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4/192)
  • “그렇지.”

    그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자벨라는 던전에서 괴물들을 죽이며 살아왔다. 자신의 주체성이 아닌, 지배자의 손대로 움직이고,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떤 감정을 품게 만들었다.

    증오와 분노. 감히 제까짓 놈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존재에 협력하는 인간을 보이는 족족 머리를 뜯어 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선인이었다.

    인간을 구하고, 그들을 지키고 싶다. 그것이 그녀가 던전을 깨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같은 인간 주제에 인간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키이이익!]

    괴물이 괴성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뭉개진 몸체가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

    “재생이라.”

    “이것저것 실험하는지, 나타나는 괴물의 형태, 특징이 전부 달랐다.”

    [크아아아!]

    괴물이 달려들었다. 여러 머리가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창연이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붙잡고, 땅에 처박았다. 굉음과 함께 바닥에 금이 퍼졌다. 괴물이 바닥을 긁으며 벗어나려 했다. 창연이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콰득.

    [키긱.]

    머리가 하나 터진다. 괴물이 부르르 몸을 떨다가 축 늘어진다. 창연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린다.

    “실패작이군.”

    머리 여러 개를 달린 걸 보면, 머리마다 독립된 생각을 하며, 하나가 박살 나도 활동하기 위한 것 같은데 하나가 터지니 곧바로 죽었다. 이건 단순한 실패작이었다.

    “그럼 나갈까.”

    “나간다고? 그 빌어먹을 결계들은 어떻게 하고.”

    “내가 여길 무슨 방법으로 온 거 같아? 그건 문제없으니까 준비해. 물론 그 전에 족치고는 가야지.”

    “……그래.”

    이자벨라가 얼굴을 들었다.

    “이것들을 죽여 버려야겠어.”

    드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바닥의 금이 점차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우리를! 인간 주제에 같은 인간들이! 감히 배신을 해!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리겠어!”

    그녀의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방 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창연이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이런저런 인간이 있는 거지.”

    “……난 이해할 수 없다.”

    “나도 이해 안 가. 이해할 생각도 없고. 너도 마찬가지.”

    창연이 일어나 허공을 바라봤다.

    “그냥 죽이면 되는 거야.”

    [……말이 험하군.]

    “너! 이 개자식!”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이자벨라가 거칠게 내뱉으며 일어났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그럴 필요는 없다. 여기서 모든 게 결정이 날 테니까.]

    우웅.

    묘한 기파가 방 안으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단지 그뿐,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자벨라가 이를 갈며 손을 들었다.

    “무너져.”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황급히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얻어 낸 힘이, 지금까지 수족처럼 다루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뭐……?”

    [혹시나 했는데 잘 되나 보군.]

    “어째서.”

    힘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안에 내제된 힘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게 현실로 구현되지 못했다. 마치 틀어 막힌 것처럼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군.’

    창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던전 안에 있던 영역 중 하나랑 똑같았다. 괴물들이 힘을 못 쓰는 공간이라 자주 갔었던 곳. 이 정도라니. 진짜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잘 되는군. 부작용도 없고. 다행이야…….]

    제압되었다 생각했는지 목소리에 안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스피커가 울렸다.

    [그러면 창연, 이탈자여. 여기서 제안을 하나 하지. 우리와 함께할 생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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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먹히는군. 기도할 필요는 없겠어.”

    “염병.”

    노인이 흐뭇하게 수염을 매만졌다.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거칠게 내뱉었다.

    “시발. 죽을 뻔했네. 아뇨, 본부장님. 좀 말이라도 하고 하죠? 뒤지는 줄 알았잖아!”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인이 찔끔 몸을 떨었다.

    “아, 아니. 왜 그래? 어쨌든 살았잖아?”

    “……그걸 말이라고.”

    남자가 이를 뿌득 갈았다. 비장으로 보낸 괴물이 뒤질 위기에 처하자, 패닉이 온 본부장이 바로 비상 스위치를 열었다. 뭐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남자로선 심장이 철렁이다 못해 내장까지 떨어진 느낌이었다.

    “진, 진정해. 진정해.”

    생명의 위기를 느낀 노인이 다급히 말했다. 그가 남자를 어르고 얼렀다.

    “잘 풀렸잖아. 응? 미안해. 내가 패닉이 와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어. 잘 풀리면 지원 빠방하게 해 줄게.”

    “……알겠습니다.”

    어쨌든 지나간 일이었다. 더 따져 봤자 소용도 없었다. 게다가 잘 풀리기도 했고. 남자가 화면을 바라봤다.

    이자벨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손을 거칠게 움직였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설마 이런 것도 가능할 줄이야……. 이거 진짜 놀라운데요. 대충 설명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장치를 이용해 특정 기파를 퍼트린다. 그 영역 안에선 이탈자들이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솔직히 설명을 들었을 때는 뭔가 싶었다. 이탈자란 규격 외의 존재. 요샌 좀 헌터들도 강해졌지만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니. 테스트해 봤다는 말도 들었지만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이자벨라가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연은 좀 애매했지만,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무력화된 거 같았다.

    “아무튼 말해 봐요.”

    “그래, 그래.”

    노인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자벨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어째서, 내 힘이.”

    “걱정하지 마.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니까. 이 구역을 벗어나면 될 거야. 뭐, 상대가 내버려 둘 리는 없지만.”

    창연이 스피커를 올려다봤다. 그에게 제안하고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제안했으면 말을 하지그래.”

    [아, 미안하군. 아무튼 이건 제안이다. 아니, 사실상 명령이군. 따르지 않으면 죽일 생각이니.]

    키잉.

    [크르르르…….]

    문이 열리고, 괴물이 하나 나타났다. 이자벨라가 이를 갈며 자세를 잡았다.

    “……골치 아프군.”

    [캬아…….]

    인간 크기의 뱀. 그리 강한 괴물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2종의 중간 보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무능력자란 게 문제였다. 물론 쌓인 경험이 있으니 쉽게 죽진 않겠지만, 이기긴 힘들었다. 목소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죽든가, 아니면 따르든가 둘 중 하나로 해라.]

    “나한테 뭘 원하지.”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그저 네가 가진 힘을 우리에게 제공하면 돼. 다른 이탈자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것. 연구 가치는 충분하지. 아, 이자벨라 그대도 마찬가지다. 어떡하겠는가.]

    “흠.”

    창연이 턱을 괬다. 이자벨라가 으르렁거렸다.

    “설마 따를 건 아니겠지.”

    “죽인다는데 다른 방법이 있나?”

    “난 그냥 죽을 거다. 또다시 남의 의도대로 움직이라고? 그렇게 못 하지.”

    이자벨라가 던전을 나오며 생각했었다. 이젠 나의 뜻대로 움직일 거다. 누군가의 명령에 다시는 따르지 않겠다. 그런 가치관을 가졌고, 또 그대로 행동했다. 그걸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다.

    이자벨라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몸을 낮추며 창연을 노려봤다.

    “만약 예스라 답하면, 널 죽이겠어.”

    창연은 강했다. 그녀도 최상위권이지만,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저런 집단에 소속된다면, 정말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었다. 그 전에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이자벨라가 광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저들의 뜻에 따르는 것보단, 어떻게 엿이라도 먹이는 게 좋지 않겠어? 너도 그럴 텐데.”

    “그거야 그렇지. 근데 그럼 그냥 죽으라고?”

    “……저 괴물을 내가 상대하지. 달라붙으면 죽이진 못해도 빈사 상태는 만들 수 있을 거다. 너는 그 틈에 빠져나가라. 결계의 통과법은 알 테니 잘하면 살 수 있을 거다. 난 뒤지겠지만 네가 살아서 복수하면 되겠지.”

    이자벨라가 창연과 괴물 사이로 섰다. 창연이 실소를 흘렸다.

    “걱정 마. 협력할 생각도, 죽을 생각도 없으니까.”

    “뭘…….”

    창연이 이자벨라를 밀어냈다. 그리고 스피커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거절이야. 너 같은 새끼들이랑 같은 편이 될 생각은 없거든. 차라리 뒤지고 말지.”

    [……그거 안타깝군. 하지만 시간이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법이지. 고통도 말이야. 저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라.]

    [캬아아아!]

    뱀이 달려들었다. 이자벨라가 이를 갈며 마주 달렸지만, 창연의 손에 가로막혔다. 뱀이 그와 충돌하며 폭음이 터졌다. 모니터 너머로 노인이 손뼉을 쳤다.

    “그렇지!”

    “흠. 아쉽게 됐네요. 창연 정도면 도움될 거 같은데. 결계를 어떻게 통과한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 지가 안 따르겠는데 어떡해. 일단 팔다리 자르고 물어보면 답하겠지.”

    먼지가 가라앉았다. 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이 멍하니 눈을 떴다.

    “……뭐야.”

    창연이 처음과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뱀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창연은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어떻게?”

    이탈자의 힘을 억제하는 파장이 퍼진 상태였다. 실제로 이자벨라는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런데 창연이 멀쩡했다.

    “뭐냐고.”

    노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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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라.”

    이자벨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황급히 막으려 했는데 창연이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뱀과 충돌했다.

    인간 크기의 뱀. 충돌하면 어지간한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비슷한 충격일 거였다. 그런데 그런 것과 부딪히고, 멀쩡한 상태였다. 창연이 애매하게 웃었다.

    “너무 진지해서 뭐라 말을 못 꺼냈네. 미안하지만 이건 나한테 안 먹혀.”

    [키에에에에!]

    창연이 손에 힘을 주었다.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꼬리가 창연의 몸을 후려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콰드득.

    창연이 거칠게 손을 잡아당겼다. 뱀의 몸통과 머리가 분리되며 피가 사방으로 번졌다. 창연이 손을 뻗었다.

    “파장이 엉켜 분리되었다.”

    쿠웅.

    기파가 창연의 몸에서 사방으로 퍼진다. 주위를 둘러싼 기운과 충돌하며 서로 반발한다. 얼마 후 주위를 둘러싼 힘들이 사라진다.

    “이젠 될 거야.”

    “응? 어라.”

    이자벨라가 손을 흔들었다. 기류가 뭉쳐 주위의 물건이 흔들렸다. 그녀가 해괴한 얼굴로 창연을 바라봤다.

    “너…… 뭐야. 어떻게?”

    “이미 겪어 봤으니까. 원래도 의미가 없었는데 지금이라고 먹힐 리가.”

    확실히 방금의 파장은 괴물의 힘을 억제하고, 이질적인 능력의 사용을 불가하게 만든 파장이었다. 일반적인 이탈자면 분명 무리일 거였다.

    하지만 그의 힘은 원전. 겨우 이 정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던전 내에서 대피처로 유용하게 써먹었었다.

    “그나저나…… 누구지.”

    이 모든 걸 만들어 낸 인간. 그 정체가 정말 궁금해졌다. 그의 던전에 있던 것들이 구현되다니. 어쩌면 그가 갇힌 곳에 대해 알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뭐, 지금부터 찾으면 되겠지. 만나러 갈게.”

    [무슨! 이게 무슨!]

    창연이 발을 밟았다. 쿵 하며 금이 간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지하를 통해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위치는 알았다. 미리 추적을 해서 대략적인 장소를 파악해 놨었다. 그 결과 이곳에 있는 인간은, 그들 외에 단 두 명뿐이란 걸 알아차렸다.

    ‘시설 크기 치곤 좀 적은 거 같긴 한데.’

    대피라도 했을 수 있었다. 굳이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창연이 가로막는 방벽을 전부 때려 부수며 지하로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달하고 땅을 밟았다.

    “안녕.”

    “……미치겠군.”

    창연의 인사에 상대가 허탈한 음성으로 답했다. 노인과 청년, 둘이었다. 창연이 걸어갔다.

    “만나서 반갑고. 그럼 우리 작별 인사를 해 볼까.”

    “잠깐, 이탈자. 우리 거래를.”

    “다물어.”

    키잉.

    노인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창연의 말에 틀어 막힌다.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너희들에게 알아낼 정보는 있지만, 너희와 대화할 이유는 없어.”

    “이놈들인가?”

    이자벨라가 굳은 얼굴로 착지했다.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끼들이랑 협력하는 놈들이라 이거지…….”

    쿠웅!

    감정의 변화에 따라 건물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자벨라가 손을 뻗었다. 창연이 그 팔을 붙잡았다.

    “일단 죽이지 말고. 알아낼 거 있으니까.”

    “……내 손으로 죽일 거다.”

    “마음대로 해. 금방 끝나니까.”

    창연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검은 빛이 퍼지며 그들을 감쌌다. 잠시 후 빛이 풀려나갔다. 둘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됐네.”

    혹시 모를 프로텍터의 방비가 끝났다. 예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정령계의 주인의 힘을 받고서 가능하게 되었다. 창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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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뭐 하는 집단이냐.”

    “저희는…… 이 세상을 지배하실 분을…… 따르는 하수인들입니다…….”

    노인이 띄엄띄엄 말했다. 창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짐작은 했어도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그분은 누군데.”

    “저희도 잘 모릅니다……. 그저 어느 날 음성으로…… 저희를 부르신 분……. 그분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세상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그렇다면 영겁에 걸쳐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목소리인가. 그건 누구누구가 듣는 건데?”

    “선택받은 인간들……. 저를 비롯해서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습니다……. 선택을 받으면 각 본부장, 또는 관리자로 승급됩니다…….”

    “파장 맞는 인간들 골라서 보내는 건가. 그러면 세뇌나 정신 지배도 포함되겠고…… 사상이나 감정에 따라 거르기도 하겠군. 정신적이나 물리적인 힘의 제공이 없는 걸 보면 단순한 통로인가.”

    “……뭐라는 거냐, 너.”

    이자벨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창연이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창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추리하는 거야. 이것들이랑 내 힘이랑 비슷해서.”

    지배자들은 신화의 서에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그도 대충 추정이 가능했다. 창연이 계속 물었다.

    “그럼 본모습을 보지는 못한 거냐?”

    “교주님이 보셨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골치 아픈데.”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 현실과 접점이 있다면 찾아 족칠 수 있겠지만, 단지 부름만 하고 있다면 어려웠다. 정체를 알아야 그쪽 세계로 넘어가서 패든가 하지. 현재로선 힘들었다.

    “그럼 다른 걸 묻지.”

    창연의 눈동자의 일렁임이 가라앉았다.

    “너. 너희 집단에 소속한 다른 곳의 위치, 아냐?”

    “아니요……. 서로 관련된 것이 없습니다……. 어느 날 뇌리에 정보나 잡담 같은 것들이 파고듭니다……. 제 측에서 그걸 이용해 보내고, 서로 거래를 합니다…….”

    “정보 안 주려고 별 지랄을 다 하네.”

    창연이 혀를 찼다. 이렇게 되면 알아낼 건 거의 없었다. 그냥 지부 하나하나 찾아서 조지는 수밖에.

    “그럼 저 결계나 방금 쓴 무효화 파장, 그거 누가 만든지는 아냐.”

    “네…….”

    “응? 진짜?”

    창연이 놀라 되물었다. 이 정도로 철저한 놈이니 당연히 숨길 거라 생각해 별 기대하지 않고 물었는데, 안다니. 그렇다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말해 봐.”

    “한국에서 온 여자입니다…….”

    “엥. 한국?”

    “응? 너희 나라 아니냐?”

    “맞는데.”

    창연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같은 나라 출신일 줄이야. 그가 놀라든 말든 노인은 전달된 명령에 따라 계속 입을 열었다.

    “얼굴은…… 모릅니다……. 항상 가리고 있기에. 하지만 그리 늙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소리가 젊게 느껴졌습니다……. 딱히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타입이 아니라 자세히 아는 사람도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모든 걸 만들었다고?”

    “네…….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릅니다……. 저 혼자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무언가를 다룹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무언가가 완성되어 나옵니다……. 이 지부에 있는 결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것들, 괴물의 강림 등 전부 그 여자가 하는 겁니다…….”

    “흠…….”

    창연이 팔짱을 꼈다. 인간이 이 모든 걸 할 수 있나. 답은 나왔다. 불가능했다. 창연조차 만들라고 하면 제법 시일이 걸릴 건데, 아무리 뛰어난 헌터라도 무리였다.

    ‘아니. 이탈자면 되려나.’

    관련 쪽에 특화된 이탈자. 그거면 가능성이 있었다. 창연이 물었다.

    “너희 집단에 이탈자도 있냐.”

    “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그럼 그 여자만 죽이면 된다는 거군. 간단하네.”

    이자벨라가 중얼거렸다.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창연이 혀를 찼다.

    “괜히 움직이려 하지 마. 지금 같은 꼴 될라.”

    “나도 마구잡이로 달려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정도면 개인적으로 찾아볼 가치는 있지. 한국의 여자. 스물 중반. 차고 넘치지. 정보는.”

    “마음대로 해라. 근데 그 여자는 목적이 뭐기에 그러고 있는 거야?”

    “복수라고 들었습니다…….”

    창연의 혼잣말에 노인이 답했다. 창연이 머리를 돌렷다.

    “뭐라고?”

    “던전에 갇혀서 죽은 친구의 복수를 위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복수를 위한 건데 왜 너희랑 협력해?”

    “저희가 정보를 숨겼으니까요……. 그 여자는 저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쩌다가 저희 측에 연결이 되어서, 그걸 기회 삼아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배자님도 그녀와 연결되었지만 정체를 숨기고 계시고……. 그냥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그 힘을 얻었는지, 무슨 방식인지 아무것도 모르고요…….”

    “이용당하는 건가.”

    창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좀 골치가 아팠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 다르게 접촉할 가능성도 충분하게 되니.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아는 것은 하나……. 그녀가 복수를 원하는 친구가 최초의 던전에서 죽었으며, 김창연이라는 겁니다…….”

    “……뭐?”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자벨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거 너랑 같은 이름 아니야?”

    “어. 흠.”

    창연이 팔짱을 꼈다. 최초의 던전에서 죽은 그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고, 이름은 김창연. 조건은 그와 동일했다.

    이 조건으로 또 누가 들어갔을 확률은 상당히 낮았다. 물론 그의 이름이 그리 보기 힘든 이름은 아니지만, 애초에 최초의 던전에 갇히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

    “그거 말고 뭐 아는 거 있냐.”

    “아니요…… 없습니다……. 그녀가 지부 이곳저곳을 자주 돌아다녀서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쯧. 머리 아프군.”

    창연이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노인의 눈에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마음대로 해.”

    “오, 끝났나? 그거 좋지.”

    “히, 히이이익!”

    이자벨라가 광기에 찬 미소를 흘리며 다가갔다. 노인과 청년이 물러났지만 곧 벽에 가로막혔다. 이자벨라의 손이 들리고, 비명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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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치 아파라.”

    창연이 괴물의 알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지부를 시원하게 박살 낸 건 좋은데, 좀 더 찝찝한 것이 걸렸다. 벨소리가 울렸다. 창연이 핸드폰을 들어 받았다.

    “여보세요.”

    [아, 창연 씨. 헌터관리부의 최민입니다. 요청하신 건이 확인되어 연락 드렸습니다.]

    “네, 어떻게 됐나요.”

    [저희가 파악하는 바론…… 창연 씨를 제외한 김창연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최초의 던전에 갇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렇습니까.”

    창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최민이 애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측에서도 최초의 던전에 갇힌 사람 전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창연 씨와 비슷한 나이에서, 김창연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실종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실종된 대다수가 일반 던전에 갇혀 사망한 걸로 나타나고요.]

    “알겠습니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연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가 이마를 매만졌다.

    “음…….”

    원점이었다. 결국 그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죽었다니.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활동하고 있고.

    ‘정보를 차단당하고 있다고 말했지.’

    창연의 존재에 대해선 일절 함구한 상태. 외부로 나가는 걸 못 하게 막은 상태라 정보의 차단은 쉬웠다. 그녀는 창연이란 이탈자가 있다는 걸 모르는 상태라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누구지.’

    그의 주위에, 그가 친구라 부를 수 있었던 사람들. 아마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이야기겠지. 여자고, 창연이 던전에 나오기 전에 실종되었다. 그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이영애.’

    창연이 얼굴을 구겼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단발의 조그마한 여자아이. 겁이 많고, 게임을 좋아했다. 공부를 제법 잘해서 의대에 간다고 자주 말하고 다녔었다. 창연과 함께 PC방에서 밤샘도 여러번 했으며, 그래서 부모님에게 곧잘 혼쭐이 났지만, 그래도 웃으며 놀았던 친구.

    그리고 그를 좋아했었다는 아이. 창연이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의문점은 여럿 있었다.

    그는 살아 있었다. 적어도 그가 던전에 갇힌 이후로, 누군가가 들어온 걸 알아차린 적은 김태연이 처음이었다. 시체를 보고 뭐고 할 껀덕지도 없다는 소리.

    물론 그가 외부인의 침입을 감지할 힘을 얻기 전에 들어왔을 수도 있었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기술의 발전은 4,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게다가 좋아했다 하더라도, 복수를 위해 이 모든 걸 만들고, 할 정도로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자 이구동성 그럴 정도라 말하긴 했는데, 영 실감이 안 났다.

    ‘무엇보다.’

    그녀가 어떻게, 결계 그것들을 만들었는가.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창연처럼 갇힌 것도 아니니 이탈자일 확률도 낮았다. 그렇다면 자기 힘으로 만들었다는 소린데, 적어도 창연의 생각 아랜 불가능이었다.

    “에휴.”

    창연이 한숨을 쉬었다.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뭐, 영애가 아닐 수도 있으니.”

    정부도 전부 파악한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풀리지 않은 답을 고민하기보단,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을 거였다.

    쩌적.

    창연의 손에 들린 괴물의 알이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슬슬 되는군.’

    괴물의 알. 아공간에 넣어서 다행히 시간의 흐름은 그와 같이 받았다. 그리고 이제 열릴 시간이 되었다. 금이 더욱 퍼져 나가며 꿈틀거리는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뭘려나.’

    지금까지 본 것들은 전부 무지막지하게 강했으며, 이질적이었다. 지배자와 비견되는 놈들도 여럿 있었다.

    힘의 방향성이 다를지언정 약한 괴물은 하나도 없었다. 이건 어떨지 궁금했다. 창연이 공간을 이동해 이름 없는 땅으로 들어갔다. 금이 점점 알 전체로 퍼졌다.

    쩌억!

    알이 부서졌다. 안에서 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연이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드래곤?”

    [캬아…….]

    괴물이 울음을 흘렸다.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바람을 만들어 냈다. 매끄러운 비늘. 드래곤이었다. 창연이 얼굴을 구겼다.

    “왜 이리 작아?”

    드래곤의 크기는 창연의 손바닥만 했다.

    [캬아. 캬아.]

    드래곤이 폴짝폴짝 뛰며 땅을 걸어 다녔다. 앙증맞은 크기로 뛰어다니니 은근히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귀여움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창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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