 안이었다. 창연이 안으로 들어갔다. 몇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전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안녕. 왔네.”

    그리고 그 사이에 남자 한 명이 손짓했다. 매끈한 인상의 남자였다. 다만 그와 비교되게 전신이 근육질이란 점이 달랐다. 어지간한 보디빌더보다 훨씬 거대한 몸. 창연이 애매한 얼굴로 다가갔다.

    “앉아. 여기 커피가 맛있어서 여기로 불렀지.”

    “너, 뭐야.”

    “짐작하고 있을 텐데.”

    남자가 웃었다. 창연이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경우는 두 번째였다. 파사나카스. 그리고 눈앞의 남자.

    “마음 같아선 이렇게 부르지 않고, 직접 만나고 싶었는데 말이야. 자꾸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기에 힘들어서 그냥 불렀다. 아무튼, 보고 싶었다. 이름 높은 인간, 창연.”

    남자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중얼거렸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세계 밖으로 못 나가는 거 아니었냐?”

    “일반적으론 그렇지. 근데 나는 변종이라서.”

    남자가 웃었다. 눈앞의 존재는, 던전의 주인. 그것도 지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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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앉지그래.”

    “……그러지.”

    창연이 마주 앉았다. 뭐가 목적인지 모르지만, 다짜고짜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자가 빨대를 입에 물고 까닥였다.

    “흐음. 여기 세계의 음료는 좋아. 음식은 별로지만, 음료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단 말이야.”

    “목적이 뭐야.”

    “목적이야 간단하지. 일단 자기소개 정도는 해 줄까.”

    남자가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지배자, 데리안이다. 너희 세계에 강림한 상태지. 너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란 말이야, 창연.”

    데리안이 창연을 바라봤다.

    “난 너와 싸워 보고 싶다.”

    “……뭐라고?”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데리안이 웃었다.

    “왜. 이상한가?”

    “이상하지. 너희가 그런 걸 원하는 놈들이던가?”

    “그야 아니지. 다른 놈들은 너에게 원전을 얻기 위해 볼일이 있겠지. 하지만 난 다르단 말이야. 그까짓 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데리안이 얼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살며시 힘을 주자 콰득 하고 깨져 나갔다.

    “내가 가진 세계는 위대한 전사의 세계. 오직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 전사들만이, 내 세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지. 난 그런 전사들과 결투를 벌이고 싶다. 그리고 창연, 너는 그만 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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